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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

       

       * * *

       

       

       며칠간 나는 이곳을 빠져나갈 생각을 고심했다.

       

       그야 여기는 지금 사실상 최전선에 있는 백군도 적군도 아닌 아나스타샤의 도시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게다가 앞으로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

       

       내 머리에 총구멍이 나지 않는 것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도 모르고. 싸우는 것도 먹을거 얻으려고 폭주족과 싸워본 것이 전부였다.

       

       그래서 일단 백군 지휘관들 구심점 역할 만 해주고 뒤로 빠져 보려고 탈출구를 알아보려 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예카테린부르크는 온전히 나의 것이 되어 버렸다.

       

       아니 나갈 때마다 러시아인들이 내가 자기들 둘러보러 왔다며 기뻐했었거든.

       

       웃는 얼굴에 침 뱉을 수 없다고.

       

       나는 억지로 웃으며 나의 신민? 들을 직접 손까지 맞잡아주었다.

       

       그러던 중, 나는 한 병사의 보고를 받았다.

       

       

       “황녀님. 정체불명의 군대가 접근했습니다.”

       “정체불명?”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입니다.”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장갑열차를 타고 종횡무진 러시아땅을 헤집으면서 적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고 압박한 군대다.

       

       본래는 1차 세계대전 당시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들이 결성한 이른바 독립군이었으나 독일군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압박으로 시베리아까지 먼 여정을 떠나야만 했다.

       

       이들의 활약이 얼마나 대단했냐하면,

       

       오죽하면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이 예카테린부르크로 가서 차르 일가를 주워 백군에 던져줄 것을 우려해서 차르일가를 죽였다는 말도 나오지 않던가.

       

       그 수만 해도 5만 명이 넘는다고 들었다.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그럼 장갑열차를 타고 있겠군.”

       “네. 그쪽 지휘관이 황녀님을 뵙고 싶다고.”

       

       

       대체 이쪽으로는 왜 왔을까.

       

       제대로 된 군대도 없어서 아나스타샤 황녀의 팬클럽 급 의용군 수백이 전부인데 말이다.

       

       그렇군. 한번 이쪽과 협상을 해 보고 싶다는 건가.

       

       하기야, 아무리 차르가  말아먹었다고 해도 차르의 마지막 자식이라면 그 이름값은 있으니까.

       

       뭐 때문에 보려고 하는진 모르겠다.

       

       적군에 넘긴다?

       

       아니지. 아니야. 그랬으면 공격해 왔겠지.

       

       보자고 했으니 보는 게 인지상정.

       

       체코슬로바키아군단은 정예 중의 정예라 할 수 있다. 그것도 수만 명이지.

       

       잘하면 아군을 더 늘릴 수 있을지 모르지.

       

       

       “전러시아 제국의 성녀이신 아나스타샤 황녀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직접 본 라돌라 가이다 장군은 과연 러시아땅에서 열차를 타고 빨갱이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인물 답게 위압감이 넘쳤다.

       

       첫만남에서 나를 기죽일 셈인가.

       

       나는 태연한 척 입을 열었다.

       

       

       “라돌라 가이다 장군.”

       “제 이름을 아십니까?”

       “장갑열차 오리크를 탄 그 유명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총사령관이 아니십니까. 시베리아 철도에서 볼셰비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때가 맞나?

       

       아무래도 상관없다.

       

       아무튼, 나로서는 이 사람에게 밉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황녀의 체면이 있으니 막 저자세를 보일 수도 없고.

       

       

       “굉장히 몸이 약하신 걸로 아는데, 볼셰비키의 마수 속에서 살아남으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어 놀랐습니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산 사람이지요. 허나 이 땅을 지키기에 저의 힘이 굉장히 모자라서 말입니다. 제가 언제까지 살아 있을지 모르겠군요.”

       

       

       돌려 말해서 너희 좀 싸돌아다니지 말고 나를 도와라.

       

       이 말이지만, 대놓고 도와달라고 하기에는 아직 이 작자의 속을 모른다.

       

       

       “-하면 차라리 더 동쪽으로 가시는 것이.”

       “이곳에 오셨으면 아시겠지요. 신민들이 저를 받들고 있는 모습을요.”

