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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8

       슬쩍 옆으로 시선을 돌리니 아이마냥 기뻐하고 있는 엔리의 얼굴이 보였다.

       

       녀석. 내가 고되어 보이는 게 그리도 즐겁더냐.

       

       아무래도 어제 가르침을 받을 때 마음에 담아 둔 것이 한 둘이 아니었던 모양이구나.

       

       그럼 말이다. 조금 더 심사숙고를 해서 나를 골릴 방법을 찾았어야지. 이런 것으로 나를 괴롭힐 수 있을 리 없잖느냐.

       

       본인이 현대 문물에 서투른 것은 부정하지 않으마. 사실이니까.

       

       그렇지만 이게 현대 문물과 무슨 관련이 있느냐. 마우스를 움직임으로써 화면 속 캐릭터를 움직이는 것 뿐인데.

       

       마우스? 마우스를 써서 그런 것이야? 내가 마우스를 잘 다루지 못할 거라 생각한 게냐?

       

       누구를 원시인으로 보는 것도 아니고.

       

       결국에 이건 마우스라는 무기를 다루어 결과는 이루어내는 일이었다.

       

       만병을 다루는 나에게 이런 작업은 숨을 쉬는 것만큼이나 손쉬웠다.

       

       이를 깨달은 것은 처음에 몇 번인가 마우스를 움직여 캐릭터를 다루어 본 뒤였다.

       

       어찌 움직여야 게임 속 캐릭터가 원하는 대로 나아가는 지를 깨달은 나는 엔리에게 이리 물었다.

       

       “그냥 위로 가기만 하면 되는 거에요?”

       

       설마 싶었다.

       

       엔리가 나를 골리기 위해 가지고 온 것이 겨우 이런 것일 리 없다 생각했지.

       

       그렇지만 엔리는 내 기대를 배신했다. 그녀는 너무나도 자신만만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정말로? 이것뿐이라고?

       

       도대체 이 게임의 어떤 요소가 본인을 곤란하게 할 수 있는 것인가?

       

       이게 마우스를 클릭하여 파일을 옮기는 일과 근본적으로 무슨 차이가 있는 게야?

       

       혹여 엔리 혼자만의 착각이 아닐까 싶어 채팅창을 살펴보았지만 그 곳의 분위기도 엔리의 반응과 비슷했다.

       

       

       – 업보ON

       – 욕조겜 처음 하는 사람들은 다 말하는 게 비슷하네 ㅋㅋ

       – 오늘 화령님이 욕하는 거 볼 수 있을까?

       – 샷건까지 볼 수 있을 듯?

       

       아해들은 진심으로 내가 이 때문에 곤경을 겪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당혹스러웠다.

       

       이런 경험이 처음은 아니었다.

       

       내가 실패하기를 바라는 이들이 세상에 어디 한 둘이었겠는가.

       

       타인의 저주라면 하늘에서 내리는 빗물의 개수만큼 받아 보았다.

       

       다만 그것은 어디까진 악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다르다.

       

       이들은 내게 호의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내가 곤경에 처하기를 바랐다.

       

       내가 공포게임 속에서 비명을 지르던 엔리를 보며 즐거워했던 것처럼 이들도 내가 곤경에 처해 놀림감이 되는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이것이 차라리 악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면 그냥 그 기대감을 깨부숴버렸으리라.

       

       하아. 그렇지만 이건.

       

       이를 어찌해야 할까.

       

       기대감을 무시하기에는 옆에서 쏘아지는 엔리의 눈빛이 너무도 따가웠다.

       

       이것도 나름 고심하여 선택을 한 것일텐데 내가 이 장난을 박살내 버리면 실망하지 않을까.

       

       예전에.

       

       그러니까 천마의 딸이 되기도 전에.

       

       나는 어느 어린 아이와 술래잡기를 한 적이 있었다.

       

       가위바위보를 진 것은 나였고 그렇게 술래가 되었지.

       

       내가 열을 세겠다고 말을 하자마자 아이는 어디론가 우다다 달려가 버렸다.

       

       그 때의 나는 열에다 열을 더 세고 나서 이쯤이면 숨었겠지라고 생각을 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나는 바로 아이를 발견했다.

       

       아이는 커튼 뒤에 숨어 있었다.

       

       커튼 아래로 삐죽 드러난 아이의 발을 본 순간 내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던가.

