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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9

       

       

       

       

       

       

       

       “어우… 머리야.”

       

       지끈거리는 머리에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몸을 일으켰다.

       아직 발효 공법이 서툴러서 그런가.

       이세계 맥주는 현대의 맥주보다 숙취가 심한 듯 싶었다.

       그나저나.

       

       “이불은… 누구 거지?”

       

       소파 등받이에 반건조 오징어처럼 널려있는 렌들러 영감이 덮어준 것은 아닐 터.

       아마도 이 자리에 없는 레이첼이 가져다준 거 같은데, 어제의 기억이 없어 모를 일이었다.

       우선 몸을 일으켰다.

       기침을 하고도 다시금 잠에 든 렌들러 영감께 이불을 덮어주었다.

       

       딸각.

       

       응접실을 나섰다.

       앞을 지키고 있던 호위병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간밤에… 무슨 일 없었나?”

       

       기억이 없다.

       정황상 특별한 일은 없었던 듯 싶으나, 혹여나 원작 엘든의 술버릇이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난동을 부리거나, 혹은 시녀들을 불러 강간을 했거나, 등등.

       

       “어떠한 일 말씀이십니까?”

       “뭐… 밤새 소란스럽지 않았나 싶어서.”

       “아무 일 없었습니다.”

       “그런가. 다행이로군.”

       

       휴우.

       안도의 한숨을 내쉰 후, 재차 물었다.

       

       “그러고 보니 이불이 덮여있던데, 누가 가져다 준 거지?”

       “레이첼 경입니다.”

       “…그래?”

       

       역시 레이첼이었나.

       무뚝뚝이 스승님께서 맛이 가버린 제자님이 고뿔에 걸릴까 신경쓰였나보다.

       매사 무신경하고 무덤덤해 보였는데, 의외로 다정다감한 캐릭터인가.

       아니면 훈련에 재미 들린 스승께서 제자의 감기로 인해 그 재미를 느끼지 못 할까 싶어 해낸 호의일까.

       어쨌든.

       이불을 덮지 않았다면 바닥의 냉기 때문에 아마 고뿔에 걸렸을 터다.

       스승님께 감사 인사를 전해야겠다, 라는 생각을 하며 걸음을 옮겼다.

       

       쓰린 속을 달래줄 해장이 필요했다.

       몬스터 요리책에서 본 적이 있다.

       해장에 그렇게 좋다는 ‘미노타우로스 선지국’을.

       지금 이 순간, 그 요리가 가장 절실했지만, 애석하게도 그것을 만들어줄 요리사도, 재료도 없다.

       우선은 알코올이 안 들어간 아무거나라도 마셔야 할 터였다.

       

       그리 어그적대는 걸음으로 다과실로 향했고.

       

       “어?”

       

       다과실에서 티스푼으로 찻잔을 휘젓고 레이첼을 볼 수 있었다.

       레이첼 역시 잠에서 막 깬 건지, 수면용 순백의 실크 드레스 차림에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왜인지 인사를 건네기 겁이 났다.

       필름이 끊긴 사이,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르니까.

       혹여 술에 취한 손이 무례를 범했을지 모를 일이었고, 술에 취한 주둥이가 어떤 말을 했을지 모르니까.

       

       다행히.

       

       “아, 일찍 일어나셨군요.”

       

       나를 본 레이첼이 늘 그랬듯, 평온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왔다.

       별다른 기색이 없다는 건, 별다른 일이 없었음을 뜻하겠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선, 다과실로 들어섰다.

       물론 묘연히 남은 불안을 깔끔히 해소할 필요는 있었다.

       

       “어젠… 별 일 없었지?”

       

       레이첼의 옆에 서서, 그리 태평스레 묻고는 물잔을 집었다.

       왜인지 속이 타는 듯한 느낌.

       냉수로써 그것을 서둘러 진화하고 싶었는데, 별안간 무언가 건네져왔다.

       티스푼으로 휘젓고 있던 찻잔이었고, 레이첼이 내 앞으로 밀어준 것이다.

       그리고선 대답 대신, 새로이 꺼낸 찻잔 하나에 재차 물을 부으며, 건넨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레이첼이었다.

       

       “아버지께서 과음하신 다음날 꼭 드시던 겁니다.”

       “응?”

