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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

     나리아 지오 노스트럼.

     이 금발 녹안의 인형 같은 작은 소녀가 바로 이 나라의 공주다.

     

     그리고 훗날 ‘망국의 공주’라고 불리게 되는 여인.

     “왕위 계승권 1위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

     나리아 공주와 정원으로 걸으며 가볍게 말을 붙였지만 무시당했다.

     “그 이유로, 세간에서는 공주님께 ‘완전 기억 능력’이라는 신의 축복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

     하지만 계속 말을 붙인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이야기하다가 떨어져 나가기 십상이지만-

     ‘나는 알지.’

     이 차가운 소녀는 지금 열심히 대화에 참여하고 있다.

     “지브롤터까지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진심으로.”

     “…….”

     꾸벅, 짧게 고개를 숙이는 것이 이 소녀의 답.

     나리아 공주는 말이 없는 편이다.

     누군가는 ‘너무 과하게 말이 없다’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건 음해일 뿐이다.

     “저를 혹시 알고 계십니까?”

     “…그레이 지브롤터.”

     처음으로, 공주가 입을 열었다.

     “크림슨 지브롤터의 2남 1녀 중 장남. 나이는 10살. 지브롤터 가문에서도 상당히 특이한 머리칼과 눈 색을 가지고 태어나 화제가 됨. 2개월 전에 열병을 앓고 쓰러진 적 있음.”

     나에 대한 보고서를 기억에서 꺼내 읊는 듯한 말투.

     “…알아.”

     그러면서 여전히 표정은 없지만, 나를 향해 무심한 눈으로 빤히 바라보고 있다.

     “정확합니다, 공주님.”

     “그래.”

     단답형의 대화.

     누군가에게는 조금 숨이 막힐 수 있지만, 나는 내색하지 않고 정원의 중앙을 가리켰다.

     “앉으시지요. 국왕 폐하와 아버지 사이에서 이야기가 끝나려면 조금 시간이 걸릴 겁니다.”

     “…….”

     나는 자연스레 그녀가 앉을 의자를 뒤로 빼냈다.

     “공주님?”

     “…….”

     꾸벅.

     다시 고개를 한 번 숙이고는 의자에 다소곳이 앉는다.

     

     나리아 공주의 뒤를 따라온 여기사 한 명이 나를 탐탁잖게 바라보고 있지만, 딱히 신경 쓰지 않는다.

     ‘저건 그냥 병풍 같은 거니까.’

     내가 여기에서 공주를 향해 위해를 가하는 게 아니라면, 호위 기사는 그냥 호위로서 서 있을 뿐이다.

     ‘나중에 왕비에게 내가 한 모든 말을 보고하고 그러겠지만, 딱히 문제 될 것도 없고.’

     왕이 아닌 왕비에게로의 보고.

     왕궁 곳곳에 왕비의 손-정확히는 모르가니아 대공가의 손이 뻗어있다는 간접 증거.

     ‘상관없긴 해.’

     장기적으로 바라보면 모르가니아 대공가는 위험하지만, ‘노스트럼이 아닌 카르멘 모르가니아’는 위험한 적이 아니니까.

     “공주님. 혹시 국왕 폐하와 왕비께서 이곳까지 오신 이유, 알고 계십니까?”

     “…반란.”

     나리아 공주의 나지막한 질문에 여기사가 흠칫 놀란다.

     “폐하의 실수로, 변경백이 화가 많이 났다고 들었어.”

     “예. 그렇죠. 아버지께서 몹시 화가 났었습니다.”

     공주라지만 10살의 어린 아이에게도 그 이야기가 들어갈 정도로 왕국 내에서는 크게 추문이 일었다.

     “아마 왕비께서 강력하게 오자고 하셨을 것 같습니다만.”

     “…응.”

     그리고 그 정치적 스캔들은 카르멘이 나서야만 했을 정도로 상당히 큰 이슈.

     ‘진실’은 단둘만 아는 비밀이라고 치더라도, 대외적인 이슈만으로도 이미 왕이 나서서 수습해야 할 일이었다.

     “변경까지 오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응.”

     여전히, 대화는 잘 이어지지 않는다.

     않는 것처럼 보인다.

     다른 이들에게는.

     “그런데 공주님. 죄송하지만, 아마 곧 다시 헤어지게 될 것 같습니다.”

