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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

       

         

         

         

        새가 지저귀는 소리에 눈을 뜬 린은 가슴에 묵직한 무게감을 느꼈다.

         

        내려다보니 루시가 새근거리며 잠들어 있었다.

         

        믿기지 않겠지만 어제의 패닉 사태가 벌어진 후부터 루시는 그에게서 한시도 떨어져 있고 싶어하지 않았다.

         

         

        “린이 없으면 무서워.”

         

        “저는 계속 곁에 있을 겁니다.”

         

        “그리고 린이랑 붙어있으면 진정되는 걸.”

         

         

        루시가 용사인 것을 떠나서 이성과 몸을 밀착하고 부대끼는 것에 조심스러운 린이었다.

         

        하지만 용사 파티의 배신에서 탈출하고 모처럼만에 제정신을 차린 루시였기에 린은 굳이 그녀를 밀어내지 않았다.

         

        팔다리가 잘리고 나서 가장 안정된 상태인 그녀를 괜히 자극할 필요는 없겠지.

         

        무엇보다 꿀을 따러간 잠시의 부재에 그토록 발작할 줄은 몰랐다.

         

        자신을 끝까지 싫어할 거라고 생각했던 린에게는 무척이나 의외였다.

         

         

        “흔들다리 효과인가.”

         

         

        나의 유일한 아군, 내 최고의 동료, 나의 린.

         

        루시가 잠들기 전까지 되뇌이던 말이었다.

         

        배신의 충격 속에서 자신을 구한 린에게 강하게 끌리고 있었나 보다.

         

        그걸 부정하고 싶어서 일부러 거칠게 굴은 걸까.

         

        아무래도 좋았다.

         

        루시가 멘탈만 잡을 수 있다면야 그는 기꺼이 어울려 줄 용의가 있었다.

         

        지금이야 워낙 고된 상황에 처해있어서 그렇지 잘려나간 사지를 복구시키면 이전처럼 시니컬한 관계로 돌아갈 가능성도 높았다.

         

        그건 조금 아쉬울 지도.

         

        루시가 그를 최고의 동료라고 불러줬을 때, 린은 솔직하게 기뻤다.

         

        이것이 인정받는다는 기분이구나.

         

        극한의 상황에서 엎드려 절받기 식으로 받아낸 셈이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기뻤다.

         

        그 영향인지 딱딱하고 사무적이던 린은 루시에게 조금이나마 웃어줄 수 있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자신은 떠나지 않으니 안심하란 뜻이었다.

         

        그 외에 별다른 의미는 없었다.

         

         

        “씻자.”

         

         

        아직 잠들어 있는 루시를 조심스럽게 안아들어 침구류에 내려놓았다.

         

        기지개를 켜며 미리 근처에 파악해 둔 샘가로 가려는 순간, 뒤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가?”

         

        “깨셨군요.”

         

        “린, 어디가?”

         

        “씻으러 갑니다.”

         

        “안 가면 안 돼?”

         

        “슬슬 씻을 때가 되긴 했습니다.”

         

         

        린은 자신의 소매에 코를 대고 킁킁거렸다.

         

         

        “용사님 말씀대로 냄새도 나구요.”

         

        “아….”

         

         

        맨날 냄새가 난다고 타박했던 그녀였다.

         

        그러나 막상 그가 씻겠다고 하니 아쉬웠다.

         

        어제까지 인정하기 싫었지만 루시는 린의 체취에서 적잖은 안도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가 곁에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으니까.

         

        게다가 악취도 아니었다.

         

        먼지와 옅은 땀 냄새가 나긴 했지만 그저 그런 사람 냄새.

         

        어젯밤 동안 코를 박고서 흠뻑 느끼던 그의 체취가 사라질 것을 생각하니 루시는 선뜻 다녀오라고 하기 망설여졌다.

         

         

        “나도 같이 가.”

         

        “여기 있는 게 가장 안전합니다만.”

         

        “내가 진정되질 못하는 데 무슨 소용이야. 그리고 어차피 나도 씻겨야 하잖아?”

