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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9

       *

        

        

        검이 달빛을 흩어내며 내려 꽂힌다. 강맹한 기세, 흠잡을 데 없는 자세다.

        

        훌륭하군. 이반은 고개를 끄덕이며 도끼를 빗겨내 검날을 잡아챘다.

        

        

       -카앙!

        

        

        도끼 끝에 걸린 칼날이 휘우뚱 궤적을 잃어버리며 스러졌다. 이반은 바닥에 처박힌 칼날을 들어올려 상태를 살폈다.

        

        

        “어때요?”

        “이 정도면 괜찮군.”

        “헤헷, 내가 뭐랬어요. 배우는 건 또 금방 한다니까?”

        “그렇군.”

        

        

        이반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칼을 던졌다.

        

        이자벨은 빙글빙글 도는 검을 공중에서 정확히 낚아채고는 씩 웃었다.

        

        

        “아저씨가 보기에 어느 정도에요? 제 나이 정도에 우리 아버지랑 비교해서는요.”

        “막시밀리앙과 비교하자면 대륙 누구를 가져와도 모자라지.”

        

        

        이반은 이자벨의 당돌한 말에 피식 웃고 말았다.

        

        볼을 부풀리며 투덜거리는 이자벨에게 다가가, 땀에 푹 젖은 목덜미에 수건을 걸어주고는 머리를 꾹 눌렀다.

        

        

        “앞서 걸었던 이들의 그림자에 매몰되지 말아라.”

        “오, 멋진 말! 아저씨가 생각한 거에요?”

        “아니, 엔리케가 해주었던 말이다.”

        

        

        선왕의 그림자에 매몰되었던 ‘작은’ 이반에게 해주었던 말이다.

        

        누군가를 동경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세상은 넓고, 뛰어난 이들은 많으니까.

        

        하지만 그런 이들을 하나하나 따라하려 노력하는 것은, 그저 어설픈 모방에 그치므로.

        

        엔리케는 이반에게, 그리고 이반은 지금의 이자벨에게 이렇게 말했다.

        

        앞서 걸었던 이들의 그림자에 매몰되지 말고, 자신의 길을 향해 스스로의 발을 내딛어라.

        

        

        “음음. 좋은 말이긴 한데, 어쩐지 엔리케 교수님이랑 이미지가 좀 안 맞네요!”

        “그 시절 엔리케는 진지한 사람이었지.”

        “아저씨는요? 그때도 지금처럼 ‘음’, ‘그렇군’, ‘아니다.’ ‘바쁘다.’ 이런 말만 하셨나요?”

        “음….”

        

        

        그 시절이라.

        

        이반은 잠시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별 다를 것 없었다.”

        “재미없어요! 어휴, 정말. 감성이란 게 전쟁통에 같이 죽었나? 아저씨 마음 속엔 대체 뭐가 살고 있을까요. 맞춰볼게요. 도끼, 힐링 포션?”

        “시덥잖은 소릴.”

        

        

        이반은 피식 웃으며 이자벨의 머리칼을 한 차례 헝클여주고는 일어섰다.

        

        실습 테러 사건 이후, 이반은 이자벨을 붙잡고 매일 밤마다 교육을 진행하고 있었다.

        

        선후 관계를 조금 더 따져봐야 하긴 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자벨이 이반을 붙잡고 교육을 부탁했던 것이다.

        

        이른바 ‘초인의 영역’에 도달하기 위한 특훈이다.

        

        

        “자, 이제 다음 단계 해요. 빨리 빨리.”

        “그래.”

        

        

        이자벨은 잔디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녀는 고요하게 숨을 내쉬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빨리 손 얹어요!”

        “이젠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을 텐데.”

        “아이 참, 아직 익숙하지 않단 말이에요.”

        

        

        초인의 영역이란, 마력을 흘려 신경계를 강화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

        

        신체 각부의 신경망에 마력을 투사시키는 감각, 그 자체를 기르기 위해서. 처음 이반은 그녀의 등에 손을 얹고 마력 조사를 도왔었다.

        

        그의 마력을 흘려 넣으면서 길을 열어주고, 감을 잡기 수월하도록 마력을 인도해주는 행위다.

        

        물론 이건 기초 중 기초에 해당한다. 감을 잡았다 하더라도 실제로 스스로 운용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며, 그렇게 강화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그 속도에 맞춰 몸을 움직이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니까.

        

        

        “흐으으에….”

        “입을 다물고 감각에 집중해라.”

        “하지만 후으으… 따듯한걸요….”

        

        

        이반이 마력을 불어넣자, 이자벨은 흐물흐물 풀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안 그래도 요새 유리도 바쁘고 에시도 바빠서… 쉬려고 해도 같이 놀 친구가 없었단 말이죠….”

        “이건 쉬는 시간이 아니다.”

        “아닌데, 쉬는 시간 맞는데.”

        

        

        이자벨은 눈을 가늘게 뜨며 이반을 올려봤다.

        

        장난기 넘치는 눈으로 그를 흘기며, 그녀는 얄밉게 웃었다.

        

        

        “아저씨는 지금 그럼 저랑 일하고 있는 거에요?”

