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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80

       *** ***

         

       흑사의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한 서공은 휘청거리며 쓰러졌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급속도로 줄어든 서공의 크기는 처음 만났을 때의 절반 정도, 5척까지 줄어들었다.

         

       “서공!”

         

       혁기린이 후다닥 달려갔고 나머지 일행들은 무기를 곧추세우며 혈존을 견제했다.

         

       찌익.

         

       그래도 울음을 토할 기력은 있었는지 뒤에서 서공의 답이 들려왔다. 흑사에게 물린 옆구리의 상처가 심상치 않아 신경쓰였으나 서공은 혁기린에게 맡기고 전면을 응시했다.

         

       언제 혈존이 공격해 들어올지 모를 일이니까.

         

       혈존은 공격 대신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나와 서공을 번갈아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그 사이에 뒤에 있는 혁기린에게서 안도의 한숨소리가 흘러나왔다.

         

       “후우, 다행히 당장 생명의 지장은 없는 듯 합니다.”

         

       혁기린이 조심스럽게 서공을 들어 바위 뒤에 숨겼다.

         

       “이해할 수 없군…”

         

       “무엇이 말이오?”

         

       혈존은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혈술에 대해서는 조금도 모르는 네가 어떻게 철혈서에게 걸린 대법을 풀었지?”

         

       “내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소.”

         

       나는 솔직하게 답했다.

         

       뭐라도 알고 있는 척을 하는 편이 혈존을 더 혼란스럽게 할 수 있는 방편이겠지만.

         

       “그러니 이곳에 뛰어든 것은 서공의 의지겠지.”

         

       나와 일행들을 구하기 위해 이 구덩이에 뛰어든 서공의 의지를 곡해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의지라…크크크.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로군.”

         

       혈존은 무엇이 그리 기가 막힌지 웃음을 토해냈다.

         

       “너와 얽히면 무엇 하나 제대로 돌아가는 일이 없구나. 천마신교를 움직이질 않나. 제 피를 뽑아가도 가만히 있던 녀석이 천적인 영물에게 덤벼들질 않나.”

         

       그리 말하는 혈존의 팔다리에서 피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이제는 확실히 알았다. 결국에는 너를 없애지 않으면 끝나지 않을 일이라는 걸.”

         

       “결판을 냅시다.”

         

       서공을 안전한 곳으로 옮긴 혁기린이 재빨리 합류하며 다시 육성진을 발동시켰다.

         

       육성진으로 현경 고수를 상대할 수 있을까.

         

       육성진이 분명 민첩하기는 하나 그렇다고 한들 현경 고수와 치고받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화경이면 몰라도 초절정인 여일예, 독고이설, 모용연화, 흑묘는 현경 고수가 펼치는 공격 한방에 치명상을 입을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혈존을 온전한 현경 고수로 보기에는 어렵다.

         

       일단 기본적으로 혈술을 통해 의수와 의족을 사용하니 당연히 일반적인 현경보다 전투력이 낮을 수밖에 없겠지.

         

       방금 전만 해도 흑사와 서공이 싸우는 위험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흑사의 머리에 남아 있으려고 했던 점을 생각해 보면 의수와 의족이 주는 제약은 내 생각보다 더 심할지 모르겠다.

         

       뭐 내 예상이 틀렸더라도 상관없다.

         

       지금 이 자리에서 혈존을 쓰러트리고 결착을 짓는다.

         

       그런 생각이 내 마음속에 굳게 자리잡았으니까.

         

       서공이 이렇게까지 제 몸을 던졌는데 혈존을 쓰러트리지 못한다면 무슨 낯짝으로 서공을 볼까.

         

       “갑시다.”

         

       진형은 기본형. 선두는 나와 혁기린.

         

       다리에 혈탄을 맞았기 때문에 혈존과 거리를 좁히는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았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혈존이 혈탄을 날리지 않았으니까.

         

       혈존의 의수와 의족에 휘감긴 피의 양은 육안으로 보기에도 얼마 남지 않았다.

         

       아마 돌풍에 갑자기 모습이 드러난 나를 잡기 위해 아낌없이 혈탄을 뿌린 탓이겠지.

         

       “하압!”

         

       선공은 혁기린이었다.

