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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70

       

       

       허리를 넘게 내려온 긴 흑발은 마치 비단결 같다.

       어떠한 색도 빛도 들이지 않은 흑발은, 오히려 고귀함을 느끼게 했고.

       

       그녀가 지닌 하얀 피부는 이를 더 돋보이게끔 만들고 있었다.

       

       아름답다.

       

       여인을 보면 그 누구라도 그렇게 말할 것이다.

       눈동자에 담긴 자색 안구는 빛을 품고 있다.

       

       저 눈동자는 마인들이라면 자연스럽게 가지게 되는 마기의 증표였으나.

       

       그 수준이 달랐다.

       

       훨씬 선명했고, 탁한 색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잘 세공한 예쁜 보석 같은 느낌.

       보기만 하면 누구라도 가슴이 뛸 만한 아름다운 여인이다.

       

       다만, 내가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건 그런 같잖은 설렘이 아니었다.

       

       ‘왜.’

       

       그저 공포.

       

       ‘이 자가…왜.’

       

       그리고 두려움.

       

       몸속 깊게 각인된 감정이 단숨에 머리끝까지 차오른다.

       손가락을 강하게 말아쥐었다. 당장이라도 떨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저 자색 빛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부터 그랬다.

       

       숨이 막힌다.

       

       심장이 차갑게 식는 느낌이 든다.

       몸이 무겁게 짓눌리며 무언가가 꽉 옥죄이고 있는 감각이다.

       

       드드득-드드드드득-!

       

       덜그덕 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감돈다.

       시선을 옮기니, 여인이 잡은 허공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저런 미친.’

       

       날 끌고 가려던 영문모를 마경문.

       그 마경문을 여인이 대뜸 붙잡아 닫아버린 상태였고.

       

       이 소리는 저 균열이 다시금 열리기 위해 애쓰는 소리였다.

       

       ‘…차원을 잡아다 닫아버리다니.’

       

       저게 무슨 무지막지한 일이란 말인가. 

       

       가능은 한 일인가를 둘째치고.

       다시 열리기 위해 벌이는 반발력이 심상치 않았다.

       

       기운의 파동만으로도 피부가 오싹해질 정도인데.

       

       여인은…아니.

       

       만마의 주인.

       

       천마(天魔)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

       

       드드득…드드드득-!

       

       계속 울리는 소리에 천마의 고개가 균열로 향한다.

       

       “시끄럽구나.”

       

       살짝 짓고 있던 미소가 사리지고.

       

       “…잠시, 조용히 하고 있거라. 정신 사나우니까.”

       

       목소리엔 서리가 끼니.

       

       우웅.

       

       천마의 발끝에선 밤이 펼쳐졌다.

       

       구구구국-!

       

       어둠이 영역을 펼친다. 

       아직은 해가 떠 있는 대낮이었으나, 천마가 어둠을 바라니 지면은 밤으로 뒤바뀌었다.

       

       수두룩하게 펼쳐지기 시작한 검은 영역을 보며 눈을 키웠다.

       

       마기다.

       

       이 어둠은 전부 마기였다. 

       단지, 마인들이 내뿜는 마기에 비해 훨씬 짙고, 또한.

       

       ‘지독할 뿐.’

       

       밤이 내려앉았구나.

       

       땅을 가득 메꾼 천마의 마기를 보며 든 생각이다.

       달이 떠 있지 않은 시간에 밤을 만들어 냈다.

       

       구가의 비기인 적천이나 다른 무공 같은 게 아니다.

       

       오로지 기운을 내뿜은 것만으로 주변의 공기와 상황을 뒤바꿔 버린 것이다.

       

       드득…드드득…득득….

       

       천마가 가만히 균열을 바라본다.

       서리가 낀 듯 서늘한 눈동자가 기운을 뿜으며 바라보니.

       

       드득….

       

       놀랍게도 균열은 내던 소리를 스스로 삼켰다.

       

       “말을 잘 듣는구나. 착하다.”

       

       균열이 정녕 천마에게 겁을 먹어 소리를 죽였을까?

       그럴 리는 없다. 

