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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8

     

    “몇 번을 말하냐. 거기 정맥 아니야. 각도가 틀렸어.”

     

    “히에엑, 히에엑.”

     

    클로에를 간호사로 섭외한 나는 일주일 정도 남는 시간에 그녀를 교육했다.

     

    애가 성실하기도 하고 짬이 있어서 기본기가 좋다. 소심한 성격이 문제였다.

     

    “그러다 바늘 여러 번 찌른다? 안 보이면 팔을 찰싹찰싹 때려버려.”

     

    “제, 제가 어떻게 선생님 팔을 때려요…!”

     

    “나중엔 황녀님 팔도 때려야 하는데?”

     

    “갸아악.”

     

    채혈이 좀 어렵긴 하지. 우선 필요한 기술이라 생각해 가르칠 생각이었는데 미뤄도 되긴 한다.

     

    혈액 분석 도구는 개발 중이라 아직은 나만 할 수 있기도 하고.

     

    혈압 측정 등 기술부터 의학 이론의 기본도 가르치고 있다.

     

    민간요법 지식이 있어서 그런지 과학적인 설명을 생략해도 대충 잘 따라온다.

     

    바이러스의 개념이나 인체 구조 같은 기본적인 생물학만 설명해줘도 아기병아리처럼 즐거워하는 게 웃긴다.

     

    종교에 심취해 머리가 막힌 치유사는 의학을 받아들이기 힘들다.

     

    클로에는 간호사가 되기에 딱 적절한 인재였다.

     

    “실습 정도는 빨리 해치워버려. 네가 할 일이 많아. 약제 재료도 만들어야 해.”

     

    “괘, 괜찮아요. 워, 원래 수면은 다섯 시간이라서….”

     

    “휴일은?”

     

    “어… 한 달에 한 번?”

     

    착취당하던 극한 노동자였다.

     

    하긴 나도 주치의 일을 시작하고는 쉴 틈이 없었다. 적어도 아셀라 체크는 매일 해야 했으니.

     

    성서에 안식일에 대해서는 안 적혀 있었나? 주 5일 근로제 어디 갔어?

     

    “앞으로는 일곱 시간 삼십 분 자. 수면이 부족하면 뇌의 효율이 떨어져.”

     

    “저, 정말요? 그래도 돼요?”

     

    “그래. 렘수면 주기 맞추고. 나중에 설명해 줄게.”

     

    클로에가 써먹을 정도가 되면 짬때리고 나도 좀 쉬어야지. 의료업계는 늘 워라밸이 안 맞는다.

     

    휴가도 좀 다니고. 네리아가 보고 싶다.

     

    “대신 업무는 꼼꼼히 해야 해. 의학서도 작성해야 하니 바빠질 거야.”

     

    “채, 책!”

     

    “그래, 책.”

     

    항상 말로 설명하기도 힘들고 내 의학이 좀 더 많은 대중에 받아들여지기 위해서 의학서적을 만드는 일은 필요하다.

     

    업적을 높이기 위해서도 의미 있는 작업이다.

     

    “그럼 마저 실습 진행해. 후딱 채혈하고 끝내자고.”

     

    “지, 진짜 해요? 바늘? 찔러요?”

     

    “그럼 가짜로 하냐. 자, 팔 똑바로 잡고.”

     

    “히야악.”

     

    비명을 지르면서도 클로에는 눈을 번쩍 뜨고 내 팔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나름 배짱이 있다.

     

    그때 쿵, 내 방문이 열렸다.

     

    “공자, 전달할 사항이….”

     

    호위기사들과 함께 아셀라가 쳐들어왔다.

     

    후작가에서도 내 방에 맘대로 들어와 있더니 여기서도 안방처럼 드나드신다.

     

    월광궁이 아셀라 거긴 하지.

     

    “흐아악, 화, 황녀 전하! 조, 존안을!”

