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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96

   마법진이 검게 물들어 있는 것을 본 유덴은 대뜸 자신의 검을 휘둘렀다.

   

   간을 보는 행위 따위가 아닌. 초격에 상대의 목을 날리기 위한 일검.

   

   검성이 사용하는 검술의 극한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빛과도 같은 공격이 소리를 꿰뚫고서 공허의 사도를 향해 날아든다.

   

   검이 휘둘러진 순간 유덴은 자신의 검이 닿았다고 확신했다.

   

   그녀가 길고 긴 세월 동안 쌓아 온 경험이. 수많은 이들을 상대해오며 만들어낸 직감이. 유덴의 승리를 고했다.

   

   현실에서 이루어진 결과는 유덴의 말이 옳았음을 증명했다.

   

   사도의 몸과 목이 분리되며 붉은 색의 액체가 주변으로 튀긴다.

   

   “검성께서는 공허라는 게 무어라 생각하십니까?”

   

   허나 사도의 목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그의 목은 허공으로 떠올랐다가 바닥을 구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많은 학자들은 공허를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라 말합니다. 세상을 다스리는 모든 긍정적인 요소가 없는 지옥 같은 장소라고 말입니다.”

   “성녀님! 파트란 영애! 권능을.”

   “이미 하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 도사리는 기운이 너무 강해요!”

   

   이 방에 도달했을 때부터 페이비와 조이는 공허의 권능을 물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기운을 떨치지 못하는 것은 단순히 공허의 권능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었다.

   

   성녀라는 직위에 어울리는 신성과 능력을 지닌 페이비와 여러 교수들이 자기학과에 끌어들이고 싶어 할 만큼 놀라운 재능을 지닌 조이마저도 쉬이 물리치지 못할 정도로 기운이 지닌 힘이 거대했기에 두 사람이 곤욕을 치르는 것이다.

   

   젠장. 이렇게 되면 주변의 상황을 둘러 볼 여유가 없어. 어느 정도 희생은 감수하더라도 저들의 계획을 무너트려야 해!

   

   표정을 구긴 유덴이 다시금 검을 휘두르려 하는 그 때에도 바닥을 구르는 사도의 목엔 여유가 가득했다.

   

   “또 다른 누군가는 공허를 논할 가치도 없는 힘이라 이야기합니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에게 왜 관심을 주어야하냐고 말입니다.”

   

   다시금 휘둘러진 유덴의 검이 바닥을 구르는 머리는 물론이고 그 안에 도사리던 공허의 추종자들을 베어 갈랐지만 여전히 방 안에는 사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허나 다릅니다. 공허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공허란 순수입니다. 그 어떤 것에도 오염되지 않은 순백 그 자체이지요.”

   

   사도의 목소리가 이어짐에 따라 방 안의 정경이 달라진다.

   

   방금 전 유덴에게 베였던 이들이 멀쩡한 모습을 되찾고.

   

   검게 물들었던 마법진은 새하얀 색으로 물들었으며.

   

   어두워졌던 창 바깥의 풍경은 설원보다도 하얗게 변했고.

   

   일행을 바라보는 사도의 눈동자는 아무런 색도 담기지 않은 백지로 바뀌었다.

   

   “작금의 세상에는 너무도 많은 것들이 존재합니다. 기나긴 세월 동안 참 많은 것들이 쌓이고 쌓여 순수와는 거리가 멀어졌지요.”

   

   유덴은 사도가 지껄이는 헛소리를 들으며 공격을 잠시 거두었다.

   

   이대로 무작정 공격만 해서야 상황이 바뀌지 않아. 괜히 힘을 낭비할 뿐이야. 진짜 뭐지? 단순히 저 놈들의 몸이 재생되는 것과는 달라.

   

   내가 그런 놈팽이들을 몇이나 상대해봤는데. 그딴 거였으면 재생 못 할 때까지 베어서 죽인다 생각하고 날려버렸겠지.

