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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9

       함대 사령관은 잠시 침묵하더니, 이내 힘겹게 입을 열었다.

       

       ㅡ……제1제국에는 의지만으로 물리법칙을 초월한 결과를 이끌어내는 초능력자들이 있다고 들었소. 혹시 당신도…?

       [같잖은 소리를.]

       

       혹시 이 일련의 사태가 제국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사령관의 의혹에, 천마는 우습지도 않다는 듯 답했다.

       

       [초능력이라. 들어본 적 있다. 나면서부터, 혹은 어쩌다 후천적으로 상단전을 개통한 이들을 너희는 초능력자라 부른다지.]

       

       상단전. 무림에서 두뇌를 달리 칭하는 용어다. 백회로부터 인당으로 통하는 혈이 뚫리고, 그로 인해 두뇌가 통상의 인간은 절대 닿을 수 없는 이능을 각성하는 것을 무림에서는 ‘상단전의 문을 열었다’고 표현한다.

       

       [나의 이 힘은 하단전의 저 밑바닥부터 끌어올린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중단전과 상단전 또한 개통하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결과에 지나지 않지.]

       

       사령관의 의혹을 상쾌하게 부정해보인 천마는, 웃으며 상대를 압박했다.

       

       [무엇보다 난 은하정부니 제국이니 하는 너희들의 소꿉장난은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느니라. 죽기 싫다면 죽을 각오로 덤비거라. 2초 남았다.]

       ㅡ……

       

       사령관은 그녀가 말하는 ‘초招’라는 개념을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녀가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정도는 본능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ㅡ그러니까, 지금 우리에게… 선공권을 주겠다, 이 말이오?

       [그래. 지금은 멸망해 없어졌지만, 본래 중원에서는 고수가 하수에게 3초를 양보하곤 했지.]

       

       세 번에 한해 상대가 먼저 공격하도록 놔두고, 공격해왔을 때 받아치기만 하는 것.

       객관적으로 엄청난 실력 차가 있지 않은 이상에야 본고장인 중원에서도 무례하다고 욕 먹기 딱 좋은 짓이었지만, 그녀는 어차피 침략자의 입장이었던고로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ㅡ…지금 그 만용, 후회하게 될 거요.

       

       사령관은 그렇게 말하더니, 이내 고도를 올려 함대를 물렸다. 순식간에 대기권을 벗어나, 궤도 저편의 우주공간까지 후퇴한 함대가 행성을 향해 포신을 겨눴다.

       

       “전 함대, 주포를 최대출력으로 발포하라! 부포의 사용은 금한다!!”

       

       어차피 자잘하게 화력을 분산시켜봐야 아무 의미 없다. 그렇다면 전 출력을 주포 하나에 집중시켜 한 방을 최대한 묵직하게 쏘는 게 맞겠지.

       

       그 판단에 따라, 기함 HMS 킹 아서와 16기의 라운드 나이츠급 호위함이 각자 주포에 출력을 집중했다. 포신에 집중된 푸른 빛의 구체가 포악한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우주 공간에 공기는 없다, 없지만…

       

       핵융합로의 잉여 화력을 한 점에 모으는 것만으로도, 그 파괴적인 진동이 전함의 선체를 뒤흔들었다. 하나를 발사하는 것만으로도 대륙을 하나 지울 수 있는 파괴의 광선이, 무려 동시에 열여섯이나 쏘아지려 하고 있었다.

       

       그 위력은 분명 화성의 표면을 싸그리 불태우고, 착탄 지점을 비롯해 별의 절반 가량을 허물 수 있는… 그야말로 전략 병기.

       

       일개 함대가, 그것도 별다른 대가 없이 몇 번이고 발할 수 있는 것치고는 너무나도 거대한 힘이었다.

       

       “오오오…”

       

       지표면에서도 눈에 띌 정도로 강대한 물리력의 준동에, 웨일리는 감탄을 흘리며 기관차의 차창 너머로 하늘 위를 쳐다보았다. 저 하늘 위에 일렬로 늘어선 작고 푸른 16개의 빛이 마치 새로 탄생한 별자리처럼 보였다.

       

       “…이거 정말 괜찮은 거 맞아?”

       

       웨일리가 내심 저 진풍경을 ‘배틀크루저자리’라고 명명하고 있던 그때, 산군이 살짝 불안한 기색으로 웨일리에게 말을 걸었다.

