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500

    그 모든 일들이 마치 한때의 환상이었던 것처럼 평화로운 어느 날.

    대신 중 한명이 그녀를 찾아와 한숨을 푹 쉬었다.

    “여왕님, 또 여기에 계셨습니까.”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또 화방에 있었다.

    그림은 최근(그러니까, 적어도 그녀의 기준에서는) 그녀가 푹 빠져있는 새로운 취미였다.

    오늘도 그녀는 늘 그리던 그림에 붓질을 더하고 있었다.

    “슬슬 내려오시지요. 이제 곧 정기회의 시간입니다.”

    “알겠어요, 금방 내려가죠.”

    그녀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높다란 의자에 앉아서 손에 든 팔레트에 물감을 휘적거리는 손길을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마도, 그만큼 푹 빠져있는 것이겠지.

    기다리는 사람들을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그에 대신은 결국 불만을 토했다.

    “여왕님, 정말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옷도 갈아입으셔야 하고, 씻기도 하시려면 지금 일어나셔야 합니다.”

    “알겠다니까요. 잠시만요.”

    분명 여왕으로 살아간 시간이 자신의 일생보다 더욱 길었을 여성이었음에도 그녀는 여왕다운 체통을 지키기는 커녕, 여전히 국정에 중요한 회의보다는 그림을 그리는 것에 집중하곤 했다.

    그리고 그녀의 이런 아이나 다름없는 행동은 그녀를 보좌하는 입장에서는 늘 불만스러운 부분이었다.

    게다가, 그토록 오랜 시간을 투자해서 그림을 그려왔으면서도 아직도 평범하게 잘 그린다는 수준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다는 것이 이해하기 어렵다.

    어떤 곳에 어떤 색을 써야하고, 어떤 것은 어떻게 보이는지 고려하며 그림을 그리다보면 어느순간 어떻게 그려야 할지 난감한 부분도 생기게 마련이라지만, 그녀는 초보자라기엔 아득히 오랜 세월을 그림과 함께해왔었으니까.

    그렇게 그녀가 잠깐 붓질을 멈추고 고민하는 표정을 짓고 있으니, 대신이 다시금 자신의 목적을 상기시키기 시작했다.

    “정말 이제는 내려오셔야 합니다. 이미 다른 분들은 전부 자리에 앉아있어요. 이미 각지에서 수많은 귀족들이 회의를 위해 한 자리에 모여있단 말입니다. 막힌 부분이 있다면 조금 있다가 다시 와서 그리시면 안되겠습니까?”

    아무래도, 이제는 더이상 시간을 뒤로 미룰 수 없게 된 모양이다.

    —–

    ‘회의는 항상 하는거면서.’

    일년에 한번 열리는 총회의만 벌써 220년을 하고 있으니, 이제는 자잘한 정기회의 정도는 자신들끼리 진행하고 보고한다고해도 별 문제는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항상 자신을 회의에 참가시키는 이유는, 일찍이 그녀가 그것을 규칙으로 정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자신의 의도가 변질되는 일 없이 일관적인 정책방향을 유지하면서도, 꾸준히 개선안을 찾아가기 위함이었다.

    그래도, 220년동안 꾸준히 회의를 하려니 슬슬 지겨울 지경이었다.

    레니에가 그렇게 속으로 투덜거리고 있을 무렵, 대신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물어왔다.

    “그 그림이 중요한 회의를 미룰 정도로 중요한 일입니까?”

    그러자 레니에가 툴툴거리듯 대답했다.

    “당연히 중요한 일이죠, 제가 얼마나 노력을 쏟아붙는 취미인데요?”

    그런 그녀의 대답에 대신은 여전히 모르겠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그런 것 치고는 그림의 실력이 그렇게 빠르게 느는 것 같지는 않던데 말이지요. 방금 전에도 명암을 어떻게 처리할지 몰라 난감해하시는 것 같았고요. 그렇게 의미없는 노력을 쏟아붓기보단 역시 그냥 유명한 화가를 불러서 여왕님 대신 그리게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확실히, 그것은 훨씬 빠르고 간편한 방법이었다.

    지배자라고해서 모든 능력이 뛰어날 필요는 없다.

    올바른 인물을 올바른 자리에 알선하는 것 만으로도 지배자는 그 역할을 다하는 법이니까.

    애초에 여왕이라는 자리가 그런 것이 아닌가.

