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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0

     

    “고트베르크 선생.”

     

    자리에서 일어선 팔켄하인이 나를 향해 근엄하게 걸어왔다.

     

    내 지근거리에 서서 다른 주치의들이 볼 수 없게 되자마자 표정을 풀고 슬그머니 귓속말을 해온다.

     

    “정말로 머리카락을 되살리는 약이 존재하오?”

     

    모발에 대한 욕심은 어느 재물욕이나 권력욕보다도 강한 법.

    슬쩍 흘린 탈모치료제에 눈이 돌아가서 완전히 내 편이 됐다.

     

    지금부터 내가 할 증언에 팔켄하인을 끌어들이는 건 필수였다.

     

    “경우에 따라 다릅니다만, 팔켄하인 경의 케이스에는 가능합니다.”

     

    “오오!”

     

    팔켄하인을 진단한 결과는 ‘원형탈모’였다.

    재능의 디버프는 아니고 나이를 먹어서 생긴 현상이었다.

     

    “탈모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앞머리 라인이 후퇴하는 M자 탈모와 정수리가 훤해지는 원형탈모지요.”

     

    “그렇소. 나는 원형탈모요.”

     

    “상태로 보아 진행된 지 얼마 안 되셨군요. 길어야 6개월 아닌지요.”

     

    “정확하오. 5개월 차요.”

     

    M자 탈모는 유전에 의한 것으로 치료가 불가능하고 모발 이식을 해야 한다.

     

    하지만 원형탈모는 스트레스나 환경에 의해 발병하는 것이기에 경과를 늦추거나, 운이 좋다면 원상복구도 가능하다.

     

    팔켄하인은 늦은 나이에 이제야 원형탈모가 생겼으니 본래 건강 상태도 좋고 탈모 유전자도 적다고 생각된다.

     

    나는 팔켄하인의 손에 슥 준비해왔던 한 개의 약병을 쥐어줬다.

     

    “체내의 탈모 효소 작용을 막는 약제입니다. 쉽게 말하면 머리가 빠지는 속도보다 나는 속도가 더 빨라져 수 개월 안에 복구가 됩니다.”

     

    소위 피나스테리드라는 탈모약을 흉내낸 버전이다. 세부 성분엔 조금 차이가 있지만 강화로 효소 억제 능력을 올려놨다.

     

    “맙소사, 그런 치료법이 있다니. 내 평생 빠진 머리가 다시 나는 사람을 한 번도 보지 못했거늘. 머리털을 돌려받을 수만 있다면 악마와도 계약하겠소.”

     

    “악마가 아니라 의사입니다. 한 달 분입니다. 부작용이 있으니 하루 반 알씩 쪼개 드셔야 하고, 많이 드신다고 효과가 좋아지지 않으니 주의하셔야 합니다.”

     

    “명심하겠소. 선생이야말로 진정 성자가 되실 분이외다.”

     

    약병을 소중하게 품 안에 넣은 후, 팔켄하인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팔켄하인 경, 지금 무엇을?”

     

    “고트베르크 선생의 의혹 몇 가지를 검증했소. 마저 청문회를 진행하시오.”

     

    다른 주치의의 질문에 능청스럽게 대답하는 팔켄하인.

     

    나를 변호할 준비를 마쳤다는 신호였다.

     

     

    알베리치가 발언을 이어간다.

     

    “고트베르크 주치의. 그대가 사용하는 약제가 당장 병자를 치유하는 것처럼 보였다 한들 민간요법의 연장선상임은 틀림없다.”

     

    알베리치는 다이어울프 마냥 당장에라도 내 목덜미를 물어뜯을 기세였다.

     

    ‘종교에 심취한 타입이었지.’

     

    팔켄하인같이 제국 출신 치유사는 여신을 섬기긴 해도 손익을 같이 취하려 한다.

     

    하지만 법국 출신 주교라면 치유술 외의 방식을 지금처럼 전면부정해버린다.

     

    한 번쯤은 시비가 걸려오리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다짜고짜 들이 받아올 줄은 몰랐다.

     

    “그대가 고용한 치유사는 내의원에서 금지된 민간요법을 사용한 죄로 해고되었다. 이 사실을 알았는가?”

     

    “알고 있었지요.”

     

    “그럼 그대는 해당 치유사의 기술을 활용하여 약제라는 물건을 제작했겠군?”

     

    “아뇨.”

