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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

     

    상쾌한 가을바람이 부드럽게 흘러들어오는 아셀라의 방.

     

    온도도 습도도 더할 나위 없이 쾌적했지만 내 머리는 조금은 취한 듯 어지럼증을 느끼고 있었다.

     

    아까부터 나를 빤히 바라보는 아셀라의 눈빛에 심장이 조여와서 그런 건가.

     

    아니면 테이블에 풍겨오는 향기 때문인지.

     

    ‘꽃 향기?’

     

    멍하니 있으니 손을 축축한 뭔가가 슥 훑고 갔다.

     

    “헥헥.”

     

    막스의 혀였다.

     

    덕분에 조금 긴장이 풀렸다.

    강아지들은 잘 대해주면 솔직하게 사람을 좋아해 주니 나도 좋아하게 된다니까.

     

    조금 쓰다듬어주니 막스가 상체를 번쩍 들어 내게 애교를 부려온다.

    귀여운 녀석.

     

    “막스, 이리 와.”

     

    아셀라가 불렀지만 막스는 내게 안겨서 떨어질 줄을 모른다.

     

    “막스?”

     

    조금 당황스럽네. 야, 네 주인이 부르잖아.

    봐, 뭐가 마음에 안 드신다는 표정이야.

    이러다 나 죽는다 막스야.

     

     

    [No. 056 : 악녀의 증오 12% → 11%]

    [변동중]

     

     

    응?

     

    그런 것 치곤 그다지 화가 나진 않았나.

    오히려 아셀라가 분노하는 엔딩 발생 확률이 조금 떨어지고 있다.

     

    “막스!”

     

    아셀라가 다시 한 번 힘차게 부르자 막스가 그제야 그녀에게 돌아가 옆에 자리했다.

     

    의자에 앉아 내게 손짓하는 아셀라.

     

    “너, 이리 와봐.”

     

    몇 걸음 다가가서 살펴보니 아까 정원에서 꺾은 노란 장미꽃이었다.

     

    그새 많이도 꺾어왔다.

    못해도 백 송이는 되어 보였다.

     

     

    [No. 003 : 백인의 효수 64% → 63%]

    [변동중]

     

     

    상태창의 숫자가 미세하게 바뀐다.

     

    ‘꽃이 핵심인가 본데.’

     

    그러다 홱, 아셀라가 예고도 없이 고개를 돌리고는 무서운 눈매로 나를 쏘아본다.

     

    ‘아이 깜짝이야. 심장 떨어지겠네 진짜.’

     

    가만히만 있으면 예쁘긴 한데.

    인형 같기도 하고.

     

    “칼 가져왔어?”

     

    “예, 일단은.”

     

    “아까 했던 것처럼 잘라줘, 가시.”

     

    “그러지요.”

     

    나는 테이블 옆에 서서 단검을 꺼내 장미 줄기의 가시 부분을 톡톡 자르기 시작했다.

     

    “왜 그러고 있어?”

     

    아셀라가 내게 물었다. 그녀의 질문의 의도를 알 수 없었기에 어리둥절했다.

     

    네가 하라며.

     

    “…가시를 자르고 있으니까요?”

     

    “거기 의자 있잖아.”

     

    “앉아서 하라고요?”

     

    “그런 것까지 가르쳐줘야 해?”

     

    “물론 아니지요.”

     

    즉시 의자를 빼 자리에 앉았다. 아셀라와 직각인 자리다.

     

    앉으라고 배려해준 건가.

    아니, 정신 사나우니 얌전히 하란 뜻이겠지.

     

    작업을 계속한다. 사각사각, 줄기를 손질하는 소리만 이어진다.

     

    아셀라는 막스의 머리 위에 손을 얹은 채 나를 감시하듯 바라본다.

     

    …시간이 흘러간다.

     

    같은 행동을 반복하다 보니 조금 긴장이 풀려갔다.

     

    잠깐 정신이 멍해질 때 즈음.

     

    “…아야.”

     

    갑자기 아셀라의 짧은 신음이 들려서 눈이 번쩍 뜨였다.

     

    장미 한 송이를 들고 있는 아셀라. 아직 가시를 제거하지 않은 쪽이었다.

     

    “그냥은 안 떨어지네. 얘는 왜 이렇게 귀찮게 생겼을까.”

