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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84

       서책의 첫 장에 적힌 글자는 분명 한국어였다.

         

       이 세계에서 오직 백우진만이 읽을 수 있는 모국어.

         

       이를 보자마자 어마어마한 감정의 파도가 몰아닥쳤다.

         

       충격, 혼란, 놀람.

         

       모든 것이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와중에 기쁨도 섞여 있었다.

         

       그곳에서 워낙 불우한 삶을 살아왔기에 향수병 따위는 겪을 일 없다고 생각했는데.

         

       ‘꼭 그런 것도 아니었나.’

         

       미운 정도 정이라는 말이 왜 생겼는지 알 것만 같은 기분.

         

       물밀듯이 밀려오는 감정의 파도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것은 딱 거기까지였다.

         

       마냥 놀라고 기뻐하기엔 백우진을 둘러싼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하여 백우진은 감정을 조금 더 배제하고서 첫 장에 쓰인 글귀를 읽어 내려갔다.

         

       [씨발, 좆같다.]

         

       [책방에서 빌린 책이 재미없다고 투덜댔다가 책 속 세계로 빨려 들어왔다.]

         

       백유성이라는 인물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빙의자다.

         

       비슷한 방식.

         

       그러나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책방….’

         

       스마트폰으로 웹소설을 읽다가 끌려오게 된 자신과 달리, 그는 책방에서 책을 빌려 읽었다고 적혀 있다.

         

       그 말인즉, 상대가 이 세계에 빨려 들어온 시점이 자신보다 훨씬 더 빠르다는 뜻.

         

       소설책을 빌려보던 책방은 그의 중학교 시절에나 볼 수 있던 곳이었다.

         

       이후에는 소설의 연재처가 차차 인터넷으로 옮겨짐에 따라 종이책을 출간하는 일이 적어져 자연스럽게 사라진 업종.

         

       그곳에서 책을 빌려 읽었음은 그가 자신보다 최소 5년에서 10년은 빠르게 이 세계에 빙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같은 소설은 아니었을 거야.’

         

       세계관은 공유하고 있을지언정 완전히 똑같은 소설일 수는 없다.

         

       무엇보다 시대가 다르다.

         

       그리고 주인공이 영웅이 되는 왕도적인 흐름을 따라가고 있지만, 세부적인 내용은 천차만별.

         

       “…이미 한 차례 망한 세계관에 또 하나의 소설을 이었다는 건가?”

         

       사실 백유성이라는 인물이 빙의된 세계를 무대로 쓴 소설이 망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혹시 모르지.

         

       책방 시절의 감성과 어우러져 나름대로 인기를 끌었을지도.

         

       그런데도 백우진이 이 세계관의 첫 소설이 망했을 것으로 추측하는 이유는 하나.

         

       ‘성공의 맛을 한 차례라도 봤으면 그런 식으로 소설을 쓸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백우진이 빙의된 두 개의 소설은 모두 삼류 소설이었다.

         

       줏대 없이 흐름이 이리저리 바뀌고, 글의 나아가야 할 방향이 끊임없이 달라졌다.

         

       집에서 누워 소설을 읽던 그가 5,700자의 댓글을 쏟아낸 것도 그 때문이었다.

         

       좀처럼 안정적으로 변하지 않고 자꾸만 들쭉날쭉한 소설의 분위기를 참다못해 ‘갈!’ 하고 소리를 내질렀다가 이 모양 이 꼴이 되고 말았다.

         

       그곳에서 죽도록 구르고 경험을 쌓은 백우진은 안다.

         

       한 번이라도 성공의 맛을 보았던 이는 결코 그런 줏대 없이 굴지 않는다는 것을.

         

       실패를 예견하고 변화를 모색할지언정 이것저것 아무것이나 끌고 와 자신이 정성들여 만든 음식을 음식물 쓰레기로 만들진 않음을.

         

       여기까지 생각을 마친 백우진은 제 이마를 탁 때리며 탄식했다.

         

       “아…, 지금 그걸 따질 때가 아닌데.”

         

       백유성이라는 인물이 빙의한 세계관은 성공했느냐, 못 했느냐는 지금 하등 중요하지 않다.

         

       그걸 알면서도 삼천포로 빠지고 말았다.

