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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88

       “어이구, 그랬어? 언니가 잘못할까 봐 걱정했어? 우리 실비아, 착하네!”

        

       “그런 거 아니라고!”

        

       내가 절규하건 말건, 벨라는 여전히 실실 웃으면서 말했다.

        

       “그런데, 나더러 언니라고 불러야 하는 거 아니야? 이런 식으로 약속 안 지키면, 앞으론 약속 같은 거 전혀 못 하게 될 것 같은데. 또 어길까 봐 무섭잖아. 안 그래?”

        

       “……그런 거, 아니라고요, 언니.”

        

       내가 이를 악물고 잇새로 말하자, 벨라는 깔깔 웃고는 내 머리를 톡톡 두드려 주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감정은 있지만, 그렇다고 그걸 전부 쏟아버릴 만큼 멍청하진 않아. 안 그랬으면 지금까지처럼 살아남지도 못했겠지.”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벨라는 황제를 날카로운 눈으로 쏘아보았다.

        

       “얘한테 감사하도록 해.”

        

       “…….”

        

       황제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 미안하다.”

        

       날 찾아서 크게 불러 분위기를 와장창 깨버린 루카스가 사과했다.

        

       나는 숨을 길게 내쉬고는 말했다.

        

       “알았어. 괜찮아. 뭐 별일 있었던 것도 아니니까.”

        

       “그래?”

        

       멀어지는 벨라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던 루카스가 말했다.

        

       “그럼 돌아갈까? 아직 나올 음식이 또 있다던데. 너 먹는 거 좋아하잖아?”

        

       아니, 좋아하긴 하는데 그렇게까지 따로 말해야 할 정도는 아니거든.

        

       하지만 그래도 디저트는 끌렸다. 이 나라에서 욕 안 먹을 부분을 따지자면 디저트와 케이크 정도니까. 물론 정어리 파이 같은 것도 있기야 하다만, 그것도 생긴 거에 비하면 꽤 먹을 만 한 편이기도 하고.

        

       “알았어. 먼저 돌아가. 나는…… 잠깐 둘이서 이야기 좀 하다 갈게.”

        

       “그러냐.”

        

       루카스는 나와 황제를 번갈아 보더니,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럼 다른 애들도 먼저 가 있으라고 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거 남겨둘게.”

        

       루카스가 내 어깨를 툭툭 치더니 몸을 돌려서 가버렸다.

        

       아니, 그러니까 먹을 거에 그렇게 환장한 사람은 아니라니까? 있으면 먹는다는 주의이긴 하지만.

        

       “…….”

        

       뭐, 아무튼.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뒤로 돌아섰다.

        

       그리고 황제와 마주했다.

        

       “……그래서, 소감은 어때요?”

        

       “다들 사이가 좋아졌구나.”

        

       “……당신 덕분에, 이렇게 다시 사이좋아지는데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요? 연금되어있는 애들 하나하나 다 찾아가서 설득하고, 싸움 붙이고. 난리였는데.”

        

       나는 숨을 길게 내쉬면서 테라스 난간으로 가 기대섰다.

        

       건물 옆으로 난 테라스에서는, 왼쪽으로는 넓은 호수가, 그리고 오른쪽으로는 숲이 보이는 식으로 양분되었다.

        

       달빛을 받는 숲의 실루엣은 으스스하면서도 웅장했다.

        

       왜 굳이 호수 쪽이 아니라 이쪽으로도 테라스를 낸 건지 알 것 같다.

        

       “고생했구나.”

        

       “그랬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황제를 보았다.

        

       “그래서, 소감은?”

        

       “…….”

        

       황제는 잠깐 고민하더니,

        

       “꽤, 즐거웠다.”

        

       “아무 말도 안 하고 꽁해 있었으면서.”

        

       뭐, 그래도 다행이다. 예전의 황제처럼 속을 긁는 소리를 계속했으면 이 자리도 그냥 파국이었을 테니까.

        

       “그래도 인생에 이런 날이 있는 것도 나쁘지 않죠?”

        

       “……그렇구나.”

        

       황제가 말했다.

        

       “어째 대답이 짧네.”