       

       지금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찾으려면 찾을 수 있다. 그냥 앞으로 가서 커튼을 걷어버리면 그만이니까.

       

       허나 그런 일을 저질렀다가는 아이가 실망을 할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울지도 몰랐다.

       

       아이를 위로할 자신이 없었던 나는 얌전히 고개를 돌려 다른 곳을 뒤지러 떠났었다.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도 난 타인을 울리는 건 잘해도 위로하는 데는 서툴렀다.

       

       내가 이 게임을 어렵잖게 클리어 한다 해서 엔리가 울지는 않겠지. 그렇지만 실망은 할 것이다. 어쩌면 울상을 지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그녀의 기분을 풀어 줄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광대가 되기를 자처했다.

       

       “망치에 기름이라도 발려 있나요?”

       

       일부러 실수를 가장해 낙하를 하고 나니 채팅창은 물론이고 옆에 있는 엔리까지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일을 기대했던 것이냐. 그렇다면 이 짓거리를 게임이 끝날 때까지 반복해야 하는 것인가.

       

       어렵구나. 어려워.

       

       엔리. 그대가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다만 그대는 분명 나를 곤경에 빠트리는 데에 성공했다.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내게 이런 감정을 품게 만든 이는 무림 전체를 따져 보아도 얼마 되지 않으니.

       

       나는 지금 무척이나 곤란했다.

       

       진심에서 우러나온 한숨을 내쉬며 다시 마우스를 움직였다.

       

       계속해서 올라오는 채팅창을 보며 다음엔 어디에서 실수를 해야할 지 고민한 것은 덤이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웠던 점은 엔리건 다른 이들이건 내가 보통사람보다는 잘할 거라는 가정을 깔아두었단 것이다.

       

       그래서 중간부터 내가 조금씩 실력을 드러냈음에도 모두들 감탄을 할 뿐 내가 실력을 감추었다고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렇게 두 시간 반 가량이 흘렀을 무렵 욕조에 갇혀 있던 알몸의 민머리 남자는 먼 우주로 떠나가 버렸고.

       

       “끝났다.”

       

       나는 심신이 지친 것을 느끼며 의자 등받이에 기대 늘어졌다.

       

       현실에서는 곰방대를 필 일이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아닌 것 같구나.

       

       하나쯤은 구비를 해두어야겠어.

       

       다음에도 이런 일이 없으리라 누가 확신을 하겠느냐.

       

       “잘하실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이런 내 심정도 모르고 옆에 있는 엔리는 분하다는 듯 화면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거 아느냐? 엔리. 이 게임 말이다. 바란다면 시작하고서 10분이 지나기 전에 끝내는 것도 가능했다.

       

       그것을 두 시간 반 동안 질질 끈 것이다. 두 시간 반 동안이나!

       

       이 정도면 제발 만족을 좀 해다오.

       

       

       “뭐가 그렇게 아쉬워요?”

       “이거 못 써먹었거든요.”

       

       엔리가 스마트 폰을 조작하자 거기에서 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런 걸로 화가 나겠어요? 겨우 게임이잖아요.’

       

       저런 말도 했었지. 설마 나를 놀려 먹겠다고 그것을 녹음한 게야?

       

       

       “엔리. 지독한 사람이었군요.”

       

       허어. 녀석. 이럴 때는 머리가 잘 굴러가는구나.

       

       저 말 또한 나의 본심 그대로였다.

       

       생각해 보거라. 본인이 진심으로 짜증이 났다면 마우스건 책상이건 그 형체를 멀쩡히 유지했겠느냐?

       

       

       “아하하. 그래도 재밌었어요. 아라 씨도 헤맬 때가 있었잖아요.”

       

       내가 연기한 당혹이 만족스러웠느냐. 그나마 다행이구나. 내 고생이 마냥 헛되지는 않은 모양이야.

       

       슬며시 채팅창 쪽으로 시선을 옮기니 그들도 진심으로 내가 이 게임을 클리어 한 걸 축하해주고 있었다.

       

       어제 엔리가 승리를 거두었을 때만큼이나 빠르게 올라가는 채팅창을 보고 있자니 정말로 안도감이 느껴졌다.

       

       하아. 드디어 광대노릇도 끝이구나.

         

       분명 일이 잘 풀렸는데 왜 이리도 힘이 드는 것일까.

