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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

       오늘이 오기 전까지 엔리는 스토커를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미친놈을 상대해봐야 지치는 건 자신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스토커가 선을 넘지 않았다면 앞으로도 그랬을 것이다. 정 마음이 불편했다면 돈 날린 셈치고 어학당을 나오면 되는 거였으니까.

       

       그 놈이 혼자서 돌아가고 있는 엔리에게 다가와 외롭지 않냐고. 다시 가깝게 지내자고 말하지 않았다면 엔리가 들이 받을 일도 없었겠지.

       

       기름기 낀 스토커의 웃음에 엔리는 폭발해 버렸다.

       

       다시는 다가오지 말라고. 역겹다고.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말할 틈도 주지 않고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스토커가 폭력을 가할 수도 있다는 건 생각하지 않았다. 머리에 열이 올라서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으니까.

       

       그러다 스토커가 주먹을 들었을 때. 엔리는 그 주먹이 참 커다랗단 생각을 했다.

       

       만약 백아라가 그녀를 구해주지 않았다면 오늘 그녀는 방송을 켜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하루 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엔리도 사람이라서 밝은 척 하는 데도 한계가 있으니까.

       

       “그러니까 그 분은 저를 구함과 동시에 이 방송도 구한 셈이죠. 제가 어떻게 보답을 안 하겠어요.”

       

       감사를 전하다 보니 늦었다. 라는 엔리의 말에 채팅창의 분위기가 애매해졌다. 충분히 늦을 만한 상황이었다.

       

       공지를 안 쓴 건 분명 엔리의 잘못이 맞았지만, 정신이 없을 만 했다는 사실엔 시청자 대다수가 동의하는 바였다.

       

       대세는 엔리의 것이었다.

       

       

       – 리어카도둑이종운님이 1000원을 후원하셨습니다.

       

       

       [구해준 사람은 어떤 사람임?]

       

       

       “으음. 뭐라고 정의하긴 어렵지만 괴짜?”

       

       오늘이 오기 전까지 엔리는 백아라라는 사람을 괴짜라고 생각했다. 자기가 자른 듯 엉망진창인 머리카락이나. 바닥에 있던 걸 아무렇게나 주워 입은 듯 허름한 옷가지를 보면 누구라도 그리 생각할 것이다.

       

       그 모든 문제를 껴안고서도 예뻐 보인다는 것도 특이했다.

       

       가끔 무언가 안 풀리는지 혼자서 중얼거리는 중국어라거나. 주변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는 거침없는 행동도 백아라를 괴짜로 보이게 만드는 요소였다.

       

       “괴짜가 맞는 것 같아요. 멋있는 괴짜죠.”

       

       스토커를 가볍게 제압하고는 서투른 한국말로 괜챦냐고 묻는 그 모습은 엔리 마음 속 어딘가에 자리 잡은 로망을 자극했다.

       

       그래서 말없이 떠나가려는 아라의 소매를 붙잡았다. 이대로 가버리면 다시는 대화할 기회가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기에.

       

       – 엔리의 부대찌개님이 1000원을 후원하셨습니다.

       

       [남자임?]

       

       “아. 그게 궁금했구나! 걱정 마요. 엔육수분들. 그 분은 여자니까 그렇고 그런 일은 없어요.”

       

       – ?

       – 이 방에 육수가 있음?

       – 개소리 ㄴ.

       

       채팅창의 분위기가 가벼워진 것을 느끼며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면 벌칙 룰렛 이야기는 그냥 넘어갈 수 있겠다.

       

       이대로 농담 몇 번 하고. 아피스로 들어가 버리면 돼.

       

       몇몇 사람들은 벌칙 룰렛 안 돌리냐고 하겠지만 이 악물고 무시하면 룰렛 무새 나가라고 하는 사람들이 나올 거야.

       

       그럼 완전히 흐지부지. 완벽한 계획이야.

       

       [ㅇㅇ님이 미션을 걸어주셨습니다]

       

       “ㅇㅇ님! 10만원짜리 미션을! 뭘까요?”

       

       [벌칙 룰렛 돌리기]

       

       와. 벌칙 룰렛.

       

       그 글자를 확인한 엔리는 떨리는 눈으로 채팅창을 확인했다.

       

       아니나 다를까 채팅창에는 싸움이 나 있었다.

       

       – 어쨌건 간에 공지도 없이 지각한 거니까. 벌칙 룰렛 돌려야 하는 거 아님?

       – 방장이 오늘 그리 고생을 했는데 그 정도는 봐줄 수 있는 거 아님?

       

       두 세력은 팽팽했다.

       

       이건 좋지 않아.

       

       차라리 스트리머인 엔리가 시청자들의 공적이 되는 편이 낫다. 시청자들 사이에서 싸움이 나버리면 오늘 하루 방송 분위기가 계속 개판이 될지도 모른다.

       

       오늘 뿐일까. 앞으로도 계속 이야기가 나올 거다. 벌칙 룰렛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난리가 나겠지.

       

       오랜 스트리밍 경험상 이 불판은 당장 해결하고 가지 않으면 큰 곤경이 될 불판이었다. 앞으로도 불씨가 되어 몇 번이나 산을 태울 게 분명했다.

