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전(前) 용사라고요? ( 5 )
숨겨왔던 아버지의 추태.
둘째 어머니는 도대체 몇 살에 임신하신 걸까. 어쩐지 밝혀내기 두려워지는 진실이었다.
이안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어째 하루하루가 조용히 지나가는 날이 없는 것 같은 기분이다.
‘설마 아버지가 덮치신 건- 아니겠지.’
미약하게 남아있는 아버지에 대한 신뢰와 존경심을 근거로 한 판단이 아니었다.
– “너희 아버지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단다.”
– “오해야…. 정말 오해라고…….”
– “나도 허락한 일이란다 이안.”
어머니와 아버지의 말을 떠올린다.
아버지가 원했던 관계는 아니었을 것이다. 음… 아마도.
분명 뭔가 사정이 있었겠지.
전 용사인 어머니와 그 동료였던 아버지가 어찌할 수 없을 정도의 일이 있었을 것이다. 있어야만 한다.
“……음. 네가 한스 님의 아들이구나.”
데이지가 눈을 가늘게 뜨며 이안을 훑었다. 생각을 알 수 없는 눈이 희열로 번뜩였다. 이안은 자신이 발가벗겨지고 있다는 착각이 들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으음.”
아니.
아니다.
타탓-!
저도 모르게 훌쩍 뒤로 물러난 이안. 반사적으로 검을 뽑았다.
손이 덜덜 떨리고, 몰려오는 공포에 이빨이 부딪혔다. 피부에 닭살이 오소소 올라왔다.
‘뭐, 뭐야? 뭐였지?!’
방금 이안은, 자신이 거대한 맹수의 아가리 안에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대적할 수 없는 괴물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듯-. 본능이 경종을 울려댔다.
죽는다.
꽈악-
롱소드에 새겨진 용기의 룬이 깜빡거리며 점멸했다.
데이지는 태연하게 다가와 검의 끝을 두 손가락으로 붙잡았다.
“…많이 놀랐구나. 미안하다.”
“-허으읍!”
이안에게 쏘아내고 있던 살기를 거둔 데이지. 이안은 그제야 숨을 크게 뱉었다.
방금 전의 위압감이 거짓말이라는 듯, 무겁게 내려앉았던 공기가 사라졌다.
“도, 도대체 당신은 누구십니까?”
“…데이지. 너의 둘째 어머니란다.”
데이지는 다시 한번 자기소개했다.
당연하지만 이안은 이름을 듣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저기-”
“…아리아에게 안내받으렴.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뒤돌아선 데이지가 훌쩍 공중으로 뛰어오르더니 작은 점이 되었다. 뭔가 물어볼 틈이 없었다.
기분 탓인지 데이지의 귓덜미가 조금 붉어진 듯 보였다.
“……대단하세요 오라버니.”
아리아가 한스의 곁에 다가왔다. 양손을 모아 잡고, 두 눈을 반짝거리고 있었다.
“저는 어머니가 저렇게 기뻐하시는 모습을 처음 봤어요…….”
“저게 좋아하시는 모습이라고? 죽이려는 게 아니라?”
“……아마 어머니가 오라버니를 만나고 기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셔서 조금 실수하신 것 같아요. 평소에는 절대 이런 실수를 안 하시는데…….”
조금 부끄러우셨던 걸까- 아리아가 중얼거렸다.
일리 있는 추측이다. 어머니는 누구보다 이안과의 만남을 기대하고 있었으니까.
“두 번 실수하시면 송장 하나 치우겠네.”
이안이 투덜거렸다. 생각했던 것보다 둘째 어머니와의 첫 만남은 거칠었다.
“……어서 가시죠 오라버니. 이제 도시가 코앞이에요.”
아리아가 앞장서서 일행을 안내했다.
뽀득거리는 눈밭을 한참이나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허벅지까지 눈에 젖었을 무렵, 그들은 한창 축제 준비로 떠들썩한 몬테그로스에 입성할 수 있었다.
“오오. 아주 시끌시끌한데?”
이안의 예상과 다르게 몬테그로스는 아주 활기찬 도시였다.
곳곳에 오색 종이가 걸려 있었으며, 먹음직스러운 순록 고기를 통째로 굽는 모습도 보였다.
길가에 전시된 그림과 조각상, 웅장한 행진곡을 준비하는 악단에, 색종이를 뿌릴 아이들까지.
그야말로 축제가 코앞이라는 느낌이 물씬 풍겼다.
“……헤헤. 마침 오늘이 ‘와일드 헌트’의 개최일이거든요. 몬테그로스의 자랑이나 다름없는 축제에요.”
아리아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자랑스러워했다. 겉보기에는 15살쯤 되는 듯했지만, 하는 행동은 9살 무렵의 그것이었다.
“너는 이 도시가 좋아?”
“……그럼요. 저는 태어날 때부터 이 도시에서 살았으니까요.”
