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0화. 최초이자, 최후의 검
부유하는 섬이자 성, 아르고스.
녀석은 순수한 별의 불꽃을 원동력으로 움직이는 신비한 천공섬이었다.
《아앗ㅡ! 어디선가, 누군가가 저, 아르고스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어요!!》
어떻게 알았는지 아르고스가 재빨리 나타났다.
항상 곁을 맴도는 하늘고래도 함께였다.
부우우우우ㅡㅡ
“아르고스를 쓰자고…?”
– “네! 아르고스는 지금 딱히 하는 일도 없지 않나요?”
SD 리아가 아르고스를 향해 악의 없는 팩트를 꽂았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르고스의 원래 역할은 성지의 수호자…. 이지만.
수호자로서 활약한 적은 없다.
성지에 누가 쳐들어온 적도 없거니와, 케넬름과 리아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누가 감히 성지에 침범할까.
– 《으아앗! 리아 언니, 아픈 구석을…! 아니야! 나도 맡은 역할이 있다고! 성지의 수호자이자, 순수한 별의 불꽃을 지키는 수호자! 거기에…》
화륵ㅡ! 아르고스 내부에 있는 순수한 별의 불꽃이 화려하게 몸집을 키웠다.
– 《나는 지금…. 무려 ‘천당’의 역할을 맡은 몸이라고! ‘임시 천당’이기는 하지만.》
“아.”
그랬다.
연옥을 제작할 당시, 세 개의 문을 만들며 각각 ‘천당’, ‘지상’, ‘축생’으로 이어놨다.
하지만 천당의 역할을 할 곳이 마땅치 않았기에, 임시로 아르고스에게 연결해줬었다.
“까맣게 잊고 있었네.”
잊어버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다.
아르고스에게 ‘임시 천당’역할을 부여하고 제법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그런데 사람이 너무 없잖아.”
‘임시 천당’으로 들어온 사람이 너무 적었다.
두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였으니, 내가 깜빡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터.
“아르고스 안에서 뭐 불편한 게 있었던 건 아니겠지?”
‘임시 천당’에 올 정도면, 어지간한 선한 사람이라는 뜻인데.
아르고스 안에 갇혀서 뭔가 불편했던 점이 있었을까, 닳아버린 삼각형이 내 양심을 쿡쿡 찔러왔다.
– “아르고스는 부유섬이지만, 어지간한 도시의 크기죠. 온갖 건물과 편의 시설들이 있으니 아마 저분들은 특별히 불편한 점은 없었을 거예요.”
“…그렇겠지?”
한시름 놓았다.
– “그러니까 말이죠. 이제 성지가 텅 비게 될 예정이잖아요. 아르고스가 담당하고 있던 ‘임시 천당’을 성지에 배정하는 건 어떨까요?”
“음. 나쁘지는 않은데.”
리아의 생각은 나쁘지 않았다.
조금 거슬리는 부분만 빼면.
“그러면 드워프랑 엘프들의 건물도 전부 철거해야 하는 거잖아.”
– “어…. 그렇죠?”
새삼스럽지만.
성지에는 엘프와 밤의 일족이 쓰던 건물들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었다.
엘프가 가꾸던 작은 숲과, 밤의 일족이 지내던 으슥한 공방, 황금 나무가 있던 자리까지.
나는 무엇 하나 손대지 않고 그대로 남겨뒀다.
“……좋아. 이렇게 하자.”
나는 드워프들의 건물들을 무엇 하나 건드릴 생각이 없다.
“드워프들에게 이곳은 고향이자, 집이잖아. 난 성지의 일부분이라도 드워프들을 위해 남겨주고 싶어. 다시 돌아올 고향은 있어야 하잖아.”
– “그렇다면ㅡ”
“하지만 성지를 천당으로 쓰자는 의견에는 찬성이야.”
– “예? 그게 무슨…?”
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 거죠?”
사람은 한 번이라도 해봤던 일을 더 잘하는 법.
나는 팔을 걷어붙였다.
“내가 제일 잘하는 걸 해야지.”
* * * * *
드워프들은 곧 성지를 떠나, 지상에서 지내게 될 것이다.
“……그게, 정말이요 형님?”