       “아, 보았지요. 여전히 로마노프는 굳건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비아냥이지만 동시에 진심이겠지.

       

       설마 아직도 로마노프를 따르는 무리가 있을 거론 상상도 못 했을 테니까. 그래서 가이다도 꽤 당황했을 거다.

       

       만일에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자리라면.

       

       

       “라스푸틴의 국정농단과 무능한 차르 덕에 볼셰비키 혁명이 터졌고 많은 신민이 우리에게서 등을 돌렸으나, 여전히 예카테린부르크의 신민들은 그 어떠한 힘도 없는 저를 이토록 따라주고 있습니다. 이들을 버리고 동쪽으로 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렇습니까.”

       

       

       여전히 무덤덤한 표정.

       

       나를 통해 어떤 이익을 봐야 할까.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을 것이다.

       

       그럼 당신이 혹할 만한 질문을 해볼까.

       

       

       “가이다 장군이 여기까지 오신 이유를 한번 제가 맞춰볼까요?”

       “말씀해 보시지요.”

       

       

       이제야 두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가능하면 저를 확보해서 동쪽으로 보내려 하시겠지요. 그리고 이번 내전에서 손을 좀 담가 미국과 일본 등의 도움을 얻어 블라디보스토크 쪽으로 탈출하시려고 하는 것 아니십니까?”

       “이거 바로 들켰군요.”

       

       

       척하면 척이다.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은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을 테고. 그러자면 지금 무슨 수단이라도 써야 할 테니까.

       

       실제로 콜차크를 넘기는 대가로 적군으로부터 안전한 퇴로를 보장받지 않았나.

       

       

       “좋은 생각입니다만. 예카테린부르크는 유럽 러시아와 시베리아를 비롯한 아시아 러시아를 가르는 지역입니다. 공업과 상업 금융업이 발전했죠.”

       “예. 이곳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입니다. 이곳을 잃는다면 백군은 힘이 빠지고 말 겁니다.”

       

       

       예카테린부르크 자체도 아시아에 속했지만, 적어도 이곳은 계속 남아야 한다.

       

       남러시아와도 연계해야 하고.

       

       시베리아와 극동만으로 백군은 버티지 못한다.

       

       

       “흠, 그런 말씀을 하신 진의를 듣고자 합니다.”

       “장군께서는 이 황녀가 지금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야? 제법 상황 파악은 잘하지만 그뿐 아닌가? 그냥 납치해서 돌아갈까? 이러실지도 모르죠.”

       “크흠.”

       

       

       이 새끼 진짜였네.

       

       내 행동에 따라 당장 나를 끌고 갈 수도 있다.

       

       다만 끌려갈 때 끌려가더라도 좀 그럴듯한 모습은 보여 줘야지.

       

       이럴 때는 있는 그대로 정면에서 부딪쳐야 한다.

       

       

       “뭐 본론부터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예.”

       “극동으로 가셔서 협상국과 접촉하시고, 차르와 가족들이 죽고 아나스타샤 황녀 한 명만이 살아남았노라고. 선전해주세요.”

       “그야. 애초에 그쪽으로 가면 알려야 할 일이고. 이곳에 남으시겠다는 뜻이로군요.”

       

       

       가이다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내 속내를 꿰뚫어 보려는 듯했다.

       

       나는 그 눈빛에 조금도 반응하지 않고 무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복수에 사무친 황녀는 예카테린부르크에서 적군을 맞아 장렬하게 산화하겠노라고. 그렇게도 전해주세요.”

       “고작 수백의 의용군으로 적을 상대하시겠다는 뜻입니까?”

       

       

       자, 그럼 이제 슬슬 판을 깔아보자.

       

       

       “비록 무능했다 하나 아버지와 어머니는 재판도 없이 무자비하게 총탄에 맞아 쓰러지셨습니다. 그것도 제 앞에서 말입니다.”

       “…….”

       

       

       눈앞에서 부모랑 형제가 총에 맞아 죽은 것도 모자라 기름이 들이부어 지고 불태워지며 아무렇게나 매장되었다.

       

       이걸 보고도 사람이 멀쩡할 수 있을까.

