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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94

    루크는 손목에 선명하게 남은 시퍼런 자국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역시 흉터가 남았구나.”

    그도 그럴게, 수갑 자체도 요즘 경찰들이 사용하는 체인형 수갑이 아니라 딱딱하고 투박한 옛날 방식의 나무수갑이었던데다가, 가만히 두면 꼬리에 자꾸 모서리가 눌려서 그러지 않도록 허리와 손목에 힘을 주고 있었으니까.

    거울은 보지 않았지만, 아마 목줄을 차고 있었던 목에도 동일한 흉터가 남지 않았을까 싶다.

    “뭐, 흉이 지지는 않겠지만…….”

    불사인 자신은 이정도 멍 쯤은 신성력을 사용할 것도 없이 그냥 두면 금방 회복할 것이다.

    그래도 새하얗고 가녀린 팔목에 자국이 남아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조금 신경이 쓰인다.

    게다가, 예르나와 다이튼이나 아이들이 돌아와서 이 흉터를 보게되면 뭐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에 레니에는 투덜거리며 대답했다.

    -뭐, 저는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해요. 루크님이 연락을 끊지 않았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테니까요.

    “음, 그 말도 틀린 건 아니지…….”

    확실히, 잘못이라면 자신에게 있다고 할 수 있었다.

    애초에 자신이 레니에에게서 도망치려하지 않았다면 그녀도 불안해져서 자신에게 그런 짓을 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계기를 만든 건 자신이 만든 거라고 쳐도 그녀에게 과실이 전혀 없냐고 물으면 그건 또 아니었다.

    “그래도, 처음부터 왕성으로 텔레포트시켰으면 나를 그렇게 길게 끌고 다닐 필요가 없었잖아?”

    레니에가 ‘보여줄 게 있다’라면서 루크를 데려간 곳은 바로 아린세이아의 왕궁, 그것도 레니에의 왕좌 바로 앞이었다.

    그러니까, 레니에가 처음부터 자신을 왕성으로 텔레포트시켰다면 루크는 그 거리를 묶인 채 활보하며 수치심을 느낄 필요가 없었을 뿐더러, 이런 흉터가 몸에 남을 일도 없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레니에도 그에 할 말은 있었다.

    -아시다시피, 왕궁에는 텔레포트를 막는 각종 방어대책이 있어서 우회에 시간이 걸려요. 그리고, 다락방과 직통으로 연결된 좌표는 그 감옥이 가장 가까웠고요. 

    “…음.”

    가장 마법적으로 효율적인 장소 선택이었다는 점에는 루크도 이견이 없었다.

    불만이라면, 하필이면 감옥에서 시작하게 했냐는 거겠지.

    감옥이라는 것이 으레 썩 깨끗하고 편한 장소는 아니었다보니.

    하지만, 레니에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너무 가까우면 당신이랑 산책을 못하니까.

    “…..뭐?”

    어처구니없는 대답에 루크가 멍하니 레니에를 바라보고있자, 레니에는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뭐요. 잘못이라면 저를 그 정도로 불안하게 한 당신의 잘못이겠지요. 그 전에, 그런 짓을 하지 않았으면 더 좋았겠지만요. 

    그렇게까지 말하니 루크는 할 말이 없었다.

    이야기가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냥 ‘뭐?’하는 소리도 내지 말걸 그랬지.

    루크는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레니에는 아직도 할 이야기가 많은 것 같았다.

    -물론, 이 시대에도 당신에게 지켜야 할 소중한 사람들이 생겼다는 건 알겠지만요. 저는 그 사람들도 당신이 희생하는 걸 바라진 않을 거란 이야기를…….

    레니에의 잔소리가 또 아린세이아에서 했던 이야기에 이어서 한바탕 길어지리라 생각한 루크는 급히 말을 끊었다.

    “…아하하. 일단, 그 이야기는 나중에 제대로 하지.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뭐, 그건 그렇죠.

    아린세이아에서 나온 순간부터, 서로의 잘잘못을 따질 시간은 지났다.

    이곳은 시간이 가속되지 않은 현실이고, 이야기도 안에서 이미 한번 결말을 지은 후니까.

    이내 루크는 한껏 진지해진 표정으로 물었다.

    “모든 계획의 준비는 잘 되었지?”

    루크의 물음에 레니에는 곧바로 준비된 대답을 쏟아내었다.

    -네. 주문하신 물건도 모든 네트워크를 뒤져서 최저가로 찾아뒀구요, 칸타시스의 해체인력도 현재 루크님의 우선순위 위주로 재배치해서 효율을 높인 상태에 있어요. 기간은 현실기준 1~2일 내로 완료될 예정입니다.

    레니에의 브리핑을 들은 루크는 만족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렇게 최대한 변수를 줄여나가자꾸나.”

    -물론 그래야죠. 당신의 임기응변을 최소화 시켜야 하니까.

    “…하하하.”

    임기응변이라….

    딱히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계획이라는 게 항상 정확히 들어맞는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지 않은가?

    요즘은 그 ‘운명적인 보호’도 상당히 옅어졌다는 게 느껴지는 중이고 말이다.

