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5

       다행히도 이번 부름은 정식으로 황제를 알현하는 것은 아니었다.

        ​

         “너무 긴장하실 것 없습니다. 일정을 진행하기에 앞서 폐하께서 경을 한 번 만나보고자 하셔서 부른 것이니까요.”

        ​

        “그렇습니까.”

        ​

        물론 그렇다고 긴장을 풀 순 없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이곳은 신분제 사회였고, 황제는 누가 뭐래도 모든 신분의 가장 위에 존재하는 지존이었다.

        ​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는 어지간한 고위 귀족들조차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최고위 포식자를 만나러 가는데 어찌 긴장을 풀 수 있을까.

        ​

        급하게 씻고 환복한 후 시종의 안내를 따라 황제가 기다리는 곳으로 향했다. 별궁은 본궁과 조금 떨어져 있었지만, 나는 물론이고 시종도 꽤나 발이 빨라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

        “폐하, 빌헬름 폰 브란덴 경이 도착하였사옵니다.”

        ​

        시종이 말을 마치자 커다란 문 너머에서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들라 하라.”

        ​

        끼이이이익.

        ​

        경첩에 기름칠을 잘 해뒀는지 그 크기와 어울리지 않는 작은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미리 외워둔 예법에 따라 고개를 숙이고 안으로 들어갔다.

        ​

        이곳은 절을 하는 문화는 없었기에 깊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린 채 가만히 기다리자 명령이 떨어졌다.

        ​

        “고개를 들거라.”

        ​

        명령에 따라 고개를 들자, 황제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보자마자 과연 마리아가 누구의 피를 이었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선이 굉장히 굵긴 하지만, 은발과 벽안, 눈매와 진지한 표정 등은 마리아와 비슷했다.

        ​

        “소문만 들었을 때는 흉터투성이 거한일 거라고 생각했건만, 예상과는 많이 다르게 생겼구나.”

        ​

        “어어, 죄, 죄송합니다…?”

        ​

        “되었다. 그저 내 개인적인 감상일 뿐이니.”

        ​

        황제는 말 그대로 내 얼굴이나 한번 보고 싶었을 뿐인지 금세 흥미를 잃었다. 역시 근위기사단을 항상 곁에 두고 있어서 그런지 내 무용담에는 별로 흥미가 없는 것 같았다.

        ​

        황제는 그 뒤로 아무 말 없이 턱을 괸 채로 날 내려다봤다. 뭘 해야 할지 몰라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으니 그가 내게 물었다.

        ​

        “그래서, 별궁에 묵고 있다 했었지.”

        ​

        “예, 감사하옵게도 마리아 전하께서 방을 내어주신 덕에 별궁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

        “…그렇단 말이지.”

        ​

        어째선지, 방 안의 기온이 조금 낮아진 것 같았다.

        ​

        “별궁에서도 가장 안쪽의 내궁에 머물고 있다고.”

        ​

        “예, 그렇습니다.”

        ​

        착각이 아니었다. 정말로 기온이 낮아졌다. 시종의 호흡에서 입김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황제의 마력이 기분에 반응해 온도를 낮추고 있었다.

        ​

        뭔지는 몰라도, 내가 황제의 심기를 건드린 것 같았다.

        ​

        “어, 그, 폐하?”

        ​

        “…그곳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알고 있는가?”

        ​

        “그, 그것이, 신은 황궁은 물론 수도 자체가 처음인지라 잘 모르옵니다.”

        ​

        내 대답에도 황제의 기분은 풀리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날 노려보고 있었다.

        ​

        “모른다면 짐이 직접 알려주마. 그곳은-”

        ​

        “마리아 전하께서 도착하셨습-, 저, 전하, 그렇게 막 들어가시면-!”

        ​

        쾅.

        ​

        갑작스레 문이 열리고, 마리아가 뚜벅뚜벅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

        그녀는 황제에게 인사를 올리고 고개를 들어 아버지의 눈을 똑바로 마주 봤다.

        ​

        “다녀왔습니다. 아바마마.”

        ​

        “…왔구나.”

        ​

        부녀가 나누는 인사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삭막하기 짝이 없는 대화였다. 그들은 감정 하나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서로를 바라봤다.

        ​

        “빌은 이만 가봐도 좋아요.”

        ​

        “빌?”

        ​

        마리아의 말에 황제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날 노려봤다. 어찌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으니 마리아가 더 강한 어조로 내게 말했다.

        ​

        “가도 돼요. 어차피 아바마마께서도 당신에게 볼일이 있어 부른 건 아니시니.”