       “꿀물입니다. 아카시아꿀에 물을 타고 레몬즙을 소량 첨가한 것입니다. 해장에 도움이 될 테니 드십시오.”

       

       생각지 못한 꿀물의 등장에, 자네 아버지도 현대에서 온 빙의자인가? 라는 실없는 소리가 튀어나올 뻔했다.

       간편하면서도 숙취 해소 효과는 뛰어난 꿀물.

       레이첼의 아버지께서 숙취 해소에 일가견이 있는 분인 듯 싶다.

       

       “…고마워.”

       

       찻잔을 들었다.

       다소 얼떨떨했다.

       렌들러 영감님이 아닌, 레이첼이란 무뚝뚝이 여기사에게 꿀물을 받게 되리라곤 눈곱만큼도 예상치 못 했으니까.

       어젯밤 모종의 일이 있었던 걸까.

       레이첼은 분명 엘든이란 고용주에게 따스한 호의를 단 한번도 베푼 적이 없는 엄격한 호위기사였는데 말이다.

       

       홀짝.

       

       꿀물을 한모금 마셨다.

       꿀의 달콤한 맛에 레몬의 상큼함이 곁들어진, 훌륭한 맛이었고 숙취 해소를 넘어 피로감마저 회복되는 듯 했다.

       

       “…어떠십니까?”

       

       조심스레 묻는 레이첼.

       그런 그녀를 보며, 따봉을 날려주었다.

       

       “한모금 만에 숙취가 가시는 거 같은데?”

       

       그리고 그제야 경직된 레이첼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피었다.

       처음 보는 미소였다.

       원작 엘든의 기억 속에도 레이첼의 얼굴은 늘 무뚝뚝했었고.

       물론 알아채기 힘든 희미한 미소였지만 말이다.

       웃는 방법을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다행히 자색의 여기사께서 미소를 지을 줄 아는 모양이었다.

       

       레이첼이 꿀물을 탄 제 찻잔을 들었다.

       그리곤 나를 바라보며 흐뭇한 얼굴로 말했다.

       

       

       “상처가 깨끗이 아무셨군요.”

       “응?”

       “그럼 저는 준비하러 가보겠습니다.”

       

       

       그게 끝이었다.

       레이첼이 김이 모락 피는 찻잔을 든 채, 그리 다과실을 나선 것이다.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고개를 틀어 찬장의 거울에 비친 뺨을 보았다.

       레이첼의 말대로, 자잘한 흉터 하나 없이 아물어있었다.

       마치 상처가 나지 않았던 것처럼 말끔히 말이다.

       

       호오.

       

       ‘아껴바르는 데에 이유가 있었군?’

       

       상처가 있었을 부위를 슥슥 문진 후, 꿀물을 마셨다.

       남이 타줘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정말이지 달콤한 맛이었다.

       

       

       **

       

       

       “근데 아가씨는 결혼 생각 없으세요?”

       

       이른 아침.

       조식을 들며 독서를 하던 아리엘에게 겨울꽃차를 따라준 시녀가 그리 물었다.

       책에서 시선을 뗀 아리엘이 의뭉스레 시녀를 쳐다본다.

       처음 들어본 질문이었던 까닭이다.

       

       “응? 나?”

       “네. 문득 궁금해서요. 책이랑 결혼했다는 이상한 말씀은 마시고요.”

       “흠.”

       

       겨울꽃차를 한모금 홀짝인 아리엘이 침음을 내뱉었다.

       결혼이라.

       딱히 생각해본 적 없는데.

       하물며 사랑을 해본 적도 없는데 결혼은 무슨.

       가히 평생이라 일컬어도 될 정도로 소설에만 푹 빠져 살았던 아리엘에게, 결혼 같은 건 관심 밖의 사항이었다.

       

       “없는데?”

       “왜요?”

       “그냥 없는데?”

       “…그러다 정말 고독사하시겠어요. 남자도 만나본 여자가 잘 만난다 했어요. 더 늦기 전에 부지런히 만나셔야 한다니까요?”

       “책도 읽어본 이가 잘 읽는 법이지.”

       “…….”

       

       하여튼 할 말을 잃게 만드는, 모든 대화 주제가 책으로 시작해 책으로 끝나는 영애님이 아닐 수 없다…라고 생각한 시녀가 탁! 아리엘의 맞은편 의자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그리고선 불만서린 표정으로 빤히 아리엘을 본다.