이 사실을 전해 들은 드워프들 사이에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오푸스 팔락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달리 뭐라고 할 말이 있을까.
“그래…. 내가 한 말은 모두 사실이다.”
“……….”
“……….”
술을 마시던 드워프가 술잔을 내려놓았다. 주괴를 두드리던 드워프는 망치를 놓쳤다.
“우리가, 성지를… 떠나야 한다고?”
드워프들은 성지에서 태어났고, 자랐으며, 생활했다.
이곳이 바로 그들의 고향이자 집.
하나 된 분은 어찌 정들고 아늑한 이곳에서 우리들을 내치시려는ㅡ
“허튼 생각하지 마라ㅡ!”
맏형, 오푸스 팔락이 크게 소리쳤다.
점점 표정이 어두워지던 드워프들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오푸스 팔락은 에픽 드워프, 영웅의 경지에 다다른 대장장이.
일반 드워프와는 차원이 다른 기백이 목소리에 실려 있었다.
“우리 모두 때가 되었을 뿐이다! 너희들도 느끼고 있지 않으냐! 조금씩 때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ㅡ!”
“그, 그건….”
“하나 된 분께서도 마찬가지로 이제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셨을 뿐이다! 우리는 더욱 성장하기 위해 떠나는 것임을 기억해라! 두들겨지지 않는 강철은 영원히 원석으로 남는다! 뜨겁게 달궈지고, 쉼 없이 두들겨져야 비로소 가치를 얻는 것이야!”
“형님….”
쿠구구궁ㅡ
저 멀리서부터, 하늘을 뒤덮는 은하수가 몰려왔다.
하나 된 분께서 오고 계신다.
동생들을 꾸짖던 오푸스 팔락이 바닥이 엎드렸다. 다른 드워프들도 머리를 숙였다.
《다들 모여있었구나.》
“예, 하나 된 분이시여.”
《…너희들도 이미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너희들에게, 기어코 오고야 만 것을 전하려고 한다.》
“…예. 말씀… 하소서.”
오푸스 팔락은 입술을 깨물었다.
가슴 한편이 찢어져 나가는 듯 괴롭다.
《때는 무르익었으며, 새로운 시대가 다가오고 있으니. 너희들은 이제 성지를 떠나……. 지상으로 향하여 생육하고 번성하게 될 것이다.》
“……예.”
짐작은 했지만, 이렇게 직접 전해 들으니 생각 이상으로 괴로웠다.
허나, 오푸스 팔락은 담담하게 받아들이려 노력했다.
부모의 품에 안주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모든 생물은 정든 둥지를 떠나 세상을 향해 날아갈 시기가 있으니, 이제 드워프들도 자연의 이치에 따라 떠날 때가 된 것이다.
“크흐흑.”
“흐윽, 흐으윽, 으읍.”
뒤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푸스 팔락은 탓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본인도 벅차 오르는 슬픔과 눈물을 참기 바빴다.
움켜쥔 주먹이 성지의 풀을 파고든다.
스쳐부는 바람, 흘러가는 구름과 신비한 하늘빛.
오푸스 팔락은 흐려지는 시야로 눈을 똑바로 뜨려 노력했다.
다시 못 볼 모습이며, 돌아오지 못할 고향일 테니.
지금부터라도 이 모습을 잊지 않도록 빼곡하게 기억해둘 작정이다.
《…허나, 이 땅은 너희의 고향이자 집일 터. 모든 존재에게는 지치고 힘들 때면 마땅히 돌아갈 수 있는 고향이 필요하다.》
“……?”
《그러니, 내 너희들을 위해 한 가지 작은 선물을 주고자 하노니.》
“하나 된 분이시여. 그 선물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선물이란 정체를 모르고 있어야 더욱 그 가치가 살아나는 법이다.》
“?”
《그렇게 알고들 있거라. 자, 이제 마음의 준비를 하고 관문 앞으로 오거라. 이별의 순간은 짧을수록 좋은 법이니.》
“…예.”
오푸스 팔락은 떨리는 눈으로 일어나 드워프 형제들을 추슬렀다.
다가오는 이별의 순간, 드워프들은 저마다의 방법으로 성지를 기억하기 위해 노력했다.