         

       언제나와 같이 빠르고 예리한 일수초현이 혈존을 노린다. 그런 일수초현을 막아낸 것은 혈존의 손이었다.

         

       의수 쪽이 아니라 강기가 입혀진 멀쩡한 손이었다.

         

       까앙!

         

       혁기린은 무리하지 않으며 몸을 뺐고 그에 교차하듯이 내가 달려들었다. 펼치는 무공은 경운무심공이 아니라 일휘청운검.

         

       잔월혈경을 펼치며 혈존의 전신을 공격해 들어갔다.

         

       카각!!

         

       하지만 내 잔월혈경은 손쉽게 혈존에게 제압당했다. 뭐 일류 무공에 불과한 일휘청운검으로 혈존에게 제대로 된 타격을 줄 수는 없었겠지.

         

       공격은 허무할 정도로 쉽게 막혔으나 성과는 거두었다.

         

       역시 의수와 의족은 혈존의 약점이었던 모양이다.

         

       정확히는 의족이 혈존의 약점이라 할 수 있겠지.

         

       혈존의 입장에서는 조잡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잔월혈경의 공격조차도 차단하려 들었으니까.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그냥 공격할 때만 움직이면 되는 의수와 달리 의족은 신체의 중심을 유지하기 위해 계속해서 힘이 분배되어야 하니까.

         

       피나는 노력 끝에 재기에 성공한 외팔이 무림인에 대한 이야기는 들어보았지만 재기에 성공한 외족 무인에 대한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만큼 무림인에게는 발이 중요하다.

         

       특히 우리들에게 포위당하지 않게 계속해서 몸을 움직여야 하는 상황에서 의족의 중요성은 더욱더 부각될 수밖에.

         

       나와 혁기린이 주공이 되고 나머지 사람들이 부공이 되어 혈존을 몰아붙였다.

         

       혈존은 계속해 물러나며 나와 혁기린의 공격을 받아내며 간간이 주변을 포위하려는 일행들을 노렸다.

         

       스스스스!!

         

       그런 균형을 무너뜨린 것은 바로 흑묘의 구음기였다.

         

       “…큭.”

         

       구음기의 냉기에 혈존의 피에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의족을 움직이는 원동력인 피가 구음기의 영향권에 오래 노출되니 의족과 의수에서 흐르는 혈류의 움직임이 둔해진 것이다.

         

       덩달아 의수와 의족의 반응 역시 느려졌으니 우리들은 그 틈새를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이놈들!”

         

       혈존 역시 위기감을 느꼈던 것일까.

         

       전투를 벌인 이래 한번도 쓰지 않았던 혈탄이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윽!”

         

       “크윽..!”

         

       일행들이 각기 혈탄을 피하고 막아내는 사이 혈존은 뒤로 훌쩍 물러섰다. 기습적인 혈탄을 받아내는 과정에서 속이 진탕되었는지 모용연화와 여일예의 안색이 좋지 않았지만 다행히 내상까지는 이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구음기를 통해 간신히 잡은 우위를 이어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나는 조급한 마음을 억누르며 차분히 숨을 골랐다.

         

       혈존이 궁지에 몰렸다고는 하나 우리 역시 지치고 상처입기는 마찬가지였으니까.

         

       독고이설의 도신에는 금이 가 있었다. 초절정의 강기로 현경의 강기를 받아쳤으니 무기가 견디질 못한 것이다.

         

       흑묘의 안색도 딱히 좋지는 않았다.

         

       혈존과의 전투에서 특별한 타격을 입지는 않았지만, 빙성의 형을 사용하며 흑사의 공격을 받으며 쌓여 왔던 피로와 충격이 올라왔을지 모른다.

         

       나 역시 다리에 부상을 입었으니 멀쩡한 것은 혁기린 한 사람뿐인가.

         

       혈존 역시 상황이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의수가 축 늘어졌으니까.

         

       아마 혈탄을 쏘아내는 과정에서 의수를 사용하기 위한 최소한의 피까지 소모해버린 모양이었다.

         

       이번 숨고르기가 끝나고 다시 한번 충돌한다면 어느 한쪽은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겠지.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소.”

         

       그렇기에 나는 입을 열었다.

         

       “나를 ‘호천안’으로 만들려 했던 것은 백번 양보해 이해할 수 있었소. 그런데 왜 어머니와 아버지를 살해하고 조부님까지 해친 것이오?”