         

       하지만 이는 그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새끼만 생각하면 열이 부글부글 끓어서 주체가 안 되는 걸 어떡해…!”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자신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놈을 용서할 수 없다.

         

       당장 이세계에서 싸웠던 마왕과 자신을 이곳에 밀어 넣은 삼류 작가.

         

       둘 중 하나의 목을 벨 수 있다면 그는 삼류 작가의 목을 베고 모두와 함께 멸망을 맞이할 만큼 원한이 가득 쌓여 있었다.

         

       “후우, 진정하자.”

         

       한 차례 분노를 쏟아내 감정의 격류를 잠재운 그는 한결 차분해진 마음가짐으로 다음 장을 넘겼다.

         

       그곳에도 마찬가지로 그의 감상이 담겨 있었다.

         

       [하루하루 시간이 갈수록 깨닫는다.]

         

       [내가 살던 세상이 얼마나 좋은 곳이었는지를.]

         

       [하루가 멀다고 사람이 죽고, 나는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바닥을 긴다.]

         

       적어도 이름 있는 가문의 자식으로 빙의한 자신과 달리, 그는 거지였다.

         

       적어도 겉으로는 평화로웠던 지금과는 달리, 중원 곳곳에 피바람이 불던 시기.

         

       중원을 반씩 차지한 두 거대 세력의 전쟁에 부모와 터전을 잃고 거리로 내몰린 거지.

         

       살아남기 위해 숱한 조롱과 멸시를 참아가며 한 줌의 식량을, 아니, 삶을 구걸하던.

         

       배고프고, 힘없는 거지.

         

       [구걸할 집을 잘못 골라 그 집 노비들과 다투다 수적 열세를 이기지 못해 두들겨 맞고 있을 때, 진짜 내 운명이 찾아왔다.]

         

       [현천문(賢天門), 그들이 말했다.]

         

       [나는 영웅지성(英雄之星)을 품고 태어난 영웅의 상이라고.]

         

       [그때부터 내 삶은 크게 바뀌었다.]

         

       현천문에서 무공을 익힌 그는 천부적인 재능을 보이며 빠르게 경지를 이룩했다.

         

       그리고 그 뒤는 모두가 알던 대로의 서사였다.

         

       현천문을 등에 업고 혼란한 무림 세계에 나타나 영웅으로 변모해 나가는 과정.

         

       숱한 위기를 겪고 더 강해져 마침내 악한 무리를 모두 몰아내 우뚝 서는.

         

       “…나하고 비슷하네.”

         

       이전 세계에서의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은 서사.

         

       물론 고작 서책 한 권으로는 그 삶을 다 이해할 수는 없을 터다.

         

       제 삶 또한 그러하지 않았나.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아픔과 기쁨 같은 것들이 수두룩했다.

         

       그러니 고작 책 한 권으로는 감히 제단해선 안 되었다.

         

       안 되는데…, 무심코 공감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엄청 굴렀구만, 이 양반.”

         

       남들보다 몇 배는 더 깊숙이 파고드는 그의 인생.

         

       고작 몇 장으로 요약된 그의 기나긴 서사가 끝나고, 그 뒤의 일들을 읽어 나간다.

         

       [이후 찾아온 고된 시간에 대한 보상.]

         

       [글을 더럽게 못 쓰는 신은 내게 말했다.]

         

       [이 세계를 구하느라 고생했노라. 그 대가로 소원을 들어줄 테니, 무엇이든 말하라.]

         

       그 단락에서 백우진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신이 말했다…?”

         

       그 말인즉, 삼류 작가가 직접 말을 걸어왔다는 것 아닌가.

         

       “이 새끼가 사람 차별하네.”

         

       백우진은 이미 하나의 세계를 구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신이 나타나지 않았다.

         

       삼류 작가의 대리인으로 생각되는 여신의 목소리가 대신 들려왔을 뿐.

         

       물론 소원을 들어준 건 똑같지만…, 그래도 조금 기분이 나빴다.

         

       만약 삼류 작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면 제 소원 또한 크게 달라졌을 텐데.

         

       은근하게 끓어오르는 화를 삭이며 다음 장을 넘긴다.

         

       [그래서 빌었다.]

         

       [다른 건 모르겠고, 당신 죽빵이나 한 대 시원히 갈기게 해달라고.]