       

       이 짜증을 풀 곳이 필요했다.

       

       아피스.

       

       아피스에 들어가자꾸나.

       

       “엔리. 캡슐VR 바로 체험 해봐도 되나요?”

       “네? 지금 안 힘드세요?”

       “화풀이를 좀 하고 싶어서.”

       

       그리 말을 하자 엔리가 미소를 흘렸다.

       

       그녀는 아마 내가 이 욕조 게임에서 겪은 곤경 때문에 성을 낸다 생각하고 있겠지.

       

       이래서 티끌 하나 없는 호의가 곤란한 것이다.

       

       저 웃는 얼굴을 어찌 무너트릴 수 있겠느냐.

       

       “여러분. 화령 씨가 아피스 하는 거 직관해도 되죠?”

       

       – 당연한 걸 왜 물음?

       – 천마님 시점 직관 못 참지.

       – ㄱㄱㄱㄱㄱㄱ

       

       “그럼 일단 이 방송은 끄고 VR에서 다시 방송을 킬게요. 조금 있다 봐요!”

       

       – 엔바

       – 엔바

       

       방송이 끝난 후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폈다.

       

       일부러 못하는 척을 해서 그런가 온 몸이 뻐근했다.

       

       “아라 씨. 많이 힘들었어요?”

       “네.”

       

       이는 내 진심이었다.

       

       정말로. 내가 그대들이 바라는 모습을 연기하느라 얼마나 곤욕을 치뤘는지 아느냐?!

       

       “아하하. 그렇지만 아라 씨가 건 내기잖아요. 업보라고 생각하세요.”

       “…네에. 업보가 맞죠.”

       

       그렇지만 말이다. 나는 이런 식의 곤경이 찾아올 거라고는 조금도 상상하지 못했다.

       

       차라리 굴욕을 겪었으면 겪었지. 내 발로 곤경을 택하러 가야 할 줄은!

       

       웃음을 터트린 엔리를 뒤로 한 채 VR캡슐의 문을 열고서 안으로 들어갔다.

       

       “따로 부착하고 하는 건 없나요?”

       

       VR캡슐의 안은 아늑했다. 너무도 아늑한 나머지 눈을 감으면 그대로 이 곳을 집 삼아 잘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 정도였다.

       

       “캡슐이 알아서 스캔을 하니까 상관없어요.”

       

       엔리가 다른 VR기기를 찾으러 떠나간 후 눈을 감고 VR에 접속했다.

       

       평소라면 이 쯤에서 현기증이 올라와야 할 터이거늘 캡슐은 그런 것이 없었다.

       

       잠시 의식이 점멸하더니 바로 평소 보던 VR의 풍경이 펼쳐졌다.

       

       오오. 과연 비싼 것은 비싼 값을 하는 구나. VR을 할 때마다 나를 거슬리게 하던 현기증이 사라질 줄이야.

       

       나중에 엔리에게 이것의 값을 물어봐야겠어. 가능하다면 거금을 들여서라도 빠르게 구매하고 싶다만.

       

       얼마 지나지 않아 엔리에게서 초대장이 날아들었다.

       

       “어때요? VR캡슐은?”

       “좋구나. 화면이 이동될 때마다 느껴지던 현기증이 사라진 것이 마음에 들어.”

       “그것 말고는요? 반응 속도가 빨라진 거 같지 않아요?”

       “글쎄. 잠시 있어보거라.”

       

       슬며시 손가락을 움직여 보았다.

       

       “조금 빨라지기는 했구나.”

       

       추측하자면 0.01에서 0.02초 정도일까.

       

       “그게 체감이 돼요?”

       “당연하지 않느냐.”

       

       실력 있는 무인들끼리의 싸움에서는 0.01초의 차이가 승패를 가른다. 이 시간을 인지하고 인지하지 못하고는 무척이나 중요한 문제다.

       

       “정말 차이가 있구나.”

       “그대도 후일 실력이 늘면 절로 알게 될 것이야.”

       “그 때까지 몇 번이나 더 굴러야 해요?”

       “으음.”

       

       무어라 확언하기는 어렵다만 적어도 년 단위 아니겠느냐.

       

       내 이런 답변에 엔리는 헛웃음을 흘렸다. 너무 먼 이야기처럼 들렸겠지.

       

       이윽고 방송이 켜지자마자 후원이 날아들어왔다.

