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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93

    그렇게 루크가 레니에의 손에 이끌려 아린세이아의 왕궁으로 향하는 꽃의 정원에 도달했을 무렵.

    불어오는 바람과 걸음걸이로 흐트러진 머릿결을 정리할 손이 없었던 루크는 귀찮게 시야를 거슬리게 떨어지는 머리카락들과, 엘프용 100% 천연향료로 만들어진 샴푸의 꽃향기에 이끌려 내려앉은 나비들을 내쫓기 위해 입으로 바람을 불며 불평을 토했다.

    “프, 레니에. 정말 풀어주면 안돼? 가끔씩 목도 졸리고 있고, 머리카락 정리도 안되고, 꼬리도 수갑에 자꾸 눌려서 불편한데.”

    그러나 레니에는 그런 루크는 돌아보지도 않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네, 안돼요. 그러면 당신은 또 어딘가로 가버릴 생각일지도 모르니까요.

    루크의 거듭된 부탁에도 불구하고, 레니에는 자신의 수갑과 목줄을 풀어줄 생각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였다.

    루크는 자신의 목과 연결된 찰랑거리는 쇠사슬의 모습을 바라보며,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하아…. 간다니, 내가 여기서 가면 대체 어디로 간다는 말인가? 이런 사슬 따위가 없더라도, 내가 갈만한 곳은 어디에도 없거늘.”

    꽃과 바람, 그리고 그 향에 이끌려 너풀거리는 나비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는 곳이며, 아린세이아 그 자체를 관리하는 권한을 지닌 레니에의 영향력이 무엇보다 강하게 작용하는 장소이다.

    따라서 자신이 도망칠 곳도 없고, 이유도 없고, 능력도 없다.

    그러자 레니에는 곧장 대답했다.

    -어디로든 사라질 수 있죠. 당신은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요.

    그래, 루크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루크는 한번 목표를 정하면 그 목표가 아무리 허황되고 바보같아보일지라도, 또 어떤 희생을 치러야 한다고 해도 달성하고야 마는 인간.

    희생해야 하는 것이 자신이 되었든, 아니면 사랑하는 누군가가 되었든, ‘목적’을 이룰 수 있다면 거리낌 없이 천칭에 매달 수 있는 존재가 바로 마법사였다.

    그래서, 레니에는 루크를 믿을 수 없었다.

    마법사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모든 약속이 원하는 형태로 이행되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으니까.

    ‘계획’에서 사용할 생각으로 자신을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루크가 자신의 생각을 모두 말해주지 않는 한 그 ‘계획’의 결말은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루크는 이번에도 ‘이전과 같은 결말’을 쓰고 있을지도 모르지.

    아니, 아마도 그것이 확실하다.

    그리고 그런 불안감이 레니에로 하여금 루크를 풀어주는 것을 주저하게 만들고 있었이다.

    이런 장난이 그를 붙잡아두는 데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해도, 어차피 그는 언제든지 도망칠 방법을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이니까 말이다.

    -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랄까요.

    레니에는 평소처럼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답했지만, 그 속에 은밀히 담긴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깨달은 루크는 결국 말을 잊어버렸다.

    “…….”

    자신은 이미 한번 그녀의 약속을 어기고 도망쳐버린 전적이 있으니까.

    방법은 조금 이상하지만, 결국 레니에 역시 두려운 것이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거짓말쟁이가 받게 되는 가장 커다란 형벌은, 진실을 말해도 믿어주지 않음이라.

    루크는 그렇게 자신을 책망하며 고개를 숙였다.

    ‘애도 아니고, 그런 식으로 도망을 치면 안 됐는데.’

    부끄러웠다.

    만인이 조언을 바라던 대마법사였던 주제에, 지금은 마치 평범한 십대 여자애들처럼 잘못에서 도망치려고 했었다니.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은 레니에와 마주하는 것이 너무나 불안했으니까.

    단지 그녀가 자신에게 화를 내고 잔소리를 하는 게 겁이 났던 것이 아니다.

    그녀를 만남으로서 자신의 마음 속에 가장 깊이 남은 죄책감, 그것을 자극하게 되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지.