    과연, 이번에는 임기응변없이 계획대로 다 될 수 있을런지.

    그런 생각을 하던 루크는 문득 의문을 품었다.

    “그나저나, 집 안이 이상하게 쌀쌀하군.”

    분명 아린세이아에 간 사이 예르나가 돌아올 시간이 될지도 몰라 나가기 전에 난로를 두었던 것 같은데, 마력이 나간 것인지 아니면 마법진이 고장난 것인지 적절한 온도를 유지하며 쾌적한 환경을 조성해야 할 저택은 한겨울의 한기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게 루크가 피부로 느껴지는 한기에 팔을 쓸어내리며 몸을 떨자, 레니에가 말했다.

    -네트워크가 연결되자마자 저택의 마법진을 과부하시켜서 강제로 텔레포트를 일으켰으니, 시설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아도 이상한 건 아니죠.

    “아니, 그러면-”

    ‘이따가 예르나와 애들이 돌아오면 어떻게 하라고 그랬냐’라는 루크의 말이 이어지기 전에, 먼저 레니에가 말을 끊어냈다.

    -뭐요. 또 제가 잘못했나요?

    한마디를 딱 듣자마자 벌써 위기감이 느껴지는 레니에의 그 목소리에 루크는 금세 꼬리를 내리며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아니, 아니야. 내가 잘못했지. 응, 처음부터 내가 안 그랬으면 됐는데.”

    -흠.

    실제 꼬리 뿐 아니라 귀와 고개까지 푹 숙여서 지나치게 처량해진 루크의 모습에 레니에는 순간 자신이 너무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걸 풀어주면 다음에 또 그런 짓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지금은 마음을 굳게 먹기로 했다.

    -알았으면 됐어요. 잘못을 알았으면 반복하지 않는 게 지혜라고 당신이 그랬죠?

    “음, 그랬지. 진짜 다신 안 그럴게.”

    -좋아요! 이번만 용서해드리죠.

    그 순간, 루크의 귀 한쪽이 쫑긋거리며 올라왔다.

    “잠깐만, 정말로 ‘이번만’이야? 그럼 지금 그 용서를 사용하기엔 너무 아까운데. 그냥 지금은 용서하지 말게나.”

    -헛소리 하지 마시구요. 그러면 이번에도 용서해주지 않는 수가 있어요?

    “이크, 그건 안될 일이지. 그냥 이번엔 그 용서를 받고, 나중에는 그대가 거짓말을 못하는 건 아니라는 점에 희망을 품어야겠군.”

    -어이없어! 괜히 걱정해서 손해봤다!

    “감정에는 손해라는 개념이 없다네. 정해진 양도 없고, 소모하는 것도 아니니까.”

    -있거든요! 수치상으로 나오는 건 아니어도, 손해는!

    역사상 가장 뛰어난 대마법사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여왕이 하기에는 조금 유치한 말싸움 같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것도 그들 나름의 유희였다.

    서로가 젊었던 옛날의 그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때와 겉모습은 너무나 많이 변하고 말았지만 말이다.

    그 순간이었다.

    “…에취!”

    쌀쌀한 공기가 문제가 됐는지, 루크는 대화를 하다말고 재채기를 하고 말았다.

    그러자 레니에는 순간 루크가 건강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는 존재라는 것조차 잊고 물었다.

    -당신, 괜찮아요? 혹시 감기인가요?

    레니에의 걱정스런 목소리에 루크는 차가워진 코를 문지르며 대답했다.

    “응. 괜찮아, 그냥 재채기야. 걱정할 것 없어.”

    -뭐어… 그럼 다행이구요.

    “그, 일단 네가 고칠 순 있는 거지? 아니면 내가 해야하나?”

    -제 쪽에서 돼요. 시간은 좀 걸릴 것 같지만.

    “음. 그건 다행이군.”

    자신이 추위 속에서 움직일 필요가 없다는 점은 다행이었다.

    추위에 손을 떨면서 마법진을 고치려고 한다면, 작업에 시간이 얼마나 걸릴 지 장담할 수가 없으니까.

    평소의 루크라면 집안의 온도같은 자잘한 문제는 육체적인 선에서 간단히 극복할 수 있는 문제였지만, 하필이면 지금은 강력한 아티팩트로 마력이 봉인된 여파로 그게 잘 안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레니에가 고치는 게 자신이 마법진에 손을 대는 것 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다.

    루크는 떨리는 팔을 연신 문질러내리며 중얼거렸다.

    “흐으…. 이래서야, 벽난로라도 켜야 할 판인데.”

    지금은 잠옷만 입고 있어서 그런지, 한기는 자각한 뒤로는 꽤 날카롭게 느껴졌다.

    게다가, 조금 있으면 사람들도 들어올 시간이고.

    사람들이 들어올 때 한기를 느끼지 않게 하려면 루크는 지금이라도 벽난로를 때어야 했다.

    다행히 다이튼이 평소 운동삼아 패놓은 장작이 있기에 장작 문제는 없었지만…….

