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전(前) 용사라고요?
“네가 알지 모르겠지만, 왕년에 너희 아빠가 끝내주게 잘 나갔다.”
이안의 아버지가 으레 입에 달고 다니던 말이었다.
이 말을 할 때면 이안의 아버지는 어깨를 으쓱이며 자랑스러워하고는 했다.
이안 입장에서는 그냥 여느 아버지들처럼 눈부신 청춘을 그리워하는 중년 남성 특유의 푸념일 뿐이었다.
“예에, 예에. 그러시겠죠 아버지.”
“못돼먹은 녀석이.”
물론 이안의 아버지, 한스가 유달리 심상치 않은 인물인 것은 맞았다.
자식인 이안의 입장에서도 한스는 중년치고 제법, 아니 꽤 선이 굵은 미중년이었으니까.
가끔 도시에 나갈 때도 아버지만큼 잘생긴 인물을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진짜라니까. 내가 왕년에는 말이야. 이 의수로 온갖 악…. 어휴 됐다. 내가 무슨 말을 하겠냐.”
또 특이한 점이라면, 아버지의 한쪽 팔이 의수라는 것일까.
유달리 번쩍거리는 검정 금속의 의수는 엄청 비싼 물건이라는 것을 짐작하게 했다.
‘아무리 봐도 농부가 가지고 있을 의수는 아니란 말이지.’
이안은 시골에서 농사나 하는 촌놈이었지만, 눈치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의 의수는 촌부렁이 농부가 가지고 있을 만한 물건이 절대 아니었다.
“아버지. 도대체 왕년에 뭐 하시던 분이십니까?”
“알면 다친다.”
정작 그 ‘잘 나가던 왕년’에 관해 물어보면, 아버지는 슬쩍 시선을 돌렸다. 뭔가 숨기는 것이 있다는 눈치였다.
“커흠. 일이나 하자. 거기 잘 묶어라.”
이 대화를 끝으로 부자는 다시 묵묵히 일을 시작했다.
새벽에 시작한 농사는 해가 질 때쯤이 되어서야 끝났다.
“으그극. 어으, 죽겠다.”
“젊은 녀석이 겨우 이거 가지고 그러면 쓰나.”
땀을 뻘뻘 흘리는 이안에 비해, 아버지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렇다고 농땡이를 부린 것은 아니었으니. 이안 입장에서는 기이함 그 자체였다.
“이안, 여보. 고생했어요. 얼른 밥 먹어요.”
이안과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갔다. 이안의 어머니가 둘을 반겼다.
나부끼는 붉은 머리카락이 흔들린다. 뽀얀 피부와 금빛 눈동자가 아름답게 빛났다.
‘우리 엄마지만… 정말 말도 안 되게 동안이시군.’
이안이 혀를 내둘렀다.
저 외모를 보고 누가 유부녀라고 생각하겠는가?
농담이 아니라 이안의 누나라고 해도 믿을 것이다.
쪽ㅡ
“으엑.”
어머니와 아버지는 자연스럽게 포옹하며 입을 맞췄다.
이안은 눈을 찌푸렸다. 다 큰 자식 앞에서 애정 표현을 서슴지 않는 분들이었다.
“얼른 식사들 해요.”
“후우….”
“…잘 먹겠습니다.”
식탁에 앉은 아버지와 이안은 결연하게 표정을 굳혔다.
냄비에 담긴 검푸른색의 무언가가 꿈틀거리며 살아있음을 격하게 주장하고 있었다.
이안의 어머니는 다 좋았는데 딱 하나, 요리를 참 못했다.
“어서 먹으렴. 오늘 구한 재료는 유달리 싱싱해서 기합 좀 넣어 봤단다.”
‘어머니…. 도대체 무슨 재료를 어떻게 조리하면 이렇게 살아서 꿈틀거리는 건가요….’
피할 수 없는 시련이다.
이안은 오늘 밤에 몰래 나가서 토끼를 사냥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이안의 아버지도 이따금 그런 식으로 끼니를 대신했다.
“…쿠웨에엑!”
“우웁……. 하, 하하. 차, 참 맛있네.”
“여기 더 있으니까 부족하면 더 먹어요.”
여느 때처럼 평화로운 저녁이었다.
* * * * *
‘우리 부모님은 뭔가 이상하다.’
이안은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숨겨진 과거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실 눈치채지 못하는 것이 바보였다.
어느 농부가 번쩍거리는 금속 의수를 차고 다니고, 또 어느 농부의 부인이 저런 미모를 자랑한단 말인가?