       

       “…왜 그래?”

       “아깝지도 않으세요?”

       “뭐가?”

       “지금 가장 빛날 시기에요. 아리따움의 정점일 시기이고, 물오른 미모를 뽐내어 멋진 남자와 사랑을 해야 할 시기라고요.”

       “…사랑? 으으. 나 그런 거 몰라.”

       

       못 볼 것이라도 본듯, 아리엘이 질겁을 했다.

       사랑이란 게 궁금해 로맨스 소설을 읽었던 적이 있지만, 감정을 소모하고 소설 한 장이라도 더 넘겨야 할 시간을 소모하는 것이 당최 이해가 가지 않아 완결을 본 적이 없는 그녀였다.

       

       “…설마 연애해보신 적이 한번도 없으신 거에요?”

       

       시녀의 물음에, 아리엘이 당연한 걸 왜 묻냐는 듯 고개를 당차게 끄덕였다.

       

       “응.”

       “허….”

       

       시녀가 탄식을 내뱉는다.

       저리 아름다운 미모를 가지고, 저리 고운 심성을 가지고 연애 한번 해본 적이 없다는 제 아가씨를 도무지 믿기 힘든,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저 얼굴이면 마음에 드는 남자들 죄다 꼬셔버릴 텐데, 라며 말이다.

       

       “그게 뭐 그리 대수라고. 그러는 넌? 해봤어?”

       “당연하죠. 시종들 사이에서 얼마나 많은 사랑꽃이 피었다 지는지 모르시죠?”

       “응? 정말? 시종들끼리 연애도 해? 난 본 적이 없는데?”

       “…늘 소설만 보시니 그렇죠.”

       “아하. 그렇구나.”

       “아니. 조금 진지하게 생각하실 수 없어요? 아가씨의 미모가 정말 너무 아깝다고요.”

       “미모는 무슨. 나보다 예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네가 제 3대공녀님을 못 뵈서 그래. 뵜다면 나 정도는 흔한 얼굴로 보일걸?”

       “…….”

       

       탄식조차 나오지 않는다.

       답답이도 이런 답답이가 없을 터다.

       안되겠어.

       이대로라면 사랑하는 제 아가씨가 독거노인이 되리란 노파심에, 시녀가 작심한 얼굴로 물었다.

       

       “아가씨.”

       “응?”

       “제일 재미나게 읽으신 책이 뭐에요?”

       “음… 많아서 어려운데.”

       

       손가락 10개를 펴 하나씩 접어보며 책 제목을 중얼거리는 아리엘.

       그러다 하나가 떠올랐다.

       정말 코피가 날 정도로 며칠 밤을 지새우며 읽었던 소설, 한장 한장 넘어가는 것이 미치도록 아까웠던 소설, 에필로그를 본 이후 가슴이 벅차 무어라 형언치 못 했던 소설, 읽는 순간엔 세상 그 누구보다 행복했던 소설이 있었다.

       

       “용사 알페리온의 후일담?”

       “읽을 때 엄청 행복하셨죠?”

       

       생각만으로도 미소가 절로 나오는 아리엘이 고개를 끄덕였고, 이번엔 시녀가 손가락 10개를 펼쳐보였다.

       

       “사랑에 빠지면요. 그것보다 10배는 더 행복해져요.”

       

       그야말로 독서광의 눈높이에 딱 맞는 비유에, 아리엘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10배?”

       

       너무도 행복해 비명조차 질러지던 그 순간들보다 10배나 행복해진다고?

       

       “에이. 과장이 심해.”

       “정말이라니까요? 안 해보셔서 그래요. 사랑하는 이로 세상이 가득차고 그와 만나는 순간이 애타게 기다려지고, 만나면 설레이다 못 해 죽어도 좋을 느낌. 그건 정말 세상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거랍니다.”

       “……그 정도야?”

       “그럼요!”

       

       흠.

       죽어도 좋을 정도라고?

       온통 그에 대한 생각뿐이라고?

       그만큼이나 행복하다면 좋기야 하겠지만…….

       

       “어때요? 이제 좀 감이 잡히세요?”

       

       무언가 눈을 뜨고 있는 듯한 아가씨에, 시녀가 기대에 찬 표정으로 그리 물었다.