    딱 한가지 문제는 벽난로가 거실에 있다는 점일까.

    ‘…그리고, 이런 흉터를 지닌 채로 난로 앞에 앉아있을 수는 없겠지.’

    뭔가 가릴만한 옷을 입어야 하는데.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다이튼이 물었다.

    “예르나, 혹시 어디 아파? 오늘 컨디션이 별로 안좋아보이던데.”

    그러자 팔짱을 끼고 있던 예르나가 살짝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그냥, 왠지 오늘따라 몸이 좀 무겁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래? 혹시 감기아니야?”

    그에 예르나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감기 아니야. 열은 하나도 안 나는걸. 딱히 어디 아픈 곳도 없고.”

    “그래? 그거 진짜 이상하네. 뭐, 일단 오늘은 들어가서 쉬어보고, 내일 병원에 가는 게 좋겠어.”

    예르나는 자신을 걱정해주는 다이튼의 모습에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별것 아닌 일로 걱정을 끼치는 것 같아 부끄러움이 들어 얼굴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응, 그 정도로 심각한 건 아닐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다이튼의 반응은 더없이 진지했다.

    “세상일은 모르는거지. 아무리 작은 것도 나중에는 크게 돌아오는 법이니까. 그러니까 내일 꼭 병원 가는 거야.”

    다이튼은 예르나와 시선을 똑바로 맞추며 조금은 강압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을 정도로 심각하게 말했다.

    “으, 응.”

    솔직히 몸상태가 조금 나쁜 정도로 병원에 갈 일까지는 절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예르나는 다이튼의 그 밀어붙이는 듯한 기세에 눌려 알겠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남을 걱정하는 마음을 예르나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고.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집은 금방 도착했다.

    “그럼 일단 들어가서 몸을 따듯하게 녹이자고.”

    “그래.”

    그렇게 그들은 차를 주차한 뒤, 언제나 그렇듯 기분좋은 온기를 기대하며 현관문을 열었다.

    -벌컥.

    “응?”

    “어?”

    그러나 문을 열자 그들을 반겨준 것은 따스함이 아닌 평소답지 않은 쌀쌀함, 그리고…….

    “아…, 다녀오셨어요?”

    몇치수나 큰 스웨터를 입고 벽난로 근처에 붙어앉아 김이 나는 머그컵을 들고 있는 루크의 모습이었다.

    예르나는 당황하며 물었다.

    “루크, 무슨 일인데 그런 꼴로 거실에 나와있니? 집은 또 왜 이렇게 춥고?”

    그러자 루크는 멋쩍은 듯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 사실은 제 실수로 난방마법이 고장나서요. 조금 있으면 고쳐질건데, 그때까지는 벽난로를 쬐어야 할거예요.”

    “아, 그으…래?”

    난방은 조금 있으면 고쳐진다니 그건 다행이다.

    대체 무슨 짓을 했는진 잘 모르겠지만.

    “야, 근데 그거 내 스웨터 아니냐?”

    루크가 입고 있는 스웨터는 원래 몸집이 커다란 다이튼의 치수에 맞춰진 것이었던지라, 루크는 현재 스웨터를 입는다기보단 덮는다는 느낌에 가까운 상태였다.

    실제로 스웨터의 넓은 품에 두 다리를 집어넣어서 공처럼 말려있는 모습이기도 했고.

    루크는 제 손바닥을 완전히 덮는 스웨터의 소매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그냥 지금 입을 게 없어서 입었는데……. 안돼?”

    “아니 뭐, 안되는 건 아니지만…….”

    다이튼은 생각했다.

    ‘평소에는 아빠 옷이랑 같이 빨래했다고 짜증내던 녀석이 대체 무슨일이래?’

    거기에 목을 덮는 스웨터는 입을 때 특유의 정전기가 머리카락을 띄워 부스스하게 만든다며 루크가 싫어하는 옷이었다.

    그런데 굳이 사이즈도 안 맞는 자신의 것을 옷장까지 뒤져서 입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뭔가 수상한데….’

    잠시간의 침묵, 루크는 잠깐 볼을 긁적거리더니 머그컵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핫초코 드실래요?”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여친(?)과 플레이(?)한 흔적(?)을 숨기려는 의도의 오버핏 스웨터 루크…….
    예르나의 스웨터는 소매도 짧고 어쩐지 불편해서 다이튼 걸로 입었다고 합니다.

    Ps. 원래는 그냥 스탠딩이었는데 수정한 버전입니다.

    수정전의 모습은 평소처럼 사용안된 삽화모음에 올라갔어요.

    추가, 올려보니 이상해보여서 삽화 엉덩이 각도 수정 했습니다.

    다음화 보기


           


The Archmage dreams of being an Archmage again

The Archmage dreams of being an Archmage again

다시 대마법사를 꿈꾼다 대마법사였던것은
Score 4.2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5000 Years in the future, the Archmage Luke Irushi opened her eyes again. The world has changes so much.

Horseless carriages, an entertainment box with audio and video, food and spices she has never seen before…

And, a changed magical system!

It wasn’t just the world that chang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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