“거기에 우리 집 벽에 있는 이 검들…. 아무리 봐도 심상치 않단 말이지.”
거실 한쪽에는 커다란 검 두 개가 전시되듯 걸려 있었다.
하나는 타오르는 불꽃을 형상화한 무지막지한 대검이었고, 다른 하나는 신비한 문자가 새겨진 금빛 롱소드였다.
“아버지. 이 검 들어봐도 돼요?”
“뭐? 하하하! 들 수 있으면 들어봐라.”
이안은 붉은 대검을 벽에서 들어 올리지도 못했다.
아버지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그대로 허리가 꺾였을지도 모른다.
“…아니 도대체 무슨 검이 이렇게 무거워요?”
“그건 네 엄마가 쓰던 거고, 이게 내가 쓰던 거다.”
아버지가 쓰던 검은 롱소드 쪽이었다. 이안도 들어 올릴 수 있을 정도로 평범했다.
겉에 신기한 글자가 새겨졌다는 것이 유일한 특징이었고, 이를 제외하면 신기할 정도로 금색인 검이었다.
다만.
키이이잉ㅡ
“오. 이게 아직도 되네.”
“…? 아버지?”
이안의 손에서는 잠잠하던 롱소드의 문장들이, 아버지의 손에 들리면 밝은 빛을 뿜어냈다.
이상한 점은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큭, 크크큭…! 너, 나의 어둠을 이어받은 종속이자 후계자여! 세상의 어두운 진실을 마주할 준비가 되었느냐? 나, 폭염용왕흑살제의 오의를 깨우칠 수 있는 자여. 대답하라!”
“아이고 아버지 또 이러시네. 어머니! 아버지 또 발작하시는데요!”
이안의 아버지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간격으로 발작하고는 했다.
일반적인 발작과 조금 다른 형태이기는 했지만.
오글거리는 말투와 과장된 행동을 주로 보였다.
깡!
“휴. 너희 아버지 깨어나면 잘 좀 달래드리렴. 이번에는 유달리 심하네.”
“…네.”
아버지의 발작은 어머니의 꿀밤 한 방이면 진정되고는 했다.
…여리여리한 외모에 속으면 안 된다. 집안 최강자는 어머니였다.
물리적으로도, 논리적으로.
이안과 아버지는 절대 어머니를 이길 수 없었다.
뭐.
이런저런 특이한 점을 통틀었을 때.
이안이 생각하기에 자신의 어머니 아버지는 결코 평범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이제 말해주시죠. 도대체 뭐 하시던 분들이십니까?”
“음….”
“…….”
이안의 추궁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입을 다물었다.
사실 오래 숨기지 못할 것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나 빨리 눈치챌 줄은 몰랐다.
“휴. 그래. 인제 와서 아니라고 말해봐도 믿지 않겠지.”
“…말해주게요?”
“언제까지 숨길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거기에… 슬슬 때가 되기도 했고.”
의미심장한 시선을 교환한 어머니와 아버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들아. 너 용사 케니스와 동료들에 대해 들어봤냐?”
“당연하죠. 그거 모르면 대륙 사람도 아닐걸요.”
용사 케니스와 동료들의 모험.
꼬꼬마 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모르는 사람 없는 가장 유명한 모험담이었다.
사악한 마왕 발가르에 대적하는 용사 케니스!
그녀의 곁을 지키는 철벽의 이스칼, 용기사 프리가, 흑염룡의 한스!
이안도 어린 시절 그들의 모험담을 들으며 자랐으니, 모를 리가 없었다.
“음…. 네 엄마는 사실 용사 케니스다.”
“……아?”
“그리고 나는 용사 케니스의 전 동료, 지금은 남편인 한스고.”
“………아아.”
이안은 눈을 조금 동그랗게 뜨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런 식으로 나와야지.
그간 부모님이 보여준 범상치 않은 모습들을 생각한다면 이 정도는 납득할 수 있었다.
‘세상 어느 농부한테 만신전의 성기사들이 인사하고 가냐고.’
용사와 그 동료라면 모든 것이 설명된다.
“어…. 생각보다 덤덤하구나?”
“조금 당황스럽기는 한데. 으음. 또 막상 그렇게 놀랍지는 않네요.”
되려 한스가 당황할 정도였다.
케니스가 조심스레 이안에게 말했다.
“그간 너한테 숨겨온 건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단다. 하지만 용사의 자식이라는 게 알려지면 너한테 너무 과도한 관심이 쏠릴 것 같았거든.”