누군가는 자신의 술잔을 챙겼고, 누구는 성지의 잔디를 뜯어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오푸스 팔락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뭔가에 홀린 것처럼 헐레벌떡 대장간으로 달려갔다.
따캉! 카강! 카앙!
정신없이 불을 피우고 망치로 두들긴다.
오푸스 팔락의 손길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고 섬세했다.
“휴우. 간신히 늦지 않았나.”
아슬아슬했다.
땀으로 흠뻑 젖어버린 오푸스 팔락은 조심스레 자신의 등 가방에 방금 만들어낸 ‘무언가’를 챙겼다.
삐이이이.
열기로 가득 찬 대장간으로 이베르가 둘어왔다.
다른 드워프들을 만나고 왔는지, 몸통 곳곳에 검댕이 잔뜩 묻어 있었다.
삐, 삐이이익
“아…. 이베르, 너구나.”
이베르는 오푸스 팔락을 빤히 바라봤다.
똘망하고 커다란 눈에서는 어쩐지 지혜와 연륜이 아른거렸다.
삐이이이익?
“그래. 뭐, 이렇게 됐다…. 하하. 지상으로 향하게 됐구나.”
삐이ㅡ
“우리도 떠나면 너는 심심해서 어쩌면 좋냐….“
삐ㅡ, 삐이이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이베르는 오푸스 팔락의 손을 살짝 깨물었다. 나름의 애정 표시였다.
“하하하. 너야 뭐, 용이니까 어떻게든 잘 살아가겠지. 우리를 잊지는 말아다오.”
삐, 삐이이이ㅡ
인사를 마친 이비르는 작은 날개를 펄럭이며 훌쩍 날아가 버렸다.
오푸스 팔락은 제 손에 무언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빨?”
이베르의 이빨이었다. 녀석이 주고 간 선물이다.
“녀석….”
오푸스 팔락은 이베르의 이빨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주머니에 챙겼다.
그사이 성지를 떠날 준비를 마친 드워프들이 모여들었다. 각자 커다란 짐을 산처럼 들고 있었다.
온갖 공구와 잡동사니, 자질구레한 것들을 챙겼다.
그들 나름대로 성지를 기억하려는 노력이었다.
《자. 이제 떠나거라. 더 넓은 세상을 향해.》
성지 구석에 있는 차원 관문으로 향하는 드워프들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하다.
걷다가 뒤돌아보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을까.
차원 관문은 성큼성큼 빠르게 가까워졌다. 야속할 정도다.
《…나의 충실한 일꾼들이여.》
차원 관문 앞.
모여있는 드워프들이 하늘을 올려봤다.
늘 올려보던 하늘이다. 언제나처럼 소담하게 빛나는 별 무리.
드워프들은 더 이상 눈물 흘리지 않았다.
《나로 말미암아 숨결을 빚었으며, 육신을 꼬아냈고, 두 발 두 손으로 나를 위해 봉사하던 자들이여.》
눈물은 이별의 상징이다.
그러니 드워프들은 더 이상 울지 않았다.
대신, 손에 든 것을 높이 들어올리기 시작했다.
《……….》
망치였다.
그들의 분신이자, 또 다른 팔이며, 영혼과도 같은 것.
드워프들은 하늘을 향해 망치를 높이 들어 올렸다.
《………그대들은 오래도록 나를 위해 헌신했…… 으며. 그 공로를 높이……. 사는 바이니.》
하나 된 분의 말이 중간중간 끊어졌다.
어쩐지 흐느끼는 듯 느껴지기도 했다.
“우리는 영원토록 당신의 일꾼입니다!”
“우리의 망치와 화로는 당신을 위해 존재합니다!!”
드워프들이 외치기 시작했다.
오푸스 팔락은 가장 앞에서, 누구보다 크게 외쳤다.
“우리의 신이시여! 창조주시여!! 《우리는 그대를 영원토록 기억하겠습니다!!》
영웅의 외침이 천둥처럼 퍼져나가며 성지를 가득 채웠다.
이는 드워프 종족 전체의 외침이니, 뒤따르는 형제들의 영혼을 뒤흔들었다.