     

    “아니다? 지금까지 인과는 확실하다. 반박에는 합당한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이쯤에서 확실하게 할 필요가 있겠다.

     

    “활용한 건 제 지식입니다. 의학이라는 학문이죠. 그 치유사는 자질이 있었을 뿐 제가 가르쳤습니다.”

     

    “인정했군!”

     

    알베리치가 벌떡 일어서며 삿대질을 해왔다. 초면인데 예의 없는 늙은이다.

     

    “그대는 치유술이 아닌 외도의 기술로 내의원의 체계를 어지럽혔다. 여신님이 자애를 부정하고 모독하였고 제국민의 신앙심을 망가뜨렸지. 주치의는커녕, 치유사의 자격도 없는 자다!”

     

    지나친 확대해석이지만 그의 강한 화법도 이해가 된다.

     

    원하는 게 있으면 턱없이 큰 것부터 시작해 목표를 손에 넣는 방식이다.

     

    ‘내 신뢰도에 흠집을 내고 싶은 모양인데.’

     

    월광궁 파벌 성장에 대한 견제겠지.

     

    이런 자리에서는 화를 내면 의도대로 놀아주게 된다.

     

    준비해온 시나리오를 써먹을 때가 됐다.

     

    “오해가 있군요, 알베리치 주교.”

     

    “어떤 오해인가?”

     

    “제게 의학을 사용하라 계시를 주신 건 다름 아닌 여신님이셨습니다.”

     

    “…뭐라고?”

     

    당연히 구라다.

     

    주치의들이 술렁거리는 걸 보니 동요하게 만드는 데는 성공했다.

     

    다들 실력 있는 주치의인 이상, 전원은 아니어도 어느 정도 여신교에 심취하고 경건히 신앙심을 갈고닦은 이들이다.

     

    여신에게서 계시를 받았다는 말이 얼마나 무게를 가지는지 모를 이는 없다.

     

    “여신님이 그 기술을 사용하라 하셨다?”

     

    “그렇습니다.”

     

    “지금 자네가 계시를 받을 정도로 신앙심이 충만한 치유사라도 된다는 소리인가?”

     

    “충만합니다.”

     

    나를 공격할 틈새를 찾은 알베리치가 예상외의 수확에 기세등등해졌다.

     

    “여신님을 모독하는 행위는 내의원에서 쫓겨날 중대한 결격사유다. 알고 있겠지.”

     

    알베리치의 기대에는 미안하지만, 내게는 보험이 있다.

     

    “설마 그 정도 상식도 없으려고요. 마침 제 신앙심을 증명해주실 분이 이 자리에 계시군요.”

     

    “바로 그렇소.”

     

    팔켄하인이 기다렸다는 듯 대답하며 웅변을 시작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나에겐 재능이 있소. 신앙심을 볼 수 있는 눈이오. 누가 훌륭한 치유사인지 쉽게 알 수 있지. 이를 통해 신앙심이 흔들리지 않게 훈련하여 이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소이다.”

     

    팔켄하인이 한 치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강력하게 주장을 펼쳤다.

     

    “고트베르크 선생은 내 직접 육성소에서 주치의로 모셔온 인재요. 한 가지 이 자리에서 확실히 증언하리다.”

     

    팔켄하인이 나를 향해 손바닥을 펼치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선생은 내 평생 봐온 그 어떤 치유사보다도 가장 신앙심이 두터운 분이요. 지금도 그 올곧은 마음이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불타오르는 모습이 이 눈에 비치고 있소.”

     

    알베리치가 못마땅해하며 반격한다.

     

    “팔켄하인 경, 신성모독이라는 중대한 결격행위를 놓고 진위여부를 따지는 자리요. 당신이 그 말에 책임지실 수 있소?”

     

    “책임이라? 지금 토진궁의 주치의인 나를 향해 책임질 수 있냐고 물었소이까, 알베리치 주교?”

     

    팔켄하인도 목소리를 높인다.

    그 역시 2황자 파벌 치유사의 우두머리다. 아랫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가만히 있을 입장은 아니다.

     

    “여신님께서 내게 내려주신 재능을 의심하는 것이오?”

     

    “나는 절대 여신님을 의심하지 않소. 여신님보다 주군에 충성하는 그대의 왜곡된 신앙심을 의심했지.”

     

    “내가 주군의 명령으로 고트베르크 선생을 거짓으로 비호한다 이 말인가? 허허, 황실이 어찌 돌아가는지 정보도 느리군.”