       

       “지금 약간 손오공이랑 마인 부우 사이에 끼인 야무치 같은 심정을 느끼고 있는데. 이러다 고래 싸움에 등이 터져 죽는 건 아니겠지?”

       “…그렇게 불안하면 카메라부터 끄지 그러나?”

       

       웨일리의 지적에, 산군은 대체 언제 챙겨온 건지 모를 최고급 촬영 장비들의 세팅을 만지작거리며 답했다.

       

       “무슨 개소리야. 갈 땐 가더라도 유튭각은 뽑고 가야지.”

       “너 설마 그거 인터넷에 올릴 거냐?”

       “미쳤냐? 지금 은하정부 하나 꼬여서 이 난리가 났는데 이걸 유튜브 서비스 차원에 동네방네 소문낼 일 있어? 그냥 하는 소리지.”

       

       산군 대호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천마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래도 갤에는 올릴 수 있으니까 다행이긴 해. 이 역사적인 광경을 우리만 보고 있는 건 너무 안타깝잖아?”

       “…확실히. 그건 그래.”

       

       웨일리는 고개를 끄덕여 동의하곤 다시 시선을 천마에게로 돌렸다. 고작 십여 초 정도 기다렸다고 그새 지루해졌는지, 천마는 입을 가리며 하품을 하고 있었다.

       

       [느리군.]

       

       그 태연한 반응에, 웨일리는 그나마 조금 생기려던 불안감도 말끔히 털어냈다. 그는 무공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지만, 적어도 천마가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힘과 감각을 가졌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렇게 위험한 상황이면 적어도 자신과 산군 두 명은 따로 빼내려 들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저렇게 긴장감 없이 놀고 있지는 않았을 터.

       

       하여 웨일리가 언제나 그랬듯 다시금 팝콘을 꺼내 와작와작 씹고 있던 그때, 드디어 발포가 시작됐다.

       

       광자포. 우주전함의 핵융합 엔진에서 함선의 이동과 제어를 위해 필요한 최소한도의 출력 이외를 전투 목적으로 써먹는, 우주전 특화 병기.

       

       핵융합 반응로에서 뿜어낸 막대한 에너지에 그대로 방향성을 부여해, 포신 밖으로 직사하는 단순무식한 원리.

       

       그러나 그 단순함에 비해 지독하리만치 파괴적인 16줄기의 포격이, 화성을 향해 일제히 쏘아져 나갔다.

       

       

       

       

       

       하나하나가 지름만 수백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빛의 기둥이 내리꽂힘에, 천마는 즉각 반응하여 주먹을 내질렀다.

       

       별다른 이름조차 없는, 초식조차 아닌 일개 권격.

       

       첨단 기술이 자아낸 광선포와 일개 인간의 주먹이 맞부딪쳐ㅡ

       

       대기권을 찢어발기는 굉음이 터진 직후.

       

       [하지만 위력 하나는 봐줄 만하구나.]

       

       천마는 상처 하나 입지 않은 채, 오른손에 와닿은 찌릿한 감각을 즐겼다.

       

       [이런 감각을 느낀 게 대체 얼마만인지 모르겠군.]

       

       그리고 그 광경에, 윌슨 중장은 비통한 탄식을 흘렸다. 대기권을 벗어났음에도 여전히 뇌리에 들려오는 괴물의 목소리에 절망했다.

       

       “설마설마했는데. 아니기만을 바랬는데…”

       

       아무래도 총리는 그들을 최악의 사지로 보내버린 것 같았다. 이쪽을 정확히 바라보며 손가락을 하나 더 접어 ‘1초 남았다’고 통보하는 천마의 모습에, 윌슨 중장은 나지막이 뇌까렸다.

       

       “저자였군. 그토록 경계했던 플래닛 킬러는…”

       

       최대출력으로 발포한 16문의 주포의 위력은, 화성의 절반 가량을 날릴 수 있을 정도.

       그리고 지구의 질량은… 화성의 9배가 넘어간다.

       

       “저게… 인간이 맞는가? 저런 것을… 인간이라 불러도 된단 말인가?”

       

       정녕 신은 그들을 버렸단 말인가. 소녀의 형상을 한 파멸의 현신에, 윌슨 중장은 이를 악물며 전의를 다시금 다졌다.

       

       “아니, 아직이다. 설령 신이 우리를 버렸어도, 나라가 우리를 버렸어도…”

       

       나는 너희를 버리지 않았다.

       

       “…전 함대는 들어라. 지금부터 함장과 포격 담당 1명, 그리고 엔진을 통제할 공학장교 1명만 남아라.”