         

       그 말에 혈존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내가 이런 질문을 했다는 사실 자체에 놀란 표정이었다.

         

       “인여와 천철중이 너에게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은 모양이로군.”

         

       서인여. 그리고 천철중.

         

       그게 어머니와 아버지의 성함일까.

         

       혹여나 나에게 해가 될까 본인들의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았던 부모님의 성함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그런 감상에 빠진 사이 혈존은 입을 열었다.

         

       “문파의 기둥이자 핵심은 무엇인가? 바로 무공이다. 무공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무림인들은 무슨 일을 저지르는가? 단전을 파괴하고 사지 근맥을 끊는 것이 자비로운 처사로 여겨지며 목숨을 예사로 거두지.”

         

       “그렇다면 묻겠다. 혈교의 기둥이자 핵심은 무엇인가? 바로 피다. 교에서 도망쳐 아이를 낳고 기른 인여는 일반 문파에 비유하자면 문외불출의 비급을 들고 도망친 자였으며 그런 인여와 혼인한 천절중과 그의 아비인 천송백은 혈교의 철천지원수라 할 수 있었지.”

         

       혈존은 나에게 질문하듯이 말했다.

         

       “그런 이들에게 내릴 수 있는 처벌이었을 뿐이다.”

         

       어째 나를 설득하려는 말투였다.

         

       이제와서 사연이 있었다는 변명이라도 하려는 것일까.

         

       “그대는 나를 도구로 만들려 하지 않았소.”

         

       “크크크…그때는 그랬지. 허나 네가 정상적으로 혈교에서 자라났다면 굳이 그런 일을 벌일 필요조차 없었을 것이다. 정상적으로 자라날 혈교의 후계자에게 내가 왜 수작을 부릴까.”

         

       “그래서 모두 부모님의 탓이란 말이오? 바른대로 말하시오. 부모님이 그대의 품에서 도망친 이유가 있었을 게 아니오!”

         

       “네가 자라나 혈교의 수장이 된다면 너 때문에 무림에 피바람이 일어난다고 생각했겠지. 흐흐. 실제로도 그러했을 것이다. 어디 깨달음에 목을 매는 무인이 한둘이더냐? 그들을 앞세워 무림을 정복할 수 있었겠지.”

         

       혈존은 눈을 번뜩이며 말을 이어나갔다.

         

       “너에게 있어서도 나쁜 미래는 아니었을 것이다. 권세와 영화를 누리는 것은 물론이고 장삼봉이나 천마와 같이 이 무림에서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명성을 떨칠 수 있었을 것이다.”

         

       불멸의 명성이라.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혹할 만한 그럴싸한 말이었지만 혈존의 말은 들은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제야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왜 혈교를 탈출하여 날 숨기셨는지 알겠소.”

         

       “….뭐라고?”

         

       “혈교에 남아있었다면 나는 물론이고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조부님까지 당신의 도구가 되었을 테니까.”

         

       혈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제는 혈존의 생각을 어느 정도 알 것 같았다. 혈존은 지금 내가 한 말을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하겠지.

         

       “혈존, 그대의 말에서는 혈육의 정이라고는 조금도 느낄 수가 없구려. 그저 달콤한 결과물만을 그럴싸하게 내뱉을 뿐.”

         

       “무슨 소리를…”

         

       “가족을 가족으로서 소중히 대하지 않는다면 그 누가 가족에게 의지할 수 있겠소? 어머니 또한 마찬가지였을 것이오. 내가 혈존, 당신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면? 그때도 그대는 나에게 금제를 걸지 않았을 것이라 말할 수 있소?”

         

       “너는 그만한 능력이 있었다.”

         

       “만약 없었다면? 내가 몇 살 때까지 혈교에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기억에 없는 것을 보니 그 기한을 최대로 잡아도 어린 영아 시절에는 혈교를 벗어났을 터. 고작해야 어린 영아의 가능성을 누가 장담할 수 있단 말이오? 그래, 내가 십 오 세이던 시절 내 몸을 들여다본 그대는 내가 이 나이에 화경의 경지를 개척할 것이라 예상했소?”

         

       당연히 아니었겠지. 내가 가치를 상실했다 여겨 나를 신경쓰지 않았을 테니까.

