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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9

       니오레는 구덩이를 내려다보며 얼어붙어 있었다. 흙의 상태를 보아 금방 파헤쳐진 것 같았으며, 구덩이에 번진 피는 채 굳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여기에 사람이 있었다.

       

       구덩이 안에 있던 사람이 기적적으로 정신을 차리고, 안에서부터 파고 나온 걸까? 아니면, 누군가가 땅을 파서 사람을 구해 준 걸까. 

       

       “⋯⋯⋯⋯.”

       

       아주 희미하지만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동쪽, 학생 거주 구역으로 향하는 발자국이다. 오늘은 비도 내리지 않았고, 바람도 잔잔했다. 이 자리를 급하게 떠난 누군가의 궤적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니오레가 그럴 마음만 먹는다면, 쫒을 수 있었다.

       

       가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많았다.

       

       아는 사람이 휘말린 일도 아니고, 확실한 일도 아니며, 높은 확률로 위험하고, 해야만 한다거나, 필요한 일도 아니었다. 산더미 같은 이유였다.

       

       가려고 하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누군가가 위험에 빠진 것 같아서.

       

       오지랖이었다. 아무 일이나 참견하고 다니면 어떤 결말을 맞이하는지는, 이미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아서 알고 있었다. 레스트맨 자작가는 타인에게 과한 호의를 베푼 끝에 몰락했으니까.

       

       그러니 야밤에 일어난 찜찜한 일에 손을 대는 건 그만두고, 다른 사람에게 맡기자. 니오레는 그렇게 거듭 되뇌고, 생각하고, 미련을 털어버리려고 했다.

       

       저벅.

       

       니오레는 한 발짝을 걷고 나서, 웃음과 옹알이의 중간쯤 되는 소리를 흘렸다. 발끝이 향하는 곳은 누군가의 발자국을 쫒는 동선이었다.

       

       “⋯⋯아흐흐.”

       

       그래, 피가 어디 가겠어. 태어난 대로 사는 거지.

       

       도시의 상인보다도 가난한 가문에서 태어나, 영약 하나 먹어본 적 없으므로, 『충만』은 달성하지 못했다.

       

       가문에 전해지는 연공법을 꾸준히 익혀왔으나, 아직 『조율』도 이루지 못했다.

       

       다만, 『답파』만큼은 달랐다. 흐름을 읽어내는 센스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할 정도로 눈이 좋았다. 눈을 깜빡이면, 남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흔적이 선명하게 보였다. 

       

       대상은 신장 175cm 정도, 체중은 70kg가량, 오른발잡이.

       

       상상 속의 수상한 사람이 발자국을 되새기며 도망쳤다. 니오레는 스스로의 정의감에 이끌려 추적을 시작했다.

       

       ===============================================================

       

       검은 후드로 몸을 감싼 채, 학생 거주 구역의 골목길을 달려 나가던 베네트는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바닥에 엎드려, 귀를 지면에 붙였다.

       

       가벼운 발소리. 가까워진다. 방향은 정확히 베네트를 향하고 있었다.

       

       “⋯⋯추적?”

       

       도망갈 때 느꼈던 인기척인가. 나름대로 흔적을 지우며 잘 도망쳤다고 생각했는데, 꼬리를 잡힌 모양이었다. 베네트가 다년간의 흑마법사 생활로 단련한 도주 실력은 수준급이었다. 어쭙잖은 실력으로는 흔적을 찾아낼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따라붙은 것은 숙련된 추적자다.

       

       누굴까.

       

       그 마법사가 감시를 위해서 사람을 붙여 둔 걸까. 아니면, 마검을 숨긴 마법사 본인인가? 어쩌면 같은 흑마법사일지도. 그러나 어떤 경우의 수더라도, 추적은 뿌리치는 게 맞았다. 예상은 항상 비관적이야 했으니.

       

       마력을 전신에 휘감으며 지면을 박찼다. 베네트의 몸이 바람처럼 빠르게 쏘아져 나갔다. 우선은 거리를 벌려두고 몸을 숨길 생각이었다. 

       

       추적을 어렵게 만들기 위해서 인적 드문 길의 담벼락을 넘고, 나뭇가지를 밟아 움직이거나 『낙하 지연』마법으로 잠시 하늘을 나는 등, 흔적을 어지럽히며 이동했다. 완숙한 도주 솜씨였다.

       

       그러나, 상대는 한 수 위에 있었다.