       

       “자! 여러분! 회장님이 돈을 걸어 주셨는데 어떻게 안 돌리겠어요!”

       

       싫지만. 정말 싫지만. 마음만 같아서는 실패 버튼을 누르고 싶지만. 여기선 돌리고 가야 한다.

       

       엔리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벌칙룰렛을 켰다. 룰렛에 적힌 벌칙들을 읽으니 정신이 아득해졌지만 어떻게든 버텼다.

       

       지금 제대로 웃고 있으려나. 아닐 것 같은데. 표정 분명 썩어 있을 거야.

       

       제발. 그나마 괜찮은 걸로. 아니 다른 건 다 괜찮아. VR공포겜만 피하자.

       

       엔리는 다른 스트리머가 VR공포게임을 하다 기절한 걸 본 적이 있었다.

       

       나름 강심장으로 평범한 공포게임은 비명 하나 없이 하던 사람이었는데 VR공포게임의 압도적인 공포에 쓰러진 것이다.

       

       스스로를 겁쟁이 중의 겁쟁이라 자부하는 엔리는 자기라면 채 10분도 못 버티고 쓰러질 것이라는 걸 알았다.

       

       근데 그걸 켠왕해야 한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깨는 것보다 죽는 게 빠를 거야.

       

       심호흡을 하고 룰렛을 돌렸다. 빠르게 돌아가던 룰렛의 속도가 서서히 줄어들고. 마지막에 화살표에 가리킨 것은.

       

       “어머나. 야발?”

       

       공포게임이었다.

       

       *

       

       다음 날 어학당에서 만난 엔리는 두 손을 흔들며 나를 반겨줬다.

       

       살갑게 인사하는 그녀를 무시할 만큼 얼굴이 두껍진 않았기에 난 자연스레 그녀의 옆에 앉게 되었다.

       

       “어제 제가 보낸 문자 확인하셨어요?”

       “종류가 많았습니다.”

       

       어제 전화로 엔리의 지시를 받으며 한참을 고생한 결과 집에 있는 컴퓨터의 성능을 확인할 수 있었다.

       

       놀랍게도 그 컴퓨터의 성능은 현 시점에서 최고라 부를 만 한 수준이었다.

       

       – 이 정도면 VR기기만 사면 무슨 게임이든 할 수 있겠는데요?

       

       성능을 확인한 엔리는 이 중에서 마음에 드는 걸 사라며 추천하는 VR기기 목록을 보내 줬다.

       

       기기의 가격은 천차만별이었다. 싼 것은 수 만원에서 비싼 것은 수억 원에 달했다.

       

       게임이 뭐기에 치킨 몇 만 마리를 태우나 싶었지만 게임에 진심인 이들은 0.01초의 반응속도를 위해 그 정도 투자를 한다며 엔리가 설명해줬다.

       

       하긴 무림에서도 0.01초의 반응을 위해서라면 성 하나를 넘길 위인들이 넘쳐 났으니. 비슷한 걸 테지.

       

       “마음에 드는 거 있었어요?”

       “네. 엔리가 추천해 준 것. 샀습니다.”

       

       그 많은 기기 중에서 엔리가 추천해 준 것은 오십만원대의 VR기기였다.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보급형 중에서 가장 가성비가 좋은 모델이라고 했다. 프로를 할 게 아니라면 몇 년이고 우려 먹을 수 있는 마스터피스라면서.

       

       VR기기에 아는 게 하나도 없던 나이기에 그냥 엔리가 추천해 준 물건을 구매했다. 지금 내 수중에 돈이 없는 것도 아니었으니 망설임은 없었다.

       

       “벌써요? 가벼운 지출은 아니었을 텐데.”

       “아피스가 하고 싶었습니다.”

       

       난 어제 마이 튜브에 올라 온 천마에 관한 영상을 몇 개 더 보았다.

       

       대개는 다른 무인과 싸우는 영상이었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천마가 사용하는 무공은 분명 내가 사용하던 것과 완벽하게 일치했으니.

       

       어렸을 적의 불완전이 눈에 띄어서 불편하기는 했다. 그 시절의 나는 왜 그 따위로 밖에 싸우지 못하면서 무림 제일을 외치고 다녔던 걸까.

       

       확신을 가지고 나니 저들은 나에 관해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라는 호기심이 생겼다. 또한 나라는 인간을 저들이 어찌 평가하는가도 궁금했다.

       

       무림에서 나의 평가는 언제나 양극단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정파의 사람들은 나를 때려 죽여도 모자랄 악마로 취급했고. 마교의 사람들은 내가 무얼 하건 교주님의 뜻이 맞다며 고갤 주억거렸지.

       

       내 삶이 다른 이들에게 어찌 보일까. 라는 부분은 절로 호기심이  생기는 사안이었다.

       

       이 호기심을 충족시키려면 직접 아피스를 해봐야 했고. VR기기가 필요했다.

