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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75

    몽롱한 기분이었다.

    지금이 너무나도 편해서,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의지가 전혀 생기지 않는 그런 막연한 몽롱함.

    이런 기분을 마지막으로 느껴본 것이 대체 언제쯤일까?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한가지 기억만큼은 남아있었다.

    그것은 지금까지도 뇌리에 박혀 사라지지 않는, 자신이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던 아기였을 적 기억.

    우스꽝스러운 얼굴이 달린 별모양 모빌을 튕기는 아빠와, 자신의 배를 토닥이며 미소짓던 엄마.

    그 조금 뒤에서 자신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 할아버지와, 휠체어에 탄 할머니. 

    열린 창문 너머로 부드럽게 타고오는 봄바람과 새소리와, 자신의 몸을 감싸고 있던 베이비파우더 향 나는 포대기.

    그리고 그 포대기의 보슬보슬한 감촉과, 그곳에 새겨져있던 잘못 인쇄되어 반토막난 비행기 무늬 하나까지.

    그야말로 평범하기 그지없는, 그야말로 너무나도 평범해서 금방 잊어버리고 말 법한 잔잔한 일상 속의 한 장면이었다.

    통째로 전사되어버려 아무런 맥락도 떠올릴 수 없는 그저 단 한순간의 장면일 뿐이었지만, 머릿속에 박제한 듯 단단히 박혀 자리잡은 가장 강렬한 기억이었다.

    그건, 자신이 좋아했던 사람들이 한데 모여서 미소를 짓고 있던, 마지막 기억이었으니까.

    아무런 걱정도, 불안도, 고난도, 역경도, 슬픔도 없이 그저 하루하루 기대를 품은 채 보내던 그 시절, 그 기억 속 모든 표정들은 웃고 있었다.

    엄마와 아빠, 할머니와 할아버지, 모빌에 매달린 별의 표정과, 담요에 조그맣게 그려진 비행기 속 파일럿의 표정, 얼굴을 직접 보지 못했지만 창가에서 즐거이 지저귀던 새들까지.

    자신의 표정 또한 웃고 있었으리라.

    어떻게든 다시 한번 경험하고 싶은 순간이지만, 시간을 돌리는 방법을 알아내거나 죽은 이들을 살려내는 방법을 개발해내지 않는 한 재현될 수 없는 장면이겠지.

    그래서인지 그것이 굉장히 그립기도 하고, 미련이 남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좋은 기억이었다.

    그들의 빈자리가 익숙해지고 난 후엔, 애써 떠올리려고 하지 않더라도 어쩌다 가끔씩 떠오르면 그리워지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았으니까.

    그리고 지금, 자신은 그런 꿈을 꾸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자신이 유일하게 기억하는 살아생전 할머니의 모습은, 그대로 사진을 찍어 할아버지에게 보여주고 싶을 정도로 선명했다.

    참 신기한 일이었다. 

    그동안 이렇게까지 선명했던 적이 없는데.

    ‘나, 죽었나?’

    문득 그런 불길한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아무렴 어떤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나도 생생한 꿈이었다.

    이것은 마치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

    지금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았다.

    그렇게하면 다시 한번 그 시절로 돌아가, 돌아오지 않을 시간에 미련이 남지 않도록 전보다 더 많은 즐거움을 함께 교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손 하나 깜짝하고싶지 않았다.

    그랬다간 바로 이 꿈에서 깨어날 것 같았다.

    신기루를 만지려고 다가가, 황망하게 모래만을 움켜쥐는 꼴이 될 것만 같아 두려웠다.

    그렇다면 욕심을 내어 이 소소한 행복을 끝내는 것보단, 지금 기분좋은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하고 이 순간을 확실히 만끽하는 편이 더 좋지 않을까?

    황금 알을 낳는 거위는 아니지만, 애써 애정을 담아 기르던 거위의 배를 가를 필요는 없으니 말이다.