       

       상대는 분명 느렸다. 폭발적으로 가속해 나갔을 때도, 베네트의 속도를 따라오지 못했다. 그러나 잠깐 시간이 흐르고 나면, 어김없이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쪽이 분명 빠르다. 그럼에도 따라잡힌다면, 베네트의 동선을 모조리 간파하며 추적해 오고 있다는 의미였다.

       

       “칫, ⋯⋯하늘에서 내려다보기라도 하는 거냐!”

       

       골목길에 가로막혀 좁게 보이는 하늘 위를 올려다봐도, 패밀리어는 보이지 않는다. 하늘을 나는 수상한 박쥐 등이 눈에 띄었더라면 진작에 요격했을 것이다. 

       

       추적을 피해 도망치던 베네트의 움직임이 잠시 멈췄다. 눈치채고 보면 도망칠 길이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베네트의 눈앞에는 여신교 교단 건물이 있었다.

       

       머릿속에서 근방의 지도를 빠르게 훑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여신교의 건물을 우회하면 따라잡힌다. 

       

       우연인가, 아니면 추적자의 노림수인가.

       

       추적자가 자탑의 마법사 쪽⋯⋯ 그러니까 마검을 숨긴 세력과 같은 진영에 속해 있는 것은 확실해 보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토록 은밀하고, 끈질기게 추적해 올 이유가 없었으니까.

       

       여신교 건물로 유도했다고 해서 여신교측 인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만약 그랬다면, 혼자서 추적해 올 것이 아니라, 성기사들을 대동하고 우르르 몰려다녔을 테니.

       

       불확실한 점은 배제하고, 확실한 것만을 근거로 생각하자. 상대는 마검을 땅에 묻었다. 마검을 사적인 용도로 이용하려고 했다.

       

       그것만으로도 여신교는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든다. 흑마법사이건 아니건 간에, 사람을 망가뜨리는 삿된 물건은 그들의 교리에 있어서 몹시 부정적인 것이었다.

       

       그러니, 추적자에게도 여신교 교단은 껄끄러울 것이다. 더해서, 여신교 건물에는 평판이 나쁜 성녀가 거주 중이었다. 제멋대로에, 안하무인이라는 소문이 들려오고 있으니, 야밤에 소란을 피우는 무리를 용서하지 않을 터.

       

       이건⋯⋯ 중립지대로 이용할 수 있다.

       

       추적자에게 생각이 있다면, 여신교 건물 안에서 싸움을 걸어오지는 않을 것이다. 전투를 피할 수 있다면 대화도 나쁘지 않았다. 

       

       ===============================================================

       

       도망치는 남자는 무시무시할 정도로 빨랐다. 도중에 흔적을 한 번이라도 놓쳤다면 영영 찾을 수 없게 되었으리라. 

       

       그는 니오레가 추적하고 있다는 사실을 도중에 눈치챈 듯했다. 니오레는 그를 따라잡아서, 물어보고 싶었다. 대체 그 구덩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물어보고, 만약 그녀가 상상하던 그대로의 나쁜 일이었다면.

       

       반성하고 죗값을 치르라고 권고할 것이다. 여신님의 앞에서 회개하고, 마땅한 벌을 받으라고 한 뒤에, 만약 거부한다면 최선을 다해서 싸우⋯⋯려고 했는데.

       

       “⋯⋯⋯?!”

       

       수상한 사람이 왜 교회 건물로 가지?

       

       자신의 텔레파시를 듣고 고해성사를 하러 달려가고 있는 건가. 그럴 리가 없다는 건 니오레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세상이 그렇게 상냥했더라면 가문이 망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실수여도, 의도여도, 니오레 입장에서는 기회였다. 건물에는 성녀님이 계신다고 들었다. 소란이 일어나면 성녀님뿐만 아니라 여신교 관계자들이 우르르 나올 것이고, 그러면 수상한 사람을 막아낼 수 있다.

       

       흔적을 따라 움직였다. 예쁘게 꾸며진 정원을 가로질러, 외부의 배수관을 밟고 올라가, 손으로 발코니 난간을 잡았다. 영차, 하고 몸을 당겨 발코니에 내려섰다. 

       

       후드를 뒤집어쓴 사람 ─목젖이 튀어나온 것을 보면 남자였다─ 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경계하면서 물었다.

       

       “⋯⋯너희들의 목적이 뭐지?”