       

       “흥미를 가져주신 건 고맙긴 한데. 좀 더 알아보셔야 하지 않았을까요. 정 궁금하시면 제 집에서 아피스를 해볼 수도 있는 거였는데.”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엔리의 말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하나였다.

       

       그녀는 내가 실망하지 않기를 바랐다.

       

       웃긴 이야기였다. 다른 이가 추천을 해줬건 어땠건 일을 실행한 것은 나다. 내가 선택한 것이고. 내가 받을 업보다. 그런데 어찌 남을 원망한단 말인가.

       

       이런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내 한국어 실력은 미천했다. 그래서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참으로 바보 같은 단어의 나열이었다.

       

       “전 엔리를 믿습니다.”

       

       엔리는 멍하니 내 입꼬리를 쳐다보다가 얼굴을 쓸어 내렸다. 왜 저러는 걸까.

       

       “아라 씨. 모르는 거 있으면 뭐든 물어보세요.”

       

       말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다. 오늘도 모르는 내용이 한 둘이 아닐 텐데 그녀가 도와주지 않으면 곤란했다.

       

       얼마 안 가 교사가 학당에 들어왔다. 부디 오늘 수업은 좀 알아들을 수 있는 내용이기를.

       

       *

       

       며칠이 지나 VR기기가 집에 도착했다.

       

       기기는 헬멧 하나와 팔 다리에 착용하는 밴드로 이루어져 있었다. 친절하게 중국어로 적혀 있는 설명서에 따르면 뇌파를 이용해서 생생한 게임을 즐길 수 있게 해준다나 뭐라나.

       

       내가 읽을 수 있는 글자인데 왜 이해할 수가 없지?

       

       VR기기의 사진을 찍어 엔리에게 보내주니 10초가 지나기 전에 장문의 문자가 돌아왔다.

       

       그 내용은 엔리가 나름대로 요약한 VR기기 매뉴얼 같은 거였다.

       

       너무 세세해서 읽을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 점만 뺀다면 엔리가 보내 준 매뉴얼은 무척 알찼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여럿 있어서 결국 전화를 걸어야 했지만.

       

       엔리의 도움을 받은 끝에 VR기기를 설치하고 나니 진이 다 빠졌다. 아피스고 뭐고 간에 그냥 쉬고 싶었지만 해보고 후기를 남겨 달라는 엔리의 말이 생각나 헬멧을 머리에 썼다.

       

       침대에 누워서 헬멧 옆에 있는 버튼을 누르면 된다 했었지.

       

       그 순간 의식이 점멸했다. 사술에 의해 잠에 빠질 때처럼 검게 물든 의식 속에서 깨어나니 새하얀 세상이 펼쳐졌다.

       

       이 무슨.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다 내 앞에 떠오른 창 덕분에 이 세계가 VR세상 속이라는 걸 깨달았다.

       

       놀랍군. 어떤 기술이 쓰인 건지는 모르겠다만 현실과 구분이 안 될 지경 아닌가. 무림의 사술사가 이런 능력을 가졌다면 세상을 지배했을 지도 모르겠어.

       

       떠오른 창에는 여러 기능이 있었지만 난 저런 것에 관해 아는 바가 없었다. 엔리가 보내 준 설명서엔 적혀있을 지도 모르겠다만 굳이 알아 볼 필욘 없잖나. 아피스만 실행되면 됐지.

       

       게임을 실행하니 또 다시 의식이 점멸했다.

       

       으. 이 감각은 영 익숙해지기 어렵군. 게임을 켤 때마다 이런 감각이 느껴진다면 좀 불쾌한데. 무언가 해결책 같은 게 있으려나.

       

       의식이 떠오르자 눈앞에 펼쳐진 것은 여러 사람들이 저 마다의 무기를 들고 싸우는 광경이었다.

       

       개 중에는 검 한 자루로 하늘을 가리는 이도 있었고. 허공을 터트리는 주먹을 제 덩치마냥 큰 방패로 막는 사내도 있었다.

       

       수십 개의 마법진을 띄우고 기적을 난사하는 마법사와 호기롭게 웃으며 그걸 쳐내는 창술사.

       

       그 외에도 여러 인물들이 나와 제 각기 자신의 특기를 자랑했다.

       

       그 풍경은 놀라울 정도로 생생했다. 당장 내 앞에서 저들이 싸움을 펼치는 것처럼.

       

       투쟁심이 샘솟았다. 천마가 플레이 할 수 있는 캐릭터 중 하나이고. 저들도 플레이 할 수 있는 캐릭터라면 실력은 대등할 터.

       

       나와 비견될 정도의 강자가 넘쳐나는 세상이라. 흥미롭구나. 내 경지에 오른 이후로 나와 맞설 수 있는 이를 본 적이 없거늘.

       

       손이 근질거린다. 아무리 부정한다 한들 나는 뼛속까지 무림의 사람인 모양이야.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Ilham Senjaya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겁게 읽어 주시고 여유가 되신다면 추천과 선작 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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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Heavenly Demon is Broadcasting

The Heavenly Demon is Broadcasting

천마님 방송하신다
Status: Completed Author:
He couldn't pass his habits to others upon his return. The Heavenly Demon remained a martial art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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