     

    꽃의 밑둥을 잡은 아셀라의 검지에서 주륵, 검붉은 선혈이 한 방울 길게 이어진다.

     

    ‘아, 망했다.’

     

    저걸 못 만지게 신경 써야 했는데.

    더럽게도 호기심 많은 황녀님이었다.

     

    안 그래도 내 이미지는 문제아다.

    누가 보고 내가 아셀라를 상처입혔다고 오해하면 골치 아프거늘.

     

    “생각해 보면 예쁜 건 머리뿐이니 아래는 필요 없지 않을까?”

     

    그렇게 말하며 아셀라가 똑,

    장미의 꽃 부분을 줄기에서 떼어냈다.

     

    노란 장미가 아셀라의 핏방울이 묻어 붉게 칠해진다.

     

    그러자 엔딩리스트의 확률이 변동했다.

     

     

    [No. 003 : 백인의 효수 63% → 65%]

    [변동중]

     

     

    아까 경험을 토대로 추측하자면.

     

    ‘아셀라가 부정적인 경험을 할수록 발생 확률이 높아지는 것 같은데.’

     

    강렬한 인상으로 아셀라의 기억에 남을수록 그걸 써먹은 악행을 저지르기도 쉬워지는 거겠지.

     

    우선 상처를 치료해주면 나을 수도 있겠다고 판단했다.

     

    “황녀님.”

     

    “왜?”

     

    나는 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아셀라의 손목을 잡아챈다.

    맥박이 약해 생명이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 얇고 하얀 손목이다.

     

    “…뭐야.”

     

    “다쳤으면 치료하면 됩니다. 간단해요. 굳이 꽃을 떼어내실 필요도 없지요.”

     

    손수건을 근처에 있던 찻주전자용 물에 조금 적셔 아셀라의 피를 닦아준다.

     

    상처까지 감염되지는 않도록 주변을 세심히 청소한다.

     

    “어디….”

     

    방에 리넨 재질의 스카프가 있었다.

    칼로 얇게 찢어 일자로 만든다.

     

    일회용 밴드가 완성됐다.

     

    그녀의 상처 난 검지를 빙글 둘러, 꽉 조이지는 않게 묶어줬다.

     

    아셀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건 뭐야? 치유술이야?”

     

    “치유가 아니라 치료입니다. 피는 응고하기 때문에 이렇게 하면 자연히 나아요. 괜히 치유술을 쓰면 더 안 좋죠.”

     

    내가 가볍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황녀님은 치유술이 잘 안 받는 체질이시니까요.”

     

    “…흐응, 맞아.”

     

    아셀라는 내가 묶어준 검지를 한참이나 찬찬히 돌려보았다.

    호기심 가득한 눈빛이 슬며시 나를 향한다.

     

    “아까 막스에게도 치료를 했어?”

     

    “지금처럼 간단한 응급처치였습니다. 치료의 일환이었죠.”

     

    “의학이라고 했었지.”

     

    “그렇습니다.”

     

    “마음에 드네. 또?”

     

    “네?”

     

    “또 없어?”

     

    악마같이 키득대는 얼굴은 얼마나 더 재밌는 걸 바라는지.

     

     

    ‘뭐라고 대답할까.’

     

     

    [No. 003 : 백인의 효수 68% → 42%]

    [변동됨]

     

     

    발생 확률이 눈에 띄게 떨어지고 있었다.

    괜찮은데.

     

    참수형은 정말이지 사양이다.

    가능하면 좀 더 낮춰봐야겠어.

     

    아셀라가 꽃의 머리를 떼지 않아도 된다는 내 말에 조금은 귀 기울였다는 뜻이지.

     

    밀어붙여 볼까.

     

    “또, 장미는 줄기가 있어야 더 예쁩니다.”

     

    “왜?”

     

    “잘 보세요.”

     

    아셀라는 흥미가 생겼는지 의자를 고쳐 앉으며 나를 향했다.

     

    나는 아직 가시 정리가 안 된 장미를 한 송이 집어 들었다.

     

    “보시다시피, 장미에는 가시가 있지요.”

     

    “응. 덕분에 나는 상처가 생겼어. 그런데도 공자, 그대는 줄기가 예쁘다고 하는구나.”

     

    가시가 남은 장미를 안주머니에 집어넣는다. 또 아셀라가 생각 없이 만졌다가 다치면 귀찮다.