외부인의 시선에서 본 몬테그로스는 춥고, 투박하고, 거친 땅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몰아치는 혹한의 추위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뜨거운 영혼을.
아리아는 이 도시와 사람들을 사랑했다.
그녀의 눈에 비친 몬테그로스는, 설원에 피어난 뜨거운 횃불이었다.
“단주. 이제 우리는 해산해도 되는 거지?”
“……아, 응. 각자 볼일 마치고, 알아서 귀환해도 상관없어.”
오크와 처녀들이 삼삼오오 빠르게 흩어졌다. 얼른 축제를 즐기고 싶어 엉덩이가 들썩거리는 것을 더 이상 참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들은 한창 꽃다울 나이였다.
오크도 포함해서 말이다.
“췻. 이번에 도끼 손자루 신제품이 나왔다고 했다!”
“헛…! 이번에 유행하는 롱소드 폼멜 너무 멋있다! 취잇!”
“꺄악 미쳤다! 이 위장약 좀 봐! 완전 진흙색이야!! 이걸로 위장하면 대박이겠다!”
좋아하는 것이 또래와 아주 조금 달랐지만.
아무튼 그들 나름대로 청춘을 즐기는 중이었다.
“…오라버니. 혹시 시간 되시면, 잠시…… 축제를 즐기시지 않겠어요?”
아리아가 이안을 돌아보며 말했다.
어쩐지 조금 기대에 찬 눈빛이다.
“축제? 나야 상관없는데. 둘째 어머니가 부르시지 않았어?”
“……그건 괜찮아요. 어머니도 와일드 헌트 축제를 좋아하시거든요.”
“그럼 나야 상관없긴 한데.”
이래도 되나? 싶은 의문이 이안을 스쳤다. 뭐어. 누구보다 둘째 어머니를 잘 알고 있을 아리아가 괜찮다고 했으니.
“……아앗. 오라버니! 여기, 이쪽! 얼른 오세요……!”
어느새 저 앞까지 달려간 아리아가 이안을 재촉했다. 언제 구했는지, 손에는 꼬치를 하나 들고 있었다.
“…유니콘?”
어쩐지 주변이 조용하다 싶더니. 유니콘이 보이지 않았다.
보나 마나 엉뚱한 곳에서 처녀나 따라다니고 있겠지. 이안은 유니콘에 대해 통제하는 것을 포기한 지 오래였다.
“오라버니…! 얼른, 얼른……!”
행진이 가장 잘 보이는 앞줄에서 아리아가 이안을 불렀다. 이안은 피식 웃으며 아리아에게 다가갔다.
첫인상이 조금 무뚝뚝하고 다가가기 어려울 뿐이지.
아리아의 행동은 생각보다 무척이나 발랄했다.
와아아아아ㅡ!
“아아아앗……!”
저 멀리서부터 함성이 들려왔다.
아리아의 하얀 볼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꼭 쥔 주먹을 붕붕 휘둘렀다. 손에 쥐고 있던 꼬치가 휙 날아가 버렸다.
이안은 잽싸게 꼬치를 붙잡아 아리아의 손에 들려줬다.
ㅡㅡㅡㅡㅡ!!!
때에 맞춰 음악단이 웅장한 행진곡을 연주했다.
축제의 시작, 기병과 사냥꾼의 행진이 시작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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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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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아아.”
아리아가 잔뜩 만족하여 배부른 한숨을 뱉었다. 뺨에는 소스가 묻어 있었다.
“재밌었니?”
“……! 엄청났어요, 정말로…! 올해 최고의 사냥감으로 뽑힌 그레즐리 베어는 포악하기로 유명한 곰인데ㅡ”
아리아가 마구 팔을 휘두르며 떠들었다.
이안은 흐뭇하게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오늘 처음 만났는데, 어색했던 공기는 날아간 지 오래였다.
배다른 남매지만 남매라는 걸까.
“뺨 이리 줘봐.”
“으부붓.”
이안이 아리아의 볼을 마구 닦았다.
아리아의 볼살이 이안의 손길에 이러저리 일그러졌다.
‘이렇게 보니까 좀 9살 같네.’
또래보다 아주 조금… 조금 많이 조숙할 뿐이지.
아. 거기에 조금 더 잘 싸우기도 하고.
“……와앗ㅡ! 오, 오라버니. 저기, 저쪽에 광대가!”
“그렇게 뛰다가 넘어지… 면 다치지는 않겠지만. 아무튼 조심해.”
광장에서 광대가 마술 공연을 하고 있었다. 아리아는 우다다 달려가서 마술을 구경했다.
광대의 화려한 손재간에 아리아의 입이 점점 크게 벌어졌다.
이안은 간단한 과자를 아리아의 벌어진 입에 넣어줬다.
“……으앗…! 오라버니, 저쪽에서 격투경기를ㅡ!”
“9살이 이런 걸 봐도 되는 거야?”