         

       혈존은 침묵했다. 방금전에 피를 무공에 비유하며 무림문파들이 얼마나 비정하고 철저하게 무공을 관리하는지를 설파했으니 반박할 말이 없었겠지.

         

       “차라리 부모님과 조부님을 해한 일이 혈교의 규율에 따라 어쩔 수 없었다고 괴로워하는 기색이라도 보였다면 내 마음이 흔들렸을지 모르지. 그런데 그대는 내가 얻었어야 할 부귀영화만을 말하는구려.”

         

       나는 검을 들어올렸다.

         

       “강서에서 수장당할 뻔했을 때, 혈존 그대를 만났을 때 나는 확실히 느꼈소. 당신이 나를 외손주로 여기고 있지 않음을. 그 느낌에 이리 쐐기를 박아주니 망설임의 찌꺼기조차 사라지는구려.”

         

       “흐흐. 내가 비정하다 비난하는 게냐? 흐흐흐! 너 역시 혈교의 수장이 되었다면, 혈교에서 나고 자랐다면 나를 이해했을 것이다.”

         

       혈교에서 나고 자랐다면 당신을 이해했을 거라고?

         

       어림도 없는 소리.

         

       혈교의 규율이 그렇다 한들, 정말로 혈교에서 혈육을 위하는 이가 없을까.

         

       나의 어머니가 그 반증이었다.

         

       어머니는 나를 위해 혈교를 떠난다는 큰 선택을 하셨으니까.

         

       그저 혈존이 그러한 사람이고 직책과 규율을 핑계삼을 뿐이었다.

         

       나는 그 사실을 명확히 깨달았다.

         

       그러자 마음 역시 깨끗하게 정리되었다.

         

       혈존과 부모님 그리고 조부님 사이에 내가 모르는 사연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지금까지 혈존과 충돌해 왔지만 그저 상황이 꼬여 예단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혈존과 마주한 이래 마음을 독하게 먹었지만 그래도 쌓여 있을 수밖에 없던 망설임이 날아갔다.

         

       “각오하시오. 그대는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조부님을 해한 원수이니 지금 그 원수를 갚을 것이니.”

         

       “…후회할 것이다. 호천안.”

         

       혈존이 이를 갈며 기수식을 취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육성진을 뇌성의 형으로 변환시켰다. 어느 때보다 거대한 기운이 몰려드는 것을 느끼며 날 응원해주는 일행들의 강한 마음이 느껴졌다.

         

       혈존과 나의 대화를 들으며 숨죽이고 있었던 일행들의 감정이 전해진다.

         

       나와 혈존의 대화에 나를 걱정하는 흑묘.

         

       부보님과 조부님을 애도하는 여일예.

         

       지금의 상황에 안타까워하는 혁기린.

         

       혈존의 말에 분개하는 독고이설.

         

       내가 이 모든 상황을 극복하길 응원하는 모용연화까지.

         

       나보다도 나를 더 깊이 생각해주는 일행들의 마음이 전해졌다. 마음의 표현은 모두 달랐지만 그 결론만큼은 하나였다.

         

       절대 지지 말라고.

         

       그 응원에 떠밀리듯이 몸이 앞으로 쏘아졌다.

         

       그와 동시에 집중력이 극한까지 치솟아 오르며 세상의 시간이 늘어진다.

         

       사실.

         

       혈존과의 정면 대결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혈존의 힘이 쪼그라들었다고 한들 그 바닥을 드러낸 것도 아니었고 내가 뇌성의 형을 취하며 공격을 쏟아낸다 할지라도 예리함 하나 없이 쏟아붓기만 하는 공격에 혈존이 당해주리라는 것도 과한 기대였다.

         

       그러나.

         

       무모하고 어리석을지라도 해야만 한다.

         

       살아온 세월의 누적이 다르고 그 경지가 다르지만 반드시 넘어서야만 하는 순간이었다.

         

       설령 이 무모함의 결과가 죽음으로 이어질지라도 나는 지금 이 순간 내 의지를 관철해내야만 했다.

         

       일문직뢰보를 펼쳐냈다.

         

       상처에서 올라오는 통증조차도 잊은 채 뇌성의 폭류를 다스렸다. 지금까지 수없이 뇌성을 다루어 왔지만 이를 온전히 제어하여 진짜 내 힘으로 다루는 일에 성공한 적은 없었다.

