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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9

       라이너스가 인사를 건네자 힌드라스타가 눈을 까뒤집으며 그대로 쓰러졌다.

       

       제때에 잡아서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자기가 싼 오줌에 뒹굴뻔.

       

       “미안하다, 라이너스. 말도 안 하고 데려와서. 너한테 편지 보낸 후에 일이 좀 복잡해져서.”

       

       “괜찮아. 일단은 그 드래곤부터 옮기고 보지. 하녀들을 불러올게.”

       

       라이너스의 지시에 하녀들이 몰려와 힌드라스타를 업고 들며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그것을 걱정스럽게 보며 셀린느가 물었다.

       

       “쟤가 그 드래곤이야? 너희 둘이서 쫓아냈다던 화이트 드래곤?”

       

       “맞아. 어쩌다 보니 우리 아카데미에 오게 됐어. 그런데 라이너스 너는 쟤를 어떻게 알아 봤냐?”

       

       “나를 보고 떨면서 실금까지 하는 생전 처음 보는 여자애라면 폴리모프한 힌드라스타 말고 또 있겠나.”

       

       듣고보니 또 맞는 말이네.

       

       “우리 얼른 들어가자. 할 이야기가 많아.”

       

       “아기부터 좀 볼까?”

       

       셀린느가 내 등을 떠밀자 계단을 올라가 라이너스에게 다가갔다.

       

       라이너스가 웃으며 폼에 안은 아기를 보여 주었다.

       

       아기는 금발에 크고 맑은 파란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 눈은 마치 하늘을 닮은 듯 맑고 투명하여 주변을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둘러보고 있었다.

       

       작은 얼굴에는 부드러운 솜털이 보송보송하게 나 있었고 핑크빛의 볼은 건강한 생기를 띠고 있었다.

       

       살짝 벌려진 입술 사이로 아기 특유의 순수한 미소가 번졌다.

       

       작고 연약한 손은 마치 무언가를 잡으려는 듯 가볍게 쥐고 있었고 손가락 끝은 투명하고 깨끗했다.

       

       아기의 모습은 순수함 그 자체로 보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미소를 짓게 만드는 아름다움이 있었다.

       

       전반적인 생김새는 라이너스를, 미소와 분위기는 셀린느를 빼다 박았네.

       

       “아들이라고 했지? 이름이 루미엔이라고?”

       

       “그래. 이것 봐라, 디안.”

       

       라이너스가 주머니에서 잘 말린 호두를 꺼내 아기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러자 아기가 우지끈- 하며 호두를 으스러뜨리는 게 아닌가?!

       

       “뭐, 뭐야?”

       

       “우리도 최근에야 알았어. 밤에 침대 난간을 발로 차서 박살내고 나서야.”

       

       “이야, 이거. 벌써부터 용사가 될 상이네.”

       

       우리는 하하호호 웃으며 저택으로 들어갔다.

       

       “헐.”

       

       저택 내부를 본 나는 그만 입을 벌리고 말았다.

       

       여기는 집이 아니라 진짜 궁전이잖아?

       

       현관 홀은 높고 아치형 천장이 인상적이었으며 천장 중앙에는 화려한 샹들리에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샹들리에의 수많은 크리스탈들이 빛을 반사해 아름다운 무늬를 벽과 바닥에 그려냈다.

       

       벽면에는 세밀한 금박 장식과 섬세한 조각들이 새겨져 있어 마치 진짜로 궁전의 일부처럼 보였다.

       

       바닥은 고급스러운 대리석으로 마감되어 있었고 대리석 위에는 정교한 문양이 새겨진 러그가 깔려 있었다.

       

       이 러그는 발소리를 부드럽게 흡수해 걸을 때마다 기분 좋은 촉감을 느끼게 해 주었다.

       

       홀의 양옆에는 다양한 예술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한쪽 벽에는 유명한 화가의 그림들이 걸려 있었고 다른 쪽에는 고풍스러운 가구와 유물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특히 저쪽 구석에는 고대의 갑옷과 무기들이 전시된 작은 박물관 같은 공간도 마련되어 있었다.

