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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0

       

       

       

       

       

       

       

       

       

       맞아.

       그 얼굴이야.

       내가 에린시아였던 걸 알았다면, 응당 절규와 통한이 깃든 그런 얼굴을 했어야지.

       내가 그랬듯, 지옥 불구덩이를 앞에 둔 것처럼 진땀을 흘렸어야지.

       그랬다면 네 따귀를 때리는 일은 결코 없었을 거야.

       전부, 네 탓이야.

       

       《죄, 죄송합니다…. 대공녀님.》

       《사죄하는 이치고 무릎이 너무 꼿꼿한 거 같은데? 엘든 공자?》

       

       털썩!

       그래, 넌 그렇게 두 무릎이 으스러져라 대전의 바닥에 꿇어야 했어.

       

       《이렇게 빌겠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호호호. 그렇지. 이제야 네가 있어야 할 자리로 내려간 거 같구나?》

       《저 같은 쓰레기에게 당연한 자리입니다.》

       

       이거야.

       얼마나 좋아.

       자아성찰?

       그건 스스로 해낼 게 아니라 내 앞에서 했어야 돼.

       죄인이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하듯, 내 앞에서 했어야 한다고.

       

       《그래. 하지만 너무 자신을 폄하하지는 마.》

       《예? 무슨… 말씀이십니까?》

       《다른 쓰레기들에 비하면 악취가 덜하니까.》

       

       그리고 죗값의 평가와 선처는 내가 직접 했어야 해.

       폭력과 조롱의 희생양이었던 내가 해야 되는 거잖아.

       네가 할 게 아니라, 내가 했어야 하는 거라고.

       

       《그 말씀은…?》

       《맞아. 선처를 받고자 한다면, 다른 쓰레기들보다 훨씬 가볍고 빠르게 받을 수 있을 거야.》

       

       죄악의 무게가 가볍다면 당연히 가벼이 죗값을 치루면 되는 거잖아.

       난 그럴 생각이었어.

       다른 쓰레기들의 악취는 너무도 고약해 코를 막지 않고선 근처에 가기도 힘들었으니까.

       악취란 고약할수록 빼기 힘들듯, 네가 풍기는 악취는 다른 쓰레기들에 비해 쉽게 빠질 테니까.

       하지만 넌, 그 가벼운 세탁조차 치루지 않고 도망가겠다는 거잖아.

       

       《어때? 내게 선처 받고 싶어?》

       《노력하겠습니다. 지난 날의 에린시아 영애에게 용서 받기 위해, 시키시는 모든 일을 감내하고 받아들이겠습니다.》

       

       호호호.

       그래, 그렇게 나왔어야지.

       얼마나 보기 좋아?

       얼마나 훈훈한 광경이야?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선처를 호소하는 진실된 모습.

       그 끝에 나의 남편이 되고자 하는 간절한 바람.

       영원한 강자가 없음을 깨달은 우물 안 개구리의 절규.

       악행의 업보는 언젠가 자신의 목을 조른다는 계몽.

       이 순간을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는지 몰라.

       

       《뭐든지 하겠다고?》

       《예. 어떠한 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푸흡. 그렇다면… 내가 그랬듯, 개처럼 바닥을 굴러볼래?》

       《예.》

       

       데굴데굴데굴.

       푸흡.

       정말 개처럼 구르는구나.

       웃겨.

       

       《이번엔 개처럼 짖어볼까?》

       《멍멍!》

       《푸훗, 소리는 좋은데, 개는 사족보행하는 거 잊었니?》

       

       다리를 구부리고 팔을 뻗어 바닥을 짚은 엘든이 개처럼 짖어댄다.

       

       《멍멍! 왈왈왈!》

       

       그 꼴이 너무도 우습고 한심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론 데론 일행이 나를 보던 시선이 이랬을 거란 생각에, 마음이 아리고 쓰라려.

       그래도 행복해.

       애타게 기다린 보람이 있을 만큼, 엘든 라펠리온이란 악인이 속죄하는 모습은 기대했던 것보다 더 뭉클하고, 감동적이니까.

       

       《주저없이 속죄하는 결심, 마음에 들어. 그럼 그 결심이 어디까지일지 한번 볼까?》

       《에린시아에게 용서 받고, 르미앙 대공녀님과 혼약을 맺을 수 있다면 죽음도 불사하겠습니다.》

       

       호호호.

       역시 훌륭한 마음가짐이구나.

       솔직히 기대했던 거 이상이야.

       그 마음가짐 끝까지 유지한다면, 분명 네가 바라는대로 이루어질지도 모르겠어.