     “……?”

     나리아 공주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차를 대접하기에는 찻물을 끓이기도 전에, 공주님께서 이곳을 떠나시게 될 것 같으니.”

     “…….아.”

     그리고 그제야, 그녀는 내가 그녀를 위한 차조차 내어놓지 않았다는 걸 자각했다.

     “…어째서?”

     한 마디에 정말 많은 질문이 담겨있다.

     궁금해서 묻는 것이기도 하지만, 머릿속으로 온갖 이유를 스스로 추측하고 있겠지.

     ‘천재니까.’

     나리아는 완전기억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곧 모든 걸 기억하고도 무리가 없을 만큼 두뇌가 뛰어나다는 뜻이기도 하며.

     ‘모든 방면에서 뛰어난 만능의 영웅.’

     그 두뇌를 바탕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할 미래의 대영웅이란 말과도 같다.

     정작 대관식을 치르기도 전에 나라가 망해버렸지만.

     “아.”

     그 나라 망하게 한 가문, 우리 가문이다.

     “이런. 실례했습니다. 잠깐 궁금해져서.”

     

     나는 적당히 말을 둘러댔다.

     “저는 정답을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만, 공주님께서는 얼마나 많은 보기를 가지고 계실지 궁금하여.”

     “…일곱.”

     “일곱 가지 가능성을 생각하셨단 말씀이십니까? 공주님이 곧 떠날 이유에 대하여?”

     끄덕.

     “굉장하시군요, 공주님.”

     

     어린아이의 치기가 아니다.

     정말로 논리적이고 그럴싸한 추론이라는 걸 나는 잘 알고 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러나, 함부로 묻지 않는다.

     “이런. 왜 물어보지 않냐고요?”

     하나를 묻기 시작하면 일곱 개를 전부 다 말할 것이며-

     “그야, 이미 가셔야 할 때가 되었으니까요.”

     “…?”

     “회담이 끝났습니다.”

     콰ㅡㅡ앙!

     저택의 정문에서 폭음이 울렸다.

     “고, 공주님?!”

     

     호위의 여기사가 공주를 향해 몸을 날리고, 나는 느긋하게 폭발이 일어난 저택으로 고개를 돌렸다.

     “작별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공주님. 전하께서 이제 돌아가시려고 하니.”

     “…아버지.”

     저택의 정문을 부수고 나온 남자, 무능왕은 한쪽 손으로 자기 뺨을 붙잡은 채 살기 가득한 눈으로 밖으로 나왔다.

     “……칫! 돌아간다!”

     그러고는 저택을 나오자마자 병사들에게 소리치며 마차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어린아이가 봐도 알 수 있지만, 조금 믿기 힘든 상황이긴 하다.

     ‘이걸 얼굴에 주먹질 한 번으로 참네. 그래도 옛 친우라는 건가.’

     변경백이 국왕의 면상에 주먹을 날렸다.

     왕가의 명예를 생각하면 이 일은 절대 세간에 퍼지지 않겠지.

     ‘진실을 알았다면 주먹이 아니라 오러 블레이드가 날아갔을 텐데.’

     아버지가 몰라서 살았다.

     하지만 무능왕은 알고 있을까.

     

     그 주먹이 매국을 결심한 선전포고라는 걸.

     지금은 그저 ‘이 정도로 참는다’라는 선언일 뿐, 앞으로는 반역을 위해 전력을 다하겠다는 다짐이라는 걸.

     ‘알려줄 의무는 없지.’

     내가 충성을 하는 건 무능왕이 아니니까.

     “나리아 공주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리아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아쉽게도 지금의 만남은 이렇게 짧지만, 언젠가 다시 꼭 만나기를 바랍니다.”

     “…….”

     나리아는 예법에 따라 내 앞에 자신의 왼손을 뻗었다.

     “이 자리에서 약속드립니다.”

     아직 10살의 작은 손.

     기억 속 ‘망국의 공주’의 손은 부르트고 상처가 가득했으나, 이 손은 그런 상처 하나 없이 하얗다.

     “나리아 공주님. 앞으로 어떤 일이 있든, 오늘, 이 순간만을 기억해주십시오.”

     나는 기사의 예를 갖춰, 나리아 공주의 손등에 키스했다.

