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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8

       상자를 열자 그곳에는 유니콘의 뿔로 만든 단검이 있었다.

       

       곧게 뻗은 순백의 검신. 그 위로는 금색 선이 수놓아져 기하학적인 문양을 그리고 있었다. 일종의 마법진인가.

       

       그다음은 가드. 이쪽도 검신과 마찬가지로 순백색이었지만, 그리 화려하지는 않았다. 장식이라고는 중심에 박힌 투명한 구슬이 전부.

       

       마지막으로 손잡이. 검은 가죽으로 감아둔 손잡이는 꽤 색이 진하고 고급스러웠다. 평범한 동물이 아닌 희귀한 몬스터의 가죽이 아닐까?

       

       소매치기의 눈으로 봤을 때, 이건 훔치면 분명 나중에 문제가 될 정도로 귀한 무기다.

       

       3성 재료로 만들었다는 말이 아쉽지 않을 정도. …다만, 뭐랄까.

       

       “좀 죽어있는 것 같은데요?”

       

       유니콘의 뿔일 때는 진작에 잘려 나온 신체 부위면서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무언가가 있었다.

       

       아마 그 모종의 힘이 접촉하는 이들의 처녀, 동정 여부를 판단하는 거겠지.

       

       그 느낌적인 느낌이 단검이 된 지금은 하나도 전해지질 않는다.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리자, 이브가 놀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세상에. 그걸 느끼실 줄은 몰랐네요. 요나 씨 말대로 지금 이 단검은 잠들어 있는 상태랍니다. 깨우기 위해서는 따로 거쳐야 할 절차가 있어요.”

       

       “역시 그랬군요. 뭘 하면 되나요?”

       

       “피.”

       

       “예?”

       

       “힘을 원하시나요? 그럼 피를 바치세요. 순결한 이의 피를 말이죠.”

       

       무고한 이를 제물로 바쳐 마검을 각성시켜라(X)

       

       피 한 방울을 떨어뜨려 주인 각인을 해라(O)

       

       “…….”

       

       이런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힘을 원하는가 같은 소리를 들었더니 깜짝 놀라 다시 뇌내 번역기를 돌려버렸네.

       

       그래. 그렇겠지. 피 한 방울로 주인 각인을 마치며, 새겨진 마법을 활성화하는 설정은 여기저기서 많이 보지 않던가.

       

       나도 자주 쓰던 거라 잘 안다. 이것도 그런 부류의 마법이 걸려있는 거겠지.

       

       헛웃음을 지으며 품에서 기존의 단검을 꺼냈다. 잘 관리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유니콘 단검 앞에서는 조금 허접해 보이는 무기.

       

       뭐, 얘는 나중에 중고로 팔아야지. 마지막 일이 주인의 손가락을 베는 일이라니 참 몬가몬가다.

       

       쓴웃음을 지으며 날 부분으로 검지 끝부분을 살짝 베었다.

       

       핏!

       

       차가운 칼날이 속살을 헤집는 감각. …생각보다 깊게 베었나?

       

       칼날의 차가움을 뒤덮듯 뜨거운 고통이 손끝에서 피어오른다. 그와 동시에 후두둑 떨어지는 핏방울.

       

       눈물이 찔끔 날 것 같았지만, 내가 베어놓고 내가 잉잉대는 것만큼은 피해야 한다.

       

       그건…아무리 남역세계라지만 너무 쪽팔리잖는가.

       

       하여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척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자니, 되려 놀란 것은 이브와 레몬 애플 듀오였다.

       

       “요, 요나 씨?! 그렇게 깊게 상처 낼 필요는 없어요!”

       

       “붕대! 붕대를 가져오는 검다!”

       “어제 결박 놀이 하다가 다 썼잖슴까! 포션부터 찾는검다!

       

       “에이 괜찮아요. 겨우 손가락에 난 상처인데 이게 무슨 대수라고. …근데 결박 놀이는 대체 뭐죠?”

       

       뭐야 그 불순한 이름의 놀이는. 너무 신경 쓰이잖아!

       

       마음 같아서는 차분하게 앉혀두고 대체 그게 뭐하는 놀이인지 하나하나 캐묻고 싶었으나, 지금은 우선 해야 할 일이 있다.

       

       “그나저나 피는 충분히 떨어뜨린 것 같은데, 왜 아무런 반응도 없나요 이브 씨?”

       

       척 봐도 피 떨어뜨려주세요 하는 가드의 구슬은 물론, 검신과 손잡이까지 뿌려댔는데 아무런 반응도 없을 줄이야.