        ​

        어째 황제의 시선은 더 매서워진 것 같지만, 황제도 별말이 없고 시종이 앞장서 문밖을 손바닥으로 가리키기에 그를 따라나섰다.

        ​

        “저녁에 연회가 있을 테니, 그전까지는 가보도록 할게요.”

        ​

        “어, 알았ㅇ-, 크흠, 알았습니다.”

        ​

        습관적으로 나오려던 반말을 억눌렀다. 사석에서야 편하게 대화하더라도 엄연히 그녀는 황녀였으니, 예법대로라면 경어로 답해야만 했다. 심지어 황제 앞에서 반말을 했으면, 진짜 큰일이었지.

        ​

        “그럼, 먼저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밖으로 나섰다.

        ​

        끼이익.

        ​

        문이 닫혔다.

        ​

        “후!”

        ​

        한숨을 뱉었다.

        ​

        황제는 황제라고, 별것 아닌 만남임에도 긴장되어서 미치는 줄 알았다.

        ​

        –

        ​

        별궁으로 돌아오기 무섭게, 나는 마틸다를 불러 도움을 요청했다. 당연히 상경하는 만큼 집에서 이런저런 복장을 챙겨주긴 했지만, 브란덴에서 수도까지 거리가 좀 있는 탓에 가져오면서 다 망가졌을 게 뻔했다.

        ​

        원래 이런 일은 알베르토가 도와줬지만, 그도 여기 들어오려면 이래저래 절차를 밟아야 하는 탓에 시간이 좀 걸렸다. 아마 며칠은 더 걸릴 것이 분명했으니, 일단 오늘은 그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

        “마틸다 님! 전하께서 오십니다!”

        ​

        한창 복장을 갖추고 있으려니 시녀 한 명이 달려와 마리아가 돌아오고 있다는 보고를 올렸다.

        ​

        “실례지만, 전하를 맞이하러 가도 괜찮겠습니까?”

        ​

        “상관없어. 따지고 보면 내가 도움을 받는 거지 네가 모시는 분은 마리아잖아.”

        ​

        “양해 감사드립니다.”

        ​

        그녀는 나가기 전 시녀들에게 명했다.

        ​

        “너희가 이분의 옷을 고르는 것을 도와드리-”

        ​

        “그럴 필요 없어.”

        ​

        거울 앞에서 적당히 내 모습을 살피며 어디 틀어진 곳이 없나 확인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아직 준비가 완전히 끝난 건 아니지만, 어차피 남은 것이라고 해봐야 외투를 입는 것뿐이었기에 이건 나중에 해도 무방했다.

        ​

        “어차피 마리아도 준비하려면 시간 좀 걸릴 텐데, 그때마저 준비하면 되겠지.”

        ​

        “하지만.”

        ​

        마틸다는 워낙 완벽주의적 성향이 강한 탓에 주저했지만, 마리아가 준비하는 데 시간이 걸린단 말에는 그녀도 동의했다.

        ​

        1층으로 향하니 마리아가 시녀들에게 옷을 맡기며 들어오고 있었다.

        ​

        “후우….”

        ​

        “폐하와는 어떻게, 대화가 잘 끝났나 보네.”

        ​

        “아, 응….”

        ​

        어째선지 그녀는 볼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

        “경이 여기서 지내는 것에 대해 허락을 받을 수 있었어요.”

        ​

        그 말에 오히려 내가 더 놀랐다.

        ​

        “아니, 그럼 폐하께 허락도 안 받고 나를 여기 들였던 거야?”

        ​

        끄덕.

        ​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

        아니, 이 사람 안 본 사이에 엄청 과감해졌네. 예전에는 뭐 하나만 해도 엄청나게 여러 번 확인하고 그랬는데.

        ​

        뭐, 폐하께서도 허락해주신 걸 보면 별문제 없는 일인 것 같으니 상관없으려나.

        ​

        그런 것 치곤 폐하께서 반응이 조금 격하셨는데.

        ​

       뭐, 좋은 게 좋은 거겠지.

        ​

        “그보다, 아까 연회라고 해서 준비를 하고 있긴 했는데, 정확히 어떤 건지 알 수 있을까?”

        ​

        일단 마리아가 같이 가자고 하니 별궁에 묵을 수 있게 해준 것에 대한 감사 인사를 겸해 군말 없이 간다고는 했지만, 막상 이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

        내 질문에 마리아와 마틸다가 그것도 모르면서 간다고 하고 있었냐는 듯한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물론 마리아는 금방 표정을 고쳤지만.