         

        “일리가 있군요.”

         

         

        린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짐꾼의 낭에서 간단한 세면 도구를 챙긴 린은 포대기로 루시를 감쌌다.

         

         

        “내 얼굴이 린 가슴 쪽으로 가게 해줘.”

         

        “네? 어째서죠?”

         

         

        그렇게 하면 씻으러 이동하는 동안 네 냄새를 맡을 수 있으니까.

         

        물론, 루시는 이 말을 절대로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안겨서 좀 더 자고 싶어.”

         

         

        그런데 어째서 이건 부끄러워하지 않고 바로 내뱉는지 모르겠다.

         

        린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보니 오늘은 악몽을 안꾸셨군요.”

         

        “어? 맞아! 정말 푹 잤어.”

         

         

        새로운 사실에 놀라며 루시는 자신의 머릿속이 상당히 맑아졌다는 걸 깨달았다.

         

        이게 모두 린 덕분일까.

         

        린의 예상처럼 흔들다리 효과인지는 몰라도 루시의 마음은 점점 무게추가 비정상적으로 기울고 있었다.

         

        예를 들자면,

         

         

        “잘 주무셨나요?”

         

        “응….”

         

         

        린의 얼굴과 미소를 보는 것만으로도 헤실헤실 풀어지는 자신의 입가를 통제하기 힘든 것만 봐도 그랬다.

         

        포대기에 감싸여 원하는대로 가슴에 귀를 가져다 댄다.

         

        두근두근

         

        지금 이 귀를 통해 들려오는 심장소리가 린의 것인지, 자신의 것인지 루시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대로 하나가 되었으면 하고 바라며 행복하고 편안한 표정을 띄울 뿐이었다.

         

        자, 그러면

         

        당장의 상황도 나름 평온해졌고 하니

         

        슬슬 우리는 앞으로 루시가 린에게 무엇을 했었고, 무엇을 후회해야할 지 알아볼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었다.

         

        린이 마왕 토벌하는 그날까지 용사 파티에서 온갖 무시를 당했었다는 사실을 부디 잊지 않았기를 바란다.

         

         

         

        —

         

         

         

        “이건 불공평해.”

         

        “무엇이 말입니까?”

         

         

        루시는 나무를 보고 있었다.

         

        계획대로라면 샘가에서 씻고 있을 린의 맨몸을 볼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루시는 불퉁하게 입술을 내밀고 있었다.

         

         

        “린은 날 씻길 때마다 내 몸 다 보잖아.”

         

        “최대한 안보려고 합니다.”

         

        “최소한 만지기는 하잖아.”

         

        “그렇지 않고서는 씻길 수가 없습니다. 전 마법사가 아니니까요.”

         

         

        단순히 마법사라고만 해서 손 안대고 사람을 씻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섬세한 마력 컨트롤로 몸을 고정시키고 솔이나 비누를 움직여 구석구석 닦아내는 게 가능하다면 이미 티그리아 이상의 대마법사급이라고 봐야 했다.

         

         

        “여튼 불공평해!”

         

        “제 몸을 보고 싶은 건 당연히 아닐테고, 단순히 분해서 보여달라고 요구하는 건 들어드릴 수 없습니다.”

         

        “린은 봤잖아!”

         

        “이야기가 계속 돌고 도니 씻기 힘드네요.”

         

        “보게 해주기만 하면 간단히 해결될 문제인 걸.”

         

        “하아.”

         

         

        이미 루시는 여러 차례 몸을 돌려 린을 훔쳐보려 했지만 번번히 제지당하고 급기야 포대기에 묶여 나무를 바라보는 신세가 되었다.

         

        뒤에서 첨벙이는 소리가 들려올수록 루시는 애가 탔다.

         

         

        “린이 내 시야에서 사라지면 불안하다고!”

         

        “대신 계속 대화하고 있지 않습니까.”

         

        “응 그건 좋아.”

         

        “…….”

         

        “린?”

         

        “네.”

         

        “네 목소리가 들려서 좋다구.”

         

        “…그렇군요.”

         

        “린은 어떤데?”