       

       …설마 내가 잠든 사이에 면간이라도 당한 건가?

       

       만약 그렇다면 엘리를 찾아가 책임지게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하는 것도 잠시.

       

       이브가 안절부절못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냥 뿌리는 게 아니라 한번 잡아야 해요!”

       

       “아하?”

       

       곧장 단검을 쥐고 들어 올렸다. 그와 동시에 검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새하얀 빛. 어찌나 그 광량이 막대한지 순간 눈이 떠지지 않을 정도였다.

       

       한참을 눈을 감고 있다 조심스레 떠보자, 그곳에는 언제 피범벅이 되었냐는 듯 말끔한 백색을 자랑하는 단검이 있었다.

       

       “…피를 먹었어? 마검인가?”

       

       우웅!

       

       내 마검 발언에 항의하듯 잘게 진동하는 단검.

       

       자세히 보니 양쪽으로 세운 날은 한층 예리해져 있었으며, 검신에 그려진 금색 문양은 박동하듯 일정 주기로 빛나고 있었다.

       

       가드의 구슬에는 백색과 분홍색이 어우러진 기운이 뒤섞여 일렁였고, 손잡이는 내가 잡는다기보다 손잡이 쪽에서 착 달라붙는 감각이 들었다.

       

       말 그대로 검이 살아있는 느낌.

       

       무사히 각인이 끝난 걸 확인한 이브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사히 끝났네요. 아마 지금쯤 상처도 회복되셨을 텐데 한번 확인해 보시겠나요?”

       

       “네? 아, 그러고 보니 아프지 않네요?”

       

       손가락을 펴보자 이제는 완전히 아물어, 베였다는 흔적만 남아 있었다. 그나마도 눈에 보일 정도로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고.

       

       “후후. 어떤가요? 새로운 힘은…마음에 드시나요?”

       

       제물을 바쳤으니 합당한 힘을 내리마(X)

       

       나 이거 만드느라 많이 힘들어써 감상평 조!(O)

       

       “당연히 좋죠! 치유 능력을 마다할 사람이 얼마나 있겠어요. 다른 능력도 있는 거죠? 알려주실 수 있나요?”

       

       눈을 크게 뜨고 활짝 웃으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이브 입장에선 밑에서부터 훅 치고 들어오는 것처럼 느껴지도록.

       

       일종의 서비스다. 아직 어떤 기능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단검에서 느껴지는 힘이 보통은 아닌 것 같거든.

       

       이건 재료만 좋아서 가능한 일은 절대 아니다. 뛰어난 대장장이와 마법사가 함께 힘을 합쳐야 가능한 일이지. 

       

       아무리 오랜 세월을 살며 쌓은 인맥이 풍부한 이브라도 자주 오겠다는 약속 하나만 믿고 공짜로 해주기엔 부담스러울 정도다.

       

       그러니 이런 거라도 해줘야지.

       

       순간 자신의 가슴을 부여잡으며 비틀거린 이브였으나, 빠르게 제정신을 회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해드려야죠. 우선 조금 전에 보셨듯이 상시 치유 능력이 있습니다. 기본적으로는 착용자에게만 적용되는 힘이지만, 검신에 접촉한 채 요나 씨가 원한다면 다른 사람도 치유할 수 있어요. 약간의 제약이 있지만요.”

       

       “대단하네요! 근데 제약이라면 대체…?”

       

       “치료받는 대상이 순결한 몸이어야 합니다.”

       

       “?”

       

       “혹은 지고지순한 순애를 거쳐 아이를 둘 이상 낳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이어야 한다는데…솔직히 이 부분은 저도 잘 모르겠네요. 유니콘은 예전부터 워낙 알 수 없는 생물…아니, 멸종한 지 오래되어 남은 사료가 얼마 없으니까요.”

       

       은근슬쩍 나이 많은 티를 내던 이브가 황급히 말을 바꾸었다.

       

       옛날 옛적 유니콘이 금태양을 찔러 죽이던 시절을 살아가던 사람다운 순발력.

       

       이를 적당히 못 들은 척하고 급하게 꺼낸 포션을 매대에 다시 돌려놓는 레몬과 애플에게 손짓했다.

       

       까딱까딱.

       

       “시, 싫슴다!”

       “생체실험 반대임다!”

       

       “어차피 제가 쫓아가면 금방 잡힐 거면서…아, 그래도 지금 오면 단검 말고 이빨로 깨물어서 상처 내드릴게요. 이거라면 실수로 깊게 벨 일은 없겠죠?”