     

    클로에는 아셀라를 목격하자 마멋처럼 곧게 서서 털을 삐쭉 세우고는 그대로 엎어지며 큰절을 했다.

     

    아셀라는 당연하다는 듯 인사를 받아주지 않았다.

     

    대신 방에 들어와서부터 나를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노려보고 있다.

     

    왜 또.

     

    “공자.”

     

    “찾으셨습니까, 황녀님.”

     

    “이건 뭐니.”

     

    클로에를 향해 턱을 까딱이는 아셀라.

     

    “제 수간호사입니다. 앞으로 저를 보조하며 황녀님의 건강을 위해 정진할 겁니다.”

     

    “방금 손잡고 있었잖아.”

     

    “그랬죠?”

     

    “내가 들어오니 화들짝 놀라며 떨어졌고.”

     

    “심약한 친구지만 실력은 괜찮습니다. 교육은 확실히 시켜놓겠습니다.”

     

    “그게 변명의 전부야?”

     

    “무슨 변명이요?”

     

    “네가 비무대회 이후로 뭔가 착각하고 있구나. 기만이 하늘을 찌르고 있어.”

     

    아셀라의 싸늘한 목소리가 고막을 뚫는다.

     

     

    [No. 077 : 질투의 화신 14% → 86%]

     

     

    아, 내가 또 뭔가 잘못했군.

     

    며칠 전까지 헤이케의 파벌이었던 치유사를 월광궁에 허락도 없이 들인 게 배신이라고 여겼나.

     

    채혈 장비같이 중요한 도구는 내의원까지 가져가지 않기에 여기로 불렀건만 판단이 안 좋았다.

     

    “황녀 전하, 외람되오나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여태 묵묵히 배경처럼 자리를 지키던 타냐가 갑옷을 절그럭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아셀라가 타냐를 흘겨본다.

     

    “타냐 공, 말해.”

     

    공?

     

    지금 아셀라가 타냐에게 존중의 의미를 담아 불러줬다.

     

    왜 나한테는 선생님이라고 안 해?

     

    “선생님께서는 황녀님을 보필하기 위해 새로 섭외한 간호사님을 교육하고 계셨습니다. 목격하신 장면은 채혈 교육을 위해 필연적으로 발생한 부분이며 다른 의도는 없었습니다.”

     

    “흐응.”

     

    타냐의 말을 들은 아셀라가 나를 못마땅하게 내려다보았다.

     

    “타냐 공, 공자의 가문을 섬긴 지는 얼마나 됐어?”

     

    “칠 년입니다.”

     

    “나중에 내 게식 시간에 찾아와.”

     

    “예.”

     

    순식간에 이야기가 진행됐다.

     

    “황녀님, 타냐 단장은 제 호위기사입니다. 그녀가 없으면 제 신변에 문제가…”

     

    아셀라가 나를 다시 매섭게 쏘아봐서 입을 다물었다.

     

     

    [No. 077 : 질투의 화신 86% → 22%]

     

     

    일단 다시 확률이 감소하고 있으니 조용히 하기로 했다.

     

    아니, 원래대로는 안 돌아갔네. 미미하게 상승해버렸다.

     

    “공자.”

     

    “예.”

     

    “앞으로 교육은 장갑 끼고 해.”

     

    “위생은 중요하지요. 훌륭하신 생각입니다.”

     

    아셀라는 내게서 홱 몸을 틀어 등을 보였다. 치맛자락 레이스가 살랑거린다.

     

    “루시, 소식은 대신 전달해줘.”

     

    “알겠습니다, 황녀님.”

     

    그럴 거면 처음부터 시녀장 누님 시켜서 전하든가.

     

    괜히 내 방을 폭풍으로 뒤집어 놓고 간 황녀님이었다.

     

    나는 아셀라가 방을 나가고서야 긴장을 풀 수 있었다.

     

    “방해나 하고 말이야. 타냐, 너무하다고 생각 안 드냐.”

