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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75

        

         

       행운.

       이르기를, 행운의 ‘행(幸)’은 행복을 뜻하는 것이라.

       행운을 파자하면 괴롭고 힘들다는 뜻의 ‘신(辛)’과 하나를 뜻하는 ‘일(一)’이 되며, 신(辛)을 파자하면 많은 어려움(十) 위에 서 있다는(立) 뜻이 되니.

       곧 수많은 어려움 끝에 도래한 행복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낭인에게 주어지는 것은 행운의 본질에 가까운 것이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불행을 이겨내고, 마침내 그 불행에서 빠져나와 다행스러움을 느끼고 숨을 돌릴 수 있으니 이 어찌 행운이라 하지 않으랴?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한 줄기의 빛처럼 다가오는 것.

       그것이 행운이다.

         

       하지만 돌아보아야만 하는 것이 있다.

         

       불만을 품지 않고, 인내하며 견디고 또 견딘 끝에 찾아오는 행복이 행운이라면.

         

       그렇다면 불만을 품지 않을 수도, 인내할 수도 없을 거대한 불행을 빠져나오게 된 것이 과연 우연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다.

         

       자신의 힘으로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 속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 법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엄청나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의 경지의 차이가 나는 무인에게서 들키지 않고 빠져나올 수 있었다는 것이-

         

       과연 그 혼자만의 노력으로 해낼 수 있는 것이었을까?

         

       바스락.

         

       만약 그 혼자의 노력으로 해낸 것이 아니라면.

       그가 직접 행운을 움켜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도움을 주어서 행운처럼 보이는 무언가를 그의 손안에 쥐여준 것이라면.

       그렇다면 그의 손안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

       행운이 아니라면 그의 손안에 들어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클로버인 척 그의 손안에 얌전히 있다가 본색을 드러내려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을 준 사람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바스락.

       바스락.

         

       소리가 들린다.

       나뭇잎을 밟고, 나뭇가지를 밟아 부러뜨리는 소리가 난다.

       스산하게 나뭇가지 사이로 움직이고, 음산하게 나뭇잎 사이에 파고들었다가 나뭇잎의 아래를 핥고 물러나는 바람의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그 바람의 속에 축축한 습기가 퍼진다.

       누군가가 내뱉는 숨결처럼 물기를 머금고, 숨결 특유의 열기와 냉기를 동시에 품은 채 남자의 몸을 싸늘하게 훑고 지나간다.

         

       숨을 내뱉는 것에는 생명을 뜻하는 따스함이.

       하지만 반쯤 썩어버린 해골이 내뱉는 최후의 숨결처럼 너무나 미약한 열기, 그리고 망자가 품는 섬뜩한 냉기를 품은 숨결 같은 바람이 남자를 훑는다.

       마치 유령이 손끝으로 쓰다듬는 것처럼 가냘프고 보드랍게, 하지만 닿는 족족 소름을 불러일으키며 몸서리치게 만드는 바람이 불어온다.

         

       바스락.

         

       나뭇잎이 밟히고, 나뭇가지가 부러지고, 벌레들이 우수수 움직인다.

         

       파삭.

         

       나무에 스치는 소리와 함께 나무껍질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

       밤의 어둠 속에서 몸을 숨긴 채 나뭇잎 아래에, 나무껍질에 붙어있던 벌레들이 우수수 바닥으로 쏟아져 내리는 소리가 난다. 벌레들이 필사적으로 뒤집힌 몸을 다시 원상태로 하기 위해 발버둥 치고, 많은 다리를 이용해 사방으로 흩어질 때의 그 소리가 난다.

         

       소리.

       소리.

         

       아, 그 소리.

         

       바스락.

         

       발소리가 나되 산짐승의 소리가 아니고.

       산짐승이라기에는 누린내가 풍기지 아니하는.

       누린내와는 다른 악취를 한껏 풍기는 무언가가 가까워진다.

         

       킁킁 냄새를 맡으며 접근하는 것도 아니요.

       호기심에 접근하는 것도 아니요.

         

       무언가 의도를 가진 채, 한 발 한 발 그에게 가까워진다.

       나뭇가지를 부러뜨리고, 나뭇잎을 아래로 떨구고, 나무껍질을 꺼트리며 다가온다.

       마치 겨울이 다가오는 것처럼.

       겨울이 오기 전에 나뭇잎을 모조리 땅으로 떨구며 앙상한 나뭇가지로 만드는 것처럼.

       갑옷처럼 두른 나무껍질을 부식시키며 거추장스러운 물건으로 만드는 그 스산한 계절처럼!

         

       바스락.

         

       마침내 그것은 모습을 드러낸다.

       남자에게 쥐여준 무언가를 회수하기 위해서.

       남자에게 쥐여준 그 의도를 행하기 위해서.

         

       그것은.

       그 사람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무언가는 기괴한 느낌의 인간이었다.

         

       남자?

       그래. 남자로 보인다.

       허수아비를 연상케 하는 깡마른 체형에 묘한 광택이 있는 청바지, 검은색 후드티를 입고 있는 남자. 검은색 후드티에는 현대미술 같은 그림이 박혀있고, 낡아빠진 후드티는 군데군데 구멍이 나 있었다.

       그리고 깊게 눌러쓴 모자의 안에는 흉흉하게 빛나는 파란색 눈이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고, 남자의 왼쪽 어깨에는 새 한 마리가 앉아서 사방을 둘러보고 있었다.

       새는 살이 너무 찐데다가 깃털이 너무 많이 빠져 볼품없어 보이는 외형을 가지고 있어 정확하게 무슨 새인지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하얀 깃털과 검은 깃털이 있는 것으로 보아 까치처럼 보였다.