       “사령관님, 그 말씀은…”

       “……그래.”

       

       옆에서 듣고 있던 브렌트 대령의 걱정 어린 목소리에, 윌슨 중장은 결연한 어조로 답했다.

       

       “배를 버려라.”

       “사령관님!!”

       “어차피 저것은 우릴 살려보낼 생각이 없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야. 최소한의 생명을 판돈으로 도박을 걸어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 삼 초를 주겠다고 했으니, 항전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적어도 쫓아와서 다 죽이려 들지는 않겠지.”

       

       윌슨 중장은 이를 악물고 선언했다.

       

       “엔진을 폭주시켜라. 최대출력? 좆까라지. 그건 어디까지나 뒷일을 생각했을 때 이야기.”

       

       어차피 싸움에서 이기더라도 엔진을 잃은 함선은 그대로 허수 공간에 표류하게 된다. 지면 어차피 죽을 게 뻔했고. 그렇다면 최소한의 인원만 남는 게 어떻게 생각해도 맞는 일이었다.

       

       “그래, 보여주마. 한계를 넘어선 필살의 일격을.”

       

       이기면 그건 그것대로 은하정부의 화근을 제거한 셈이고,

       설령 진다 하더라도 최소한의 희생으로 은하정부의 체면은 세운 셈.

       그런 계산을 찰나에 마치고, 사령관은 자리에 다시 앉았다.

       

       “지금부터 5분 주겠다. 그 전에 전부 알아서 피난해라. 그 뒤로는 어떻게 되든 난 모른다.”

       

       일방적인 통지에, 승조원들은 잠시 서로를 마주보더니 이내 일제히 사령관과 함장에게 경례를 올려붙였다. 작별 인사는 그것으로 끝.

       

       함대마다 다급한 피난의 행렬이 이어지고, 아직 남아있던 수송기와 구명정이 승조원들을 태우고 전함 후미로부터 줄줄이 떠나갔다.

       

       “…자네들은 왜 안 가나?”

       

       수천의 승조원들 중 십수 명 가량은 떠나지 않고 컨트롤 룸에 남기를 택했다. 사령관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묻자, 그들은 제각기 이유를 댔다.

       

       “어차피 미혼에 부모님도 노령으로 돌아가셨는데, 돌아가봐야 뭐하겠습니까?”

       “구명정에 자리가 없던데요. 가위바위보해서 졌습니다.”

       “가슴이 웅장해지는 역대급 명장면을 안 보고 내빼라고요? 죽는 한이 있어도 직관하겠습니다.”

       

       참으로 병신 같으면서도 가슴 훈훈해지는 이야기에, 사령관은 눈가를 쓱 닦고는 입을 열었다.

       

       “그래. 이왕 죽을 거, 이긴 병신이 되자고.”

       

       저 오만한 여자에게, 인류의 저력을 보여주지 않고서야 죽어서도 마음 편히 성불할 수 없다.

       

       “플래닛 킬러? 하. 우리라고 그런 걸 못할 줄 아나?”

       

       공학장교가 무덤덤한 얼굴로 자판을 건드림에, 엔진이 과열되며 함내의 온도가 점점 올라가기 시작했다.

       

       “깨닫게 해주겠다. 과학의 힘을. 수천 년에 걸쳐 쌓아올린 문명의 힘을.”

       

       남은 이들과 함께 창 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사령관은 유언을 이어나갔다.

       

       “이것이, 진정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다! 앞으로 나아가려는 인류의 총의다!!”

       

       사령관은 이 한 방이 부디 상대에게 닿기를 바라는 간절함을 담아, 성대를 쥐어짜내다시피 혹사시켰다.

       

       “어디 한번, 받을 수 있으면 받아보거라! 천마ㅡ!!!”

       

       이번 일격에는, 이전처럼 긴 시간은 필요하지 않았다. 통제를 포기하고, 핵융합로에 모든 연료를 쏟아부어, 단기간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폭발적인 화력을 발생시킨다.

       

       중요한 것은 그 화력을 무작위로 발산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방향을 향해 쏘아내는 것. 포격 담당이 주포의 일그러짐까지 계산해 사전에 설정해둔 방향으로, 마침내 포문이 불을 뿜었다.

       

       화륵ㅡ

       

       엔진은 물론이고 동력부 인근까지 살라먹기 시작한 순수한 에너지 덩어리가, 비좁은 주포에 그 초월적인 몸집을 비집어넣어ㅡ 그대로 발사한다.

