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79

   “…….”

   내 설명을 들은 벨라는 잠깐 나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너도 가끔 보면 머리 안에 꽃밭이 있는 것 같다니까.”

   음……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는 말이라, 나는 굳이 반박하지는 않았다.

   대놓고 꽃밭, 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은 하지만, 그래도 지나치게 이상주의적인 건 맞는 말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 목숨 걸고 싸우던 사람끼리 화해를 위해 이렇게까지 하는 것.

   그리고 심지어 평생을 속인 황제와의 관계도 어떻게든 돌려놓으려고 하는 것.

   당사자들 눈으로 보기에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이야기였으니까.

   “어떻게 생각해?”

   내 말에 벨라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다른 ‘애들’과 만나는 건 크게 신경 안 써. 사실 우리가 그렇게 사이가 나빴던 건 아니거든. 너도 알잖아?”

   벨라는 웃긴다는 듯 말했다.

   “적어도 루카스는 날 죽이려 들지는 않았거든. 너는 어때?”

   “……용서하기로 했어.”

   “봐. 역시 머리 안이 꽃밭이라니까. 아무리 그래도 자기 여동생을 베어보겠다고 난리였던 녀석인데, 그렇게 용서할 수 있다는 게 나는 이해가 안 가거든.”

   벨라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그리고, 알지? 내가 내 ‘아버지’를 혐오할만한 이유가 있다는 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네가, 그 사이를 어떻게 줄여놓겠다는 거야?”

   “내가 줄여놓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 나는 그런 재주는 없으니까.”

   “그래, 그랬지. 너는 그런 재주는 확실하게 없지.”

   벨라가 그렇게 인정해버리니까 조금 욱하는 감정이 들긴 했지만, 나는 일단 참았다.

   “그럼, 시간이 약이라고 하면서 그냥 가만히 있으려고? 그럼 내가 황제를 용서해줄 것 같아?”

   “…….”

   시간이 약이라는 말은 아물 수 있는 상처에나 쓸 수 있는 말이었다.

   팔이나 다리가 잘린 사람에게 썼다가는 처맞을 이야기지.

   벨라의 어린 시절은 클레어의 어린 시절, 그러니까 원작 게임의 클레어의 어린 시절과 비슷했다는 암시가 있다.

   그래서 벨라도 클레어를 꽤 귀여워했던 거고.

   생각해보면 나도 꽤 귀여움을 받았다. 물론 벨라는 원작의 벨라가 클레어를 귀여워하듯 나를 귀여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황제는 내 능력을 꽤 금방 간파했고, 그래서 나와 거리를 두고 관찰해왔으니까.

   황제의 최측근으로서 이런저런 정보를 들을 수 있었던 벨라도 나를 경계하긴 했겠지.

   그래도 나를 어느 정도 귀엽게 여긴 것은, 내 상황이 벨라 자신의 어린 시절과 겹치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빈민가의 고아원에 있다가, 다른 누군가에게 팔려 가 끔찍한 짓을 당하는…… 물론 나는 그 전에 탈출했고, 벨라도 그 사실을 알고 있긴 했지만, 적어도 내가 탈출한 이유에 대해서는 깊게 공감했을 거다.

   그런 벨라가, 사실은 좋은 가정에서 좋은 대우를 받으며, 훌륭한 옷을 입고 맛있는 식사를 배불리 하며 자랄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자기 아버지 때문에 망가져 버린 어린 시절을 떠올리고 어떻게 생각할까.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용서해달라고는 하지 않아. 그런 걸 할 수 있는 건 너 자신 뿐일 테니까.”

   “그럼? 복수하지 말라고?”

   “…….”

   “왜? 아버지로서 정이라도 들었어?”

   “……이건 이기적인 이유인데.”

   “한 번 들어나 보자.”

   벨라는 쥐고 있던 스푼을 놓아버리며 말했다. 스푼은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잔 안에 안착했다. 잔이 길어서 그런지 끝부분이 거의 나오지 않은 채로.

   “……더 싸우고 싶지 않으니까.”

   “…….”

   “그것뿐이야. 다른 이유는 없어.”

   내 말에 벨라는 입을 멍하니 벌리고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나는 더 할 말이 없었다.

   이건 순전히 벨라에게 달린 이야기였다.

   루카스는 나에게 큰 잘못을 했다. 당연히 루카스가 나한테 사과하는 것이 맞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루카스가 고집을 부릴 때도 답답하긴 해도 죄책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제이든은 애초엔 내가 하는 말이라면 뭐든지 다 들어주려는 인간이었고.

   하지만, 벨라는…… 벨라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여러모로 힘들었다.

   “그러니까, 아무 이유도 없이, 순전히 네가 원하기 때문이라는 거네.”

   억지스럽다.

   그래서 뭐라고 설명할 수도 없었다.

   벨라가 거절하면 그걸로 끝인 이야기였으니까.

   벨라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거절하면? 그 뒤로는 나를 안 볼 거야?”

   “……날 보고 싶을 때가 있어?”

   내 질문에, 벨라는 미간을 찡그렸다.

   몹시 이상한 질문이라는 표정이었다.

   팔짱을 끼고,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앉아서 잠깐 고민하던 벨라는 대답했다.

   “보고 싶을 때가, 있지.”

   벨라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면서 말했다.

   “나에게는…… 가족이긴 했으니까. 그게 이상하다는 건 알고 있어. 너도 그렇고, 루카스나 제이든도 그렇고, 결국에는 가족이라는 감정보다는 동업자라는 감정이 훨씬 컸으니까. 그런데 말이야.”