         

       ‘뭐…지?’

         

       낭인은 숨을 죽인 채 모습을 드러낸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리 특이한 모습은 아니기는 했지만,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이 불길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기척을 죽였고, 숨을 아주 느리고 가늘게 쉬기 시작했다.

       성취가 낮은 귀식대법(龜息大法)이기는 했지만, 일반인 정도는 감쪽같이 속일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렇게 기척을 숨긴 남자는 저 이상한 사람이 어딘가로 가기를 바라며 그를 지켜보았다.

         

       “아. 아-아아아–”

         

       하지만 모습을 드러낸 남자는 어디론가 가는 대신, 그 자리에서 우두커니 선 채 이상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일부러 목을 긁고 성대를 쥐어짜기라도 하는 듯 탁한 소리가 흘러나왔고, 중간중간 트림에 가까운 불쾌한 소리가 흘러나오기도 했다. 게다가 대체 무슨 의도인지 가슴께를 손가락으로 푹푹 찌르면서 소리를 중간중간 끊기도 했는데, 폐가 찔릴 때마다 툭툭 끊기는 호흡과 함께 흐트러지는 소리는 듣는 이로 하여금 불쾌감을 주었다.

         

       기괴함.

         

       갑자기 나타난 저 사람에게는-기괴함이 있었다.

         

       “블로클-라, 블로클라. 악마의 피가 한 방울 흐르는 혓바닥을 낼름 움직이며, 날개를 퍼덕이며 밤을 가르라. 어둠에 몸을 숨긴 채 퍼드덕 퍼드덕 날아 발푸르기스의 밤을 가르라. 하이 피크에서 그어진 성호를 짓밟고, 웨스트 라이딩에서 그어진 성호를 뒤집으며 날갯짓하여라. 검고 푸르른 날개를 어둠에 숨기고, 흰 날개를 교차시켜 뒤집힌 십자가를 만들어 신을 모독하라. 부리를 열어 혀를 내밀어 악마의 숨결을 내뱉고, 익살스러운 울음 속에 사람을 현혹하는 독을 뿌리며 영혼을 타락시켜라….”

         

       남자는 못으로 칠판을 긁어내리는 듯한 거슬리는 소리로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영국 억양이 짙게 묻어있는 영어였다.

         

       영국 억양으로 하는 영어는 끔찍한 소리와 함께 기괴한 주문이 되어 적막한 숲속에 울려 퍼졌고, 그의 목 아래에 달린 통역기는 그가 말한 기괴한 소리를 한국어로 번역해서 감정 없는 기계음 섞인 소리로 숲에 울리게 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이를 애도하지 않는 새야. 검고 흰옷을 입은 채 무관심으로 살아가는 악마의 새야. 악마의 핏방울처럼 붉은 혓바닥으로 벌레를 잡아먹고, 사람의 영혼을 집어먹으며 날으라…. 그렇게 날고 날아, 마땅히 성자와 성녀들의 시선이 거두어진 어두운 날에 방문을 받을만한 이를 찾아내도록 하라….”

         

       그리고 마침내 남자의 기괴한 소리가 끝났을 때.

         

       퍼드덕.

         

       남자의 어깨에 앉아있던 까치가 날갯짓하기 시작했다.

       볼품없어 보이는 날개를 들어 올리며 몸을 띄워 올렸고, 주변을 한 바퀴 날더니 고개를 확 꺾어 한 방향으로 날아갔다.

         

       푸드덕.

         

       그렇게 날아오른 까치는 바닥에 착지하고 날개를 접은 뒤, 한 곳을 빤히 바라보았다.

         

       낭인의 바로 앞에서.

       낭인을 빤히 바라보며.

         

       까악-

         

       불길한 소리를 내며 울었다.

         

       “오. 까치여, 까치여…. 나는 성호를 긋습니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어깨에서 어깨로. 가슴에서 머리로, 어깨에서 어깨로. 어깨에서 어깨로. 가슴에서 머리로. 어깨에서 어깨로. 머리에서 가슴으로. 성호를, 나는 성호를 긋습니다…. 나를 가호하소서. 불길함 속에서 한 발자국을 갈 수 있도록 성호를 긋습니다….”

         

       그리고 그 불길한 소리가 울려 퍼지자 남자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른손으로 이리저리 움직이며 십자가의 형상을 그리며, 한 발짝 한 발짝 걷기 시작했다.

         

       저벅.

         

       남자가 걸을 때마다 땅이 깊게 파인다.

       땅에 자국이 깊게 새겨지고, 깔려있던 낙엽이 빨려 들어가듯이 꽂힌다.

       나뭇가지는 부러지고, 남자가 지나간 자리에 움푹 파인 자국이 남는다.

         

       그 형태는 둥그스름하고 속이 비어 있는 것이라.

       그 끝에는 구멍이 뚫린 동그라미의 형상을 하고 있으니, 영락없는 말발굽이라.

         

       저벅.

         

       남자가 걸을 때마다 발굽이 땅에 박혔다.

       남자가 성호를 그리는 것을 멈추고 팔을 늘어뜨리자 그의 손에는 무언가가 들렸다.

       허공에서 갑작스레 나타난 것은 녹슨 금속의 냄새를 풍겼다.

         

       스르릉.

         

       차가운 금속끼리 부딪칠 때 나는 소리.

       녹이 땅에 쓸리면서 묻어나오는 기분 나쁜 붉은색.

         

       저벅.

         

       남자는.

       그것은 까치가 있는 곳에 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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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haman Desires Transcendence

The Shaman Desires Transcendence

주술사는 초월을 원한다
Status: Ongoing Author:
The shaman realized he had gained life once more. This time, he would live a life solely for transcendence, through shamanism al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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