“으. 그건 그렇긴 하네요.”
이안은 치를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용사와 그 동료 사이에서 낳은 자식이라니.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딱 좋은 주제 아닌가.
이안은 그런 관심이라면 딱 질색이었다.
“네가 눈치를 얼추 챈 것 같아서 말해준 것도 있지만. 사실 조금 더 중요한 이유도 있다.”
한스는 품에서 편지 한 통을 꺼냈다.
아무런 장식도 없이 투박한 편지였다.
“이건…?”
“열어봐라.”
이안은 편지를 펼쳤다. 또박또박 올곧게 적힌 글자가 이안을 반겼다.
“……에?”
빠르게 편리를 훑은 이안이 저도 모르게 멍청한 소리를 흘렸다.
이럴 줄 알았다는 듯, 한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케니스는 여느 때처럼 온화하게 웃고 있었지만, 기분 탓인지 그 미소의 온도가 제법 차가웠다.
“그, 아버지? 이건 도대체?”
이안의 눈동자는 풍랑을 만난 돛단배처럼 흔들렸다.
이안에게 한스는, 아버지는 조금 엉뚱하고 이상한 모습이 있을지라도 언제나 믿음직한 아버지였다.
가정에 충실하고, 어머니에게는 다정했으며, 때로는 엄하고 때로는 친근한.
그런 아버지였단 말이다.
그런데….
“아버지…. 이, 이게 도대체ㅡ”
한스는 뭐라 할 말이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저한테 두 번째 어머니가 있다니요!!!”
이안이 허공으로 편지를 내던졌다. 아버지에 대한 배신감이 사무쳤다.
팔랑팔랑 나부낀 편지는 케니스의 앞에 안착했다.
케니스가 이안을 나무랐다.
“너희 아버지를 너무 탓하지 마렴. 이건, 그러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나도 허락한 일이고.”
“진심이세요 어머니?”
“그래. 설마 지금 이렇게 연락을 해올 줄은 몰랐지만….”
케니스는 편지를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예나 지금이나, 묘하게 저돌적인 성정은 변하지 않은 듯했다.
죄인 한스는 입이 있으되 할 말이 없었다.
조금 억울한, 아니 많이 억울한 면이 분명히 있지만….
달리 뭐라 말하겠는가.
“그러니까 이안. 네가 좀 가야 할 곳이 생겼단다.”
케니스는 문제의 편지를 가리켰다.
내용은 간략했지만, 품고 있는 무게마저 가볍지는 않았다.
[한스 님에게.
오랜만이에요. 몸은 건강하신가요?
이제 약속한 때가 되었어요.
약속을 지켜주세요.
-당신의 두 번째 아내, 데이지]
“두 번째 아내라니. 아버지 그렇게 안 봤는데.”
이안이 경멸의 눈길을 보냈다.
“…네가 모르는 사정이 있단다. 아주 깊은 사정이 있었어….”
한스는 아무에게도 닿지 않을 변명을 중얼거렸다.
혼자 굴을 파기 시작한 한스 대신 케니스가 이안에게 말했다.
“별거 아닌 약속이란다. 나중에 우리가 자식을 낳아서 장성하면, 자기 쪽으로 보내달라고 했거든.”
편지에서 엄청난 약속인 것처럼 적어놨길래 내심 걱정했던 이안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난데없이 둘째 어머니가 생겨서 좀 놀랐지만….
부모님이 용사님과 그 동료인 것에 비하면 별것 아닌, 음. 아닌가?
이안은 잠시 머리를 긁적였다.
“하아. 갑자기 이게 뭔…. 일단 알겠어요. 그, 데이지? 라는 분을 만나서 얼굴만 뵙고 오면 되는 거죠?”
“그래. 가는 길이 조금 멀기는 하겠지만, 그건 걱정할 필요 없다.”
한스가 대답했다.
땅굴을 파던 모습과 대조적으로 눈이 반짝거렸다.
이안은 그 눈빛을 보며 불안에 떨었다.
뭔가 꿍꿍이를 꾸미는 눈빛이었다.
“우리가 널 위해 아주 오랜 친구를 불렀거든.”
“친구요?”
“그래. 이제 슬슬 올 때가 됐는데ㅡ”
쐐애애애액ㅡ!!
“왔군.”
한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집 밖에서 강풍이 불어닥쳤다.
그건 바람 따위가 아니었다. 분명한 질량을 가진 것이 바람처럼 빠르게 달린 것이었다.
이히히히힝ㅡ!!
