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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9

        

         흔히들 말하길, 무능한 아군 지휘관은 적보다 무섭다고 한다.

         …그렇다면 유능한 적군 지휘관은 얼마나 신중을 기해 상대해야 하는 존재인 걸까?

         

         “…….”

         

         지휘부 한 켠에 마련된 사무실로 나를 끌어들인 뒤, 마주앉은 앤 그리샤를 조용히 응시한다.

         

         나는 실종사건의 진상에 닿았지만 그녀의 진의는 이해하지 못했고.

         그녀는 내가 중요한 기밀을 빼냈다고 짐작은 하지만 물증은 없었다.

         

         허나 유리하다고 단언하긴 어려운 상황이다.

         법은 있지만 재판없이 오직 심판만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무죄추정의 원칙을 주장해봐야 소용없기에, 실권자인 앤의 몇 마디면 즉시 내 시민증에는 전과기록이 추가되거나… 심하면 처분될 것이다.

         

         하지만 꼭 여차할 때 살아날 방도가 있어서 만은 아니고, 그녀의 고백을 보거나 들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도저히 앤이 헬레나나 나를 어떻게 해보려고 여태 숨죽이고 있었다고는 믿지 않을 것이다.

         

         바보라고 나를 욕하기 전에, 이미 서로에게 등돌린 관계라고 봐도 무방할진대 아직까지도 온화한 표정을 띤 그녀에게서 나는 눈을 떼지 못했다.

         

         이윽고 앤의 말문이 트였다.

         

         “아샤… 이건 제가 오랫동안 정돈한 무대에요. 관객으로 참가하는 건 허락할 수 있어도, 멋대로 즐거움을 뺏어 가려고 하면 안 돼요.”

         

         “그게…… 무슨 소리…!”

         

         고대하던 선물상자의 포장지를 살며시 벗기듯 그녀의 손이 내 얼굴 쪽으로 뻗어오자 무의식적으로 목을 움츠려서 피했다.

         평소의 자애 넘치는 앤이었다면 모를까, 요사스러운 불꽃으로 차오르기 시작한 동공을 마주하니 거부감이 먼저 치솟았다.

         

         “여기서까지 거짓말하실 필요는 없어요. 고작 오 년 지기인 저도 레나만 보고 있으면 충동을 억누르기가 힘든데… 평생동안 옆에서 지켜봐 온 아샤는 얼마나 쌓아둔 게 많을까요…?”

         

         “내가 뭘 쌓아 뒀다는 거…?!”

         

         덥썩!

         

         아예 자리에서 일어선 앤이 내 뺨을 감싸 쥐고 시선을 강제로 맞추게 했다.

         

         “……기본적인 편의성 임플란트를 빼면, 몸에 철심 하나 박을 수 없는 저희는 아무리 노력해도 사회의 그림자일 수밖에 없어요. 항상 바닥을 기며… 무수한 발에 짓밟히고… 고난 끝에 빛을 받으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그림자.”

         

         “…….”

         

         응어리지고 뒤틀린 질투심, 열등감, 그리고 무엇보다 잘못된 방향으로 자라나 결실을 맺어버린 애증.

         폭주하는 마음에 끊임없이 부어지는 어두운 연료의 정체를 나는 너무 늦게 확인했다.

         

         “현대인은 누구나 아프고 미쳐 있어도… 겉으로는 멀쩡한 척, 완벽한 척 연기하느라 바쁜데. 레나는 언제나 아름답고 고상하게. 이상론으로 살아가면서도 그걸 관철할 능력이 된다니… 치사하지 않나요…?”

         

         많은 유저들에게 사랑받았던 헬레나 발렌타인의 근간은, 누군가에겐 견디기 힘든 빛이었다는 고해에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헬레나를 사랑한다고 했잖아? 그건 그럼 거짓말이었어?”

         

         무슨 바보 같은 말을 하는 거냐는 듯, 주체할 수 없는 열기를 뿜어내는 앤의 얼굴이 이마가 맞닿을 정도로 가까이 들러붙었다.

         

         상처를 헤집는 흉내를 내려던 게 아니다.

         그저 한 명의 청자로서, 미약한 손길로나마 앤의 이성을 짓누르는 짐을 덜어내려고 한 거였는데….

         

         “…사랑해요. 죽도록. 그녀에게 죽어도 좋을 만큼.”

         

         “그런…….”

         

         이건 충동적으로 꺼낸 주제가 아니었다.

         

         문득 불길한 상상이 떠올랐다. 헬레나의 근간이 이상론과 그걸 관철하는 신념이라면, 앤을 이루는 근간은 무엇일까.

