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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85

    루크가 가져온 수건으로 어느정도 물기를 닦아낸 후, 시루드는 결국 화장실로 들어갔다.

    아무래도 입안에 들어있던 액체인지라, 불편함을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닐테니까.

    그러자, 헬레나는 잔뜩 울상짓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게, 그만한 실수를 저지른 거니까.

    아무리 당황했기로서니, 시루드의 얼굴에 차를 뿜어버리다니!

    ‘진짜 말도 안돼, 시루드가 대체 날 뭐라고 생각할까…!’

    사람 얼굴에 물이나 뿜어대는 부주의하고 덜렁거리는 여자애?

    아니면, 제대로 된 예절도 모르는 몰상식한 여자애?

    그것도 아니면, 그냥 더러운 여자애라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어느쪽이든 상상조차 하기 싫은 최악의 가정이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그 추측이 어긋날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누군가가 얼굴에 마시던 차를 뿜는다면 자신이라도 그 사람과는 상종하기 싫어지게 될 테니까.

    하지만, 소녀도 억울한 부분이 없지는 않았다.

    평소라면 고작 사레가 좀 들었다고 그 정도로 차를 뿜어낼 일은 없다.

    왜냐하면, 애초에 뿜어버릴 정도로 차를 머금을 일 자체가 없으니까.

    그냥 잠깐 혼자서 켁켁대고 끝났겠지.

    차라는 것은 본디 그 향을 즐기기 위해 조금씩 마시는 것이며, 그 외에도 마실 때 지켜야 하는 이런저런 예절이 있어서 몇모금씩 나눠서 마시는 게 보통이었다.

    기본적으로 뜨거운 액체라서 그렇게 하기도 힘들고 말이다.

    그러나, 이 경우는 그야말로 ‘하필이면’이라는 말이 정확히 어울릴 정도로 공교로운 상황과 계기가 있었다.

    첫번째로, 차가 딱 알맞게 식어서 입 안에 가득 머금기 편한 온도가 되어 있었다는 것.

    두번째로, 루크와 시루드가 마법 얘기에 정신이 팔려 이런저런 예절같은 걸 차릴 필요가 전혀 없었다는 것.

    세번째로, 루크가 대접한 차가 그 대화에서 소외되어 공허한 마음을 정확히 채워주는 ‘인생 차’였으며, 살짝 쌀쌀했던 집 안의 온도와 대비되는 따듯한 차의 향과 온도가 주는 안정감과 따듯함에 취해 있었다는 것.

    이중 어느 하나의 요소만 아니었더라도, 이런 대참사는 절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자신이 이렇게 자신을 변호 한다고 해서 시루드가 자신을 완전히 이전과 동일하게 바라봐 줄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이미 벌어진 일은 돌이킬 수 없고, 지금 상황에선 자신이 시루드에게 무언가 해줄 수 있는 것도 없었으니까.

    손님인 자신이 수건을 찾아 가져올 수도 없는 거고, 이미 젖어버린 옷을 말릴 수단이 있는 것도 아니며, 화장실로 안내를 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기껏해야, 테이블에 이렇게 안절부절 앉아서 고개를 숙이는 것 뿐.

    가시방석이라는 게 바로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라는 것을 실감한다.

    ‘시루드에게만큼은 완벽하게 보이고 싶었는데….’

    저번엔 떼쓰며 우는 걸 들키질 않나, 이번에는 얼굴에 차를 뿜는다니?

    스스로에게 엄격한 완벽주의자인 헬레나로서는 용납하기 어려운 엄청난 실책이었다.

    결국, 헬레나는 눈물이 차오르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흐윽, 흑….”

    테이블을 정리하던 루크는 헬레나의 우는 소리가 들리자 곧바로 젖은 것들을 닦아내던 손길을 멈추고는 곧바로 깨끗한 손수건을 꺼내 헬레나의 눈에서 흐르는 닭똥같은 눈물을 닦아주기 시작했다.

    “이런, 헬레나. 울지 말거라. 예쁜 얼굴 다 망가지겠다. 왜 우는게냐?”

    그러자 훌쩍이던 헬레나가 겨우 말을 시작했다.

    “흐윽, 나, 분명 미움받겠지….”

    “그럴리가 있나. 시루드도 별로 신경쓰지 않을 게다.”

    “그, 흑. 그치만….”

    헬레나로서는 자리를 피한 시루드가 어떤 반응을 보일 지 모르니 더욱 그런 심리가 부추겨지는 듯 했다.