       

       《그럼, 네가 그토록 혐오했던 괴수 요리를 준비했는데 맛있게 먹어볼래? 내가 직접 정성스레 준비한 거야.》

       《….》

       《왜? 결심이 혐오를 이길 정도는 아니었던 거야?》

       《아, 아닙니다.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엘든이 괴수 요리를 먹는다.

       곧, 얼굴이 새빨개지며 헛구역질을 시작한다.

       아카데미에서 너희들이 이야기하는 걸 들었었어.

       괴수 요리 같은 건 역겹고 지저분한 오물 덩어리라고 너희들이 그랬었잖아.

       그 흉측한 것을 가지고 요리를 만들어 먹는 미개한 새끼들이 이해되지 않는다며 그랬었잖아.

       보는 것만으로도 구토를 할 뻔했다고, 엘든 네가 그랬었잖아.

       그래서 열심히 준비한 만찬이야.

       그러니까 당연히 구역질을 하며 힘겹게 요리를 먹었어야 했어.

       미식을 즐기듯 복스럽게 먹는 게 아니라, 다른 쓰레기들처럼 구토와 함께 먹었어야 했다고.

       

       지금처럼 말이야. 

       얼마나 보기 좋아?

       

       《우읍…, 마,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호오. 결심이 허풍이 아니었단 걸 증명했구나? 나와 결혼한다면 평생 그걸 먹어야 할지 모르는데, 괜찮겠어?》

       《대공녀님의 곁에서 속죄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상관없습니다.》

       

       그래.

       그래야지.

       엘든 라펠리온, 너는 그랬어야지.

       진심으로 속죄하겠다면 응당 내 곁에서 하는 게 당연한 거니까.

       너도 알고 있었던 거지?

       나도 몰랐던 내 마음을, 너는 눈치챘던 거지?

       가벼운 속죄로써 윈터펠 대공가의 사람이 될 수 있으리란 기회를 엿봤던 거지?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야.

       네가 옳은 결정을 해서.

       

       《호호호. 진작 이랬으면 얼마나 좋아.》

       《제 불찰이었습니다. 노여움이 풀리실 수 있다면, 지옥 불구덩이에서도 구르겠습니다.》

       《내 곁이 그 지옥 불구덩이라 할지라도?》

       《기꺼이 감내하겠습니다.》

       

       호호호.

       그래.

       넌 그런 인간이었잖아.

       늘 맞서 싸우는 인간이었잖아.

       걸어오는 싸움을 마다하지 않는 인간이었잖아.

       그러니까, 내가 건 싸움에서도 물러서지 않는 게 당연하잖아.

       

       

       그렇지?

       

       

       하하하하.

       

       

       “아, 아가씨? 깨신 거에요?”

       

       

       하하하.

       

       

       “…왜, 왜 웃으세요?”

       

       

       하하.

       

       

       “아, 아가씨…? 좋은 꿈이라도 꾸시는 거에요?”

       

       

       하.

       

       

       또 엘든에 대한 꿈이었구나.

       

       

       ……….

       

       …….

       

       …

       

       

       그래.

       

       

       모처럼.

       

       

       좋은 꿈이었어.

       

       

       

       

       

       

       **

       

       

       

       

       

       

       “무슨… 꿈을 꾸셨길래 자면서 웃으신 거에요?”

       

       마리엔이 침대에 걸터앉으며 그리 물었다.

       악몽으로 인해 온몸이 젖었던 그날과 달리, 제 아가씨의 얼굴은 잠들기 전과 마찬가지로 그저 새하얄 뿐이었다.

       그 빛이 다행일지 불행일지, 이제는 모르겠는 마리엔이었다.

       

       “….”

       

       르미앙이 말없이 제 왼손을 매만진다.

       엘든의 뺨을 때렸던, 스스로 혈흔을 만들어낸 그 손엔 붕대가 감겨있었다.

       마리엔에겐 깨진 접시에 베였다고 했었다.

       손바닥이 욱씬거려왔다.

       통증의 욱씬거림일지, 어떠한 새로운 박동일지 모를 이질적인 느낌.

       피식.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은 르미앙이 갈라진 입술을 움직였다.

       

       “응. 좋은 꿈이었어. 모처럼.”

       “…다행…인 거죠?”

       

       마리엔의 물음에 재차 미소짓는 르미앙.

       그 미소에 걸린 것이 너무도 쓸쓸하고 씁쓸해 보여, 마리엔은 한숨을 삼켜야 했다.

       어제도 어찌나 놀랐는지 모른다.

       대전의 문을 열고 나온 아가씨의 손에 묻은 피를 보고서 비명까지 질렀던 마리엔이었다.