       

       “야, 라이너스. 너 말이야. 돈맛 알고 사람이 변한 거 아니냐? 너무 사치스러운데?”

       

       “사실 이렇게까지 하고 살고 싶지는 않는데 2황녀님께서 강경하게 나오시는 바람에 거부하지 못했다.”

       

       라이너스의 말에 따르면 원래 작고 소박한 집을 지으려고 했는데 2황녀가 대륙의 영웅인 용사가 그런 데서 살아서는 안 된다며 반강제로 이 으리으리한 대저택을 만들어 주었단다.

       

       “아마 외부의 시선을 많이 의식한 탓이겠지. 마왕을 죽인 자를 이렇게 대우하지 않으면 나중에 또 비슷한 일이 일어났을 때 어느 누가 자원하겠어.”

       

       “네 말이 맞다, 디안. 그리고 또 다른 이유도 있을 것이고.”

       

       라이너스가 말하는 또다른 이유란 바로 라이너스를 계속 자기 통제하에 두려는 2황녀의 정치적 계략.

       

       전후실세로 엄청난 정치력을 발휘해 첩의 자식임에도 불구 황성의 요직을 독차지한 2황녀는 그것도 모자라 용사인 라이너스마저 자신의 휘하로 끌어들였다.

       

       나중에야 알음알음 듣기로는 그당시 황녀가 실권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엄청나게 많은 의문사가 일어났다고 한다.

       

       어디 부장은 술마시다 피를 토하고 어느 군단장은 부하의 칼에 찔리고 무슨 장관은 출근하다 갑자기 가슴을 움켜쥐고 쓰러지고….

       

       그들의 공통점은 모두 2황녀를 위시한 전후실세의 대척점에 서있는 기득권력들.

       

       기존에 제국의 모든 것을 틀어쥐고 있었으나 4년전쟁 때에는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해 상대적으로 위축된 자들이다.

       

       정황상 분명히 2황녀측에서 저지른 암살인 건 분명한데 문제는 그 증거를 아무리 추적해도 찾을 수가 없다는 것.

       

       그래서 당시 황성에서는 2황녀에게 대들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는다는 인식이 팽배했고 그런 무차별한 암살 끝에 2황녀는 안보실장이라는 최고 요직에 앉을 수 있게 되었다.

       

       대체 어떻게 된 게 역천의 씨앗이 될지도 모를 첩의 자식이 안보실장이 됐나 좀 의아했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비로소 의문이 풀렸다.

       

       이렇게 악랄하고 유능하지만 출신문제로 정통성이 약한 황녀 입장에서는 무조건 라이너스를 쥐고 있어야만 하겠지.

       

       그러니 자기가 통제하는 아카데미 교장으로 앉히려고 했던 것이고.

       

       그리고 행여나 라이너스가 다른 세력에 붙을 것을 우려 모든 것을 아낌없이 퍼붓는 중.

       

       저번에 10년인가 유급 육아휴직을 준 것도 그렇고 모든 사람들이 군침을 흘리는 수도 인근 직할령을 내어준 거나 이 웅장한 대저택을 지어준 것 등등.

       

       하여튼 그쪽은 정말 너무 복잡해. 10년 전에 다 버리고 황성 도개교를 떠나던 때의 결정, 참 잘한 일이다.

       

       홀만큼이나 화려한 응접실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다 물었다.

       

       “그런데 너 예전에 우리 받은 훈장이나 이런 거는 어디에 있냐? 따로 전시 안 해놨어?”

       

       “내 집에 그걸 걸어두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그래도 손님 오면 보여줄 수도 있는 거 아니야?”

       

       “남에게 자랑하기 위해 그 길을 걸어온 게 아니다.”

       

       “그러냐? 오랜만에 하나씩 꺼내 보면서 옛날 얘기나 좀 하고 싶었는데.”

       

       “그런 거라면 환영이지.”

       

       그러며 라이너스가 막 차를 내오는 사용인에게 말했다.