     

    “예쁜 꽃일수록 가시도 날카롭지요. 아름다운 존재일수록 취하려는 적도 많으니 자신을 지키려 하는 법입니다.”

     

    “흠, 그래서?”

     

    아셀라는 내가 무슨 소리를 더 하나 지켜보겠다는 듯 턱을 치켜들었다.

     

    손에 든 장미 줄기를 슬쩍 구부려본다.

    비교적 말랑말랑하다.

     

    노란 장미는 이 세상에만 있는 특이한 품종이다. 전에 약재로 쓸 식물을 연구하던 중에 확인한 적이 있었다.

     

    이거면 되겠어.

     

    “지금부터 보여드릴 물건은, 줄기가 있는 꽃으로만 만들 수 있습니다.”

     

    나는 손질한 장미들을 가지런히 놓았다.

    그리고 한 송이의 줄기를 가로로 접어 엮고, 반복한다.

     

    “…헤에.”

     

    내 손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습을 지켜보며 아셀라가 신기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시간이 지나자 테이블에는 장미꽃으로 만들어진 화관이 완성되어 있었다.

     

    “꽃 머리를 떼버리면 만들 수 없지요.”

     

    아셀라는 내가 만든 화관을 조심히 들어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마음에 든 거야 만 거야?

    얼굴만 봐서는 판단이 안 선다.

     

    “왜 고리 모양이야?”

     

    아, 화관인지를 몰랐구나.

     

    나는 화관을 슬며시 집어 아셀라의 조막만한 머리 위에 살짝 놓아주었다.

     

    “이렇게 머리에 쓰는 장식입니다.”

     

    아셀라는 화관의 용도를 미처 생각지 못했는지 몇 번 커다란 눈을 깜빡이고는.

     

    “어울리니?”

     

    라고 물었기에.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우십니다.”

     

    그렇게 대답했다.

     

    제발 오답이 아니기를.

     

    “알았어.”

     

    아셀라가 내게 대답했다.

     

    뜬금없는 말이기도 해서 되물었다.

     

    “뭐를요?”

     

    “안 떼는 쪽이 좋네.”

     

    응?

    지금 내 의견을 받아들인 건가?

     

    아셀라의 눈치를 슬쩍 확인한다.

    정신없이 화관에 빠져있는 금색 눈동자가 행여나 나와 마주칠까 조심히 살핀다.

     

    상당히 의외였다.

    그녀가 내 말에 귀를 기울인 건 여태 한 번도 없던 일이었으니.

     

    10년 전이니 이런 일도 있을 수 있나.

     

    아니, 어쩌다 오늘 기분이 좋았던 거겠지.

    의미 부여하지 않기로 했다.

     

     

    상태창을 확인한다.

     

     

    [No. 003 : 백인의 효수 42% → 31%]

    [변동됨]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다.

     

    ‘아셀라가 납득하긴 했지만 엔딩이 삭제되진 않았어. 슬슬 변동치도 줄어드는 걸 보면 이게 본 사건은 아닌가 보네.’

     

    그래도 처음에 비하면 엄청 많이 줄였다.

    아셀라에게 영감을 줄 본 사건이 뭘지 궁금해졌다.

     

     

    내가 아셀라에게 물었다.

     

    “그런데 황녀님, 이 장미꽃을 어디에 쓰실 생각이신지요?”

     

    “음….”

     

    아셀라의 아랫입술이 슬쩍 밀려 올라온다.

     

    “다른 사람에겐 비밀로 해.”

     

    “물론이죠.”

     

    “나중에 어마마마께 드릴 거야.”

     

    “…선물인가요?”

     

    “맞아.”

     

    시원하게 긍정하는 아셀라였다.

     

     

    아니, 왜 자기 엄마 선물을 남의 집 화단에서 꺾어다 주고 있어.

     

    혼약자의 물건을 훔치면 되는데 왜 돈을 주고 사냐 이런 건가.

     

    저와는 사고방식 자체가 다릅니다.

     

     

    뭐, 황녀님이시고 언젠가 황제 폐하가 될 몸이신데 제국이 곧 당신 거지요.

     

    백번 옳으신 생각이십니다.

     

    ‘그럼 꽃 문제는 내가 아니라 황비가 더 관련됐겠네.’

     

     

    생각을 정리하는데 아셀라가 내게 말했다.

     

    “고트베르크 공자.”

     

    “예, 황녀님.”