    이기적으로, 레니에를 전혀 배려하지 않은 채 말이다.

    “…….”

    따지고보면 자신이 그녀를 그리워한 기간은 기껏해야 현대에서 ‘루크’의 기억을 깨닫게 된 이후 일년 남짓이었다.

    그러나 그 뒤로도 수천년을 살아가며 문명을 이끌어온 그녀가 자신을 생각해온 세월은, 분명 자신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랜 시간이었으리라.

    루크는 그녀가 홀로 남은 여신으로서 감내해야했을 오랜 삶의 고통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결국 현재 루크가 할 수 있는 속죄라고는, 잠자코 그녀가 이끄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는 것 뿐이었다.

    그러던 중, 레니에가 문득 말했다.

    -그건 그렇고, 언제봐도 참 예쁜 정원이죠.

    “응?”

    갑옷을 찰칵거리며 주변을 둘러보는 모습이 어딘가 감상에 젖어있는 듯 했다.

    그에 루크도 새삼 주변을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보았던 풍경이지만, 이렇게 보니 감회가 새롭다.

    그러고보니, 그녀와 이렇게 함께 정원을 거닌 건 이번이 처음이었던가?

    어쩌면, 그것때문에 더욱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자신의 목과 팔에 잠긴 이 목줄과 수갑 때문일지도 모르고.

    레니에의 말이 루크를 향해 이어졌다.

    -어땠나요? 이 공간을 처음 보셨을 때 기분?

    마치 부모의 칭찬을 바라는 듯한 어린아이같은 그녀의 모습에 루크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질투했다. 너무 아름다운 마법이라서.”

    루크도 동의를 표했다.

    이 정원에 담긴 회로도의 마법적 경이를 제쳐두고서라도, 풍경이 너무나 아름답다는 점엔 이견을 표할 길이 없으니까.

    레니에는 그런 루크의 대답에 그에게서 인정을 받은 것 같아 기뻐했다.

    -옛날 생각나네요. 이 아이들을 전부 꽃피우는 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던지.

    꽃밭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회로도인 이 정원은 그녀가 다른 누구의 손도 빌리지 않고 직접 파종하여 가꾸어낸 작품이었기에 더욱 감회가 새로웠다.

    일반적으로는 함께 자랄 수 없는 꽃들을 함께 심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던지.

    하지만 루크는 레니에가 그 모든 작업을 정말 혼자서 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기에, 조금 놀란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대가 직접, 혼자서 말인가?”

    -네.

    대답하는 레니에의 목소리에는 처음의 것과는 달리 뽐내는 기색이 전혀 들어있지 않았다.

    마치, 그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는 듯이.

    “어째서 아무도 부리지 않고 혼자서 했던 거지?”

    루크의 질문에 레니에가 새삼스럽다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어머? 그야 당연하죠, 떠난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를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 할 수는 없으니까요.

    “편지라고?”

    레니에에게서 듣게 된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에 루크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가, 뒤늦게 레니에의 말 뜻을 이해하고 감탄을 중얼거렸다.

    “아.”

    그래, 레니에의 말에는 어떤 은유나 비유가 전혀 들어있지 않았다.

    “…그렇군. 이건 편지였어.”

    꽃말.

    꽃에는 언제나 다른 말이 숨겨져있지 않던가?

    이 정원은 아름답게 짜올려진 회로도일 뿐만 아니라 꽃말로 이뤄진 편지이기도 했다.

    루크는 정원에 심어진 모든 꽃들의 꽃말을 알았다.

    그가 마법사로서 식물에 박식했기 때문이 아니라, 모두 레니에가 알려준 것들이었으니까.

    루크는 이 정원이 그녀가 오직 자신에게 직접 보여주고 꽃말을 알려준 것들로만 이뤄져있었음을 이제서야 깨달았다.

    추억, 슬픔, 기다림, 우울, 증오, 그리고 사랑.

    점이 무수히 이어져 선으로 화하듯, 꽃이 지닌 단어가 무수히 이어져 문장으로 이어졌다.

