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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98

   저 멍청이들이 조금 더 혼란에 빠져 있기를 바랐는데 아쉽게 됐네.

   

   일이 끝날 때까지 시간을 벌기만 하면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승리선언을 할 수 있었는데 말야.

   

   그리고 나서 이를 악물고 달려든 루카를 쳐발라 준 후에 머리를 잘근잘근 밝아주면서 질질 짜는 걸 구경했다면 정말 즐거웠을 텐데.

   

   아쉽다. 뭐. 그렇지만 이것도 이것대로 나쁘진 않아.

   

   내가 자신을 이기지 못할 거라 생각하는 멍청이를 찍어눌러주는 것도 재밌는 일인 걸.

   

   방패를 치켜 든 나는 웃음을 가리는 체 하며 저들의 구성을 확인했다.

   

   던전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줄어든 이들이 셋. 남은 건 루카와 공허의 추종자 다섯.

   

   평민 모험가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아카데미 교수로 들어온 루카의 실력이 뛰어난 것이야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고, 다른 공허의 추종자들 또한 여러 박해 속에서 살아남은 이들답게 꽤 괜찮은 실력을 지닌 것처럼 보인다.

   

   이 지역을 공허의 권능이 잠식하고 있단 걸 생각해보면 저들이 지닌 힘은 내 예상보다 더 거셀 테지.

   

   저들을 나 홀로 감당할 수 있을까에 대해 생각해본다면 솔직히 말해 까다롭다.

   

   그렇지만 괜찮다. 저들이 혼자가 아니듯, 나도 지금 혼자가 아니니까.

   

   – 다시 뵙네요. 공허의 추종자분들. 동료분들께서 여러분을 애타게 찾고 있는데 다른 사람을 보시면 어떡하나요?

   

   아드리가 뒤 편에서 자신의 사령들을 이끌고 모습을 드러낸다. 사령들의 선두에 선 것은 얼마 전 이 곳에서 죽은 공허의 추종자들이었다.

   

   죽었으나 죽지 못한 채 바라지 않는 일을 해야 하는 이들의 모습에 과거 그들과 동료였던 자들이 치를 떤다.

   

   “안녕. 루카 교수님.”

   

   그리고 내 뒤에서 프레이가 얼굴을 드러냈다.

   

   “오. 안녕하십니까. 켄트 영애. 대단하시군요. 환각에서 빠져나오다니.”

   “허접하던데? 그게 대단한 일이야?”

   “으음. 제가 보는 눈이 틀렸네요. 영애께선 제 생각보다도 대단하신 분이셨군요.”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자신을 가르치던 이를 적으로 마주하게 되었음에도 프레이의 표정에서는 자그마한 망설임조차 찾아볼 수 없다.

   

   그녀에게 있어 루카라는 존재는 크게 관심을 보일 가치가 없는 존재인 것이다.

   

   “어찌 보면 잘 된 일입니다. 당신께도 시련을 내려드릴 수 있게 되었으니.”

   “시련? 재밌는 거 해줄 거야?”

   

   되물으며 검을 뽑아든 프레이는 무색의 오러를 휘감으면서 루카에게 달려들었다.

   

   루카는 양 손에 단검을 붙잡은 채 프레이가 휘두르는 바람을 맞이했다.

   

   그가 한 행동은 단순했다.

   

   유려하게 단검을 휘두른 것도 아니고.

   

   막대한 힘으로 찍어누른 것도 아니고.

   

   경이로운 속도를 보인 것도 아니었다.

   

   그저 몇 걸음.

   

   몇 걸음 만으로 루카는 프레이의 날카로운 검격을 회피하는 것은 물론이고 프레이의 품 안 쪽으로 파고들어 프레이가 뒤로 물러서게 만들었다.

   

   “…읽혔어?”

   “켄트 영애. 저는 말입니다. 재능을 지닌 것으로 보이는 분들이라면 누구나 주시하고 있답니다. 당신도 예외가 아닙니다. 아니. 굳이 따지자면 당신은 예외가 될 수 없죠. 영애께선 언제나 알른 영애와 함께 계셨으니까.”

   

   저게 루카의 특기다. 사람 하나하나를 분석해서 그에 맞춘 전략을 짜내는 것.

   

   묘사된 바에 따르면 이 전략이라는 것은 단순히 누가 어떤 동작을 선호하고 어떤 것을 꺼린다 정도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무기를 휘두르는 사이에 0.3초 정도의 빈틈이 존재하니 그 사이를 파고들면 좋겠다 수준에 이른다.

   

   게임 속에 구현되었을 때는 주인공 파티가 까다롭게 여기는 무기, 스킬, 특성, 조합 등 모든 걸 준비해서 기다리고 있는 방식이었지.