       

       “…지금 감다!”

       “레몬! 새치기는 안 됨다!”

       

       “선착순 아니니까 천천히 오세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리 말하자, 말은 잘 듣는 레몬과 애플이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내 앞에 줄을 섰다.

       

       실험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욕망에 솔직한 레몬과 애플이 진작에 치유된 상처 부위를 입으로 쪽쪽 빠는 모습에 피식 웃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내 원래 자리가 아닌 이브의 옆자리에.

        

       “…….”

       

       어쩐지 평소보다 무서운 분위기로 레몬과 애플을 노려보는 이브. 그런 그녀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툭툭 치며 물었다.

       

       “그다음은 무슨 효과가 있나요?”

       

       “예? 으, 에?!”

       

       아무래도 내가 바로 옆에 앉아있는 줄은 몰랐던 걸까. 이브가 짧게 몸을 경련시킬 정도로 화들짝 놀랐다.

       

       생선 같아서 조금 재밌네….

       

       “제 말. 듣고 있나요? 그다음은 무슨 효과가 있냐구 물었어요 이브 씨.”

       

       “예, 예에. 물론이죠. 유니콘의 뿔이 지닌 기본적인 기능은 전부 들어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개쩌는 물건을 만들었다(X)

       

       가까워. 작아. 좋은 냄새 나.(O)

       

       “경험 여부 판별 능력이요?”

       

       “…그게 가장 유명하긴 하지만, 다른 능력도 많답니다. 예를 들면 온갖 부정적인 효과로부터 사용자를 지켜준다거나, 더러운 것을 정화해 준다거나, 운을 높여준다거나 하는 것들 말이죠.”

       

       “운…!”

       

       상태이상 내성이나, 자동 청소기 기능도 좋긴 하지만, 가챠 능력이 있는 내겐 운이 가장 중요하다.

       

       “저번에 가져가신 럭키 스트라이크도 그렇고, 요나 씨는 운을 참 중요하게 여기시네요.”

       

       “그거야 당연하죠. 도박판에서 가장 중요한 건 운이잖아요?”

       

       “…….”

       

       말없이 이쪽을 바라보는 이브를 향해 씨익 웃어보였다.

       

       “미궁에서 과거의 보물이나, 죽은 신의 성물이라도 발견하면 떼돈 벌 수 있잖아요! 전 돈이 좋아요!”

       

       “…아. 그런 의미의 도박이군요. 하긴. 모험가 생활은 그 자체로 목숨을 건 도박이긴 하죠.”

       

       위험한 일을 하는 만큼 운을 많이 신경쓰는구나(X)

       

       까비. 도박 중독자였으면 일족의 힘을 빌려서라도 나 없으면 안 되는 몸으로 만들었을 텐데(O)

       

       ???

       

       나한테 엘프들이 그간 모은 돈을 퍼주면서 놀고먹는 밥벌레 기둥서방으로 만들겠다고?

       

       이 무슨 끔찍한 생각이니 이브이브야….

       

       나도 모르게 당장 하자는 말이 튀어나올 뻔했지만,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은 덕에 가까스로 참을 수 있었다.

       

       “…기본적인 능력이라고 말하신 걸 보면 유니콘의 뿔에는 없는 능력도 있다는 거죠?”

       

       “눈치가 빠르시네요. 무기인 만큼 편의성을 위한 자동 수복 마법, 자동 회수 마법, 보안 마법이 걸려있지만…사실 이것도 비싼 무기라면 기본적으로 달고 있는 것이니 진짜는 이다음이죠.”

       

       “오오…그게 뭔가요?”

       

       “성적으로 문란한 사람, 혹은 사악한 것을 상대할 때 치명적인 일격을 날릴 수 있게 돼요.”

       

       “뭣!”

       

       비처녀 슬레이어…라고?

       

       뒤에 사악한 것도 해당된다는 말도 들리긴 했지만, 이는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깨가 닿을 정도로 이브의 옆에 몸을 바짝 붙이고는 기다란 귀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이어지는 작은 속삭임.

       

       “만약 제가 동정이 아니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거죠…?”

       

       “…그때는 단검이 검게 물들며 2개로 갈라질 거예요. 바이콘의 단검이라고 해야 하려나요?”

       

       사용자를 다치게 하는 일은 없으니 안심해라(X)

       

       이거 기대해도 되는 각인가?(O)

       

       “…….”

       

       뇌내 번역기가 고장 났나 보네.

       

       아무튼 그런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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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cha Addict in a Matriarchal World

Gacha Addict in a Matriarchal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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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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