       

       니오레는 자신이 지난밤에 겪은 일들과, 파헤쳐진 구덩이와 당신의 관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묻고 싶었다. 하지만, 앗차.

       

       “⋯⋯⋯⋯!”

       

       화이트보드가 없었다. 니오레는 목을 부여잡고 덤벙거렸다.

       

       ===============================================================

       

       추적자는 순둥순둥하게 생긴 여학생이었다. 따로 무장하고 있지도 않았고, 살기 넘치는 눈빛을 갖고 있지도 않았다. 면식이 없는 것을 보니 신입생이었다.

       

       어쩌면 단순한 오해일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해서, 베네트는 목적을 물어봤다.

       

       “⋯⋯너희들의 목적이 뭐지?”

       

       “⋯⋯⋯⋯!”

       

       “침묵이냐⋯⋯.”

       

       떠보려는 건가. 아니면 상황을 파악하려고 뜸을 들이는 건가. 베네트는 경계심을 끌어올리면서 몇 마디 더 뱉었다.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건지는 몰라도, 담대한걸. 마검은 소지와 은닉만으로도 이단심문 감이다. 그 리스크를 모르고 있지는 않았을 텐데.”

       

       “⋯⋯⋯⋯?”

       

       “말할 생각이 없다면, 내가 맞춰보지.”

       

       “⋯⋯⋯⋯.”

       

       베네트는 머릿속에서 떠돌아다니는 퍼즐을 착착 조립해 나갔다. 2황자를 뒷배로 둔 세력이, 마검을 이토록 눈에 띄는 장소에 숨긴 이유⋯⋯. 일부러 들키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하면 모든 게 이해가 됐다.

       

       그는 완벽한 답을 내놓았다.

       

       “마검을 빌미로 트집을 잡아, 흑마법사 혐의를 씌워, 아카데미 내부의 2황자 반대 세력── 즉, 3황자 파벌을 숙청해 버리려는 계획인가?”

       

       “⋯⋯⋯⋯?!!”

       

       추적자의 표정이 무너져 내렸다. 망치에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표정. 중대한 무언가를 들켜버린 사람이 짓는 표정이다. 베네트는 확신을 얻었다.

       

       마검 매장의 진상은, 치가 떨릴 정도로 비정한 황위 계승 경쟁이었다. 

       

       더할 나위 없는 호재다. 정치 싸움에 의해 아카데미가 소란스러워진다면 흑마법사 입장에서는 바라는 바다. 자탑 마법사의 사악한 계획은 진행되어야만 한다. 베네트는 허리춤에서 마검을 끌러 바닥에 내려놓았다.

       

       “값나가는 물건이라고 생각해서 훔쳤던 것뿐이다. 돌려주지. 나는 높으신 분들의 싸움에 끼어들 정도로 멍청하지 않아. 방해하지 않을 테니 추적을 멈춰.”

       

       “⋯⋯⋯⋯!!!”

       

       추적자는 몹시 놀라서 당황한 채로, 한 걸음 내디디면서 팔을 뻗었다. 베네트는 발코니 위에 놓인 빨래건조대를 잡아서, 추적자를 향해 집어 던졌다. 옷가지들이 흩어지며 시야를 가렸다.

       

       베네트는 발코니 아래로 뛰어내려, 질주했다. 

       

       ===============================================================

       

       니오레는 반사적으로 날아오는 빨래건조대를 쳐내고, 시야를 가리는 공중에서 나풀거리는 팬티를 잡아 걷어냈다. 그리고 움직임을 멈췄다. 과잉 정보에 의한 급성 뇌정지였다.

       

       내가 지금 대체 뭘 들은 거지.

       

       니오레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우선, 다행히도, 구덩이에 묻혀있던 건 사람이 아니라 마검이었다. 땅을 파낸 수상한 사람은 살인범이 아니라 도둑이었다. 사소한 오해였다.

       

       이번 일은 사람 한 명이 생매장당해 죽은 사건이 아니었던 것이다.

       

       앞으로 사람 여러 명이 불타서 죽을 사건이지.

       

       니오레의 표정이 근심·걱정으로 물들었다. 조금 울고 싶기도 했다. 아무리 오지랖을 부렸기로서니, 2황자와 3황자 사이의 냉혹한 경쟁에 끼이게 된 건 너무하지 않은가. 몰락한 귀족의 목 정도는 가볍게 증발할 수 있는 사안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마검을 이용해서 누명을 씌운다니⋯⋯.