정적을 찢는 말의 울음소리.
한스가 활짝 웃었다.
아주 약간의 반가움, 거기에 견딜 수 없을 정도의 즐거움이 가득한 미소.
“어서 나가보자. 아마 너도 아주 좋아하게 될 거다.”
한스가 이안을 이끌고 문을 나섰다.
푸르스름한 달빛이 떨어지는 마당 한가운데, 순백의 갈기를 자랑하는 커다란 말이 서 있었다.
《푸히히힝ㅡ! 영혼의 맹약에 따라, 모든 처녀의 수호자가 이 곳에 도래했나니!》
“마, 말? 아니, 뿔이 달린… 유니콘?!”
빛으로 빚어진 신수, 처녀의 수호자.
유니콘을 알아본 이안이 경악했다.
유니콘?!
유니콘이 도대체 왜 여기에?
“아빠랑 유니콘은 계약으로 묶인 관계거든.”
《푸르르릉ㅡ! 아주 지긋지긋한 계약이로다. 비동정과 순수한 이 몸이 계약으로 엮였다니!》
“그 관계도 이제는 끝이야.”
한스가 시원하고 후련하게 웃었다.
유니콘의 눈동자가 이안을 향했다. 영혼을 꿰뚫어 보는 눈동자에 이안의 몸이 덜컥 굳었다.
《호오. 이 깨끗한 동정이 계약자의 자식인가? 흠, 흐음. 과연…. 태어나서 여자와 손 한번 잡아본 적 없는 지고의 동정이군!》
“어? 어어?”
마치 상품을 품평하는 듯한 눈빛.
이안은 자신이 노예 경매장에 올라왔다는 착각을 느꼈다.
“그럼. 우리 아들이 얼마나 순박하고 순진한데. 동네에 친한 여자애가 하나도 없다니까?”
유니콘 옆에서 한스가 손을 비비며 말했다.
상품의 가치를 마구 어필하는 장사치가 겹쳐 보였다.
《흐으으음. 좋다! 영혼으로 맺어진 계약의 권리와 의무를 일신에게로 옮기는 의식을 행하겠도다!》
“어, 어어…. 아, 아버지? 저기요. 잠깐, 뭔가 이상한, 지금 계약이라는 말이ㅡ”
파아아아앗ㅡ!
유니콘의 뿔에서 눈부신 빛이 터져 나왔다. 이안이 뭐라 거부하거나 동의할 찰나를 허락하지 않았다.
“우와아아앗!”
영혼에서 맺어진 계약은 부모에서 자식으로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계약의 당사자, 이안의 의사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
빛이 사라지고, 이안은 멍청하게 눈을 비볐다.
계약은 이행되었다.
영혼을 통해 유니콘과 이어진 끈을 느낄 수 있었다.
한스가 활짝 웃으며 이안의 어깨를 두드렸다.
“축하한다 아들아! 너는 이제 전설의 푸흡! 신수 유니콘의 계약자…쿠흐흡! 계약자가 된 거다!”
“……아.”
이안의 눈이 까맣게 죽었다.
유니콘의 이명…의 탈을 쓴 온갖 기행과 악명에 대해 자자하게 들었던 탓이다.
‘움직이는 처녀 감별기, 비처녀 혐오 전파자, 사상 최악의 변태 신수, 처녀 납치 전문가….’
“쿠흐흡! 축하한다! 아버지로서 너무나 자랑스럽구나, 크흐흡!”
이안은 주먹을 꽉 쥐었다.
진지하게 아버지의 얼굴을 한 대 때리고 싶어졌다.
Ilham Senjaya님, 반갑습니다!
외전의 시작입니다!
– ‘산달폰’님 후원 정말로 감사합니다! 그간 함께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짧게나마 외전으로도 즐거움을 드렸으면 좋겠네요! 날씨가 변덕을 부리는 요즘, 감기와 비염을 피하실 수 있도록 기도하겠습니다!!
– ‘신선우’님! 후원 정말로 감사합니다! 하하, 다시 만나기는 만났네요… 외전이지만 말이죠! 뭐랄까, 조금 머쓱한 기분?? 아무래도 작가 후기는 외전까지 전부 다 쓴 다음에 올릴 걸 그랬습니다 하하…!
– ‘니다람쥐’님! 후원 정말로 감사합니다! 완결 기념 후원! 정말 감사합니다! 어찌어찌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완결이라니… 다시 생각해도 참 실감이 안 나네요…! 모쪼록 짧은 외전이라도 즐거움을 드렸으며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