         

        “용사님께서 기운을 차린 것 같아서 저도 좋습니다.”

         

        “히힛.”

         

         

        개구쟁이 같은 웃음소리는 린에게도 안심을 주었다.

         

        호감도도 없는 상태에서 어쩌나 싶었지만 지성이면 감천이라 다행이 루시의 마음을 열 수 있었다.

         

        장난인지 진심인지 알 수 없는 짓궂은 장난과 억지를 부리기는 하지만 못 견딜 것들은 아니었으니 앞으로의 여정은 한결 수월해질 터였다.

         

        루시가 정신을 차린 것만으로도 샘가로 오는 동안 스킬 스크롤을 쓰지 않고 오로지 그녀의 감각에 의지하여 주위 기척을 알아챌 수 있었다.

         

        용사로 선택받은 강자라는 건 그런 존재였다.

         

         

        “이건 불공평해.”

         

        “또 무엇이 말입니까?”

         

        “린.”

         

        “네, 용사님.”

         

        “봐봐, 이게 불공평하다는 거야.”

         

         

        루시는 한숨을 내쉬며 투덜거렸다.

         

         

        “왜 나만 린을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 거야?”

         

        “원래 파티 내에서는 일종의 코드명처럼 부르기로….”

         

        “린, 파티 얘기는 하지 말고 너와 나의 이야기잖아.”

         

         

        묘하게 압박감이 느껴지는 말투였다.

         

        어떤 의도를 가지고 그리는 빅 픽처인지는 모르겠지만 린은 난감했다.

         

         

        “기억 안 나십니까?”

         

        “뭐가?”

         

        “저한테 이름으로 부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그런 기억 전혀 없었다.

         

        아무리 과거를 회상하고 끄집어내 보아도 떠오르지 않는다.

         

         

        “우리가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

         

         

        자신이 내뱉고도 한심한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이거 뭔가 이상하다.

         

        루시의 직감이 경종을 울렸다.

         

        정확히는 과거에 린을 대한 루시에나 에스텔이란 여자의 행실이 이상하다.

         

         

        “두 번째인가, 세 번째였었죠.”

         

        “그래?”

         

        “루시님이라고 불렀다가 함부로 이름 부르지 말라고 화내셨었죠.”

         

        “…그래?”

         

        “네.”

         

        “내가 왜 그랬지….”

         

        “그날 큰 전투가 있었거든요. 마군 침공을 처음 저지한 날이었습니다.”

         

         

        기억난다.

         

        용사 파티가 결성되고 얼마 안되었을 때 일어난 사건이었다.

         

        모두가 입에 단내가 날 정도로 분투해서 간신히 막아낸 첫 승리였다.

         

        루시는 전투에 참여하지 못하고 자기 몸 지키기에 급급했던 린을 보고 아예 정나미가 떨어졌었다.

         

        비단 그녀뿐만 아니라 용사 파티 전원이 짐꾼을 그냥 두 발 달린 소달구지급으로 취급하기로 암묵적인 합의가 이뤄졌었다.

         

         

        “파티원 전부 너무 힘들고 지쳐서 짜증이 날 법했죠. 제가 눈치가 없었습니다.”

         

         

        아니라고 하고 싶은데 염치가 없어서 할 수가 없었다.

         

        가슴 속이 싸하게 식으며 내려앉았다.

         

        그저 린에게 이름을 불리고 싶은 거였는데 과거의 자신이 죄다 망쳐놨다.

         

        가만히 나무를 노려보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뭘 잘했다고 우는 건지 자신을 타박하며 코끝을 찡그리자 저도 모르게 훌쩍이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리고 그 소리는 린의 귀에 닿기에 충분했다.

         

        잠시 고민하던 린은 얼추 씻던 것을 마무리하고 나와 몸을 닦았다.

         

        일부러 들으라는 듯이 크게 천을 펄럭이자 그 사이로 훌쩍임이 파고들었다.

         

         

        ‘울 정도인가?’

         

         

        미안해하는 건 알았지만 조금 심한 게 아닌가 싶었다.