       

       “창고 안쪽에 따로 놔둔 종이상자 아시죠? 그것을 가져다 주세요.”

       

       다른 사람은 평생 하나도 받기 힘든 훈장들을 창고에 처박아 두다니, 역시 라이너스답다.

       

       “그나저나 디안. 힌드라스타는 어떻게 된 거지? 교복을 입은 것을 보니 너희 아카데미 학생인가?”

       

       “응. 이번에 특기생 선발한 거는 알고 있냐?”

       

       “들었다. 바깥에서도 상당히 떠들썩했어.”

       

       “그때 지원했어. 특기생이 되려던 건 아니고 지원자 중에 경호대상이 있었거든. 쟤, 전쟁 후로 레블랑 용병대에 들어갔다더라.”

       

       라이너스에게 힌드라스타의 사정을 이야기해 주었다.

       

       처음에는 분탕이 재미있을 것 같아 참전했고 우리한테 뒤지게 얻어터진 후 도망쳤다가 드래곤 장로들한테 인간 형태로 제약을 당해 쫓겨나 생계를 위해 용병일에 뛰어들었다고.

       

       “단순히 상황을 더 혼란스럽게 만들기 위해 참전했다니, 참으로 불순한 드래곤이로군.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최근 사정은 굉장히 딱해.”

       

       라이너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힌드라스타는 아카데미에서 계속 수학하기로 합의를 한 건가?”

       

       “합의는 아니고 그냥 내가 강제로 잡아두고 있어. 아카데미 졸업생 수준을 끌어 올리려고.”

       

       “이해했다. 황성 입장에서도 폴리모프한 드래곤이 요원이 되어 준다면 좋아할 거야. 하지만 강제했다면 언젠가 도망칠 수도 있다는 거 아닌가? 그러면 오히려 잡아두느니만 못한 상황이 되고 말 텐데.”

       

       “그래서 네 이름을 팔았지.”

       

       잠시 나를 보던 라이너스가 말뜻을 이해하고 낮게 웃었다.

       

       “도망치면 이번에야말로 나와 네가 끝장을 보겠다고 한 모양이로군.”

       

       “그거 말고 저 드래곤을 억제할 방법이 없잖아? 그러니까 나중에 쟤 깨어나면 네가 으름장을 좀 놓도록 해.”

       

       “알겠다. 그건 걱정하지 마.”

       

       “그래서 디안. 그 동안 도대체 어떻게 살았던 거야?”

       

       우리의 이야기가 끝나자 셀린느가 물었다.

       

       “결혼식에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꼭 초대하고 싶어서 백방으로 수소문했는데 결국 실패했거든. 라이너스 말로는 저기 브룬스웰에 있었다고 하던데.”

       

       “뭐, 별거 없었어. 그냥 사례금 받은 거로 띵가띵가 놀았지. 아, 맞다. 그런데 내가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혹시….”

       

       누가 듣기라도 할까 목소리를 낮췄다.

       

       “오늘 로르마네도 오는 거 아니지…?”

       

       “로르마네? 아니, 안 와. 저번에 물어보니까 오늘 바쁜 일이 있어서 못 온다고 했어.”

       

       “휴, 다행이다.”

       

       “아직도 그때 일을 잊지 않고 있는 거야?”

       

       셀린느의 물음에 헛웃음을 터뜨렸다.

       

       “너 같으면 고작 10년만에 잊을 수가 있겠냐?”

       

       “하긴 그건 그렇지…. 어쨌든 살아온 이야기 좀 해줘. 브룬스웰에서 깡패 상단을 혼자서 때려 눕혔다는 사람이 너라는 말 듣고 깜짝 놀랐거든.”

       

       “그래. 알았다.”

       

       나는 몸을 한번 떨며 로르마네의 기억을 떨쳐내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날 황성 환영회날 밤에 도개교를 건너 브룬스웰로 튄 후 오늘까지의 일이었다.

       

       

       # # # # #

       

       

       “너 정말 유유자적 잘먹고 잘 살았구나?”