“우리는 그대를 영원토록 기억하겠습니다!!”
“우리는 그대를 영원토록 기억하겠습니다!!”
《……아아. 나의 종들이여, 일꾼들이여. 나 또한 그대들을 영원히 기억하리라.》
은하수가 눈물을 흘리는 듯, 서글프게 유성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어둑한 도화지에 보석이 박히는 것처럼, 밤하늘에 떨어진 몇 개의 유성우는 하나의 형상을 이루었다.
《이는 굳세고 강한 망치의 별자리이니, 그대들이 나를 기억하는 것처럼. 나 또한 그대들을 잊지 않으리.》
거대하고 투박한 망치의 별자리가 탄생했다.
신을 모시는 자들이 신을 영원히 기억하기로 맹세했으니, 신 또한 영원토록 그들을 기억할 것이다.
쿠그그그그그ㅡ
무거운 굉음과 함께 차원 관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이별의 순간이 다가온다.
“…창조주시여. 부디 저의 마지막 공물을 받아주십시오!”
눈에서 안광을 흩뿌리고 있는 오푸스 팔락이 성큼 앞으로 나섰다. 짐 가방에서 소중히 감싸고 있던 것을 두 손으로 받혀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이것은.》
황금빛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검.
투박하고 저열한 구리로 만든 조악하기 짝이 없는 롱소드였다.
“당신의 첫 번째 일꾼이 최초로 만든 공물을, 이제 마지막 공물로 돌려드리고자 합니다. 부디 받아주소서.”
《아아아아ㅡ.》
오푸스 팔락, 첫 번째 일꾼.
그가 최초로 바친 공물은 구리로 만든 조악한 롱소드였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공물은.
구리로 만든 조악한 롱소드가 되리라.
《그대들이 나를 기억하는 만큼, 나 또한 그대들을 기억하리라…….》
조악한 롱소드는 찬연한 빛과 함께 사라졌다.
텅 빈 오푸스 팔락의 손안에 남은 빛무리는 은근한 온기를 담고 있었다.
은하수에서 더 많은 유성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오푸스 팔락은 신께서 슬퍼하신다고 느꼈다. 가장 오랫동안 신을 보필한 일꾼의 직감이었다.
《…………》
“부디, 영원토록 영광을 누리소서. 창조주시여.”
오푸스 팔락은 오래도록 머리를 숙여 경의를 표했다.
아주 오랫동안.
이 광경은 엄숙하고 또 숭고해서.
오푸스 팔락이 영원히 이러고 있을 것 같다는 착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영원한 기쁨이 없는 것처럼, 닥쳐올 이별 또한 영원히 미룰 수는 없는 법.
“…자. 이제 가자.”
비척비척 몸을 일으킨 오푸스 팔락이 차원 관문 앞에 섰다.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고개를 훌훌 털어내고 관문 안으로 걸어갔다.
“영원토록 영광을 누리소서. 우리의 창조주여.”
드워프들은 차례차례 관문을 통과했다.
줄은 금방 사라졌다. 마치 바람이 드워프들을 훔쳐 간 것처럼.
그들은 아무런 흔적도 없이, 또 너무나 쉽게 성지를 떠나버렸다.
텅 비어버린 성지를 거친 바람이 내달린다.
은하수에서 유성우 몇 개가 뚝뚝 떨어졌다.
그날, 신의 창고에는 조악한 롱소드 하나가 추가되었다.
최초의 롱소드가 하나.
최후의 공물로 받은 롱소드가 또 하나.
시작과 끝을 알리는, 가장 볼품없는 검이었다.
Ilham Senjaya님, 항상 봐주셔서 정말 엄청나게 무지막지하게 감사합니다…!!!
– ‘신선우’님…!! 후원 정말로 감사합니다..!! 니카… 라고 하시면, 원피스에 나오는 그 니카 말씀이신가요…? 해방의 드럼을 울리는 태양의 신…??!! 헉, 그런 엄청난 발상을 하시다니… 정날 엄청난 추측입니다…!! 안되겠군요… 독자님, 잠시 이곳으로… (탕!)
…장난입니다!! 하지만 재밌는 추측임은 부정할 수 없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