     

    “지금은 도련님이 잘못하셨죠.”

     

    “내가? 그리고 왜 또 도련님이래?”

     

    “글쎄요. 저는 황녀님과 차 마실 준비나 해야겠습니다.”

     

    “좋다고 쫄레쫄레 가버리냐. 야, 그거 직무유기야?”

     

    “황녀님이 더 상급자시니 명령을 우선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디서 넘어지지 말고 월광궁에 얌전히 계세요.”

     

    뻔뻔함이 오버플로우해서 오히려 친절해 보이는 타냐의 태도였다.

     

    “나 원. 클로에, 너는 이상한 거 배우지 마라. 알았….”

     

    “아가가각, 가가각.”

     

    클로에는 아셀라의 압을 버티지 못했는지 바닥에 엎어진 채 몸을 꿈틀대고 있었다.

     

    “클로에, 자빠져 있을 시간 없어. 황녀님 덕에 실습은 여기까지니 돌아가서 배양 실험이나 계속해.”

     

    “어읍, 네엣.”

     

    “과정엔 문제없어? 슬슬 재료가 필요해.”

     

    클로에가 비틀거리며 일어나 호다닥 서류철을 가져왔다.

     

    “푸른곰팡이 배양이요. 이렇게 진행되고 있는데요오.”

     

    동글동글한 글씨로 상세하게 적어놨다.

    일일이 그림으로도 스케치해놔서 알아보기 편했다.

     

    클로에에게는 황궁 주방에서 폐기처분 할 빵과 치즈 따위를 얻어다 푸른곰팡이를 잔뜩 배양해 놓으라고 시켜놨다.

     

    “항생제? 라는 약제의 재료라고 하셨죠.”

     

    “그래. 아스피린은 전염병의 증상을 호전시키는 약이야. 재감염을 막으려면 항생제도 필요해.”

     

    클로에가 배양한 푸른곰팡이가 충분한 품질이 되면 페니실린을 제작하려 한다.

     

    지금 유행하는 전염병은 감기 계통의 바이러스성 병이다.

     

    보통 완치될 때 즈음 환자의 면역력이 약해져 세균성 감염도 함께 발생하게 된다.

     

    해당 증상이 보이는 기사에게는 항생제를 처방할 생각이다.

     

    클로에가 쭈뼛거리며 내게 부탁했다.

     

    “서, 선생님께서 제약하시는 모습도 보고 싶은데요….”

     

    “어차피 앞으로 지겹게 볼 텐데 뭐.”

     

    “그, 그래도.”

     

    클로에가 침을 흘리며 눈을 반짝였다.

     

    이 정도 경과면 쓸만한 샘플도 슬슬 나올 때가 됐지.

     

    “테스트하러 가볼까.”

     

    나는 클로에와 내의원으로 향했다.

     

     

     

    ***

     

     

     

    각진 원목 가구가 정갈하게 늘어선 집무실.

     

    헤이케 폰 뷔르템펠트, 제국의 1황녀는 비무대회 간 쌓였던 업무를 처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흠, 병영의 가용률이 많이 떨어졌군. 잉여 예산 장부를 가져와라.”

     

    “예.”

     

    카리스마 넘치는 태도로 깃펜을 놀리는 모습에는 빈틈이 없다.

     

    남자라는 이유로 암묵적으로 차기 황제로 내정된 권터 1황자는 심약하다.

     

    게오르크 2황자는 야욕이 넘치지만 매사에 과한 의욕이 그릇된 행동을 부른다.

     

    승계에서 한 발짝 떨어진 라우가나 아셀라는 고려 대상이 아니다.

     

    황가에서 실질적으로 차기 황제에 가장 어울리는 인물을 꼽으라면 많은 이들이 헤이케를 선택할 것이었다.

     

    성인이 되기 전부터 기사단을 이끌어 야만족을 토벌한 경험도 있는 여장부이며, 지금도 사건이 생기면 위험한 전장에도 마다않고 출정한다.