     “저, 그레이 지브롤터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오직 당신만을 위해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합니다.”

     고개를 들어 나리아 공주를 본다.

     “…….”

     끄덕.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지만, 나리아 공주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덜커덩, 덜커덩.

     왕실의 마차지만, 오늘따라 유독 마차가 들썩인다.

     “쯧.”

     카르멘 왕비는 마차의 상태에 짜증을 내며 턱을 괴었다.

     “네 아버지는 우리 모녀보다 자기가 더 소중한 모양이구나.”

     “…….”

     카르멘 왕비의 맞은편에 앉은 나리아 공주는 묵묵히 눈을 감았다.

     “자기가 잘못해놓고 얼굴 좀 한 대 얻어맞았다고 화가 나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다니.”

     지브롤터까지 온 마차는 여러 대.

     “심지어 딸이랑 아내는 챙기지도 않고 말이야. 하, 백작 부인에게 추한 모습을 보여주기 부끄러우셨나? 아하하.”

     하지만 세인트 지오 국왕은 왕실 전용 마차를 타고 냅다 왕도로 향했다.

     “…그 나이를 먹고도 어떻게 변경백의 반의반도 따라가지를 못하니.” 

     

     왕비와 공주를 뒤따르던 마차에 맡긴 채.

     “네 아버지를 두고 왜 사람들이 무능왕이라고 하는지, 이럴 때는 그들과 함께 외치고 싶구나.”

     “…….”

     “정말이지, 너는 누구를 닮아서. 하아. 적어도 네 아버지를 닮지는 않은 것 하나만큼은 확실해서 다행이지만.”

     카르멘 왕비는 너무나도 말수가 적은 딸의 태도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우리라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단다. 네 아버지이자 내 남편이지만, 그저 왕실의 피를 물려받았기에 왕인 남자야.”

     혈통만 아니었다면.

     “왕위를 이어받을 남아가 한 명이라도 더 있었다면, 분명 그가 왕이 되었겠지. 장남이 아닌데도.”

     유일한 적자만 아니었다면.

     “…그래도 얼굴은 변경백과 어떻게 어깨는 나란히 할 정도는 되니까. 어휴.”

     왕가의 혈통 덕분에 미남만 아니었다면, 누가 그를 왕이라고 추앙할까.

     “명심하렴. 네 아버지는 그냥 왕의 자리에 앉은 망나니라는 걸. 그걸 우리가, 모르가니아 공작가, 원로원 등과 함께 잘 보좌해야 한단다. 이번만 하더라도….”

     “어머니.”

     “으, 응?”

     “지브롤터 변경백이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은…없는 겁니까?”

     “……말을 함부로 하지 말렴.”

     카르멘 왕비는 엄한 목소리로 나리아 공주를 향해 얼굴을 가까이했다.

     “그 이, 지브롤터 변경백은 절대 국가를 배신하지 않는 충신이란다.”

     “…….”

     “그는, 지브롤터는 절대 왕국을 배신하지 않아.”

     “그렇다면 후대 지브롤터 또한 마찬가지입니까?”

     “물론이지. 이건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과 언약이니까.”

     전통, 언약.

     나리아 공주는 작게 두 단어를 곱씹었다.

     “…그저, 약속이라는 말인가요?”

     “그래. 약속이란다. 지브롤터 가문의 남자들은 한 번 내뱉은 말을 주워 담지 않으니까. 특히 그것이….”

     카르멘 왕비는 마차의 창문 너머, 지브롤터 백작성을 아련한 눈으로 바라보며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지브롤터의 남자가 무릎을 꿇으며 하는 말이라면, 더더욱.”

     * * *

     13분.

     왕이 백작성에 도착하여 얼굴에 주먹을 얻어맞고 부리나케 도망가며 떠난 시간.

     시간이라고 하기에도 너무나도 짧은 순간이었으나, 나는 나리아 공주에게 내 뜻을 전한 것으로 만족한다.

     ‘지브롤터의 맹세를 안다면 편하고, 아니어도 상관은 없지.’

     나는 그녀에게 내 뜻을 전했다.

     나머지는 과거로 돌아온 내가 할 일을 하면 될 뿐이다.

     끼이익.

     굳게 닫힌 서재의 문을 연다.

     “아버지.”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엄명에 따라, 오직 ‘그레이 지브롤터’만 들어오라는 명령에 따라.