        “가르치는 거지.”

        “나는 그냥 쉬는 걸로 할래요. 아저씨랑 같이 노는 시간인데 뭐.”

        “훈련 강도에 대해 재고해볼 필요가 있겠군.”

        

        

        이반은 다소 충격을 받았다. 그는 자기객관화가 대단히 잘 되는 사람이었으므로, 그의 교육은 엄정하고 냉혹하며 까다로운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자평할 수 있었다.

        

        이게 노는 수준이었다고? 과연 막시밀리앙의 딸인가.

        

        이반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던 이자벨은, 굉장히 한심한 무언가를 바라보는 표정을 짓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기지개를 쭉 펴며 일어섰다.

        

        

        “됐어요. 으그윽, 오늘도 잘 배웠습니다.”

        “음.”

        “아 맞다. 아저씨, 비밀 요원 일 아직 하시죠? 최근에 제가 이상한 얘길 좀 들어서요.”

        “이상한 이야기?”

        “네! 이거 말해준다는 걸. 그, 왜 있잖아요. 디안 경이 며칠 전에 우리집 앞에서 이상한 놈 하날 봤다던데요.”

        “이상한 놈?”

        “네! 담벼락 구석에서 우리집을 한동안 멀뚱히 바라보고 있길래, 뭐하는 사람인가 싶어서 쫓아가봤다가, 놓쳤대요.”

        

        

        

        이반은 그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디안, 틸레스 왕정에서 그녀에게 붙여 둔 호위무관이다.

        

        그런 그가 사람을 눈 앞에서 놓쳤다라…. 학생이나 민간인 수준은 아니란 뜻이다.

        

        

        “아저씨 동료 분들은 아니시죠?”

        “아니다.”

        

        

        방첩사령부는 그런 식으로 일하지 않는다.

        

        

        “내가 알아보마. 신경 쓰지 마라.”

        “그… 제가 사는 집을 감시하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신경을 안 쓸래야 안 쓸 수가 없는 걸요?”

        “그건 내가 신경 쓸 일이지. 학생은 공부에 집중해야 한다.”

        “어….”

        

        

        진짜 가끔 이렇게 훅 치고 들어온다니까.

        

        이자벨은 저벅저벅 걸어 나가는 이반의 뒷모습을 한동안 노려보다가 휴,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쉽지 않다. 정말.

        

        그녀는 피식 웃고는 목에 걸린 수건을 꼭 끌어안았다.

        

        

       *

        

        

        이자벨이 누군가에게 감시당하고 있다.

        

        당연히 방첩사령부의 소행은 아니다. 방첩사령부는 그런 식으로 일을 하지 않을 뿐더러, 이자벨과 용사 파티 자제들은 이반의 업무 영역이기 때문이다.

        

        드미트리는 결코 그의 심기를 건드릴 짓을 하지 않는다.

        

        이반은 밤거리를 걸으며 생각에 잠겼다.

        

        

       -누군가, 또는 어떤 집단이 용사 파티 자제들을 감시하고 있다.

       -드로안의 다섯 야를 중 하나가 아카데미에 폭탄 테러를 시도했었다.

        

        

        이 두 사건에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후자의 경우는 분명 에시디스의 목숨을 노린 짓이다.

        

        에시디스가 죽거나 다치면, 에이나르 대왕이 움직인다.

        

        그리고 에이나르와 그의 형제들은, 지금 드로안 본토에 있는 가장 강력한 병력이다. 이들이 움직일 경우 드로안은 빈집이나 다름 없다.

        

        야를 중 하나가 노리는 것이 그것이다. 에이나르의 부재를 틈타 왕국을 전복하려는 수작이겠지.

        

        

        ‘거기에 이자벨이 얽혀 있다고?’

        

        

        과민반응일수도 있다. 전혀 다른, 별개의 사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반은 무언가 찜찜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의 감은, 20년이 넘는 전쟁 속에서 길러진 것이다.

        

        

        ‘모르드가 있는 이상 밤에 에시디스는 안전하다.’

        

        

        모르드는 고아원 봉사활동을 졸업하고 다시 에시디스의 전속 호위무관으로 돌아갔다.

        

        그가 있는 이상, 만일의 사태가 터지더라도 이반이 도착할 때 까지 시간을 버는 것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고도 남는다.

        

        그러므로, 해가 진 뒤에 다소 안온하게 사태를 지켜보고 있었다.

        

        

        ‘낮에는 에시디스를 지켜보고, 밤에는 이자벨을 지켜봐야겠군.’

        

        

        이반은 스케줄을 정리하며 원장실로 향했다.

        

        처음부터 쉬울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방첩사령부에서 두 달 동안 꼬리를 잡지 못한 범인을 찾아야 하는 일이다.

        

        물론 방첩사령부가 이 일에만 온전히 신경을 몰두하고 있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국가 기관의 수사력이 해내지 못한 것을 개인이 처리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래왔듯이.

        

        할 수 있는가, 할 수 없는가. 그 질문은 중요하지 않다.

        

        절멸부대에겐 단 한 가지 명제만이 진리였으니.

        

        해야 하는가, 아닌가.