    —–

    그렇게 오래된 기억의 필름이 끝나고 어두운 고요가 점차 찾아들던 무렵, 몽롱하던 정신도 차츰 가닥이 잡혀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며칠 밤을 샌 후에 잠에서 깨어나는 감각과도 비슷했다.

    귀를 통해 외부의 소리가 들려오고, 피부의 감각이 느껴지기 시작하지만, 너무나도 나른해서 웬만한 일이 아니면 절대로 눈을 뜨고 정신을 차리기는 싫은 상태.

    바로 그것이 지금 그의 정확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도 그 감각과 함께 귀를 통해 들려오는 무언가 만큼은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 …….’

    굉장히 희미했지만, 그것은 분명히 말소리였다. 

    물 속에서 말하는 것처럼 먹먹하여 그 내용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어딘가 익숙한 울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무엇일까?

    그는 곧 그 희미한 울림을 단서로 생각을 하기 시작했지만, 잠결의 흐릿한 판단력으로는 도저히 떠올릴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결국, 호기심이 나른함을 이기고 눈꺼풀을 들어올렸을 때.

    어찌 된 영문인지, 눈앞에는 한 여성이 입가를 가린 채 어딘가를 향해 무어라고 떠드는 장면이 시야에 들어온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명백하게 이상한 장면이었다.

    왜냐하면, 그녀의 얼굴이 여기에 있을 수가 없는 사람의 것을 하고 있었으니까.

    ‘…역시 꿈인가?’

    별개의 꿈을 연달아 꾸는 것은 딱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꿈 속의 꿈이라는 말도 있고.

    아직 꿈 속이라고 결론을 내린 이상 구태여 눈을 뜨려고 할 이유는 없었기에, 그는 겨우 떴던 눈을 다시 그대로 감았다.

    잠은 금세 쏟아졌다.

    살짝 실눈을 뜨려고 한 것 만으로 이미 기력을 전부 다 쓴 것 같았다.

    —–

    숨을 제대로 쉬기 시작한 시루드의 모습에 루크는 이마로 흐르던 땀을 닦아내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휴우, 호흡은 어떻게든 돌아온 것 같군.”

    -그러네요. 역시 인공호흡이 답이었어. 어때요, 완벽한 조치였죠?

    휴대폰에서 흘러나온 레니에의 의기양양한 목소리에 루크는 마지못해 대답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굉장히 급박한 상황이었는데, 의료인으로서 레니에가 가진 눈은 아무래도 정확했던 모양이다.

    시루드의 상태를 보자마자 바로 그 대처법이 튀어나오다니.

    하긴, 레니에가 시루드의 상태도 읽어내지 못할 리 없기는 했다.

    그녀 정도의 의료 경력은 아마 온 대륙을 찾아봐도 없을 테니까.

    하지만, 뭔가 탐탁지않다.

    -그런데 왜 그러세요? 혹시 지금 그 어린 엘프 남자애랑 입 닿은 걸 가지고 의식하고 있나요? 어머, 고작 인공호흡 가지고 뭘 그래요! 그건 명백한 의료행위라고요!

    레니에의 묘한 반응에 루크가 돌연 목소리를 높였다.

    “그건 나도 알아!”

    그리고 애초에 자신에게 그것을 의식하게 한 것은 다름아닌, 바로 레니에 자신이었다.

    바로 몇시간 전에 서드와 가면을 맞닿은 걸 가지고 암컷이니 뭐니 지껄이지만 않았어도 아무런 감정 없이 온전히 의료행위만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인데, 그런 소리를 듣고 난 뒤라서 생각하기 싫어도 생각이 나지 않은가?

    그러자 레니에가 별 거 아니라는 듯이 대꾸했다.

    -에이, 그건 그냥 농담이었다구요! 그냥 반응 좀 보려고 아무렇게나 던진 말이었는데.

    “하여튼 내가 의식하게 된 건 순전히 그대 때문이란 말이네! 그런 말만 안 했어도!”

    -그보다도, 저는 다른 게 신경쓰이던데요.