       

       “……!!!”

       

       아까의 포격이 열여섯의 작고 푸른 별처럼 보였다면.

       이번의 것은, 마치 하늘에 순간이나마 열여섯의 태양이 뜬 것처럼 보였다.

       

       하늘을 가득 메운 강렬한 주황색 빛무리에, 그 웨일리마저 안색을 딱딱히 굳혔다.

       기함을 포함한 열여섯의 전함이 퇴각을 포기하고 토해낸 일격은, 편린이나마 태양의 권능을 재현하는 데 성공했다.

       저런 걸 직격당했다간, 화성은 물론이고 지구라 할지라도 단번에 녹아내릴 터.

       행성을 부수는 초인에게 대항하기 위해, 13함대는 행성을 녹이는 병기를 대령했다.

       

       “미친…”

       

       산군이 죽음을 직감하여 외마디 한탄을 내뱉은 그때.

       천마는 그저 물끄러미 하늘을 쳐다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강하구나. 지금껏 만나온 그 어떤 상대보다도.]

       

       지금껏 무림에서 만나온 그 어느 무인도, 그 어느 집단도 이런 힘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그나마 예외라 칠 수 있는 혈마 또한 마찬가지.

       

       그야말로 인생을 통틀어 처음으로 만나보는 강적이었다.

       이것이, 과학 기술의 산물인가. 문명의 저력인가.

       

       [허나… 이미 충분히 보았다. 목숨을 도외시한 일격도, 하나된 사람들의 총의 타령도.]

       

       주체가 과학이냐, 무공이냐. 고작 그 차이를 제외하면, 이미 중원 무림을 침공할 때 전부 질리도록 겪어보았음이다.

       

       [정파 놈들도 그랬지. 문파와 세가의 쓸데없이 긴 역사를 자랑하고, 그들이 빚어낸 무학을 뽐냈다.]

       

       그리고 중원 무림의 정수나 다름없는, 그 모든 고상한 성취들은.

       전부, 단 한 사람의 발 아래에 짓밟혀 으깨졌다. 인고의 노력으로 맺어낸 달콤한 과실만을 모조리 수확당해 빼앗기고 말았다.

       

       [누가 그랬더냐, 개인은 집단을 이길 수 없다고. 한 사람의 생애는 인류가 축적한 세월의 벽을 넘어설 수 없다고.]

       

       기실 누가 그랬다 할 것도 없었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모두가 그것을 상식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으니까.

       그리고 천마는 그 ‘상식’을,

       절대불변의 진리로부터 근거 없는 미신으로 끌어내리기로 정했다.

       

       생각에 가까운 속도로 쏘아져내린 파괴의 권화에, 천마는 그저 맨손을 갖다대었다. 지금껏 힘을 힘으로서 상쇄하던 강强의 묘리가 아닌, 힘을 교묘하게 비트는 유柔의 묘리.

       검을 상대할 때와 본질적으로는 다를 게 하나도 없었다. 열여섯의 태양을 부드러이 움켜쥔 왼손이 반원을 그리며 오른손과 접했다. 오른손 또한 마찬가지로 반원을 그리며 막대한 힘의 파도를 왼손으로 다시 건넸다.

       

       [도가의 말코도사들은 말했다. 대도大道는 곧 태극太極이라고.]

       

       세상 모든 것은 상호의존적이니, 별개의 것 같아도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 세상의 섭리라. 음과 양, 낮과 밤, 삶과 죽음. 서로가 상종 못할 상극에 있는 것 같아도, 서로가 있기에 비로소 완성됨이라.

       

       그러나 무당의 도사들이 그토록 강변하던 부드러움의 이치는, 천마의 손에서 태극이라는 미명 하에 재해석당했다. 조화와 상생은 어디에도 없고,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오직 천마뿐.

       

       본래라면 일대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화성을 통째로 녹여버려야 했을 작은 태양은, 천마의 손에 닿은 순간 방향을 교묘히 비틀려버렸다. 

       

       하나의 태양이 그녀의 손에 의해 다른 하나의 태양과 충돌하고.

       그렇게 힘의 방향을 유도당한 두 개의 태양이 다른 두 개의 태양과 충돌하고.

       다시 넷이 넷과, 여덟이 여덟과.

       

       눈 깜짝할 새에 열여섯의 작은 태양은 서로가 서로를 밀치는 원형의 진을 그리며 갇혀버리고 말았다. 적의 힘을 이용해 또다른 적을 치는 이화접목의 묘리가, 하나의 새로운 순환계를 그렸다.