         

       아까 흑사를 베어내며 그런 뇌성의 둔중함을 간파한 것일까.

         

       혈존은 마지막으로 남은 피와 기를 짜내 정확히 자신의 몸을 보호할 영역만 지킬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공격에 예리함이 없으니 그저 몸을 웅크리고 버티겠다는 뜻이겠지.

         

       이 보. 쌍연각전이 펼쳐진다.

         

       느려진 시간 속에서 폭류처럼 흐르는 뇌성의 기운을 제어해 보려 했지만 여전히 성과는 없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실 한 사람이 이 기운을 제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천마 위지천이라면 뇌성과 같은 기운을 온전히 다루어 낼 수 있었을까. 저 위지천이라면 해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혹여나 천마신공의 구결이라도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면 뇌성을 다루는 단서가 되었을까.

         

       초대 천마도 참 너무하시지. 아무리 원본을 복원하는 자라도 천마신공의 전승에 도전한 자인데 그렇게 구결 한줄 남겨주지도 않고 그렇게 싹 가져가다니.

         

       그런 원망을 하고 있자니.

         

       문득 머릿속에 한 줄기 구결이 떠올랐다.

         

       [인간을 지탱하는 것은 인연이다.]

         

       분명하게 떠올랐다.

         

       천마신공의 서장, 마지막에 적혀 있던 구결이었다.

         

       인간을 지탱하는 것은 인연이라.

         

       그건 무슨 의미이고 왜 지금 이 순간에 떠오른 것일까.

         

       나는 나와 함께 쏟아지고 있는 뇌성의 기운을 살폈다. 흑묘. 여일예. 혁기린. 독고이설. 그리고 모용연화까지.

         

       일행들 각자의 내공이 각자의 무학을 담은 채 서로 부딪히며 하나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일행들을 통제하며 지금 이곳에까지 왔는가.

         

       아니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여일예는 복수를 마친 뒤 스스로 나를 찾아왔다. 혁기린 역시 소문을 듣고 날 돕고자 황궁을 나섰다.

         

       독고이설도 모용연화도 스스로 나와 함께하기를 원했다.

         

       나는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지만 일행들은 자신들의 문제를 미루면서까지 나와 함께해 주었다.

         

       그 사실을 떠올린 나는.

         

       뇌성의 모든 기운을 헐겁게 풀어냈다.

         

       그야말로 기다렸다는 듯이 흩어지려 요동치는 기운에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결심을 굳히고는 모든 기운을 해방시켰다.

         

       제멋대로 갈라지는 기운. 갑자기 내가 기운을 풀어헤치자 혈존이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삼 보. 삼연환휘와 함께 분산되는 뇌성의 기운이 느껴진다.

         

       그러나 그 기운에는 명확한 방향성이 있었다.

         

       아무런 통제도 가하지 않았음에도 그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으니 나는 내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사극신뢰와 오영추혼을 펼쳤다.

         

       어느 새 뇌성은 하나의 형상을 이루고 있었다. 아니 그건 형상이라기보다는 이치에 가까웠다.

         

       초대 천마는 인연을 뿌리라 보았을까 가지라 보았을까.

         

       아니 어쩌면 천마는 나무가 아니라 다른 것으로 보았을지 모르지.

         

       그러나 정녕 인간을 지탱하는 것이 인연이라면.

         

       흐르는 대로 두어야 할 일이었다.

         

       자연스럽게 두고 보아야 할 일이었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이들이 일행이 되고 뭉쳐 여행하며 시끄럽게 소란을 벌이며 현재 이 구덩이까지 도달했듯이 그러한 것들이 켜켜이 쌓여 지금에 이른 것처럼.

         

       자유로이 풀려나간 일행들의 기운은 스스로 경운무심공의 이치에 따르고 있었다.

         

       깨닫고 나니 참으로 우습고 어리석은 일이었다.

         

       일행들이 나를 위해 함께해 주고 있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으면서 일행들의 기운이 경운무심공의 흐름을 따라와 줄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으니 말이다.

         

       나는 육영개화를 펼치며 검을 들어올렸다.