       

       2황자의 암흑가 평정 소식을 듣고, 제국민을 위해서 이젠 어두운 곳도 들여봐 주시는구나 생각했었는데. 이제 보니 선의가 아니라 암살단 같은 걸 기르려고 한 게 아닌가 싶었다.

       

       “⋯⋯흐으으.”

       

       진정하자.

       

       고블린 부락에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다. 어쩌면 별 탈 없이 지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돌아가면 셀비어에게 상담을 요청해야⋯⋯.

       

       “밖에 누구 있어?”

       

       “⋯⋯⋯⋯!!!”

       

       두터운 커튼이 쳐진 발코니 문 안쪽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니오레는 바닥에 떨어진 마검을 한 번 보고, 하늘 한 번 바라본 뒤에, 냅다 도망쳤다. 마검은 여신교에서 알아서 잘 처리해 줄 것이다.

       

       정신없이 도망갔다. 한참을 달려서, 여자 기숙사 건물 담벼락에 등을 기대며 주저앉아 숨을 골랐다. 그리고 그제야 깨달았다.

       

       “⋯⋯.”

       

       자신의 오른손이 여전히 팬티를 꼭 쥐고 있었다. 빨래건조대를 쳐낼 때 잡아채고 나서, 경황중에 도망가다 보니 놓고 오는 걸 깜빡했던 것이다.

       

       펼쳐 보니, 옆을 끈으로 묶어 입는 형태의 야시시한 속옷이었다.

       

       아카데미 팬티 도둑이 되었다⋯⋯!!

       

       ===============================================================

       

       야밤중에 이게 무슨 소란이야.

       

       발코니 너머에서 들린 우당탕탕 소리에 단잠에서 깬 성녀 타라는, 있는 대로 인상을 찌푸리며 발코니 문을 열었다. 

       

       “뭐야.”

       

       성녀는 눈을 깜빡였다.

       

       잠이 덜 깼나 싶어서 눈을 비벼도, 똑같은 개판이었다.

       

       아예 세수를 하자 싶어서, 1층으로 내려가 우물에서 물 한 바가지를 뜨고, 찬 물로 얼굴을 씻은 뒤에, 젖은 앞머리를 쭉쭉 비틀어 짜서 물기를 말리고는. 내친김에 차 한 잔도 끓여서 마셨다.

       

       그리고 다시 발코니로 돌아왔다.

       

       빨래건조대가 엎어져 세탁을 마친 옷들이 바닥을 나뒹굴고, 웬 장검 하나가 반듯하게 눕혀져 있었다. 검에는 봉인 마법이 걸려있길래, 해주해봤다.

       

       -네가 나의 새로운 주인⋯⋯

       

       “『찬란한 세 고리의 아티팩트 봉인』”

       

       마검이었다.

       

       사건 현장을 잘 보니, 속옷 한 장이 사라진 상태였다.

       

       종합적으로 정리하자면, 야밤에 누군가가 여신교 교단 건물에 잠입해서, 성녀의 빨랫감을 엎지르고, 팬티를 가져간 대신에, 마검을 선물로 남겨 놓은 것이다. 

       

       “⋯⋯진짜 뭔데?”

       

       당혹스러워서 화도 안 났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시리고 아픈 크리스마스는 지났습니다, 여러분.
    이제는 새해를 맞이해야 할 때입니다! 나를 살펴주소서 태양이여!
    내일 또 만날 수 있기를 바랄게요, 마이 프렌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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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therworld TRPG Game Master

Otherworld TRPG Game Master

Another World TRPG Game Master, 이세계 TRPG 게임마스터
Score 8.6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became a wizard of the Illusion Magic School and decided to create a virtual reality with illusion magic to play a tabletop role-playing game (TRPG). It was great to create a virtual reality, but I was in trouble because there were no suitable players. During that time, I received an offer to be the professor from the Royal Academy. The offer was to use illusion magic to fill the students’ lack of practical experience safely. And so, I became a professor at the academy. “Send me back, send me back to that world right now-!” “Outer god, someday an outer god will be our doom, we’ll all die!!” “I am not the bastard of the Redburn Ducal Family. I am the foremost disciple of the Great Namgung Clan, Namgung Qinghui!” But it seems there is a bit of a misunderstanding. This isn’t a spell for dimensional travel, kids. It’s fi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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