     

    “그럼 아니라고? 저 새파랗게 어린 치유사가 이 자리에서 가장 강한 신앙심을 가졌다는 게 말이나 된다 생각하시는가?”

     

    “내가 보기엔 자네도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오.”

     

    “놈? 이 영감탱이가 드디어 노망이 났군. 당신은 머리의 피가 마르다 못해 털까지 다 뽑아버렸나?”

     

    “내 머리털이 다 빠지기 전에 네놈이 먼저 요단강을 건널 게다.”

     

    “인명이 제천이라고 내 명줄이 아무리 짧아도 오늘내일하는 당신보단 길겠지. 치매 걸렸으면 은퇴해서 손주 기저귀나 갈으시게.”

     

    노인네들이 침 튀겨가며 어린애처럼 언쟁을 벌이는 모습은 상당히 추했다.

     

    재미있긴 해서 말릴 생각은 안 들었다.

     

    “어차피 허황된 말뿐이지. 고트베르크가 충만한 신앙심을 가졌단 증거는 어디에도 없잖는가?”

     

    “오냐, 내 증거를 보여주마.”

     

    팔켄하인이 성서를 꺼내들었다. 품에 고이 안아 들고 반대쪽 손을 들어 경건하게 눈을 감아 선서한다.

     

    “존경하는 여신님께 경의를 담아 진실만을 맹세하노니, 신성한 눈으로 보건대 의사 고트베르크 선생은 성도 알베리치 주교보다 한참 깊은 신앙심을 가졌소.”

     

    화아악!

     

    팔켄하인의 등 뒤에서 강한 빛이 역광으로 뿜어져 나왔다. 그의 몸에서 은은히 피어오르는 강인한 신성력이 빛무리를 이룬다.

     

    수준 높은 치유사, 성직자에게서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깨끗한 신성력이군.”

    “후광에 흔들림이 없소.”

    “신앙심에 금이 갈 만한 거짓은 맹세하지 않았다는 뜻이오.”

    “고트베르크 주치의가 그 정도로 걸출한 인재란 말인가?”

     

    다른 주치의들이 웅성거린다.

     

    “고작 이런 일에 맹세까지….”

     

    알베리치도 팔켄하인이 이렇게까지 나오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는지 당황했다.

     

    그러게 적당히 도발했어야 했다.

     

    내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증명은 된 듯하군요. 말씀드린 대로 제가 의학을 펼치는 건 외도가 아닙니다.”

     

    “정도라고도 할 수 없다. 치유사는 기도를 올리는 자이지 환자에게 독을 먹이는 자가 아니란 말이다!”

     

    여전히 알베리치는 목에 핏대를 세운다.

     

    그때였다.

     

    회장 문이 쾅 열리고 투박한 구두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망토를 휘날리며 당당하게 걸어들어오는 여걸이 한 명.

     

    1황녀, 헤이케였다.

     

    청문회를 진행하던 모든 주치의들이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헤이케는 슥 회장을 둘러보고는 군인처럼 명령을 내렸다.

     

    “알베리치와 고트베르크만 남기고 전원 퇴장하라.”

     

    즉시 자리를 비우는 주치의들.

     

    음, 조금 전까지 라우가와 있어서 잠깐 무게감을 잊어버릴 뻔했다.

     

    이게 본래 황가의 핏줄이 내뱉는 말의 무게였다.

     

    “알베리치, 묻겠다. 왜 고트베르크 주치의를 해임하려는 청문회를 열었나.”

     

    “황녀 전하, 이 자리는 그를 해임할 목적이 아니라 의혹을 해소하고 자질을 검증하는 자리였습….”

     

    “같은 말 아닌가. 시간을 낭비하게 하지 마라. 이미 고트베르크의 사무실을 다녀오느라 시간을 허비했다.”

     

    헤이케가 나를 직접 찾아왔다라.

    절대 좋은 예감은 안 들었다.

     

    라우가도 한 번 왔다 하면 평범한 사람의 한 달 치 대화를 쏟아놓고 가서 머리가 어지럽다.

     

    귀찮은 일일 게 분명했다.

     

    “다시 묻지, 왜 이 청문회를 열었나?”

     

    알베리치가 식은땀을 흘리며 변명하듯 천천히 대답했다.

     

    “…전하께서 월광궁의 치유 예산을 확인하시고 3황녀 전하 파벌의 성장을 경계하시는 듯했기에.”