       

       – 킁킁이님이 10000원을 후원하셨습니다.

       

       [천마님! 돌아오셨군요!]

       

       “본인은 방금 전에도 이 곳이 있었다만.”

       

       – 캬. 이거지.

       – 이 오만한 어투가 그리웠어.

       – 어눌한 한국어도 좋았지만 역시 화령님은 이거지.

       

       “그렇게까지 느낌이 다르더냐?”

       “많이 다르죠. 저도 맨날 볼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는 걸요.”

       

       적당히 잡담을 나누다 아피스에 접속을 했다.

       

       “그럼 바로 랭크게임을 하러 가실 거에요?”

       “그건 나중에. 지금은 다른 걸 먼저 하고 싶구나.”

       “다른 거요?”

       

       나는 그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대기실의 모습을 사막 한 가운데에 있는 유적지로 바꾸었다.

       

       지난 번 엔리가 그림자 사냥꾼과 싸웠던 장소였다.

       

       사람은 아무도 없고 낡아 빠진 건물들만이 가득한 곳. 화풀이를 하기에는 최적의 장소다.

       

       “여기는 왜 온 거에요?”

       “말했잖느냐. 화풀이를 해야겠다고.”

       

       근처에 있는 건물의 앞에 서서 진각을 밟고 주먹을 내질렀다.

       

       그걸로 충분했다.

       

       건물은 주먹이 닿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권에서 나온 여파를 견디지 못해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잔해와 함께 흙먼지가 비상했다.

       

       “한 이십 분 정도만 기다려 다오.”

       “어. 네. 넵.”

       

       *

       

       엔리는 주먹 한 번이 내질러질 때마다 무너져 가는 도시를 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라와 같이 지내며 놀랄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지만 여전히 아라의 압도적인 무력에는 적응을 할 수가 없었다.

       

       “많이 화나셨나봐요.”

       

       – 화풀이의 규모가 좀 큰데?

       – 여기 건물이 아무리 낡았다고 하지만 원펀은 좀.

       

       – ㅇㅇ님이 1000원을 후원하셨습니다.

       

       [천마님 주인공으로 재난영화 찍을 수 있겠다.]

       

       “그거 주인공이란 말이 화령 씨가 재난이라는 이야기죠?”

       

       – 틀린 말 아닌 듯?

       – 혼자서 도시 하나를 박살내는 데 그게 재난이 아니면 뭐겠어.

       – 렝겜에서 화령님 만나면 저걸 직접 상대해야 한단 거지?

       – 커뮤에서 화령 욕하는 애들 이해 못했는데 지금은 좀 공감이 갈 것 같아.

       

       엔리는 그 채팅을 읽고 공감했다.

       

       커뮤니티에서 화령에게 당했다며 울분을 토하는 이들을 볼 때마다 엔리는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피스에서 강한 사람 만나서 지는 게 그리 특이한 일은 아니잖아.

       

       그렇지만 지금 저 모습을 보니 그들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분명 화령 씨. 렝겜에서도 다른 사람 사정 안 봐줬죠?”

       

       – 유저에 따라서 다르긴 한데. 봐주진 않지.

       – 화령 상대 최단 기록이 1초였을 걸?

       – ㅋㅋㅋㅋㅋ.

       – 1초컷 당한 상대도 어이없겠다.

       

       “욕 할만 했네요.”

       

       – ㅇㅈ

       – 태풍에 점수가 날아갔는데 태풍 욕 좀 할 수 있지.

       – 이 정도면 오히려 욕 안하는 쪽이 보살 아냐

       

       엔리는 새삼 자신을 가르쳐 줄 때 아라가 얼마나 봐준 건지를 깨달았다

       

       진짜 진심의 일부도 내지 않으셨구나.

       

       다음에 아라 씨를 놀릴 일이 생기면 눈치를 잘 봐야겠다.

       

       정말로 화를 내시면 감당이 안 될 것 같아.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Ilham Senjaya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네. 사실 항아리 겜도 피지컬 겜이죠. 못할 리가 없잖아요?

    ——

    VR기기의 딜레이 시간을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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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Heavenly Demon is Broadcasting

The Heavenly Demon is Broadcasting

천마님 방송하신다
Status: Completed Author:
He couldn't pass his habits to others upon his return. The Heavenly Demon remained a martial art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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