         

        그래도 다른 것도 아니고 지난날의 심한짓을 반성해서 그런거니 린은 이쯤하고 맞춰주기로 했다.

         

        애초에 그는 늘 맞춰주기만 했으니까.

         

         

        “루시님, 이제 씻을 차례입니다.”

         

        “…….”

         

        “루시님.”

         

        “루시.”

         

        “네, 루시님.”

         

        “루시라고 해줘. 그리고 린도 반말해.”

         

        “…루시.”

         

        “응, 린.”

         

        “울었어?”

         

        “안울었어!”

         

         

        일부러 분위기 깨는 말로 그녀가 발끈하게 만들었다.

         

        원하던대로 이름을 부르고 반말을 하자 루시의 훌쩍거림도 잦아들었다.

         

        포대기를 풀고 조심스럽게 안아든 그녀의 눈가는 이미 붉어져 있었다.

         

        샘가로 들어가 천에 물을 적셔 얼굴부터 닦아주자 루시는 눈을 감고 그의 손길을 느꼈다.

         

         

        “흥하세요, 흥.”

         

        “안 해!”

         

         

        적당한 장난도 쳐주자 루시는 언제 그랬냐듯이 새침하게 반응했다.

         

        몸을 닦아줄 때는 그녀의 등이 보이도록 하고 더더욱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손을 통해 가슴과 그 아래의 감촉이 전달됐지만 그 사실을 굳이 린도 루시도 지적하지 않았다.

         

        일종의 샤워가 끝난 뒤, 마른 수건으로 머리를 말려주고 있자 가만히 린을 쳐다보던 루시가 드디어 입을 뗐다.

         

         

        “린.”

         

        “응.”

         

        “잘생겼는데 왜 가면을 쓰고 있었어?”

         

        “어….”

         

         

        어색한 미소와 함께 린의 말문이 막히자 루시는 또 불안한 직감에 휩싸였다.

         

        설마 또…?

         

         

        “처음 만났을 때 나보고 못생겼으니까… 그리고 방패기사 외에는 남자 얼굴 보기 싫다고….”

         

        “아아! 아아아아!!!!”

         

         

        있는 힘껏 소리를 지르며 부정하던 루시는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대체 걔는 그때 왜 그런건데!!!!”

         

         

        심지어 라인폴드 말고 다른 남자 얼굴이 보기 싫었다니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자신이 너무나도 한심했다.

         

        동시에 두려움이 엄습했다.

         

        그딴 남자에게 절절매던 모습을 여행 내내 보여줬던 자신이 떠올라 버렸기 때문이었다.

         

         

        “미안해… 미안해….”

         

         

        루시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그저 울면서 하는 사과였다.

         

         

        “이구이구, 괜찮다괜찮아.”

         

         

        린은 루시를 품에 안고 등을 토닥여줬다.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후회하던 루시는 곧 그의 심장소리에 진정하며 눈을 감았다.

         

        가능하다면 린에게도 자신의 심장소리를 들려주고 싶었다.

         

        더 이상 이전처럼 그를 멸시하고 있지 않다는 걸 들려주고 싶었다.

         

        더 이상 그 없이는 안된다는 걸 들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잘못한 기억 밖에 없었기에 루시는 함구한 채로 버티다 잠이 들었다.

         

        잠들기 전 루시는 어느새 자신의 마음에 질척이는 감정이 생겨난 것을 알았다.

         

        큰 잘못을 한 자신을 계속 품어주는 그에 대한 애정과 그 잘못들로 인해 자신을 언제 떠나도 이상하지 않다는 불안감.

         

        그렇게, 린에 대한 루시의 집착과 의존증이 본격적으로 도지기 시작했다.

         

         

         

         

       


           


He Became the Only Ally of the Abandoned Warrior

He Became the Only Ally of the Abandoned Warrior

Abandoned Hero's Only Ally, 버림받은 용사의 유일한 아군이 되었다.
Score 6.8
Status: Ongoing Type: Author: ,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I saved the Warrior who used to ignore and bully me and now she is obsessed with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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