   

   그래서 일부러 루카에게 특정 전략을 강요하는 방식도 존재했다.

   

   소울 아카데미 내에서 원탑 폐급 무기라 불리던 양손 도끼를 쥐어준다던가. 마법소녀마냥 화려한 싸움법을 펼치게 만든다던가 하는 식으로.

   

   그거 하나하나 실험할 때 정말 재미있었는데. 어떻게 하면 더 폐급으로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하느라 하룻 밤을 꼬박 새운 적도 있을 정도였어.

   

   하여튼. 이런 루카를 상대하는 정공법은 크게 두 가지다.

   

   루카가 무엇을 준비했더라도 박살낼 수 있을 만큼 스펙을 쌓는 것. 다른 하나는 루카의 파훼법을 역파훼하는 것.

   

   루카를 괴롭힌다는 의미에선 전자가 가장 훌륭하겠지만 그건 현실적으로 무리고.

   

   지금 내가 택해야 하는 건 후자 쪽이다.

   

   “안 오십니까? 알른 영애?”

   “에?♡ 내가 가야 해?♡ 같은 공간에서 숨쉬는 것조차 혐오스러운 변태 새끼한테 내가 왜?♡”

   “하하. 그렇죠. 영애께서는 먼저 오실 분이 아니죠. 알고 있었습니다.”

   

   루카가 징그러운 미소를 짓는 동안 뒤편에서는 공허의 추종자들과 아드리의 사령들이 맞붙기 시작했다. 개개인으로 우세한 것은 공허의 추종자들이었다.

   

   이미 죽었음에도 아드리라는 구심점을 바탕으로 모여든 영들과 악신의 힘을 나눠 받든 이들 중에서 후자가 강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

   

   허나 그 개개인의 격차를 아드리는 사령들의 수와 자신의 지휘와 스스로가 펼치는 사령마법으로 극복해보였다.

   

   쟤가 강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저 정도였었나? 내가 알던 것보다 훨씬 더 강해진 것 같은데? 저 정도면 주신 교회에서 대놓고 토벌 대상으로 삼을 정도 아냐?

   

   <교회가 아니라 네가 토벌해야 하는 상대인 듯 하다만.>

   ‘진짜 위험해지면 주신께서 뭐라 하시겠죠. 그런 부분에선 민감하신 분이니.’

   

   시간 끌기나 하면 다행이라 생각하던 아드리가 주도권을 잡는 모습에 살짝 놀란 나는 이내 히죽 웃으며 루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는 넌 왜 가만 서 있어?♡ 변태 새끼라면 침을 줄줄 흘리면서 달려들어야 하는 거 아닌가?♡ 설마 페도 주제에 그런 깡도 없는 허접조루인 거야?♡”

   “…알겠습니다. 그리 부탁을 하시니 조금은 어울려 드리도록 하죠.”

   “푸하핳♡ 부탁?♡ 정말 자의식 과잉이네♡ 극혐♡”

   

   루카가 달려드는 것을 본다.

   

   그의 걸음이 얼마나 거센지. 그의 다리에 얼마나 많은 힘이 들어가 있는지. 그의 무기가 어디로 향하는 지. 그의 눈빛이 어딜 바라보고 있는지.

   

   그 모든 것을 확인한다.

   

   그리고 확신한다.

   

   그가 세운 전략이 내가 아는 전략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방패를 움직이는 것조차 껄끄러울 수준의 초근접전.

   

   성벽을 무너트릴 수 없다면 그 성벽 너머로 넘어가버리면 그만이라는 듯한 행동.

   

   이를 예상하고 있었던 나는 오히려 방패를 내리고서 루카의 얼굴을 이마로 박아버렸다.

   

   이럴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듯 루카는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렇게 루카의 첫 수가 실패로 돌아가며 내 방패가 그의 앞을 가로 막는다.

   

   “다 아는 것처럼 나대더니 내 피부랑 맞닿는 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나봐?♡ 이래서 동정이 혐오스럽다니까♡”

   

   루카는 내 도발에 어울려주는 대신 재차 앞으로 발을 움직였다.

   

   흐응. 즉석에서 전략을 수정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또 안 쪽으로 파고들려고 하는 건가.

   

   회심의 한 수가 있다고 하기엔 할아버지나 내 여러 스킬들도 너무 조용해.

   

   이건 좀 실망스럽네.

   

   겉으로는 태연한 척 해도 이미 내 도발에 걸려서 머리가 돌아버린 상태인가.

   

   뭐. 아무래도 좋아.

   

   가지고 놀기 좋은 상태가 됐다면 가지고 놀아줘야지.