    하지만 그건 그냥 헬레나의 피해망상에 가까운 추측일 뿐, 정말 시루드가 그런 생각을 할거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애초에 헬레나가 그 정도로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고 말이다.

    이런 일로 울다니, 정말 감수성이 풍부한 아이였다.

    하긴, 정령인 파이리스가 좋아할 정도이니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이견을 표할 수 없으리라.

    그나마 다행인 점은, 루크가 그동안 우는 아이를 한두번 달래본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루크는 꽤나 능숙한 솜씨로 헬레나의 눈가를 적당한 세기로 비벼주면서 말했다.

    “헬레나. 시루드가 이런 일로 너를 미워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만약 미워졌다고 해도 내가 잘 타일러주마.”

    루크의 그 인자한 목소리와 손길에 안정감을 느낀 것인지, 울음을 멈춘 헬레나는 루크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흐끅, 정말로?”

    이 쯤 되면 거의 다 달랬다고 보면 된다.

    루크는 더욱 신뢰를 심어주기 위해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물론이지. 만약에 말만으로 안된다면 때리는 한이 있더라도 내 반드시…”

    루크가 한 손을 들어 주먹을 쥐어보이자, 헬레나가 기겁을 하며 외쳤다.

    “때, 때리지는 마! 그럼 내가 나쁜 애가 되잖아!”

    “음, 그런가?”

    루크의 입장에서는 고작 그런 걸로 여자아이를 울리는 녀석이 더 나쁜 게 아닌가 싶지만, 헬레나가 그렇다고 하니까 일단 폭력은 쓰지 않는 걸로 정했다.

    —–

    루크는 어느정도 진정을 한 헬레나의 모습에 정리를 마무리하고 테이블에 앉았다.

    “미안하다. 내가 미처 너를 생각하지 못했구나.”

    “…괜찮아.”

    잠시 헬레나와 둘이서 이야기를 나눠 본 결과, 그동안 자신이 너무 시루드하고만 대화를 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어른으로서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었다.

    헬레나가 아무리 할 말이 없어보인대도 자신이 나서서 챙겼어야 했는데, 자신도 결국 마법사였던지라 시루드와 나누는 마법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서 그만 놓치고 말았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시루드가 침착함을 유지하는 게 이상한 것이지, 평범하고 감수성이 넘치는 헬레나에게 이번 사건은 너무나도 큰 일이었을 게 분명하다.

    그러니 자신이 더 각별히 주의하고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그럴 의무를 소홀히 한 것이다.

    그렇게보면 이번 일은 자신의 실수라고도 할 수 있으리라.

    “헬레나. 그러고보니 너도 그곳에 있었지? 너에겐 별 일 없었느냐? 혹시 어디 다치진 않았고?”

    루크의 늦어도 한참 늦은 안부를 묻는 말에 헬레나는 차를 한모금 마시며 느긋하게 대답했다.

    “뭐, 나한테는 별 일 없었어. 그냥 잘 빠져나왔으니까. 문제는 우리 아빠였지.”

    “아빠?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느냐?”

    루크가 의아함을 잔뜩 담아 묻자, 헬레나가 입가에서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 아빠가 다른 쪽에서 테러범한테 인질로 잡혔었거든.”

    “저런, 그랬단 말이냐?”

    헬레나의 말에 루크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인질로 잡혔다면, 서드인가?

    자신은 딱히 인질극을 벌이지는 않았으니까.

    어쩌면, 루체스트의 설명회에 참여한 인물들 중에 헬레나의 아버지가 섞여있었던 모양이다.

    ‘그러고보니, 출입자 명단중에 ‘루스핀드’가 있기는 했지.’

    단순히 성이 같은 줄 알았는데, 혈육이었던 건가?

    루크는 입가를 만지작거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설마하니 주변에 루체스트와 연관된 사람이 있었을 줄이야….’

    참여자 명단에는 가명도 상당히 섞여있었던지라 굳이 하나하나를 조사하지는 않았는데…….

    한번쯤은 명단을 철저하게 훑어볼 필요가 있겠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으니, 루크가 자신의 아버지를 지나치게 걱정하는 것으로 보인 헬레나가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테이블 위에 놓인 루크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인질이 되시긴 했지만, 딱히 별일 없으시니까 걱정하지 마. 오히려 너무 건강하셔서 바로 다음날 일을 나가셨을 정도지.”