       

       [불가의 땡중들은 말했다. 삼라만상森羅萬象은 무생無生이라고.]

       

       없던 것이 생겨나고 있던 것이 태어남이 아니니, 세상 모든 것은 그저 서로가 자리를 바꿀 뿐이라. 하여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으니, 그 이치를 일러 무생이라 하더라.

       

       그러나 소림의 승려들이 그토록 강조하던 공空의 이치는, 천마의 손에서 무생이라는 단어를 빌어 변질되었다.

       

       닫힌 태극 사이에서 정처 없이 공전하던 열여섯의 인공 태양은,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다가 이내 그녀가 마련한 출구를 향해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세상 만물이 불생불멸하여 그저 자리를 바꿀 뿐이라면, 그 자리를 바꾸는 것은 바로 이 몸의 소관이라.

       

       은하정부군에 의한 회심의 일격은, 천마에 의해 멋대로 침식당해 도리어 쏘아낸 이들에게 돌아갔다. 힘은 힘에 불과하며, 그 방향도 용도도 그녀가 규정할지니.

       

       태극의 기준이란 천마와 그 대적자에 불과하노라.

       

       [보라, 나의 오롯한 의지로 무無에서 태극太極이 태어나니生.]

       

       

       천마신공天魔神功 번외식番外式

       

       

       무생태극無生太極

       

       

       적의 힘을 그대로 되돌린다는, 어느 의미로는 무당파의 주특기나 다름없는 기교의 극의. 중원에서 약탈한 전리품을 과시하듯, 그녀는 일격으로써 명문 정파에 대한 헌사와 조롱을 겸했다.

       

       “……뭐 저런 양심없는ㅡ”

       

       전함들의 엔진은 이미 폭주로 인해 소실된지 오래였기에, 함대로서는 되돌아온 포격을 회피할 수도, 막아낼 수도 없었다. 사령관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투덜거린 직후.

       

       이글거리는 파멸의 불에 의해, 도합 16기의 우주전함은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증발해버렸다.

       

       자신이 초래한 파멸에 녹아내리는 함대의 모습을 보며, 천마는 손을 툭툭 털었다. 과연 지금껏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강렬한 열기에 손바닥이 살짝 데긴 했지만, 이 정도라면 잠깐 기를 손에 돌리는 것만으로도 순식간에 나을 터였다.

       

       “……”

       

       허나 어째서일까. 큰 피해 없이 적이 쏘아낸 필사의 일격을 막아내고서도, 천마는 낯빛이 어두워지는 것을 금할 수가 없었다.

       

       적의 수뇌부는 목숨을 내버리면서까지 자신에게 한 방 먹이려고 들었다. 분명 살려고 발악할 여지 자체는 남아있었을 텐데도.

       

       목숨보다 소중한 것. 그것이 과연 그들에게 있어선 국가였을까, 긍지였을까, 그도 아니면 그 이외의 무언가였을까.

       

       그녀는 지금껏 패배를 모르고 살아왔다. 언제나 이겨왔고, 그렇기에 세상이 멸망한 지금까지도 살아남은 것이지만.

       

       글쎄. 더 높은 하늘을 향해 그저 하염없이 솟구치다, 무심코 내려다본 아래에. 이미 경쟁자는 커녕, 아무도 보이지조차 않을 정도로 높이 올라왔다는 사실을 체감할 때면.

       

       분명 이긴 사람은 그녀일 터인데,

       원인 모를 공허함과 쓸쓸함이 가슴 속을 채우고 마는 것이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천마쟝 외로움을 많이 타는 거시야요…
    아 그리고 천마님은 딱히 데우스 엑스 마키나 같은 게 아닙니다…!
    우주는 넓고 숨은 강자는 존나게 많은 것입니닷…!! 그 강함이란 게 꼭 무력을 기준으로 한다는 법도 없구요! 그 부분에 대해선 아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까마귀맛쿠키님 후원 감사합니다!!! 천마님이든 용사님이든 결국에는 둘 다 웃게 될 겁니다!

    원래는 훨씬 빠르게 올리려고 했는데, 쓰다보니 많이 늦고 말았네요! 죄송합니다 흐규흐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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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llery for Loners After Demi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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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FLAD 종말 후 외톨이 갤러리
Score 4.1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A community for the last people who survived on Earth. This is ‘The Lonely Gallery After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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