   

   “슬쩍 닿은 내 피부가 그렇게 좋았어?♡ 푸하핳♡ 이 악물고 달려드는 꼴이 진짜 절박해보이네♡ 어~떡할까?♡ 한 번 더 놀아줄까?♡”

   

   새로운 둔기술의 첫 시험 상대로 루카 정도면 그렇게 나쁘진 않잖아.

   

   *

   

   루카는 자신의 이성이 잘 작동하지 않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기이할 정도로 벌겋게 물든 감정은 눈앞의 꼬맹이를 잡아 죽이라는 생각만을 허락할 뿐 다른 그 어떤 사고도 허락하지 않는다.

   

   이게 이상하단 걸 알고 있는 루카는 본성에 따라 움직이는 와중에도 필사적으로 이성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

   

   이대로 가다간 알른 영애께 휘둘리다가 시간만 질질 끌릴 뿐이야.

   

   영애께서 내 전략을 읽고 파훼한 걸 생각하면 이 이상 이성을 잃어버렸다간 정말로 패배할지도 모르는 일이지.

   

   그래선 안 된다. 앞서 생각한 전략이 파훼 된 이상 다른 전략으로 바꿔야 해.

   

   생각을. 생각을 해야.

   

   “…이런.”

   

   이성을 붙잡으려다가 빈틈을 내어 준 루카는 프레이의 검격이 자신의 눈 앞까지 다가 온 걸 확인하고 나서야 다급히 공격 사이에 자신의 단검을 끼워 넣었다.

   

   반응이 늦은 탓일까. 궤도를 비틀었음에도 불구하고 루카의 얼굴에 자상이 새겨졌다.

   

   조금만 더 반응이 늦었다면 죽었어.

   

   자신이 정말 위험했단 사실에 등줄기가 싸늘해진 루카는 잠시나마 마음을 사로잡았던 분노를 떨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루카는 자신을 사로잡았던 이상에 대해 눈치챘다.

   

   알른 영애의 목소리를 들을 때 분노가 차오르는 것은 익숙한 일이다.

   

   그녀의 어투나 표정, 행동이 얄미운 것과는 별개로 알른 영애의 목소리엔 사람의 감정을 건드리는 힘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당장 알른 영애 본인이 이를 활용하는 모습을 몇 번이나 봐 왔으니까.

   

   그렇기에 어느 정도 대처할 수 있노라 생각을 했었고 대비할 수단도 몇이나 강구해 두었지.

   

   허나 그 모든 것은 실제로 알른 영애의 앞에 선 순간 무의미해졌다.

   

   그녀가 지닌 힘은 너무나도 간단히 사람의 이성을 앗아갔다.

   

   뭘까. 무엇이 다른 걸까. 무엇 때문에 내 이성이 그녀에게 잡아먹힌 걸까.

   

   내가 왜 생각을 하는 것조차 버거워하게 된.

   

   아.

   

   간신히 되찾은 이성 속에서 사고하던 루카는 루시의 움직임을 본 순간 무엇이 문제였는지를 알아차렸다.

   

   너무나도 아름다워 자연스레 시선을 주게 되지만.

   

   저를 가만 보고 있다보면 그 안에 담긴 장난스러움에 잡아먹히게 되는.

   

   일종의 춤사위와도 같은 움직임.

   

   경이롭군.

   

   보라.

   

   동료들의 원한을 갚겠노라며 분노를 불태우는 이들조차 시선이 끌리는 광경을.

   

   함께 옆에서 싸우는 이들조차 조금씩 시선을 주는 저 모습을.

   

   그 모든 시선의 한 가운데에서 너무도 얄미운 웃음을 짓는 알른 영애를.

   

   아아.

   

   찍어 누르고 싶다.

   

   울리고 싶다.

   

   바닥에 머리를 박은 채 사죄하게 만들고 싶다.

   

   겁에 질려 벌벌 떠는 꼴을 보고 싶다.

   

   맹세?

   

   맹세가 무슨 의미가 있지?

   

   이미 어긴 지 오래 된, 검게 물들어버린 맹세가 무슨 의미가 있냔 말이다.

   

   마음 깊은 곳에서 끌어오르는 검게 물든 마음 속에서 루카는 누군가가 속삭이는 것을 들었다.

   

   그리고 그 말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루시의 시련이 되기 위해서.

   

   자신의 바람을 이루기 위해서.

   

   저 빌어먹을 꼬맹이에게 예의란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

   

   [악신 아그라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Ilham Senjaya님 보러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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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g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Mesugak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메스가키 탱커는 참교육 당하지 않는다.
Score 9.2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2 Native Language: Korean
“You sloppy orc~ You can’t take down a girl?” He became the Mesugaki character in the Academy game. But the taunt works too w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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