       

       “이제 와 다행일 게 뭐가 있겠어.”

       “…손은 괜찮으셔요?”

       “응.”

       “다행이네요…. 이거라도 좀 드셔요.”

       

       마리엔이 겨울꽃차를 건넸다.

       심신의 안정이 필요할 때, 이따금씩 그날의 통증이 욱씬거릴 때 늘 찾던 차였다.

       하지만, 그것을 받은 아가씨가 입을 대지 않았다.

       

       “안… 드세요? 조금이라도 드셔요.”

       “됐어.”

       

       결국 아가씨가 찻잔을 놓고야 말았다.

       이러신 적이 없는데.

       안정과 안식이 필요할 때 꼭 찾던 차였는데.

       설마… 이제 그것들이 필요없다는 것일까.

       마리엔이 걱정스레 제 아가씨의 안색을 살핀다.

       푸르른 해안을 담았던 동공이, 심연의 바다를 담은 듯 검푸르러져있다.

       푹 주무시고 나면 다시 회복되리라 여긴 빛이, 어제와 똑같았다.

       

       “아가씨…? 이제… 그만하시는 게 어떨까요?”

       

       조심스레 물음을 던지는 마리엔.

       그 질문에, 르미앙은 눈부신 햇살이 깃드는 창가를 보았다.

       오늘따라 유달리 눈부신 햇살이 깃드는 창가를.

       르미앙이 붕대가 감긴 왼손의 손바닥을 오른손으로 누르며 답했다.

       다시금, 미소를 지으며.

       

       “어떻게 그만둘 수가 있겠어?”

       “…네?”

       

       대답 대신 뜻 모를 질문이 돌아왔고, 그 다음 이어진 말에, 마리엔은 푹 꺼진 아가씨의 검푸른 눈동자를 이해할 수 있었다.

       

       

       “시작조차 하지 못 했는데.”

       

       

       제 아가씨의 검푸른 눈동자에 찬란한 빛을 돌려줄 수 있는 이는, 엘든 라펠리온 백작가 공자뿐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런 그의 기권 선언이 공식 승인된 것과 더불어 사면을 뜻하는 조약서의 등장은, 제 아가씨의 눈빛을 더욱 어둡게 만들고 만다.

       또한, 그 소식에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린 아가씨를 말리지 못 한 마리엔이었다.

       

       

       벌컥!

       

       쾅!

       

       

       거칠게 열린 중앙보좌관의 집무실 문이 부서질 듯한 굉음을 낸다.

       그렇게 곧장 겔우드의 집무실로 쳐들어간 르미앙이 진노한 음성으로 그를 불렀다.

       처음으로 내는, 표독스런 악성(惡性)이었다.

       

       “겔우드-!!”

       

       그리고 균열의 방문을 예견한 겔우드가 침통스런 표정으로 그녀를 맞았다.

       시작된 균열이 꾀하고 있는 붕괴를 막기 위해 일생일대의 결단을 내린 그가, 그 붕괴를 꾀하고 있는 균열을 맞이한 것이다.

       

       “오셨습니까. 대공녀님.”

       “너, 미쳤어?! 네가 뭔데 엘든에게 사면을 내려? 내가 용서치 않았는데, 네가 무슨 자격으로 용서를 하냐고-!!”

       “고정하십시오. 대공전하께서 수도성으로 떠나시기 전, 모든 결정권을 제게 위임하셨습니다.”

       “뭐?”

       “그를 용서한 것이 아닌, 예정된 결말을 맞았을 따름입니다. 엘든 공자에게 모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발, 이제라도 멈추십시오. 이리 간청드립니다.”

       

       시작조차 하지 못 했는데, 자꾸만 멈추라는 그들.

       대체 무얼 멈추라는 건지 모르겠는 르미앙은, 언제부터 시작됐을지 모를 파국 속에서 홀로 싸워야 했다.

       받아주는 이 없는, 허공을 향한, 공허를 향한 싸움이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금요일 연재분이 늦었던 만큼, 이번주는 일요일에도 찾아뵙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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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migrated Into A Tragic Romance Fantasy

Transmigrated Into A Tragic Romance Fantasy

후피집물의 후회캐가 되었습니다
Score 10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I was curious about what a female-oriented tragic romantic fantasy was like, so I skimmed through only the free chapters. And then… “…Ha.” I found myself transmigrated into one of the main male characters, destined for tears of regret, exhaustion, and obsession. So, the first thing that had to be done was… “I, Elden Raphelion, hereby declare my withdrawal from the competition for the betrothal of the Third Northern Duchess.” To escape this trage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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