   

   “순수위에 쌓인 수많은 오염들은 세상을 검은 색으로 물들이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모든 것이 검게 물들어 되돌릴 수 없는 수준이 될 테죠.”

   “뭐. 그래서 다 터트리고 초기화라도 시키겠다고?”

   “정확합니다! 예! 그렇습니다! 이 세상을 시작으로 되돌려 모두가 함께 순수에서 시작하는 겁니다!”

   

   공허의 사도가 말한다.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자본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파트란 영애께서는 특권을 타고 나셨으니 공감하지 못할 겁니다. 이해합니다! 권력이란 그런 것이지요! 허나 다른 두 분은 아니지 않습니까! 고아원에서 자라나며 지옥을 경험하셨던 성녀님이라면! 밑바닥의 용병이었던 검성님이라면! 기존에 존재하던 질서라는 것이 얼마나 쓰레기 같은 것인지 아실 텐데요!”

   

   그가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목소리를 높였지만 페이비도 유덴도 딱히 공감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페이비는 동정 어린 시선으로 사도의 광기를 내려다봤으며 유덴은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을 뿐이었다.

   

   그들의 눈빛을 마주한 사도는 멍하니 앞을 바라보다 이내 정신이 나간 것마냥 가열찬 웃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새하얀 색으로 물들어 가는 방 안을 웃음소리가 가득 채워가던 그 때에 조이가 페이비와 유덴 사이에 끼어들어 자그마한 목소리를 냈다.

   

   “지금 저들을 공격하는 건 무의미합니다. 아무리 공격해봐야 처음으로 돌아갈 뿐이에요.”

   “…자세히 설명해주십시오.”

   “사도가 지닌 공허의 권능입니다. 방금 전 일어났던 일을 무로 되돌린 겁니다.”

   

   조이는 루시가 책에 적어두었던 내용을 떠올리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공허의 권능이란 것의 기원은 결국 자기자신을 공허 속에 내던지는 것부터 시작된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기에 다른 것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대개의 추종자들은 자기 자신만을, 그것도 한정적으로 공허 속에 내던질 수 있지만 공허의 사도는 다르다.

   

   공허의 악신에게 총애받는 존재인 사도는 자기자신은 물론이고 주변의 현상마저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설령 그것이 자신의 죽음일지라도.

   

   “루시의 설명에 따르면 저기에도 한계가 있다고 했습니다만…”

   

   지금 공허의 사도가 보여주는 모습은 한계와는 거리가 멀어보였다. 아마 아카데미의 마법진에서 막대한 힘을 부여받고 있기 때문이겠지.

   

   100층 규모의 던전을 지탱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아카데미 내에 여러 긍정적인 기운을 부여하며 외부의 개입을 막는 결계까지도 유지하던 마법진의 힘

   을 부여받고 있으니 기적이라 부를만한 일을 자유자재로 펼치는 거다.

   

   “영애. 마법진에 접근하면 저 놈과의 연결을 끊을 수 있습니까?”

   “이론적으로는 가능합니다.”

   

   마법진을 만든 장본인인 에르기누스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조이는 마법진에 다가갈 수만 있다면 연결을 끊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 뿐일까? 곁에 페이비가 있으니 마법진을 침식한 악신의 기운을 무너트리는 것도 어렵지 않으리라.

   

   문제는 마법진에 개입하는 것 이전에 마법진에 다가가는 것 자체가 어렵다는 사실이다. 죽음조차도 없는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존재들을 어찌 물리치고 걸음을 내딛는단 말인가.

   

   “…곤란하게 됐네.”

   

   유덴의 입장에서도 현 상황이 막막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눈앞에 머무르는 이들을 베어넘기는 것은 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저들이 어떤 짓을 벌이더라도 그녀는 모든 걸 무의미하게 만들 자신이 있었다.

   

   허나 그럼 무얼 하는가. 그녀가 하는 모든 것이 없는 일이 되어버릴 텐데.

   

   흐음. 저 마법진에서 나오는 출력이 한계를 맞이할 때까지 검을 휘두르는 수밖에 없나.