        

       나는 툴툴거렸다.

        

       “시간 들여서 그 태도 좀 고쳐요. 애들이랑 말도 좀 섞고. 뭐, 걔네들이 싫어한다면 어쩔 수는 없겠지만.”

        

       “너는 나를 원망하지 않는 거냐?”

        

       “언제 그런 걸 신경 썼다고?”

        

       내가 어이없이 웃으면서 돌아보자, 황제가 나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음, 이건 좀 진지하게 대답해주는 게 좋으려나.

        

       그런데 사실, 진지하게 대답하려고 해도 뭐 할만한 이야기가 있어야지.

        

       “원망…… 했었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 이런 상황에 처하게 했는가. 어째서 그런 계획을 짜서 내가 이렇게 몇 번이고 시도해서 부수게 만들었는가. 처음부터 아이들을 조금이라도 행복하게 지내게 해줄 수는 없었나.”

        

       하지만 전부 부질없는 원망이다.

        

       어쨌건 우린 살아남았다. 황제가 저질러둔 문제는 너무 많아서, 아마 앞으로도 한참 동안 수습해야 할 거다. 정치적인 파장도 처리해야 할거고, 빠르게 바뀌는 시대에 발을 맞추기도 해야겠지.

        

       하지만, 결국 이제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을 뿐이다.

        

       “그러니까, 전부 갚던가 해요. 그 잘난 원대한 계획, 이번에는 조금 괜찮은 방향으로 써보자고요. 허튼수작 부리려고 해도 소용없어요. 어차피 당신이 쓸 수 있는 수족은 전부 독립했으니까.”

        

       내 말에 황제는 작게 웃었다.

        

       “역시 네게는 황제의 재능이 있어.”

        

       “무슨 끔찍한 소리를.”

        

       “진심이다. 나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이긴 하지만, 네 편을 만들어냈으니까.”

        

       이상하다.

        

       황제라면 분명 뒤에다가 이것저것 조건을 달아서 칭찬할 것 같은데.

        

       이번에는 아니었다.

        

       “다음 황제는 앨리스뿐이에요.”

        

       “……그래.”

        

       황제가 말했다.

        

       “앨리스도, 좋은 아이지. 재능도 있고.”

        

       이번에도 ‘하지만’ 같은 단어는 붙지 않았다.

        

       뭐, 그게 어디겠어.

        

       확실히 사람이 바뀌고 있다는 증거이긴 하니까.

        

       “……내일도, 낚시할까요?”

        

       내 질문에, 황제는 껄껄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

        

        

       휴가 내내 즐겁게 놀았다.

        

       다음날에는 생선을 구운 것이 아니라 돼지를 통째로 구웠다.

        

       물론 우리 모두에게는 돼지를 통째로 골고루 구워낼 능력 따위 없었기에 사용인들에게 다 맡기긴 했지만.

        

       맛있었다. 하긴, 맛이 없을 리가 없지.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었다.

        

       대부분은 어린 시절의 이야기였다. 앨리스가 어린 시절에는 어땠냐느니, 내가 어린 시절에는 어땠냐느니. 루카스나 제이든의 어린 시절 이야기도 들었고, 벨라와 데미안의 어린 시절도 들었다.

        

       아직은, 황실 바깥에 있었을 적의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다. 그런 이야기를 하려면, 그리고 들으려면 더 큰 용기가 필요할 거다.

        

       하지만, 이것으로 좋다.

        

       시간은, 아직 많았으니까.

        

       천천히— 시간을 들여서, 서로 알아가면 되겠지.

        

       그렇게, 다시 가족이 되어가는 것이다.

        

       *

        

       “…….”

        

       찰박찰박.

        

       고요한 호수 한가운데서, 물소리가 침묵을 깼다.

        

       이런 호수라면 보통 하나씩은 있는 작은 보트 위에, 나와 앨리스, 클레어가 타고 있었다.

        

       사실 세 사람이 타기에 부족함이 없는 보트이긴 했지만, 자세가 조금 어색했다.

        

       선수를 향해 등을 보이고 있는 나, 그리고 그런 나를 바라보는 클레어, 그리고 그 뒤에 앨리스.