       

       마경문이 무슨 생물체도 아니고 겁을 먹는단 말인가.

       

       한데.

       

       ‘…그게 아니면 설명이 안 되잖아.’

       

       저건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는 게 문제겠지.

       

       당장 놓으라는 듯 발버둥 치던 마경문은.

       

       천마가 기운을 내뿜은 직후 귀신같이 그 움직임을 멈추었고, 나는 그걸 보며 아득함을 느껴야 했다.

       

       천마의 시선이 다시금 이쪽으로 향한다. 그 눈을 마주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역시.’

       

       천마가 맞았다.

       

       저런 분위기를 내뿜을 수 있는 건 이 세상에서 오로지 천마뿐이다.

       마교의 하늘이라 불리며, 가장 단시간에 천하제일인에 오른 존재.

       

       보기만 하고 있는데 제멋대로 고개를 숙일 것만 같다.

       

       그 누구보다 하늘에 있는 게 어울리는 사람.

       

       천마는 그런 존재였다.

       

       “신기하구나.”

       “…!”

       

       아무 말 없이 천마를 보고 있으니, 오히려 천마쪽에서 내게 말을 걸어온다.

       

       그제야 정신을 다시금 바짝 차릴 수 있었다.

       

       “이런 경험은 처음인데.”

       

       살며시 지어지는 미소.

       나는 저 웃음이 두려웠다.

       

       “참 신선한 선물이야. 그렇지 않나?”

       

       웃음을 머금고선 내게 한걸음 다가온다.

       이어 손이 뻗어져 왔다.

       

       어쩌지?

       머릿속엔 방법을 찾고자 의문을 떠올리지만.

       

       스륵.

       

       몸은 이미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 있다.

       나도 모르게 벌인 행동이었다.

       

       자존심이 상할 만한 행위였으나, 머릿속에 그런 생각은 떠오르지 않는다.

       천마는 그런 걸 떠올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문제는.

       

       한 걸음을 물러섰다고 한들.

       그녀는 이미 내 앞에 와있었다는 것이다.

       

       툭.

       

       잡혔다.

       

       천마는 앞으로 다가오더니 대뜸 내 왼팔을 붙잡고서는.

       제 눈앞에 손을 가져가 살피기 시작한다.

       

       그 감촉에 곧바로 손을 내빼려 하지만.

       꾸욱-!

       

       ‘썩을.’

       

       잡힌 손은 전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음.”

       

       왼팔이 들린다. 

       

       무복으로 가리고 있던 피부가 드러나며 괴상해진 상태가 여실하게 보였다.

       

       푸른 비늘로 뒤덮인 왼팔.

       다소 혐오스럽게 보이는 모습이 낱낱이 말이다. 

       

       그렇게 잡혀있길 잠시, 갑자기 손이 뿌리쳐 나왔다.

       내 힘으로 빠져나온 건가?

       

       ‘그럴 리 없다.’

       

       이는 천마가 허락했기에 가능한 것이다. 

       좆같지만 그게 현실이었다.

       

       “대주.”

       “…!”

       

       천마가 날 부르는 호칭에 몸이 딱딱하게 굳는다.

       대주. 

       

       분명 그렇게 불렀지.

       

       떨리는 눈으로 천마를 바라봤다.

       

       “…어떻게….”

       

       그녀가 날 알아봤음을 깨닫는다.

       어떻게 알아본 거지?

       

       거기에 애당초.

       

       ‘천마가 왜 여기 있는 거야.’

       

       그녀가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천마를 보고 있으니.

       그녀는 살짝 좁혀진 눈으로 날 보며 말을 이어간다.

       

       “본좌가 분명 말했을 텐데.”

       

       목소리가 들려옴에 따라 마른침이 삼켜진다.

       

       “함부로 다쳐서 돌아오면, 화를 낼 거라고.”

       

       눈꼬리가 반달처럼 휜다.

       웃음을 짓는 모습은 유달리 아름다우나, 몸에서 넘실거리는 존재감은 절대 얕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겁이 질릴 것 같다.

       아니, 이미 겁을 먹었나?