     

    그녀의 능력에 반한 많은 이들이 점점 몰려들어, 헤이케의 파벌은 황가에서 게오르크와 양강 체제를 이루고 있었다.

     

    “훈련이 전부 취소되었군. 아무리 비무대회 전후라도 지나치지 않는가.”

     

    비서가 보고서를 제시하며 대답했다.

     

    “전염병 때문입니다. 특히 비무대회 이후 기사들의 장기 부상률이 6할 이상 상승했습니다.”

     

    “전염병.”

     

    그런 헤이케라도 모든 문제를 아무렇지도 않게 해결할 수는 없었다.

     

    황궁까지 퍼진 전염병은 벌써 두 달째 골칫거리였다. 내의원을 예약하는 제국민도 훨씬 늘었다.

     

    “비무대회에서 기사들의 강행이 이어졌지.”

     

    “그렇습니다. 기밀 자료를 보시면 현재 황실 기사단의 전투력 하락치가 상당하다고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적국이 침입하기라도 하면 위기겠군.”

     

    제국에 병력은 많다.

     

    국경을 지키는 제국 기사단, 제도를 순회하는 제도 기사단. 황실에는 그 중에도 엘리트 기사들만이 모였다.

     

    몇 중이나 방벽이 있는 이상 실제로 적국이 들어올 틈새는 없겠지만 헤이케는 방심하지 않는 타입이었다.

     

    “겨우 꽃놀이에 얼마를 쓰는 건지. 심지어 마물의 습격까지 있지 않았나.”

     

    “흑마술사의 짓이었지요.”

     

    “짐이라면 흑마술사들이 사룡을 소환하기 전에 먼저 목을 땄을 거다.”

     

    헤이케가 이어서 전염병 관련 서류를 읽어나갔다.

     

    “이 내용은 뭔가? 병영 훈련시설을 월광궁이 쓰고 있다니?”

     

    “그건….”

     

    내용을 들은 헤이케가 상념에 빠졌다.

     

    “월광궁의 기사는 모두 멀쩡했지. 내의원 치유사가 배정될 리가 없었을 텐데. 지금도 새로 병에 걸리는 기사가 한 명도 없군.”

     

    헤이케가 비서를 돌아보며 물었다.

     

    “원인이 뭔가?”

     

    “소문입니다만.”

     

    비서가 대답한다.

     

    “전염병에 다시 걸리지 않는 약제를 개발해서 월광궁 기사단에게 사용한다 합니다.”

     

    “들은 적 있다. 아스피린 말인가?”

     

    “아스피린과 다른 새로운 약제라더군요. 페니실린이라고 했습니다.”

     

    “페니실린.”

     

    헤이케는 생소한 이름을 곱씹었다.

     

    “소문을 들은 친왕 파벌 등이 약제를 얻고자 찾아갔으나 문전박대당했답니다.”

     

    “그런 기술은 독점할 만하지. 아셀라가 유능한 주치의를 들였군.”

     

    “그게….”

     

    “뭔가?”

     

    헤이케가 조심스레 말을 꺼내는 비서를 독촉했다.

     

    “이번에 페니실린을 개발한 치유사는 3황녀님의 주치의가 아닙니다.”

     

    “그러면 누군가?”

     

    “어느 말단 치유사입니다만, 지금은 고트베르크 주치의의 수제자로….”

     

    “지금은? 그럼 그 전에는?”

     

    “…저희 파벌 소속이었습니다.”

     

    헤이케의 얼굴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왜 그쪽으로 넘어갔지?”

     

    “들은 바에 의하면, 주교께서 해고하신걸 고트베르크가 즉시 재고용했다고….”

     

    비서는 마치 목에 칼이 들어온 감각에 말을 멈추고 침을 꿀꺽 삼켰다.

     

    헤이케가 낮은 목소리로 명령했다.

     

    “알베리치 주교를 불러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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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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