     

    “주치의 시험 잘 해 봐.”

     

    이 독불장군께서 어지간히 나를 주치의로 삼고 싶으신 모양이다.

     

    “왜 그렇게 저를?”

     

    “마음에 들었어.”

     

    아무래도 의학을 눈여겨본 모양이다.

    막스의 목숨을 구한 건 사실이니 관심이 갈 만도 하다.

     

    자기 생각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밀어붙이는 폭군이다.

    아셀라의 눈에 든 이상 제안을 거절하면 어떻게 해코지를 해올지 모른다.

     

    이렇게 된 이상 적당히 엮이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아셀라가 발생시키는 배드엔딩은 모두 삭제해야 한다.

    그걸 위해선 당분간 그녀 옆에서 행동하는 게 편하긴 하겠지.

     

    업적을 쌓기 위해서는 사회적인 지위도 높일 필요가 있다.

     

    추후에 방향을 변경하더라도 그녀의 제안은 좋은 발판이 되어줄 것이 틀림없다.

     

     

    …정했다.

    황실 주치의가 되자.

    그 대신 유리한 조건을 붙이는 게 차라리 낫겠다고 판단했다.

     

    “제가 황녀님의 주치의로 뽑혔을 때의 이야기입니다만.”

     

    아셀라가 눈썹을 슬쩍 치켜올렸다.

     

    “저는 의학을 주로 사용하고자 합니다. 의학 기반의 치료를 진행할 환경을 구비해 주셔야 합니다.”

     

    “그래.”

     

    “저는 장남으로서 가문도 돌봐야 하지요. 종종 자리를 비우게 되겠습니다만 양해가 필요합니다. 그동안 황녀님을 모실 간호사는 육성해 놓겠습니다.”

     

    “그것도 좋아.”

     

    “마지막으로.”

     

    나는 방에 준비되어 있는 서신용 봉투를 꺼내 글자를 적었다.

     

    밀랍으로 밀봉하고 내 인장을 찍는다.

     

    “제가 주치의로서 황녀님께 막대한 공을 세웠을 경우, 이 봉투 안에 적어놓은 요구사항을 들어주셔야 합니다.”

     

    “뭐라고 적어놨는데?”

     

    “제국을 달라거나 하는 비현실적인 문장은 아닙니다. 황녀님이 지금도 들어주실 수 있는 간단한 일입니다.”

     

    “그래, 그 정도라면.”

     

    아셀라가 봉투를 받아들려고 할 때, 내가 살짝 손을 뺐다.

     

    “확실한 언약을 원합니다.”

     

    “당돌하구나. 기아스라도 사용해 줄까?”

     

    “예. 적힌 내용이 별거 아니라는 점에 대해선 제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고 마법이나 아티팩트를 써서 검증하셔도 됩니다.”

     

    아셀라가 내 태도에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어디 하찮은 계략을 쓸 수 있으면 써보라는 깔보는 태도였다.

     

    아셀라가 공중에 손가락으로 진을 그린다. 그녀의 금빛 마나가 새어나와 아지랑이처럼 퍼져나간다.

     

    기아스. 맹약의 마법.

     

    무슨 일이 있어도 약속을 지키게 되는, 강제력을 지닌 마법이다.

     

    “나 아셀라 폰 뷔르템펠트는.”

     

    그녀의 목소리가 청아하게 울리며 마법진을 진동시킨다.

     

    “고트베르크의 영식이 본녀의 주치의로서 지대한 공을 세웠을 때, 봉투를 개봉하여 적힌 문장을 이행한다.”

     

    세 개의 마법진이 시계 방향으로 회전하며 격렬히 반짝인다.

     

    “위대한 현자 델리파커스의 이름에 걸고.”

     

    ―파앗!

     

    아셀라의 손에서 뭉친 빛이 폭발하듯 퍼져나간다.

     

    계약이 성립됐다.

     

    “내용이 정말 궁금해지네.”

     

    “황녀님도 기뻐하실 내용일 겁니다.”

     

    기뻐하고말고.

    네가 날 얼마나 싫어하는지는 잘 알지.

     

     

    [아셀라 폰 뷔르템펠트는 라스 고트베르크와 파혼하며, 그를 주치의 직에서 해임하고 안전하게 황실에서 내보낸다.]

     

     

    나도 이 정도 보험은 들어놔야 사지 멀쩡히 집에 돌아오지 않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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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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