        

        해야 한다면, 고민하지 않는다. 다만 해낼 뿐.

        

        이반은 원장실에 걸린 부비트랩을 하나하나 해체하고, 그의 자리로 돌아가 마력등을 켰다.

        

        밤 늦은 시간까지 원장실에선 보고서를 정리하고 장부를 손 보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

        

        

        에시디스는 타박타박 교정을 가로질러 밴치로 향했다.

        

        기사학부 야외수련실 옆 밴치는 이자벨, 유리와 항상 점심을 함께 먹던 그녀들의 아지트다.

        

        오늘도 피곤했다. 수업은 어렵고, 동기들은 냉랭하고, 세상은 각박하고….

        

        에시디스는 도시락 가방을 꼭 끌어 안은 채로 벤치로 다가가다가,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아, 에시! 오늘은 좀 일찍 왔네!”

        “그, 어…? 무슨…? 지금 이게 무슨 일…? 이야…?”

        “아, 인사해! 오늘부터 당분간 점심 같이 먹기로 했어. 처음 보지? 아저씨야!”

        

        

        이자벨이 활달하게 웃으며 ‘그’의 등을 팡팡 쳤다.

        

        

        “하여간 진짜 같이 밥 한번 먹기 되게 힘든데, 오늘 만난 김에 같이 먹자고 했더니 대뜸 그러자고 하는 거야, 참나. 무슨 바람이 부셨는지 귀한 발걸음 해주셔서….”

        

        

        이자벨은 한껏 텐션이 오른 상태로 쫑알거렸다. 에시디스의 귀엔 그녀의 목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멍하니 이반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그 옆에 앉은 유리에게 시선을 보냈다.

        

        

       -이게 무슨 상황이에요?

       -저도 궁금하긴 해요.

        

        

        스토커라는 게 원래 먼 발치에서 바라보면서 음습한 욕망을 풀어내는 그런, 뭔가 좀 소극적이지만 악의 가득한 그런 사람들 아니던가?

        

        왜 이렇게 과감하게…?

        

        그녀는 조심스럽게 벤치에 앉아 도시락을 꺼냈다. 그리고는 지잉, 이자벨의 곁에서 묵묵히 도시락 상자를 꺼내 드는 이반을 노려보았다.

        

        벨라가 저렇게 좋아하는데, 다른 여자를 꼬시려고 해?

        그리고, 그 꼬시는 방법이 감시…? 진짜 최악이잖아.

        

        한참동안 에시디스의 시선을 받아내던 이반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잠시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고, 에시디스가 지레 겁을 먹고 시선을 내릴 때 쯤에.

        

        

        “…?”

        

        

        그녀의 도시락, 소중한 치킨 샌드위치가 놓인 도시락 상자 위에 무언가가 턱, 올라왔다.

        

        

        “이게…? 뭐, 뭐에요?”

        “채소다.”

        

        

        이반은 도시락을 턱턱 꺼내 이자벨과 유리에게 각기 다른 식단을 제공하며 말했다.

        

        

        “평소에 탄수화물과 단백질… 빵과 고기만 먹더군. 영양 균형이 무너지기 쉬운 식습관이다. 채소와 과일, 견과류를 챙겨 먹도록.”

        

        

        이반은 섬세하고 사려 깊은 사람이므로, 이 전근대 사회의 어린 아이들조차도 이해하기 쉽도록 풀어 설명했다.

        

        그는 고아원을 운영한다. 그리고 고아원은 말 그대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거두어 먹이고 가르치고 키우는 곳이다.

        

        식단을 짜고, 휴식과 학업의 스케줄을 관리하고, 아이의 재능과 취미, 자질을 극대화 시키는 것은 이반의 ‘본업’이었다.

        

        어떤 종류의 뿌듯함마저 느끼며, 이반은 유리와 이자벨에게도 도시락을 나눠 주었다.

        

        

        “와 대박! 아저씨 고마워요!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뭐 좀 준비해 보는 건데. 제가 또 요리를 참 잘해요. 혹시 아저씨 요리 잘하는 여자애는 어떻게 생각해요?”

        “요리를 잘한다는 생각.”

        “진짜 죽이고 싶네….”

        

        

        활기차게 떠드는 이자벨과 달리, 에시디스는 공포에 잠긴 눈으로 이반을 바라봤다.

        

        

        ‘매일 먹는 메뉴까지 감시하고 있었다고…?’

        

        

        

       

       *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늦어서 정말정말정말죄송합니다…….

    어제 밤에 오늘치분 쓰다가 잠들어버렸어요… 근데 일어나고 보니까 이게 글이라고 쓴건지, 이걸 돈 받고 팔아도 양심은 무방한지, 너무 혼란스러워서 다 지우고 새로 쓰다보니까 세상에 시간이 이런맙소사…!!

    내일 분은 저녁 시간대에 정상적으로 업로드 하겠습니다!!

    죄송함을 담아서, 빠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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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프롤로그에서 30년이 흘렀다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got transmigrated into a game I’ve never seen before. I thought it was a top-notch RPG and spent 30 years on it. I retired as a war hero and planned to spend my remaining time leisurely. But it turns out, it was an academy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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