       

       모든 이야기가 끝나자 셀린느가 감탄했다.

       

       “우리 라이너스도 그랬다면 좋았을 텐데. 지난 10년간 황성에서 고생을 많이 했어.”

       

       셀린느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라이너스의 손등에 손을 얹었다.

       

       “용사니까 어쩔 수 없지.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니까 떠날 수 있었던 거고.”

       

       “네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그런 말은 하지 마라, 디안.”

       

       라이너스가 내 말에 점잖게 반박했다.

       

       “네가 없었다면 나와 셀린느도 없었어. 아마 마왕성에서 살아 나오지 못했을 거다.”

       

       “사실이잖아. 내가 늘 말했듯 이 세계의 진짜 주인공은 너야. 지금도 그렇고.”

       

       “도대체 그 ‘이 세계’라는 게 어떤 의미…. 아, 고마워요.”

       

       마침 창고에 갔던 사용인이 낡은 종이상자를 들고 나타났다.

       

       상자를 건네받은 라이너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을 뒤집어 테이블에 내용물을 와르르 쏟아냈다.

       

       번쩍번쩍 각양각색으로 빛을 내는 훈장 한 무더기가 테이블 위를 꽉 채웠다.

       

       상자를 세워 바닥에 내려둔 라이너스가 손을 뻗어 훈장을 추려내기 시작했다.

       

       “이것들은 종전 후에 받은 것들이고….”

       

       훈장들이 휙휙 날아가 상자에 툭툭 떨어지는 게 꼭 어시장에서 잡어를 분류하는 것처럼 보인다.

       

       “자, 이게 그때 내가 받은 거랑 네가 내 가방에 버려두고 간 네 훈장들이다. 그대로 가지고 있었어.”

       

       라이너스가 약 마흔 개 남짓한 훈장들을 테이블 가운데로 쓸어 모았다.

       

       “이게 우리가 첫 번째로 받은 훈장이로군.”

       

       그 가운데 라이너스가 훈장 하나를 들어 보였다.

       

       삼등무공훈장으로 낙타령 방어전에서 우리 둘이서 적 포로를 붙잡아 오고 받은 최초의 훈장이다.

       

       “아, 그거. 그때 정말 재미있었는데.”

       

       새록새록 당시의 기억이 떠오른다.

       

       

       # # # # #

       

       

       “겨우 찾았네.”

       

       참호 구석에 앉아 혼자 감자를 먹고 있던 라이너스가 고개를 들었다.

       

       갈색 더벅머리 병사 한 명이 웃으며 라이너스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네가 그 촌놈 라이너스냐?”

       

       “그런데. 내게 용무가 있나?”

       

       “감자는 소금에 찍어 먹어야 맛있어.”

       

       라이너스의 옆에 주저앉은 병사가 작은 주머니를 내밀었다. 안에는 소금이 수북하게 들어 있었다.

       

       “이건 어디서 구한 거지? 오늘 보급에 소금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소대장 개인호 안에서. 아, 걱정하지 마. 원래 병사들 나눠줘야 하는 건데 그 새끼가 빼돌려서 숨겨놓은 거니까.”

       

       “하지만 이건 도둑질이다.”

       

       “보급품 빼돌린 건 도둑질 아니냐? 이건 도둑질이 아니라 재보급이야.”

       

       “그건 그렇지만….”

       

       “반갑다. 나는 디안. 너랑 같은 신병.”

       

       디안이 라이너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우리 신병들끼리 잘 지내보자.”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과거 활약상을 일시에 모두 쓰는 건 좀 무리라 하나만 풀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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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tired Supporting Character Wants To Live A Quiet Life

The Retired Supporting Character Wants To Live A Quiet Life

The Retired Supporting Character Wants to Live Quietly 은퇴한 조력캐는 조용히 살고 싶다
Score 3.9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stead of causing chaos with my knowledge of the original work, I assisted the protagonist.

I successfully completed the story and now planned to retire and live peacefully.

However, it seems the protagonist still needs my help.

An academy professor? That’s nothing much.

But why is the state of the academy so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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