       

       

       “내 남동생도 비명에 갔으며, 내 언니들은 기어이 희롱당하다가 총칼에 찢겨 죽었습니다. 그리고 불로 태워졌죠.”

       “허.”

       “제 두 눈으로, 제 앞에서 가족들이 그리 처참하게 죽어 갔습니다. 이런 몸으로 편히 혼자 도망가서 살 수는 없습니다.”

       

       

       명분은 그럴듯하게 갖추고 있다.

       

       가족들이 그렇게 처참하게 죽어 눈이 돌아가 버린 황녀.

       

       복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가 되어 버린 황녀.

       

       동정이든 뭐든 간에 데려가면 자살할 거 같은 분위기를 연출했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저는 지금도 하늘이 노랗고, 매일 밤 가족들의 원혼이 찾아옵니다. 한을 풀어달라고 말입니다. 장군께서는 모르실 겁니다. 그렇게 처참히 죽은 가족들이 불에 타는 것을, 불에 타 뼈가 되어 아무렇게나 파묻히는 모습을. 그 광경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래요. 더 부탁할 일이라면 한 가지 더 있겠네요.”

       “무슨.”

       “군수물자나 지원해줬으면 좋겠네요.”

       

       

       내 말에 가이다는 눈살을 찌푸리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조금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좋아, 떡밥을 무느냐 아니냐. 좋겠다.

       

       이 정도 던져놨으면. ‘개소리 하지 말고 따라와라.’해서 반강제로 가게 되는 게 그나마 보기 좋겠지.

       

       적어도 와 신 난다. 하고 따라가는 것보다는 최소한 이미지는 확실히 찍어둘 수 있지 않은가.

       

       복수?

       

       내 부모인가? 아나스타샤의 부모지.

       

       아나스타샤의 기억이 있다지만, 이건 기억일 뿐.

       

       나한테 복수할 이유가 전혀 없다.

       

       마지못해서 끌려가듯 나가서 유럽이든 미국이든 가 한동안 비련의 여주인공 행세하다가 적당히 친척인 혐성국에서 지원받으며 호의호식하면 되고.

       

       만일 또 예상외로 흘러가면.

       

       나는 여기서 정말 산화해야 할 테고.

       

       그때는 정말 미래를 바꿀 각오를 해야겠지.

       

       그리 된다면, 이전같은 제국은 글렀으니 합중국은 어떨까.

       

       

       * * *

       

       

       

       아나스타샤와의 만남이 있고, 가이다는 부관들과 함께 모여 대책을 논의했다.

       

       사실 뭐 여기까지 오는 동안 대책이랄 것까지도 없었다.

       

       그냥 눈도장만 찍고 언제 볼셰비키에게 죽을지 몰라 오들오들 떠는 황녀를 데리고 동쪽으로 달리면 된다.

       

       그리 여겼는데.

       

       직접 만나 본 황녀는 진짜 눈앞에서 가족들이 죽고 화장당하는 것을 본 탓인지 반쯤 광인이 되어 있었다.

       

       저 나이대의 여인은 지을 수 없는 광소가 입가에 머물고 있었다.

       

       복수심으로 똘똘 뭉친 것이다.

       

       

       “나라로 돌아가지 못하고 떠도는 우리와 황녀와 다를 게 없군.”

       

       

       엄연히 비교할 것이 다르긴 하지만. 아무튼, 그만큼 사정이 촉박하다는 범주 아래에서는 그렇다는 거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저래서야 우리가 데려간다고 하면 자살이라도 할 거 같습니다만.”

       

       

       맞다. 저 모습을 보니 복수를 못할 바에 차라리 죽으려 하겠지.

       

       더군다나 이 예카테린부르크란 도시. 이상하게 볼셰비키도 아니고 황녀에게 광적이기도 했다.

       

       단순히 황녀에 대한 동정이 아니라 무언가.

       

       그래. 정말로 기적이라도 본 것처럼.

       

       지나다니는 황녀 신봉자를 만나 대화해보니, 볼셰비키의 총탄과 마구 쑤신 총검에도 살아남고. 손을 흔드는 것만으로 아픈 이들이 나았다고 한다.