“……흐앗…! 이, 이안 오라버니. 저쪽, 저쪽에서 그레즐리 베어 도축 쇼를 하고 있어요……!”
“어허. 눈 가려. 저런 거 보는 거 아니야.”
이안과 아리아는 한참이나 축제를 누볐다. 주로 아리아가 달려 나가면, 이안이 뒤쫓아가는 형식이었다.
정신없이 축제를 즐기다 보니, 어느새 뉘엿뉘엿 노을이 걸쳐졌다.
그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축제를 즐겼을 아리아의 행색이 화려했다.
“……음! 재미있었어요……!”
손에는 그레즐리 베어 뒷다리 통구리, 머리에는 와일드 헌트 축제의 머리띠를 쓰고 있었다.
온종일 먹은 배가 빵빵하게 올라왔다.
“다행이네.”
이안은 흐뭇하게 웃으며 아리아를 바라봤다. 오늘 처음 만난 여동생이지만, 그 누구보다 순수한 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슥슥-
“……앗.”
무심코 아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무의식적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마치 본능에 각인된 것 같다고 해야 할까.
뒤늦게 자신의 행동을 깨달은 이안이 황급히 손을 거뒀다.
“아. 미안…. 나도 모르게 그만.”
“……아니에요.”
아리아는 조심조심 이안의 손길이 닿았던 부분을 매만졌다.
나쁘지 않은 감촉이었다. 누군가에게 쓰다듬을 받는 경험… 어머님을 제외하면 처음이었다.
“……오라버니. 한 번만 더 쓰다듬어 주세요.”
“어?”
아리아가 조심스럽게 이안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잠시 당황했던 이안은 조심스럽게 아리아의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사락사락- 손끝에서 흐르는 머리카락, 살짝 따뜻한 정수리.
“……오라버니는, 제가 이상하지 않으신가요?”
그리 묻는 아리아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이상하다니. 뭐가?”
“……그야. 저는, 다른 아이들보다 몸도 크고, 키도 크고…. 이상하잖아요……. 다른 아이들에 비하면 저는 꼭 괴물처럼….”
아리아의 말 못 할 고민이자 콤플렉스였다.
감히 대놓고 아리아를 흉보는 사람은 없었다. 데이지가 이끄는 부하들도 아리아의 모든 것을 긍정해줬다.
하지만, 아리아는 자신이 또래의 친구들과 비교하면 많이 다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마 제 몸에 있는 불꽃 때문이겠죠……. 저처럼 불꽃이 큰 사람도 없고, 성장이 빠른 사람은 없어서 정확하지는 않지만.”
“불꽃?”
떠오르는 것은 오크와 처녀들의 몸에 새겨져 있던 불꽃 형태의 문신. 유니콘은 이들을 불꽃을 키우는 자들이라고 칭했다.
‘그 문신이랑 지금 말하는 불꽃이 관계가 있는 건가.’
일단 나중에.
지금은 물어볼 분위기가 아니었다.
“……나도 다른 친구들이랑…. 흐끕. 놀고 싶었는데….”
아리아는 팔다리도 길고, 키도 크다.
9살이 아니라 16, 17살 무렵의 언니들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또래의 9, 10살 친구들과 어울리면 친구가 아니라 보살피는 언니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어린 나이일수록 자신과 다른 점에서 큰 거부감을 느낀다. 아이들은 순수하지만, 그렇기에 악의 없이 사악할 때도 있다.
이안은 조심스럽게 아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빠로서 여동생의 눈물을 어찌 모른 척할까.
“나는 아리아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 없어.”
“……흐윽. 정말요?”
“그럼. 나는 아리아의 오빠잖아. …이복 오빠지만. 아무튼, 이 세상에 여동생을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오빠는 없어.”
사실 모든 남매를 서로를 증오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는 어머니의 자궁에서부터, 유전자로 각인된 뿌리 깊은 분노와 혐오다.
하지만 이복 남매로 맺어진 아리아와 이안에게는 조금 다른 이야기였다.
“…헤헤. 오라버니.”
아리아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살짝 울었던 눈망울이 불그스름했다.
더 쓰다듬어 달라고 보채는 강아지처럼 이안의 손에 머리를 마구 비볐다.
이안은 최선을 다해 아리아를 쓰다듬어줬다.
“……과연.”
사이좋은 이복 남매를, 저 멀리서 지켜보는 이가 있었으니.
모든 투쟁의 주인이자 지존, 데이지였다.
“…저 능숙한 쓰다듬기, 각도, 적절한 속도와 리듬.”
아리아를 쓰다듬고 있는 이안을 노려보던 데이지가 중얼거렸다.
저 아이… 보통이 아니다.
본능의 수준에서 가장 적절한 쓰다듬기를 해내고 있었다.
“…전성기의 한스 님에 버금가는 수준….”
역시 한스 님의 아들이다.
연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