    그것은 마법에 눈이 먼 루크로서는 미처 눈치챌 수 없었던, 자신의 빈자리를 그리워하며 쓰여진 하나의 서정시였다.

    그렇게 가만히 정원에 피어난 꽃들의 꽃말을 이어붙이던 루크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오래 걸렸겠군.”

    -네, 오래 걸렸죠.

    가슴이 미어질 때마다 한번씩, 다시 만나리라는 운명 하나만 믿고서 심어온 편지다.

    오래 걸릴 수밖에.

    그 때였다.

    -쏴아아-.

    ‘바람이…….’

    멀리서부터 불어온 바람은 온갖 꽃의 향기를 품은 채 루크에게 다가왔다.

    달콤함과 씁쓸함, 시원함과 찝찝함등, 온갖 종류의 꽃의 향기가 섞인 정체불명의 향이었지만 그것이 신기하게도 전혀 불쾌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향이 아니었다.

    ‘…코가 간지러워.’

    바람이 실어온 꽃가루 때문인지, 아니면 바람 때문에 흩날린 자신의 머리카락 때문인지, 코 끝이 갑자기 엄청나게 가려워졌다.

    뭐, 가려움이야 평소라면 문제라고 할 것도 없는 지극히 일상적인 감각이지만, 하필이면 손이 뒤로 묶인 상황이라서 그리 간단히 코를 긁을 수가 없다는 게 문제다.

    마법 같은 걸 사용하기엔 목줄과 수갑의 영향을 무시하기 어렵고, 몸이 아무리 유연해도 팔을 뒤로한 채 어깨로 코를 긁는 건 인체의 구조상 불가능한 일이며, 벽 같은 곳에 코를 비벼보려고 해도 주변에는 마땅한 벽이 없다.

    그나마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라면 잠시 무릎을 세워 꿇어앉은 후, 그 무릎에 코를 긁는 방법이 있었지만, 레니에가 바짝 잡고있는 목줄 때문에 멈춰서서 무릎을 꿇어앉는 것이 어려웠다.

    앉으려고 해도 자꾸만 앞에서 당기는 중이었으니까.

    게다가 레니에는 지금 감각이 동기화되지 않는 갑옷의 몸이라 자신이 잡아당기고 있다는 자각이 부족한 것도 있었기 때문에, 결국 루크는 어쩔 수 없이 레니에를 불러세워야 했다.

    “저기, 레니에. 잠시만.”

    -네?

    루크의 부름에 레니에는 가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 루크를 바라보며 빠르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왜냐하면 안절부절 못하고 몸을 배배 꼬는 것이, 마치 어디가 급한 사람처럼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혹시 엄청 급하신거면, 근처에 좀 풀이 길게 나있는 곳이 있는데요.

    “응? 갑자기 풀은 왜?”

    그에 레니에는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그야, 이 근처에 화장실은 없으니까요.

    그제서야 레니에가 언급한 길다란 풀이 어떤 의미인지 깨달은 루크는 그 오해에 마치 비명을 내지르듯 목소릴 높였다.

    “푸, 풀이 긴 곳이라니?! 지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나는 그냥 코가 간지러워서 멈춰보라고 했을 뿐이야! 그리고, 아무리 급해도 내가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잖아?!”

    갑자기 쏘아내는 듯한 루크의 해명에 레니에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래요? 뭐, 그럼 다행이구요.

    길다란 풀은 옛날에도 야외에서 흔히 사용하던 해결방식이니 이제와서 그리 기겁할만한 제안도 아닌데, 너무 과민하게 반응하는 게 아닌가?

    정 급하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아무리 감정잡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잡아도 목줄이랑 수갑을 넣으면 그림이 이상하네요.

    그나저나 지금 10살짜리 폼이라고 했다면 이건 100% 짤렸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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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rchmage dreams of being an Archmage again

The Archmage dreams of being an Archmage again

다시 대마법사를 꿈꾼다 대마법사였던것은
Score 4.2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5000 Years in the future, the Archmage Luke Irushi opened her eyes again. The world has changes so much.

Horseless carriages, an entertainment box with audio and video, food and spices she has never seen before…

And, a changed magical system!

It wasn’t just the world that chang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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