         

         “저는 항상 깨끗하고 고결한 레나가 절망하는 걸 보고 싶어요.”

         “다치고 망가져서 쓰러진 레나의 눈물을 마시고 싶어요.”

         “레나도 새빨간 피를 쏟는지 보고 싶어요.”

         

         “읏?!”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도착적인 아집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하나같이 비틀린 정성이 가득 담긴 게 똑똑이 느껴졌다. 망가진 물건은 고치면 된다지만, 망가짐으로서 완성되어버린 사람을 대하는 방법을 나는 모른다.

         

         “피는… 대하기 어렵다고 하지 않았어?”

         

         “…? 맞아요. 옛날부터 피만 보면 끓어오르는 충동을 억제하기가 힘들어서요.”

         

         …거짓으로 자신을 완전히 감추는 게 아니라, 조금씩 내심을 흘리면서 드리운 장막의 안쪽을 살펴 주길 바란 요녀.

         오히려 모든 순간순간이 진심이었기에 알아차리는 게 늦었다. 믿음의 조각을 누군가에게 나눠줬을 때 찔릴 각오가 부족했다.

         

         그것도 아니면… 헬레나의 절친이라고, 막연하게 아닐 거라고 지레짐작했던 내 멍청함을 욕해도 좋다.

         

         “너무 제 얘기만 풀어놔서 미안해요…. 자, 이제 아샤 차례에요?”

         

         …뭐라고?

         

         반짝거리는 눈과 함께, 경청할 준비가 되었다는 자세를 보이는 그녀를 직시했다.

         

         “……하.”

         

         이제야 앤 그리샤가 여지껏 나에게 친절했던 연유와 오해를 정확하게 눈치챌 수 있었다.

         특별히 무장해제도 안 한 나와 선뜻 밀실에 들어와 이런 얘기를 꺼낸 것도, 허물없는 접촉과 태도도.

         

         처한 상황이 비슷했기에, 서로가 닮은 점이 많았기에 나 또한 헬레나에게 비틀린 감정을 품었을 거라고 간주한 폭거.

         지나친 사고의 비약에 무슨 대답을 돌려줘야 할지도 쉽사리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입을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하던 와중, 돌연 걸려온 통신에 해이해진 정신을 다잡았다.

         

         

         – …아샤, 미안한데 먼저 집이나… 어디 모텔에 돌아가 있을래? 언니가 실종자 중 한 명을 찾았는데… 일이 좀 커지는 것 같아서…. 어느 정도냐면… 음… 할아버지한테 새 신분을 부탁해야 할지도…? –

         

         

         …이런 망할. 내가 고의적으로 위험한 정보는 공유하지 않았음에도, 헬레나는 자력으로 폭풍의 중심에 다가서고 있었다.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뒤바꿀 원인을 겨우 다 알아냈지만… 이걸 순화해서 전달할 시간이나 기회는 전부 놓쳐버렸다.

         

         여하간 방금 그걸로 인해 얌전히 물러난다는 선택지는 사라졌다.

         어차피 이대로 가면 절망적인 파국만이 기다리고 있을 게 뻔하니, 앤을 바꿀 수는 없을지언정 이쪽의 마음도 부딪혀 봐야겠다.

         

         “어머…?”

         

         우선은 최대한 신중하게, 그녀를 자극하지 않도록 어깨를 밀어 다시 자리에 착석하게 만들었다.

         이기적인 자아에 도취된 앤에게 과연 내 말이 닿을지는 모르겠지만, 기어이 표출된 광기가 진짜 앤 그리샤라면 나도 정면으로 마주할 각오가 있었다.

         

         외면하고 싶을 정도의 광기에 물든 눈동자를 바라본 채로 단어와 문장을 정돈한다.

         

         “…질투라면 조금은 했어. 초인적인 재능에도, 그 올곧음에도. 사실 헬레나 발렌타인이라는 운명에게 사랑받는 영웅을 실제로 마주하면 누구나 한번쯤은 시샘할만 하다고 생각해.”

         

         “역시 아샤도…!!”

         

         “하지만 앤…!! 나는 당신처럼 헬레나의 몰락이나 변질을 바라지 않아. 역으로 그녀처럼 되고 싶다고, 이루기 불가능한 이상론을 쫓고 싶다면 모를까.”

         

         커지려는 불길에 단호하게 찬물을 끼얹는다.

         정말 작디작은 공감에도 화색을 띄우던 앤에겐 미안하지만 차마 그녀의 사상을 긍정할 수는 없었다.