     

    “넓은 의미로는 옳다.”

     

    “하, 하오면 이 자리에는 문제가 없는 게 아닌지.”

     

    쿵!

     

    헤이케가 발을 구르며 강렬한 눈빛을 부라렸다. 알베리치가 깜짝 놀라 고개를 떨었다.

     

    나라도 저 시선은 1초 안에 피하겠다.

     

    아셀라가 악의를 담아 죽이러 덤빌 것 같은 눈빛이라면, 헤이케는 누를 버튼을 잘못 고른 순간 감정 없이 나를 죽일 살인기계 같은 느낌이랄까.

     

    “주교, 자네의 직업이 뭔가.”

     

    “…주치의입니다.”

     

    “짐이 주치의에게 정치적 판단을 맡길 정도로 무능해 보이나?”

     

    “그, 그럴리가 있겠습니까.”

     

    “자네가 짐의 책사인가?”

     

    “아닙니다.”

     

    “짐은 목휘궁의 치유 예산을 줄이라 하였지 월광궁을 견제하라 명령하지 않았다. 그 판단은 짐이 한다. 틀렸나?”

     

    “백 번 옳으신 말씀입니다.”

     

    알베리치는 입을 비죽 내밀고 헤이케의 말을 전부 긍정할 뿐이었다. 마음고생이 심한지 다크서클이 뺨까지 떨어졌다.

     

    “그럼, 고트베르크 주치의.”

     

    “존안을 뵙습니다, 황녀 전하.”

     

    이제야 나를 찾네.

     

    둘의 대화로 보아 페니실린과 관련된 이야기라고 생각됐다.

     

    “그대를 짐의 파벌로 영입하고자 한다.”

     

    상상을 뛰어넘은 제안이 들어왔다.

     

    알베리치 역시 헤이케의 돌발행동에 입을 떡 벌리고는 행동을 멈춰버렸다.

     

    “진의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말 그대로 러브콜이다. 짐이 그대를 원한다. 짐의 부주치의가 되어 새로운 치유 메커니즘을 도입하라.”

     

    다른 파벌의 인력을 빼오는 일이야 황실에서는 흔한 일이겠지.

    황실 기사단도 수시로 파벌이 변동하니까.

     

    내가 아셀라의 주치의인 건 헤이케에게 별 문제가 안 되는 모양이다.

     

    이들에게 신하는 물건이다. 동생의 장난감을 뺏어다 놀려는 느낌 아닐까.

     

    나이도 열 살 넘게 차이 나는데 말이야.

     

    “그 말씀은 의학을 쓰라는 뜻이신지요?”

     

    “그래. 의학을 적극 활용해 약제를 개발, 양산 및 독점할 환경을 구비해주겠다.”

     

    흠, 헤이케의 부하라.

     

    조건만 보면 나쁘지 않다. 황궁에서 제일가는 파벌이기도 하고, 아셀라가 차기 황제가 못 된다면 그 자리는 헤이케가 차지할 확률이 가장 높다.

     

    손익계산이 확실한 여자다. 충성했을 때 돌아올 보상은 보장된다.

     

    하지만.

     

    “송구하옵니다, 전하. 이미 저는 아셀라 황녀님께 충의를 바치기로 한지라.”

     

    황실에 깊게 관여하는 건 내게 손해면 손해지 결코 득이 되지는 않는다.

     

    수렁에 허리까지 담그면 빠져나갈 수 없게 되는 법이다.

     

    어디까지나 배드엔딩을 삭제하는 것이 내 목표다. 헤이케의 파벌로 들어가면 일만 늘어나고 나중에 괜히 귀향만 힘들어진다.

     

    “어째서지? 그저 계약에 의한 주치의일 뿐이지 않는가.”

     

    “하하, 주치의지만 혼약자이기도 합니다.”

     

    “정치적인 이유로 가문에서 정한 혼약자 말인가.”

     

    헤이케가 흐름을 꿰뚫어 보며 파고들 틈새를 찾는다.

     

    “명목뿐인 황가와의 혼약관계를 원하는가?”

     

    “예? 그건 아니….”

     

    “마침 짐에게도 혼약자가 없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혼인 전에 가문 간 힘싸움에 의해 파혼과 재혼약은 밥먹듯이 일어나는 게 상식 아니겠는가. 고트베르크 주치의.”

     

    헤이케가 내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진지한 말투로 질문했다.

     

    “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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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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