       

       아마 일부 황녀의 측근들이 황녀를 신격화하려고 작업한 거라 치부했지만. 어쨌든 도시는 확실히 황녀의 손에 넘어간 듯 보였다.

       

       외통수다.

       

       아나스타샤란 황녀가 이렇게 나올 줄은 생각도 못했다.

       

       자신들이 황녀와 접촉한 시점에서 황녀에게 무슨 일이 터진다면 그 범인은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이 될 것이다.

       

       안 그래도 떠도는 처지에 황녀시해범이라든가. 그런 말이 나돌면 위험하다.

       

       이도 저도 안 되면 다른 길을 뚫어야 하지 않을까?

       

       

       “흠. 어쩔 수 없군.”

       “예?”

       “차라리 황녀의 손을 들어 주는 것이 어떤가.”

       “아니, 그럼. 저희는 조국으로 언제 돌아갑니까?”

       

       

       지금, 이렇게 러시아땅에서 왔다 갔다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결국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함이 아닌가?

       

       

       “멋대로 조약을 맺고 전쟁에서 이탈한 저 볼셰비키를 뚫고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러니 적당히 황녀와 협력하는 건.”

       “우리가 카자크도 아니고 로마노프의 창칼이 되는 건 좀.  그렇지 않습니까?”

       “어차피 황녀가 살아남은 이상 볼세비키를 적대하는 구심점이 될 것은 뻔해. 우리가 먼저 그 선두에서 영향력을 발휘하잔 거지.”

       

       

       황녀가 죽지 않고 살아남은 이상. 그 어떤 파벌이든 볼셰비키와 싸우기 위해 정통성을 간직한 마지막 로마노프의 기치 아래로 몰릴 것이다.

       

       

       “그렇다면.”

       “잘 생각해 보게. 나중 가서 황녀가 러시아의 차리나가 된다면?”

       

       

       잘 만하면 이거 체코에서 러시아를 좌지우지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아무렴 저렇게 복수심에 살아가는 여자의 한을 푸는 데 일조해주는데. 나중 가서 간이고 쓸개고 떼줄 만큼 자기들을 돕지 않겠느냔 말이다.

       

       러시아는 일단 큰 나라기도하고.

       

       무능한 차르를 만나 오늘날의 러시아는 이 모양이지만. 러시아가 가진 잠재력은 무시할 수 없다.

       

       심지어 볼셰비키 놈들은 자기들 권력을 위해 독일과 멋대로 조약을 맺어 땅덩어리들을 다 떼주고 전쟁에서 이탈한 찢어 죽일 놈들 아닌가?

       

       즉, 아나스타샤를 도울 이유 정도는 굳이 따지면 만들 수 있다는 소리다.

       

       

       “음. 하지만 저희가 황녀의 기반이 된다고 한들 어디까지 되겠습니까?”

       “그것을 논의해 보고자 한다. 일단 우리의 요구도 들어 줘야 할 것이고.”

       “저희의 요구라면.”

       “체코의 독립 보장. 우리가 이후 체코에서 힘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움을 받는 것. 이 정도면 우리로서는 감지덕지 아닌가.”

       “적군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이길 수 있겠다라.

       

       황녀의 손을 잡으면 이길 수 있겠다는 모호한 표현보다는 이겨야만 한다고 악착같이 싸워야지.

       

       더군다나 그들이 보는 적군은 그리 강한 존재가 아니었다.

       

       

       “허우대만 멀쩡한 놈들이야. 볼셰비키 놈들은 전쟁이 두려워서 대전쟁에서 빠졌고 무능하고 제국 시절의 경력이 있는 러시아의 장군들은 다 물러나 있지.”

       “아.”

       “그래. 뭐. 어려울 때 서로 돕고 사는 거지.”

       

       

       아나스타샤의 생존으로.

       

       역사의 톱니바퀴는 어긋나기 시작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차리나: 러시아 황제의 호칭인 차르의 여성형 버전.

    연참! 아마 내일부터는 11시 1회 고정될 거 같습니다!

    선작, 추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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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the Last Princess of the Bear Kingdom

I Became the Last Princess of the Bear Kingdom

Status: Ongoing Author:
I became a Russian princess destined to die in a revol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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