   벨라의 시선이 천장을 향했다.

   거기 달린 조명을 가만히 노려보던 벨라는 말했다.

   “이제 그 동업자 같은 관계가 사라져버렸잖아. 그러니까 가족이라는 얄팍한 부분만 남은 거지. 내 인생에서 남은 건 이제 그것뿐이야. 그러니까, 그래. 너라면 보고 싶을 때가 있긴 하지.”

   벨라는 다시 내를 보면서 말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날 보고 싶을 때가 있어?”

   이번에는 내가 벨라를 멍하니 바라볼 때였다.

   질문할 생각은 했는데, 이런 질문을 받을 생각을 하지는 못했다.

   저쪽에서 역으로 적극적으로 나설 거라는 생각을 못 했으니까.

   “나 뿐만이 아니라, 루카스나 제이든, 데미안은? 걔네들을 보고 싶을 때가 있어?”

   나도 벨라처럼 미간을 찡그리고 진지하게 고민해보았다.

   “……아주 가끔은?”

   “나를 생각할 때도?”

   벨라의 표정은 평소와 다를 게 없었지만, 목소리는 아주 살짝 떨린 것도 같다.

   물론 그건 그냥 내 생각뿐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 상대였다면, 여기 직접 찾아와서 노력하지도 않았을 거야.”

   나는 말했다.

   “나도 여기서 남은 가족들은 너희들뿐이니까.”

   벨라는 한동안 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입을 살짝 벌린 벨라는 뭔가 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보였다.

   “……다른 애들은 어떻게 설득했다고 했더라? 루카스를 제이든이 팼다고 했었나?”

   “그렇게 말하니 말이 영 이상한데. 게다가 루카스는 그거 절대 인정 못할 거야.”

   사실 제이든이 더 많이 다치긴 했다. 그래도 본인은 만족한 것 같았지만.

   “그거, 조건이 어떻게 되었는데?”

   “조건?”

   “그래. 제이든한테 부탁했다는 거 아니야. 제이든이 너한테 뭘 바랐어?”

   나는 조금 불안해졌다.

   왜 갑자기 그런 걸 묻는 거지?

   “왜?”

   “일단 말해봐. 뭔가 해달라고 하기 전에는 조건을 맞춰야 하는 거잖아. 안 그래?”

   “…….”

   나는 입을 꾹 다문 채 벨라를 찬찬히 뜯어보면서 대체 왜 그런 소리를 하는 건지 진지하게 고민해보았다.

   하지만 결론을 내리기가 조금 힘들었다.

   잠시 보이던 감정은 능글맞게 웃는 벨라의 얼굴 피부 아래로 쏙 숨어버렸다. 지금 내 앞에 있는 벨라는 언제 어느 곳이나 능숙하게 잠입해서 정보를 빼 오는 천의 얼굴의 벨라였다.

   “……오라버니라고, 불러주는 거.”

   “뭐?”

   하지만 내가 얼굴을 잔뜩 붉힌 채 한 대답에 벨라의 얼굴에 다시 멍한 표정이 올라왔다.

   “……제이든을 며칠 동안 오라버니라고 불러주기로 했어. 제이든은 그 조건에 수락했고.”

   “…….”

   벨라는 멍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다가, 이내 푸흡, 하고 웃음소리를 냈다.

   “하하, 하하하하!”

   그리고 이내 못 참겠다는 듯 배를 부여잡고 그렇게 웃었다.

   테이블을 두드릴 때는 잔이 넘어질까 걱정될 정도였다.

   “그거 참 제이든 답네! 제이든은 너를 진짜 아꼈으니까, 음.”

   “…….”

   내가 입을 꾹 다물고 있자, 벨라는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아내며 말했다.

   “하, 진짜 재밌었다. 오랜만에 한참 웃었네, 후.”

   그리고 나를 보더니,

   “그럼 나도 그 조건으로 거래를 받아들일게.”

   “…….”

   나는 벨라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말했다.

   “내가 무슨 거래를 하자고 했던가?”

   “부탁하러 왔었지. 그리고 그 부탁을 누군가가 들어주는 데 조건을 걸면, 그게 거래인 거고.”

   그게 그렇게 되나?

   “……그러니까, 내게 너를…….”

   “언니라고 불러줬으면 좋겠어. 제이든도 그렇게 해달라고 했다며? 나는…… 음, 일주일 정도는 어때? 기간은 내가 원할 때로.”

   “……제이든은 이틀이었는데.”

   “그야 걔는 단발성이었잖아.”

   벨라는 테이블에 팔꿈치를 대고, 양손을 깍지 낀 채 그 위에 자기 턱을 올리고는 나를 보며 말했다.

   “하지만 나는 조금 다르지. 황제를 죽이지 말아 달라며? 아아, 덕분에 나는 평생 살인 충동을 참으며 살게 되었어. 그 상실감에 대한 보답에 고작 호칭을 일주일간 바꿔주는 것 정도는, 네가 훨씬 유리한 거 아닌가?”

   “…….”

   차마 부정할 수가 없었다.

   한참 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나를 향해, 벨라가 한 손을 내밀었다.

   …….

   결국 나는 그 손을 잡았다.

   벨라는 그러고 또 웃음을 터뜨려, 한참 동안 배를 부여잡고 웃어댔다.

   뭔가 낚인 것 같은데.

   분명 내가 손해 보지 않는 거래인데 왜 이렇게 배가 아픈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