       

       그렇다면 참아내야 했다.

       

       “…누구랑 착각한 건지 모르겠는데. 나는 대주라는 인간이 아니야.”

       

       억지로 말을 토해냈다.나는 언젠가 그녀를 죽일 생각이니, 겁을 먹어서도 물러서서도 안 됐다.

       

       “흐음.”

       내 말을 들은 천마는 잠깐 생각하는 듯한 눈빛을 취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뭐지? 설마 곧바로 수긍한 건가.

       

       그런 생각이 스친 것도 잠시.

       

       “거기서는 대주라 불리지 않는 모양이구나.”

       “…!”

       

       덤덤히 뱉은 말에 등골이 찌르르 울렸다.

       

       “아니면, 아직 내가 나타나지 않았나? 그럴 리는 없을 터인데.”

       

       천마는 턱을 괴고서 살짝 인상을 찌푸린다.

       그걸 보며 비명을 삼켰다.

       

       ‘내가 다른 차원에서 왔다는 것까지 알아본 건가.’

       

       천마는 대뜸 천존의 목을 들고 나타난 건 물론. 

       내가 어디서 온 누구인지까지 알아낸 모양이었다.

       

       꾸드드득.

       

       심장 쪽에서 반응이 온다.

       기운이 갑자기 들끓는다.

       

       ‘뭐지?’

       

       그 예상치 못한 이변에 몸을 숙였다. 

       격한 진동은 고통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하물며 심장뿐이 아니었다.

       심장이 왼팔에도 달렸는지, 이놈도 미친 듯이 쿵쿵거리기 시작했다.

       

       어디지? 분명 이걸 어디선가 느껴봤는데.

       

       이건.

       

       ‘아.’

       

       떠올랐다.

       

       지난 정파회합에서, 장선연의 탈을 쓴 혈마를 마주했던 그 순간.

       

       그때 느껴지던 적의였다.

       

       ‘그게 왜?’

       

       그때의 감각이 어째서 지금 천마를 보며 느껴지는 걸까.

       

       ‘아니, 지금은 그런 걸 고민할 때가 아니다.’

       

       직면한 상황이 위험하기 짝이 없는데, 내 몸 상태를 파악할 때가 아니라는 의미였다.

       

       ‘어쩌지?’

       

       시선이 느껴진다.

       천마가 날 바라보고 있는 시선이 말이다.

       

       본명 그냥 바라보고 있는 높이일 터인데, 마치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쿵-! 쿵-!

       

       점점 올라오는 적의와 맞물려 점차 열이 들끓기 시작할 무렵.

       

       스윽.

       

       턱 쪽에 감촉이 느껴지며 고개가 위로 살짝 들려온다.

       천마가 손으로 내 턱을 들어 올린 것이다.

       

       “대주.”

       “…나는 대주가 아닌….”

       “눈을 보니, 대주는 나를 알고 있어. 그렇지?”

       “…”

       “어떻게 알고 있을까. 그게 참 궁금해.”

       

       들어올린 고개로 시선을 내려 천마를 쳐다봤다.

       그녀는 여전히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좋지 않은 눈이로구나. 당장이라도 뽑아버리고 싶어.”

       

       살벌하기 짝이 없는 말이다.

       

       “…”

       “하나 봐줄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본좌는 자비로우니까.”

       

       당장이라도 이 손을 뿌리쳐야 했다. 

       하지만 몸은 굳어 움직이질 않았다.

       

       힘을 갈무리하고, 불완전하던 경지를 수습했으니. 분명 어디가서 쉽게 안 맞고 다니겠다 싶었던 게 직전이거늘.

       

       ‘씨발.’

       

       그리 생각하자마자 천마와 마주하다니. 하여튼 운이 지지리도 없었다.

       

       ‘거기다가.’

       

       바닥에 시선을 돌렸다.

       뽑혀 죽은 천존의 목은 아무렇지 않게 흙바닥을 구르고 있었는데.

       

       와중에도 마검후가 신경 쓰였다.

       

       ‘쯧.’

       

       마검후는 천마가 나타난 시점에서 이미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교주를 마주한 마인이 취할 태도가 그러했다.