     “찾으셨습니까.”

     “그레이.”

     아버지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을 모아 벽을 향해 기도하고 있었다.

     “오늘부로, 지브롤터 변경백은 너다.”

     “…….”

     “나는 더 이상 지브롤터 백작이 아니다.”

     “왕국을 향한 충성의 맹세를 깨뜨리기 위해서입니까?”

     “…흐.”

     아버지는 나를 바라보지 않고 있지만, 낮게 웃음을 흘렸다.

     “잘 아는구나.”

     “아버지께서 생각하시는 약속의 날이 될 때까지, 아버지는 계속 충신으로 계시겠죠.”

     “그렇다.”

     “이것은, 의식이로군요. 조상님들께 올리는 선언.”

     “그래. 반역이 성공하든 성공하지 않든, 지브롤터는 유지되어야 한다.”

     아버지는 손을 풀어, 자기 목을 엄지로 그었다.

     “반역이 실패하는 날, 네가 내 목을 잘라라.”

     “…아버지.”

     “그리고 외쳐라. 반역자 크림슨의 목을 잘랐다고.”

     “저보고 패륜아가 되라는 말씀이십니까?”

     “패륜아가 되어서라도, 네 어머니와 동생들을 지켜라.”

     나는 비록 누군가의 아버지였던 적은 없지만, ‘어버이’로서의 결의가 가득한 눈을 보며 아버지의 생각을 바로 짐작할 수 있었다.

     -제발! 변경백! 내 딸, 내 아들의 목숨만은 살려주시게!! 주, 죽일 거면 나를 죽이게! 제발!

     -제가, 제가 죽도록 일하겠습니다! 어떻게든 돈을 만들어서라도 세금을 내겠습니다! 부디, 제 딸만은…!

     여러 아버지들이 자식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건 숱하게 봐왔으니까.

     아버지는 그중에서도-

     “아버지는 제가 어머니와 동생 중 한쪽을 살려야 한다고 한다면, 누구를 살리기를 바라십니까?”

     “…….”

     “어머니겠지요?”

     “…….”

     처자식 중에서도 ‘처’에 더 가까운, 다른 평범한 아버지들과는 조금 다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안심하십시오, 아버지. 저도 우리 가문에게 무례한 짓을 저지른 왕을 가만히 둘 생각은 없는지라.”

     “…호오?”

     나는 아버지의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반역이 성공할 수 있게, 철저히 이 나라를 박살 내버리도록 하겠습니다.”

     “…….”

     “방법은…적어도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그날이 올 때까지는 열심히 충신 노릇을 해야겠죠. 아니면 그 반대거나.”

     “반대?”

     “매국노가 되겠습니다.”

     아버지가 나를 향해 차갑게 굳은 얼굴로 바라본다.

     “아버지는 충신이 되십시오. 저는 마음껏 엇나가며, 나라를 팔아먹고자 하는 배신자들과 손을 잡겠습니다.”

     “너.”

     “변경백의 자리가 탐이 나서 제국과 몰래 손을 잡은 망나니. 뭐, 그게 아니더라도 다른 방법도 있을 것 같습니다만.”

     방법은 많다.

     “제가, 나라 팔아먹을 후레자식이 되겠습니다.”

     하지만 내가 가장 잘하는 것이 있다면, 역시 ‘그것’이다.

     “제가 가장 사랑하는 이를 지키기 위하여, 저는 아버지의 말씀에 따를 것을 맹세합니다.”

     나는.

     “설령, 패륜을 좀 저지른다고 하더라도.”

     있는 그대로의 진심을 전했다.

     “그래.”

     아버지는 생전 처음으로, 나에게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네가, 나의 희망이로구나.” 

     나는 매국으로 이 나라의 희망을 구할 것이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10월 5일 첫 날이라 5편이 연재되었습니다.

    6화부터는 1일 1~2편이 연재될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

    다음화 보기


           


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매국명가 간신천재
Score 7
Status: Ongoing Type: Author: , ,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The eldest son of a lord notorious for treason returns to the past. ‘A person adept at selling a country once can do it well again.’ However, in this life, ‘I will rise as the king of traitors.’ Beyond a directionless kingdom or a betraying empire, ‘Join me in this revolution.’ All for the sake of my 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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