         

         프로젝트와 그걸 숨겨온 인물에 대한 진상을 알게 되면 가장 상처받을 건 헬레나일텐데, 내 부정을 들은 앤은… 마치 믿었던 연인에게 배신당한 것처럼 처연해 보였다.

         

         “왜…? 어째서…? 아샤라면 분명 나와 비슷할 줄 알았는데…??”

         

         “…….”

         

         일순간에 공허해진 동공이 불안하게 흔들리고 목소리도 그에 못지않게 떨린다.

         

         도대체 왜냐고 물어봐도… 그게 나에겐 당연한 거니까 어쩔 수 없다.

         하루아침에 모든 현실이 뒤바뀌고 천지가 개벽했어도. 어떻게든 옳다고 믿는 가치를 지키고, 이상론을 고집해서 행복한 결말(Happy Ending)에 도달한 채 돌아가기로 마음먹었으니까.

         

         이것마저 포기한다면 나는 내가 아니게 된다. 절대로 양보할 수 없었다.

         

         “….”

         

         움찔움찔.

         바닥을 향해 축 쳐져 있던 그녀의 어깨가 요동친다.

         

         감히 흉악하다고 단언해도 좋을 기세가 서서히 풍기며, 실망감을 감추지도 않은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그래도 다행이네요. 저와 닮지 않은 아샤래도 충분히 어울리는 역할이 있어서.”

         

         “…그게 뭔데?”

         

         침착하게 되물으면서도 손을 슬금슬금 허벅지로 옮긴다.

         고개가 다시 이쪽을 향하고, 바뀐 각도 때문에 안경알이 번들거렸다.

         

         “…소중한 여동생이 수술대 위에 올라가 있는 것도 그림이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철컥…!

         

         곧바로 권총을 뽑아 들고 무방비하게 웃는 앤을 겨눴다.

         …설마 여기까지 와서도 내가 이 고약한 짓거리에 순순히 어울려줄 거라고 여겼다면 오산이다.

         

         어울리는 역할은 무슨…!

         간편한 인질 취급을 당하느니 차라리 지금 당장 내 손으로 이 악몽에 끝을….

         

         “…왜 그렇게 침착해?”

         

         만인에게 평등한 죽음이 코앞에 있는데도 그녀는 계속 웃고 있었다.

         꼭 발포해도 전혀 상관없다는 태도에, 내가 간과한 게 있나 싶어서 불편해졌다.

         

         

         “비록 제 무대는 엉망이 되겠지만…… 하나뿐인 동생이 친구를 죽이는 것도 레나에겐 감당하기 힘들테니까요.”

         

         

         “그건…?!!?!?”

         

         파지지직—!!

         

         …아, 이 멍청이. 이런 실수를 하다니.

         

         생각지도 못한 지적에 잠깐 총구가 내려가자, 눈 깜짝할 새에 능숙하게 뽑아진 테이저 건이 내 목덜미에 꽂혔다.

         

         강화 임플란트도 없이 저런 정교한 사격을 하기 위해 그녀는 얼마나 연습했을까… 하는 어이없는 고민이 암전되는 도중에 떠올랐다.

         노력도 안 한 채 시기만을 일삼은 둔재는 영원히 닿지 못할 솜씨였다.

         

         …가엾다. 더 나은, 더 낙관적인 미래가 반드시 어딘가에 존재했을 텐데.

         어찌 기계의 도움도 없이 자신의 힘과 노력만으로 메가 코프에 입사까지 한 앤에게는 보이지 않았을까.

         

         흐려져가는 시야에 어렴풋하게 흔들리는 갈색 머리카락이 보였다.

         

         이유는 설명하기 어려웠지만… 왠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는 동화가 갑자기 떠올랐다.

         

         자각하지 못한 사이에 쫓고 있던 게, 마음이 아픈 갈색 토끼인 줄 알았다면 나는 함부로 토끼 굴에 발을 들이밀었을까?

         

         

         …아니, 어쩌면 진자처럼 흔들리는 앤의 꽁지머리를 무심코 쳐다봤던 그날 밤에. 이미 그 광기에 홀렸을지도 모르겠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사랑의 형태는 사랑을 하는 사람의 숫자만큼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에피소드 내내 앤은 단 한번도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 너무 착하네요!

    그리고… 오랜만에(…) 정시연재를 지켰네요. ……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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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Status: Ongoing Author:
No matter how many times I repeated the episodes, I couldn't clear the true ending of the open-world shooting RPG, Neo Haven. Just when I thought I finally cleared the hidden true ending... they want me to actually clear it without any help from the game system or save/load fea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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