    “하하, 그런가? 뭐, 그렇다면 다행이로구나.”

    “조금은 집에서 쉬어도 될 텐데.”

    내심 아버지와 함께하는 시간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그런 일을 겪고도 쉬지 않고 일을 나가는 모습은 어쩐지 대단해 보이면서도 서운했다.

    마치, 집안에 조금이라도 남아 있기 싫은 사람같아서.

    헬레나는 살짝 침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역시, 내가 싫으신 걸까?”

    “그럴리가.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그치만, 최근에는 전혀 놀아주지도 않으시고. 칭찬도 안해주시는 걸.”

    역시 자신이 이번 시험에서 실수로 2등을 해버려서 가문의 이름에 먹칠을 한 것이 화가 나신 걸까?

    아니면, 자신이 기업을 물려받지 않고 노래를하고 싶다고 해서?

    그것도 아니면, 요즘 시루드랑 놀러다니느라 학원이나 과외시간에 학습태도가 좋지 않아서?

    헬레나는 모든 게 다 자신의 탓인 것 같았다.

    옛날에는 정말 다정한 아빠였는데.

    그에 루크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설마 그건 아닐게다. 그냥 일이 바빠서 그렇겠지.”

    자신의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세상 어디에 있을까?

    만약 정말로 사랑하지 않았다면, 진작에 어딘가에 내버리고 신경도 쓰지 않았겠지.

    하지만 일이 바빠서 그러지 못했고, 감정을 표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 숨겼다.

    그렇다보니 헬레나와 같이 감수성이 풍부한 아이의 입장에서는 사랑받지 않는다고 느낄 수밖에 없었고, 이는 결국 아이가 스스로를 더욱 내몰며 애정을 갈구하며 매달리다가 지쳐가게 된다.

    이는 많은 가정의 아버지들이 흔히 빠지게 되는 딜레마였다.

    하지만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이것을 눈치채지 못하여 그저 아이도 자신을 좋아한다고 착각하게 되고, 어느날 아이가 완전히 지쳐버리고 말았을 때에야 눈치를 채고 말지.

    그제서야 감정을 회복하기 위해 여러모로 노력을 하지만, 익숙하지 않아 잘 되지 못하는 경우를 참 많이도 봐왔다.

    “글쎄….”

    헬레나의 체념한 듯한 중얼거림에 루크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반드시 그럴거다. 요즘은 여러모로 정세가 안 좋으니 말이다.”

    지금은 에이레스 뿐 아니라 베리튼의 동향도 꾸준히 좋지않았는데, 이번 테러사건으로 생겨난 후폭풍까지 적잖은 영향을 주고 있었으니 정치인이나 기업인들에게는 상당히 어려운 시기였다.

    이런 시기에 한 기업의 우두머리인 헬레나의 아버지가 얼마나 바쁠지는 쉽게 예상이 된다.

    그야말로 ‘눈 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말이 어울리겠지.

    “그러고보니, 전시장도 네 아버지가 ‘일을 배우라’면서 데리고 온 것이라하지 않았느냐? 내 생각에 네 아버지는, 그 와중에도 딸과 시간을 내려고 했던 게 아닐까 싶구나.”

    루크의 말에 헬레나는 잠시 눈을 크게 떴다.

    그동안 아빠가 자신을 일터에 끌고다녔던 게, 사실은 자신을 곁에 두고 싶어서였다니?

    한번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는데!

    “…그, 그럴까?”

    울적했던 인상이 활짝 펴진 헬레나의 모습을 본 루크는 왠지모를 뿌듯함에 입가에 옅은 미소를 드리우며 웃었다.

    “그래, 울지 않고 웃으니 참 보기 좋구나.”

    그러자, 헬레나는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부끄러워했다.

    “뭐, 뭐래! 나 원래 이렇게 울보 아니거든?”

    그동안 혼자서는 자주 울었어도 남들 앞에서 울어본 적이 없었는데, 저번 사건 이후 자꾸만 우는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것 같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수상하게 애 달래기 고수인 루크(10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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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rchmage dreams of being an Archmage again

The Archmage dreams of being an Archmage again

다시 대마법사를 꿈꾼다 대마법사였던것은
Score 4.2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5000 Years in the future, the Archmage Luke Irushi opened her eyes again. The world has changes so much.

Horseless carriages, an entertainment box with audio and video, food and spices she has never seen before…

And, a changed magical system!

It wasn’t just the world that chang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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