    갑자기 목소리의 톤이 바뀐 레니에의 반응에 루크는 덩달아 살짝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뭐가? 혹시 내 처치에 뭔가 잘못된 점이라도 있었나?”

    처치는 완벽했을 텐데?

    기도를 확보한다던가, 옷의 단추를 풀어 피가 잘 통하도록 해서 흉부를 압박한다던가, 돌이켜봐도 딱히 자신이 실수한 건 없었다.

    그리고, 시루드가 이렇게 호흡을 되찾은 순간부터, 응급처치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그것으로 끝난 셈이었다.

    그렇다면 경우의 수는 한가지.

    “아니면, 시루드에게 추가적인 증상이라도 발견된 거냐?”

    루크가 그렇게 걱정을 담아 의문을 표하자, 레니에가 미묘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아니 그게 아니고요, 그…. 어린 남자애 배 위에 올라타서 입을 맞추고 자신은 점차 몸이 어려지는 게…… 꼭 무슨 애한테 흡정하는 서큐버스 같아서 묘한 기분이 들었달까……. 그건 진짜 변명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묘한, 그런….

    레니에는 말을 서서히 흐렸다.

    시루드의 가슴에 손을 대고 있는 루크는, 지금도 실시간으로 서서히 ‘어려져’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 영락없이 남성의 정기를 빨아 젊음을 유지하는 마족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그 터무니없는 소리에 루크는 화들짝 놀라 목청껏 외쳤다.

    “아니, 그게 대체 무슨! 모함도 정도껏 해라!!”

    이건 신성력으로 불균형해진 서클을 시루드의 서클을 이용해 공명을 일으키는 방식으로 안정시키는 중이라서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일 뿐, 오히려 어느정도 그릇과 균형을 맞추기 위하여 마력의 손실을 일으키고 있기에 상대의 생명을 빼앗아 젊음을 갈취하는 서큐버스의 것과는 그 근본부터가 전혀 다른 행동이다!

    게다가 입맞춤(?) 역시 생명을 빼앗는 매개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생명을 불어넣은 것으로, 그것은 레니에가 인정한 의료행위였으니 따지자면 그 또한 서큐버스와는 정 반대의 목적을 가지고있다!

    또한 그 두가지 일은 완전히 별개.

    그냥 단순히 동시에 다른 두가지 일을 행했을 뿐이지, 원리상으로는 전혀 연관성을 찾아볼 수 없는 각각의 다른 사건이었다!

    -그냥 겉으로 보기에만 그런 느낌이 났다는 얘기니까 진정하세요! 그러다 애 깨겠네!

    레니에의 말에 시루드의 표정을 확인한 루크는 황급히 손등으로 자신의 입을 가린 채, 목소리를 낮추며 항의하듯 눈빛을 쏘아보내며 말했다.

    “하여튼, 그대가 쓸 데 없는 소리를 하니까 그런 거 아닌가!”

    -네에, 죄송합니다. 

    머릿속에 떠오른 건 일단 내뱉고 보는 그 성격은 여전하군.

    오래 살면서 이것저것 보고 느낀 것이 많아져서 그런지, 옛날처럼 순수한 느낌은 전혀 아니긴 하지만.

    “….그나저나, 역시 겉으로 보면 내가 그렇게 천박해보인다는 얘긴가.”

    하긴, 제자를 가슴으로 눌러 죽일 뻔 하질 않나, 제자와 입술이 닿았다고 의식하질 않나.

    생각해보면 이보다 더 천박할 수가 없다.

    남들이 이런 자신의 모습을 봤으면 스스로 목을 매달지 않았을까?

    …물론, 그냥 그런 기분이 든다는 얘기고, 실제로 목을 매달지는 않을 것이다.

    불사의 개념이 섞인 키메라가 그런다고 죽을 일은 절대 없을 테니까.

    과연, 죽음의 권리조차 박탈당한 생물의 삶이란 이토록 고통스러운 것인가?