         

       그저 그뿐이었음에도 일행들의 기운은 내 뒤를 따르며 하나의 이치를 그린다. 그 흐름을 느끼며 검을 내질렀다.

         

       이 이치와 흐름을 무엇에 비유해야 할까.

         

       산? 강? 바람?

         

       이내 나는 답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 흐름은 천하 그 자체라고.

         

       육성진과 일행의 힘에 힘입어 나는 단사패검의 최후절초의 이치에 닿았다.

         

       콰르르르릉!!

         

       뇌명천하(雷鳴天下).

         

       칠뢰영변을 펼침과 동시에 뻗어진 검은 강기가 어린 혈존의 핏물을 산산히 부수고 교차된 의수와 팔에 서린 강기를 휩쓸어 내리며.

         

       혈존의 모든 방어를 뚫어냈다.

         

       거대한 경력에 휩쓸린 혈존의 신형이 맥없이 떠올라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혈존의 의수는 산산조각이 나 바스라졌고 피 한방울 남지 않은 의족은 맥없이 늘어졌다.

         

       “쿨럭!”

         

       쓰러진 혈존의 입으로 진짜 혈존의 피가 튀어올랐다. 그리고 그 피가 튀어오름과 동시에 대검의 검날이 땅에 박혔다.

         

       뇌명천하를 성공적으로 펼쳐냈다고 한들 현경의 고수와 정면대결을 벌였으니 검이 버티지 못한 것이다.

         

       나 역시 기침을 토하지 않았을 뿐이지 목구멍에 핏물이 차오른 것이 느껴졌다.

         

       “선배!”

         

       “은공!”

         

       “호 낭인님!”

         

       “용지맹!”

         

       “대협!”

         

       일행들이 날 듯이 달려오려 했지만 내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아직은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으니까.

       

       손끝부터 발끝까지 통증을 호소하는 몸을 움직여 혈존의 앞에 섰다.

         

       뇌명천하의 흐름에 휩쓸린 혈존의 내상은 대라신선이 살아돌아온다 해도 살릴 수 없는 상태였다.

         

       뇌명천하의 충격도 충격이었지만 혈존의 몸이 이미 건강을 잃은 상태인 탓이었다.

         

       아마 혈술을 과도하게 사용한 결과겠지. 피를 뽑아 사용한 결과가 이로울 리 없을 테니 말이다.

         

       “남길 말이 있으시오?”

         

       “호천안과 팔다리를 잃었음에도…영물을 부리는 혈술을 깨우칠 수 있었으니…하늘이 나를 선택한 줄 알았는데…쿨럭, 모두 헛꿈이었구나.”

         

       나는 죽어가는 혈존을 바라보며 혈존을 만난 이래 계속해서 하고 싶었던 말을 입에 담았다.

         

       “어째서 그리 혈술에 정통한 자가 혈육의 정에는 무지하셨소.”

         

       내 말을 들은 혈존이 몸을 들썩거리며 웃었다.

         

       “크크…크크…! 그래. 혈육의 정 역시 피에 흐르는 힘이었을지 모르지…”

         

       혈존이 흐린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손을 뻗었다.

         

       “천하를…쥐어보고 싶었거늘…”

         

       그 말을 끝으로 혈존의 눈에 빛이 사라졌다. 애써 뻗어 올린 손 역시 맥없이 축 늘어졌다.

         

       나는 빛이 사라진 혈존의 눈을 감겨 주었다.

         

       전장의 소음이 아련하게 들려왔다. 혈존의 죽음과 영물들이 연관이 있는지 단번에 혼란스러워지는 전장의 기색이 느껴졌다.

         

       그 소음은 마치 나에게 이렇게 속삭이는 듯했다.

         

       모두 끝났다고.

         

       나는 혈존이 마지막으로 본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구름 한점 없는 청명한 날.

         

       혈존과의 싸움은 그 끝을 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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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an Outcast the Martial Arts Masters are Obsessed With

I Became an Outcast the Martial Arts Masters are Obsessed With

무협게임 속 고수들이 집착하는 낭인이 되었다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 became Ho Cheon-an, a second-rate warrior in the martial arts game [Murim Cheonha].

To survive, I had no choice but to give enlightenment.

Martial arts masters began to obsess over me.

In Murim Cheonha, where fame means difficulty, getting attention meant death.

Please, just go away.

Please, let me l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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