         

       이 부분에선 두근거렸다.

         

       어떻게 됐을까?

         

       소원을 들어주었을까?

         

       [거절당했다.]

         

       “…….”

         

       그럼 그렇지.

         

       그 좀생이 같은 삼류 작가가 그런 소원을 들어줄 리가 있나.

         

       [소원으로 뭘 빌어야 하는지 고민했다.]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할까?]

         

       [그러기엔 이곳에서 너무나도 많은 인연을 쌓아 올렸다.]

         

       [쉬이 결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여 말했다.]

         

       [잠시 고민할 시간을 달라고.]

         

       [삼류 작가치곤 흔쾌히 제안을 수락한 녀석은 떠나기 전, 그리 말했다.]

         

       [차기작을 구상하고 있을 테니, 생각나면 언제든 말하라고.]

         

       “…차기작?”

         

       어딘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며 다음 장을 넘긴다.

         

       [그때 나는 확신했다.]

         

       [놈이 차기작을 쓴다면 필시 나와 같은 일을 겪는 이가 또 나타나게 될 것임을.]

         

       [왜냐하면.]

         

       백우진은 다음 문장을 보지 않아도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이 새끼는 글을 더럽게 못 쓰기 때문이다.”

         

       [이 새끼는 글을 더럽게 못 쓰기 때문이다.]

       

       

       예상했던 문장이 그대로 나타나자 씨익 웃는 백우진.

         

       “역시.”

         

       차라리 시대의 감성에 맞지 않는 글이라면 언젠가 고평가받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줏대 없는 글은 동서고금 어느 때에 가져다 놔도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다.

         

       그리고 그의 글은 명백히 후자였기에.

         

       또 한 번의 짙은 동질감을 느끼며 다음 장을 넘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놈은 어쩌면 일부러 거지 같이 글을 써서 제 글을 욕한 사람을 납치하려는 건 아닐까.]

         

       [내가 이곳에 오게 된 건…, 놈의 소설 속 흐름 중 필수 불가결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

         

       생각해본 적 없는 관점이었다.

         

       그러나 아예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제법 신빙성 있어.”

         

       삼류 소설을 쓰는 것까지가 그의 즐거움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면?

         

       제 소설을 읽고 비난한 사람 중 하나를 골라 납치하여 그가 고난을 겪고 이겨내는 과정까지가 전부 그의 즐거움이라면.

         

       “…상상 이상의 악질인데, 그건.”

         

       한 사람이 험난하게 구르는 모습을 보고 즐긴다, 라.

         

       “이 정도면 악신(惡神)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 아닌가.”

         

       쓰게 웃는 백우진.

         

       표현하고 보니 우스웠다.

         

       선한 신은 뭐고, 악한 신은 또 무언가.

         

       그리 구분하는 것조차 인간이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한 것일 텐데.

         

       신은 그저 신일 뿐이다.

         

       인간으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아니, 이해하려 해서도 안 되는 불가해한 존재.

         

       생각을 잠시 멈추고 또 한 장 넘긴다.

         

       [문득 하나의 감정이 샘솟았다.]

         

       [놈이 그린 그림을 망치고 싶다.]

         

       [녀석이 바라는 흐름을 마구 뒤죽박죽 흔들어 놓고 싶다.]

         

       [하여 나는 마침내 녀석에게 빌 소원을 정했다.]

         

       흐름을 방해하기 위해 그가 신에게 바란 것은 무엇일까.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몇 장 남지 않은 서책을 넘긴다.

         

       [미래를 볼 수 있게 해달라.]

         

       [나는 그리 빌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그럼 저는 다음 편으로 찾아 뵙겠습니다.

    읽어주셔서 매번 감사합니다.

    편안한 밤 되셔요. (_ _)

    다음화 보기


           


I Became a Drunkard in a Martial Arts Novel.

I Became a Drunkard in a Martial Arts Novel.

무협지 속 주정뱅이가 되었다
Score 7.6
Status: Completed Type: Author: Released: 2022 Native Language: Korean
I sent a 5,700-character message and ended up transported into a novel world once. Then after returning, I got reincarnated into a second martial arts novel by the same damn author. Only this time, I really didn’t write anyt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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