       물론, 그 기대는 삽시간에 식어버리고 말았지만.

       

       

       “…근데 그러면 책을 못 읽잖아.”

       “허.”

       

       

       세상이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탄식이 이른 아침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

       

       

       

       ‘…아침부터 왠 사랑 타령이래?’

       

       조식을 마친 아리엘이 호위병과 함께 대공성 도서관으로 향하고 있었다.

       혼약대전의 결말이 다가오고 있어서 그런지, 시녀들 사이에서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떠들썩하게 오가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렇겠지.

       뭐, 이따금씩 책 좀 보지 말고 남자 좀 보라며 다그침을 하기는 했었지만.

       그나저나.

       

       ‘10배나 행복할 수가 있을까?’

       

       무인도에 갇혀도 이 소설만 있다면 평생 재미나게 살 수 있을 것 같을 정도로 행복했었는데, 그것보다 어떻게 10배나 행복해질 수 있다는 걸까.

       

       ‘말도 안돼.’

       

       설득하고자 해낸 허풍이겠지.

       그리 일축한 아리엘이 도서관 개장 10분 전에 도착했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혹여나 엘든이 일찍 도착하지 않을까…하는 바람에서였다.

       또한, 요근래 늘상 늦게 도착해 독서 감상을 충분히 나누지 못 한 것에 대한 아쉬움도 묻어 있었다.

       독서보다 훈련을 중요시 여기는 것 같아 조금은 서운하기도 했었고.

       물론 그것이 제 욕심이리라 여기는 아리엘이었지만 말이다.

       

       ‘오늘도 늦게 오려나?’

       

       힝.

       

       사실상 기권 선언도 승인된 거나 다름없다 했으니 오늘은 일찍 와줬으면 좋겠는데…라며 주변을 둘러보지만, 이른 아침 공기를 가르는 이는 청소를 하는 사용인들 뿐이었다.

       

       쩝.

       

       아쉬움에 괜히 입맛을 다신 아리엘이 개장을 1분 앞둔 도서관의 출입문으로 시선을 두었다.

       그리고 그 문이 열리는 순간.

       

       툭툭.

       

       누군가 뒤에서 어깨를 두 번 쳤다.

       

       ‘응?’

       

       갑작스런 기척에 놀란 아리엘이 황급히 몸을 돌렸고, 곧 두 눈을 휘둥그레 떠야 했다.

       자그마한 바람이 이루어진 것이다.

       

       “흠, 오늘은 내가 널 기다리려 했는데 역시 늦질 않는구나? 아리엘?”

       “뭐, 뭐야?! 엘든!”

       

       크게 뜨인 두 눈동자에 기쁨이 담기고, 한껏 승천한 미간은 환희를 담아내고, 함박미소를 짓는 붉은 입술은 그 어느 때보다 큰 행복을 담아내고 있음을 아직은 알지 못 하는 아리엘이었다.

       그저, 자리에서 폴짝 뛰는 아리엘이었고, 왜인지 오늘 하루가 마냥 행복할 것 같은 아리엘이었다.

       그런 아리엘의 코로, 술냄새가 풍겨왔다.

       

       “응? 근데 어제 술 마셨어?”

       “아, 레이첼하고 렌들러 영감님하고 축하주 거하게 마셨어.”

       “정말?”

       

       아리엘이 엘든의 오른쪽 대각선 뒤에 서있는 레이첼을 보았다.

       아카데미 재학 시절, 자신이 앉아있던 곳과 같은 자리였다.

       

       

       “..나도 술 마실 줄 아는데.”

       

       

       그 직후.

       

       환희를 내뱉던 아리엘의 입에서 괜한 볼멘소리가 나온 것은, 아직은 모를 마음이 빚은 작은 투정과 같았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_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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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migrated Into A Tragic Romance Fantasy

Transmigrated Into A Tragic Romance Fantasy

후피집물의 후회캐가 되었습니다
Score 10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I was curious about what a female-oriented tragic romantic fantasy was like, so I skimmed through only the free chapters. And then… “…Ha.” I found myself transmigrated into one of the main male characters, destined for tears of regret, exhaustion, and obsession. So, the first thing that had to be done was… “I, Elden Raphelion, hereby declare my withdrawal from the competition for the betrothal of the Third Northern Duchess.” To escape this trage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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