   

   “제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네요.”

   

   유덴과 조이의 표정이 곤혹으로 물들던 그 때에 페이비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주변에 도사리는 따스한 신성이 순백을 물리고 세상을 본래의 색으로 되돌린다.

   

   신성의 영향마저도 무시할 순 없었던 걸까. 일순에 웃음을 멈춘 공허의 사도가 눈꼬리를 내리며 페이비를 바라본다.

   

   “도움이요? 주신 교회에 의해 만들어진 거짓된 성녀께서 말입니까?”

   

   공허의 사도가 내뱉은 말에 조이의 눈동자가 커지고 유덴마저도 놀라 고개를 돌리지만 페이비의 표정은 태연했다.

   

   “예. 그렇습니다.”

   “하하하! 웃긴 이야기를 하시는 군요! 당신이 무얼 할 수 있습니까? 주신의 수치가 되어야 할 당신이 뭘 할 수 있냔 말입니까! 그럴 바엔 차라리 처음부터 시작하시지요! 순백 속에서는 존재자체가 죄인 당신도 순수해질 수 있을 테니.”

   “거절하겠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분.”

   

   상대의 도발 속에서도 페이비가 미소를 지어보이자 사도의 눈꼬리에 살짝 힘이 들어간다.

   

   “그 시련도. 고난도. 죄도. 모든 것이 지금의 저를 이루고 있는데 그 모든 걸 무로 돌려서 무얼 하겠습니까.”

   “그런다면 당신의 진실된 신앙이 인정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당신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시는군요. 저는 이미 주신께 보답 받았습니다.”

   “…뭐?”

   

   페이비가 자신의 신성을 겉으로 드러낸다. 주신 교회의 성직자들이 사용하는 평범한 신성이 아니라 태양과도 같은 따스함을 담은 신성을 말이다.

   

   위대한 신의 신성이 주변으로 퍼져나감에 따라 공허의 권능이 뒤로 물러나며 순백의 풍경이 점차 색을 갖추기 시작한다.

   

   “당신께서 모시는 쩨쩨하신 분과는 달리 주신께서는 한없이 자비로운 분이시거든요.”

   

   그 한 가운데에 선 페이비는 어느 때보다도 당당히 웃음을 지으며 공허의 사도를 바라봤다.

   

   “이 죄스러운 사람을 품어주실 만큼.”

   “…허세를.”

   “이해 못 하시는 것도 당연하다 생각합니다. 당신이 모시는 신께서는 이런 관용이 존재치 않으실테니.”

   

   실핏줄을 세운 공허의 사도의 벌건 눈 앞에서도. 페이비를 노리는 수많은 적의 속에서도. 공허의 권능이 담긴 여러 위협을 마주하면서도. 페이비는 여전히 여유로웠다.

   

   지금의 상황이 두렵지 않아서는 아니었다.

   

   자신의 목숨이 아깝지 않아서도 아니었다.

   

   그저 믿기 때문이었다.

   

   방금 전 자신의 등을 밀어 준 위대하신 주신을.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을 만들어 둔 주신의 사도를.

   

   “왜 그리 표정이 안 좋으신 걸까요? 당신의 말대로 모든 게 순수로 돌아갈 거라면 제가 한 말도 사라질 텐데?”

   “그토록 공허로 돌아가길 바란다면 그리 해드리죠.”

   

   페이비는 상대의 적의를 앞에 두고서 자신의 마법을 펼쳤다.

   

   과거 루시가 기적을 벌일 때에 사용했던 마법이며. 이제는 그녀의 것이 된 마법을.

   

   페이비를 중심으로 신성의 영역이 펼쳐진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Ilham Senjaya님 보러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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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g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Mesugak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메스가키 탱커는 참교육 당하지 않는다.
Score 9.2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2 Native Language: Korean
“You sloppy orc~ You can’t take down a girl?” He became the Mesugaki character in the Academy game. But the taunt works too w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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