        

       세 사람이 대화하기 위해서는 클레어와 앨리스 모두 살짝씩 몸을 움직여야 했다.

        

       호수 한가운데 떠 있으려니, 뭔가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은 기분이다. 저 멀리 저택에 사람들이 오가는 것이 잘 보이는데도.

        

       “……그래서, 어땠어?”

        

       나는 물었다.

        

       클레어와 앨리스의 눈이 나를 향했다.

        

       “즐거웠어?”

        

       “물론이야, 언니.”

        

       클레어가 먼저 대답했다.

        

       “다음에 또 갈 일 있으면 불러주면 좋겠다.”

        

       “그럴게.”

        

       나는 웃으며 대답하고, 뒤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는 앨리스를 보았다.

        

       “즐겁네.”

        

       앨리스는 말했다.

        

       “이게 일상인지, 아니면 황궁에서 지내는 나날이 일상인지, 잘 구별은 안 되지만 말이야.”

        

       “언젠가 저 애들을 다시 황궁에 들이게 되면 이게 일상이 되겠지.”

        

       “…….”

        

       앨리스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네가…… 해준 게 참 많아.”

        

       “…….”

        

       “정말이야, 언니.”

        

       클레어도 동참했다.

        

       “언니가 없었다면, 나는 나로 있지 못했을 테니까.”

        

       “나도 마찬가지고.”

        

       “…….”

        

       나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내가 아니었더라도, 두 사람 다…… 괜찮았을 거야.”

        

       시련이 있었더라도, 결국엔 이겨낼 수 있었을 거야. 클레어도 분명 다시 살아날 수 있었을 거고. 게임 스토리를 생각한다면 말이다.

        

       나는…….

        

       “아니.”

        

       앨리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 운 좋게 모든 일이 그냥 순순히 잘 풀려갔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건 우리가 아니야.”

        

       “…….”

        

       “언니, 언니를 ‘언니’라고 부르는 ‘나’는, 언니 덕분에 있는 거야. 앨리스 말이 맞아. 정말 운 좋게 내가 좋은 집안에서 자랐더라도, 지금의 나는 아니었겠지. 서로의 시간이 얽히고 얽혀서, 지금의 우리가 된 거잖아.”

        

       그래, 그랬다.

        

       나도…….

        

       나도, 분명히, 아무 일도 없었다면, 그냥 평범한 회사원으로 살아가고 있었겠지.

        

       이 아이들이 있었기에, 내가 ‘실비아 팬그리폰’이 될 수 있었던 거다.

        

       이제는 ‘원작’ 같은 거, 아무래도 상관없다. 게임에서 나왔던 고작 몇 년의 이야기가 아니라, 한평생의 이야기가 우리의 앞에 펼쳐져 있었으니까.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 살아가면서, 계속 상처 입을 거다.

        

       그리고 서로 보듬으며, 다시 회복해나가겠지.

        

       “……고마워.”

        

       기왕 남들 보지 않는 곳이니, 나는 두 사람에게 솔직하게 말했다.

        

       “정말 고마워. 내 삶에, 이렇게 나타나 줘서. 두 사람 다.”

        

       “……누가 누구한테 할 소리를.”

        

       클레어는 배시시 웃으면서 고개를 숙였다.

        

       앨리스는 괜히 시선을 호수 바깥쪽으로 돌렸다.

        

       “앞으로도, 계속. 함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럴 거야. 그럴 수 있을 거야, 분명히.”

        

       내 중얼거림에, 앨리스가 대답했다.

        

       그리고, 나는 그 대답을 믿었다.

        

       배에 걸린 노 끝에 닿은 물의 파장이, 앞으로, 앞으로 꾸준히 나아갔다. 저 멀리, 보이지 않는 곳까지.

        

       결코 다시 돌아오는 일 없이.

        

       계속.

        

       계속…….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지금까지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여러분이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절대 오지 못했겠죠.

    긴 글 읽어주셔서,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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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Status: Completed Author:
I got transported into a steampunk-themed JRPG developed by a Japanese game company. Somehow, I ended up becoming an executive in the villain faction. However,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excessively dilig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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