       

       “대주.”

       

       파고든 목소리에 시선을 다시 돌렸다.

       

       “본좌와 얘기 중이라면, 시선을 피하지 말거라.”

       

       아무렇지 않게 뱉어내는 말.

       그 말에 이를 까득 깨물고선 천마의 손을 잡아챘다.

       

       휙.

       

       “음.”

       

       손목을 잡아채니 천마의 입에서 작게 반응이 들려온다.

       

       “나는 당신네 대주가 아니라고 했잖아.”

       

       말하는 와중에도 목소리가 떨릴까 신중해야 했다.

       내 말에 자색 눈동자가 잡힌 손목으로 향한다. 거기서 몸에 긴장을 끓어 올렸다.

       

       “신선하구나.”

       

       당장 잡힌 손을 빼낼 줄 알았으나, 천마는 여전히 덤덤했다.

       

       “이런 적은 처음인데….”

       

       목소리에 스민 사소한 열기. 어깨가 떨려온다.

       

       “이런 것도 나쁘진 않아.”

       

       말하며 천마가 웃는다. 

       그 고혹적인 미소에는 소름 끼치는 무언가가 스며있었다.

       

       “한 가지 묻고 싶구나.”

       

       지독한 흥미인가.

       그도 아니라면 하찮은 관심인가.

       

       천마의 눈동자에는 무언가 감정이 섞여 있었다.

       쉽지 않은 일이다.

       

       천마의 눈빛에 감정이 섞이는 일은 없다시피 한 일이었고.

       가끔 생긴다고 하더라도.

       

       그건 대부분 살의에 가까웠으니 말이다.

       

       “본좌가 끝에 닿아 한 선택이 결국, 그대인가?”

       “그게 뭔….”

       

       천마의 말에 뭐라 대답을 내놓으려 하지만. 천마는 시선을 옮겨 허공을 바라봤다.

       

       와중에도 마경문을 잡고 있는 손을 놓지 않는다.

       

       “아쉽게 손님이 왔구나.”

       

       담백한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천마가 보고 있는 곳을 살폈다.

       

       “…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하늘 너머로 무언가가 다가온다.

       

       쉬이이익-!

       

       검이다.

       

       순백의 검이 허공에 머물러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족히 수백 자루.

       많게는 수천 자루까지 될 법한 검의 향연.

       그 수두룩한 광경을 보며 나는 못내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넌 또 왜…?’

       

       천마가 온 걸로 모자라 상황이 더 악화된다.

       저건 지금 상황에 가장 와서는 안 되는 인물의 기운이었다.

       

       하늘을 가득 메운 검을 보며 천마가 제 머리칼을 정리한다.

       

       집중하니 보인다.

       검 위로 올라타 이곳으로 나타난 인물이.

       

       화려했던 금발이 흰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거기에 양손에 쥐고 있는 검은 더욱 선명한 빛을 내고 있다.

       태양을 등진 모습이나, 가리고 있다기보단 되려 햇빛이 인간 형상이 된 것 같은 모습.

       

       내가 가장 싫어하던 그녀의 모습이다.

       저건 제 생명줄을 태워내야만 취할 수 있는 형태였으니까.

       

       갑작스레 나타난 여인을 보고 있으니.

       

       “다행히 제대로 느낀 모양이구나.”

       

       천마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뱉어 낸다.

       

       “여전히 꼴 보기 싫은 얼굴이로다.”

       

       다소 우스웠다.

       

       어찌 우습지 않을 수 있으랴.

       

       그리 말하는 천마와 갑작스럽게 나타난 여인은.

       

       너무나 똑같이 생긴 얼굴을 지니고 있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_ _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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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ldhood Friend of the Zenith

Childhood Friend of the Zenith

CFZ, Childhood Friend of the Zenith Under the Heavens, The Zenith's Childhood Friend, 천하제일인의 소꿉친구
Score 8.4
Status: Ongoing Type: Author: , Artist: Released: 2021 Native Language: Korean
Instead of struggling meaninglessly, he acknowledged his p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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