    참으로 웃기는 농담이다.

    -그래도, 보는 사람이 없으면 상관 없는 거 아닌가요? 어차피 폐허 속이라 본 사람도 없는걸요.

    “…그건 그나마 다행이군.”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하면 언제나 일이 틀어진다고 했던가?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곳에 절대 들려올 리 없는 타인의 목소리가 들려와 순간 루크의 귀를 쫑긋거리게 했다.

    “언니, 지금 뭐해?”

    “파, 파이리스?”

    목소리의 주인은 파이리스.

    어디에든 쉽게 나타났다가 사라질 수 있는 정령체인 그녀는, 이런 잔해에도 쉽게 얼굴을 들이밀 수 있었다.

    “ㄴ, 네가 여길 어떻게?”

    하지만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는 실제로 이곳에 온 것을 설명할 수 없다.

    대체 집에서 놀던 파이리스가 뭐하러 이곳에 날아와 얼굴을 들이민단 말인가?

    도저히 동기를 이해할 수 없는 파이리스의 행동에 루크는 의문을 던졌으나, 파이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일단은 상황을 읽는 게 먼저라고 생각한 걸까.

    “음…….”

    파이리스는 루크의 빨갛게 상기된 얼굴과, 그 아래에 깔려있는 시루드의 옷이 반쯤 풀어헤쳐져 있는 것을 보고는 금방 고개를 끄덕였다.

    “아! 나 이거 알아!”

    그야 이 장면, 디아나랑 놀면서 만화를 보다보면 종종 보게되는 장면이었으니까.

    평소에 그토록 즐겨보는 메루루에도 한번정도 나온 장면이라서 아주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 심상치않은 말투에 루크는 기겁하며 변명을 시작했다.

    “잠깐, 파이? 이건 절대 그런 게 아니다.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와! 

    언니는 정말로 만화랑 똑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파이리스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알겠어. 무슨 상황인지!”

    “그게 정말인가?”

    루크는 살짝 기대가 섞인 눈빛을 자신에게 보내왔다.

    정말 봐도봐도 똑같은 장면이라서, 언니와 소꿉장난을 하는 것 같아 신이 났다.

    파이는 벌써 자신의 배역에 몰입하고 있었다.

    ‘이 다음에 이어지는 장면이 뭐더라?’

    잠깐 생각을 해보니 금방 기억이 났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이럴 때는 다들 자리를 피해주는 걸로 이어진다.

    갑자기 열었던 방문을 닫으며 나간다거나, 왔던 길을 그대로 돌아가며 딴청을 피운다거나.

    그럼 이 경우에는 도로 정령화해서 뒤로 빠지면 되는 거겠지?

    ‘아참, 그리고 뭐라고 하던데…’

    그리고 거기에서 그냥 가는 게 아니라, 다들 자리를 비켜주면서 꼭 하는 말이 있었다.

    잠시 후, 기억을 떠올린 파이리스는 몸을 점차 영체화하며 잔해 속으로 천천히 잠기며 말했다.

    “음, 좋은 시간 보내……, 언니?”

    그래, 분명 그랬던 것 같다.

    그에 루크는 마침내 경악하고 말았다.

    “아냐, 파이리스! 잠깐만 기다려!! 전혀 이해하지 못했잖아!!”

    파이리스의 그 반응에 루크가 당황하며 목소리를 크게 높이자, 그 소리에 시루드도 놀라 정신을 차리고 말았다.

    ‘잠깐, 이거 그냥 꿈이 아니었어…?’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파이는 클리셰를 잘 학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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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rchmage dreams of being an Archmage again

The Archmage dreams of being an Archmage again

다시 대마법사를 꿈꾼다 대마법사였던것은
Score 4.2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5000 Years in the future, the Archmage Luke Irushi opened her eyes again. The world has changes so much.

Horseless carriages, an entertainment box with audio and video, food and spices she has never seen before…

And, a changed magical system!

It wasn’t just the world that chang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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