        ​

        “원래 이맘때가 각지의 귀족들이 모여서 폐하의 참관 아래 성인식을 치르는 때입니다. 각지에서 귀족이 모이다 보니 거의 매일같이 파티나 연회가 열리지요.”

        ​

        마틸다가 마리아를 대신해 설명했다.

        ​

        “그런데, 황녀가 참가할 정도면 주최자가 꽤 높은 모양이네.”

        ​

        그녀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

        “뷔르템부르크 후작 각하의 장남이신 욤 공자께서 주최하시는 연회입니다.”

        ​

        “아, 그 사람.”

        ​

        미간이 찌푸려졌다. 마리아가 내 표정을 보고 물었다.

       

        “…혹시, 서로 아는 사이신가요?”

        ​

        “안다면 아는 사이긴 하지.”

        ​

        아예 초면인 사람은 아니었다. 남부 지역에 영지를 가진 대제후 가문이라 면식이 없을 수가 없었으니까.

        ​

        하지만 개인적으로 사이가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

        이게, 사람이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귀족적인 성향이 매우 강했다. 귀족으로서 자신이 이끌 사람들에 대해 신경을 많이 쓰긴 하지만, 동시에 귀족이기에 그들로부터 무언가를 거둬들이는 걸 당연하게 여겼다.

        ​

        사람이 나쁜 편은 아니었다. 영민들의 목숨을 함부로 빼앗는 편도 아니고, 세금 외의 수단으로 재산을 갈취하거나 하진 않았던 걸 보면 나름대로 선을 잘 지키고 있기도 했다.

        ​

        다만, 자신을 위해 다른 사람들이 고난과 희생을 감수하는 걸 당연시하는 그 사고방식이 나와 맞지 않을 뿐이었다.

        ​

        “사이가 나쁘신가요? 분란이 일어날 정도라면, 그냥 참석하지 않으셔도 되는데.”

        ​

        “그 정도는 아냐. 서로 딱 일면식 정도만 있는 사이라, 사이가 좋고 나쁘고를 따질 것도 없어.”

        ​

        그리고, 아마 틀림없이 그쪽도 나에 대해 똑같은 감상을 갖고 있으리라 확신할 수 있었다.

        ​

        “…그냥, 좀 서로 얼굴 보고 있으면 피곤한 사이. 딱 그 정도지.”

        ​

        그날 저녁, 우리는 수도에 위치한 뷔르템부르크 후작의 저택으로 향했다. 안에서 형형색색의 불빛이 새어 나오는 대저택이 우리를 맞이했다.

        ​

        경비가 마차를 막아서고 내게 물었다.

        ​

        “실례합니다. 성함과 가문명을 말씀해주시겠습니까?”

        ​

        “빌헬름, 호엔베른 가다.”

        ​

        경비의 뒤에 서 있던 가신이 열심히 서류를 뒤적거렸다. 그러나 목록에는 내 이름이 없었는지, 그는 내 이름을 찾지 못하고 내게 되물었다.

        ​

        “죄송합니다. 명단에 이름이 없으신 것 같습니다.”

        ​

        “뭐, 내가 초대받은 것이 아니니까.”

        ​

        나는 마리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마리아는, 누가 들어도 기분이 나쁜 것이 느껴지는 싸늘한 목소리로 답했다.

        ​

        “마리아. 호프부르크.”

        ​

        흡.

        ​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

        이 나라에, 호엔베른을 모르는 사람은 많아도 호프부르크를 모르는 귀족은 있을 수 없었다. 나는 창밖으로 손을 뻗어 경비의 투구를 툭툭 두드리며 마차의 전면부를 가리켰다.

        ​

        “앞으로는 묻기 전에 마차 앞에 달린 문장을 잘 살피라고, 경비병 친구.”

        ​

        “죄, 죄송합니다!”

        ​

        곧장 길이 열리고, 마차가 다시 움직였다.

        ​

        하아.

        ​

        마리아가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기분만큼은 동일했다.

        ​

        수도에서 연회를 벌인다는 후작가의 경비가 제국 황실의 문장조차 알아보지 못한다니.

        ​

        이 연회의 진행이 얼마나 엉망진창일지 벌써부터 보이는 것만 같았다.

       

       

       

       

       

       

       

       

       


           


I Wished for Romance, but it Turned Out to be a Romance Fantasy

I Wished for Romance, but it Turned Out to be a Romance Fantasy

낭만 판타지를 꿈꿨는데 로맨스 판타지였다
Score 7.6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I dreamed of a life filled with romance¹ and romanticism, but I didn’t dream of a romance fantasy… —- ¹ The “Romance” here means a feeling or atmosphere of something new, special and exciting, e.g., a hero’s adventure.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