    하지만 레니에는 대신의 그런 제안에 관심이 없었다.

    “안돼요. 그림은 제가 완성시켜야만 의미가 있으니까요.”

    자신이 상상한 것을 남들이 볼 수 있는 형태로 표현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은, 생각보다 즐거운 일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미루고 싶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또, 그리운 얼굴을 떠올릴 수도 있고.

    벌써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의 얼굴을 아직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적어도, 이 세계의 다른 모든 이들보다는 정확하게.

    그녀가 그렇게 장담할 수 있는 이유는 그저 그만큼 오랜 세월을 살아왔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대신이 말했다.

    “그나저나, 항상 똑같은 얼굴만 그리시는군요. 이쯤 되면 저도 그 사람이 정말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될 지경입니다.”

    “누누히 말씀드리지만, 그는 정말 실존했을 뿐 아니라 대단한 마법사였어요. 신까지 끌어내려 무한의 진리에 다가갔던 인물이라니까요.”

    그녀가 투덜대자, 대신은 그런 그녀의 투정이 늘 있던 일이라는 듯 태연하게 반박했다.

    “하지만, 그렇게 대단한 마법사가 남긴 업적이 아무것도 없다는 게 말이 안되잖습니까.”

    “…….”

    대신의 말에 레니에는 결국 입을 다물었다.

    몇 백 년 전, 그때의 충격이 다시금 살아났기 때문이었다.

    ‘죄송합니다만, 이루시 가문의 후계자는 루이 이루시뿐입니다. 또, 그는 이루시 가문의 외동아들이었고요.’

    그것은 과거, 레니에가 사망한 루크의 장례식을 위해 시체를 수습하여 돌아갔을 때 들은 말이었다.

    ‘루크 이루시’라는 존재의 말소.

    이치가 맞지 않는 이야기는 아닐 터였다.

    그것은 모든 이들의 머리 위에서 ‘신’을 끌어내리는 이야기였다.

    태초의 지식, ‘아카식레코드’라는 개념을 건드리는 개념은 한낱 필멸의 존재가 건드리기에는 너무나 격이 다른 권한이었으니까.

    결국, 그는 여신과 함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시간선에서 잊혀지고 말았다.

    그를 묘사한 환상이나 그림들에서도 그의 모습이 도려낸 듯 사라져버렸고, 과거 루크가 이룬 마법적 업적은 다른 이들의 업적이 되었으며, 그가 남긴 기록들의 저자도 다른 이들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사라진 톱니바퀴 하나를 대체하기 위해 다른 톱니바퀴들의 크기가 커지고 작아져 그 공간을 메꾸게 된 것과도 같았다.

    이는 아마도, 세계가 지닌 회복력이 작동한 것이리라.

    그러나, 자신의 경우는 달랐다.

    신성이란 창세와도 깊이 관련된 개념이었기 때문에, 모든 이들에게서 완전히 격리시킨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여신의 경우는 작은 톱니바퀴 하나가 아니라, 기계 전체를 이루는 하나의 동력원 그 자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 덕에 가장 여신에 가까운 자신만큼은 그 ‘회복력’의 영향에 닿지 않았던 것이겠지.

    그렇게 이제 살아있던 루크를 진정으로 기억하는 인물은 자신뿐이 되었다.

    자신이 그에게서 따온 이름을 숲에 붙인다고 해도, 그의 업적을 떠올리며 모두에게 떠들고 다닌다고 해도, 그 모든 것들이 마치 ‘루크 이루시’라는 자신이 만들어낸 가상인물이라는 듯 불편한 반응만이 되돌아올 뿐이었다.

    “뭐, 가상의 인물이라고 해도 국민들이 정신적으로 기댈 수 있는 영웅이니까요. 조금 널리 퍼진대도 나쁜 이야기는 아니겠습니다만.”

    “그러니까, 가상의 인물이 아니라고 말해도……. 하아, 아무렴 어때.”

    여왕으로 살아간 지 어언 220년, 레니에는 슬슬 체념을 하는 법을 배웠다.

    그녀가 수백 년간 주장해온 사실을 모든 사람들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가 존재했다는 사실만은 절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니까.

    그리고 몇 백쯤 더 지나면 가상인물도 실존인물이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게 되는데, 루크 역시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으니.

    적어도, 세대교체가 된 역사학자들에게 그렇게 주장할 수는 있겠지.

    “그나저나, 루크 이루시라는 인물을 퍼트리는 것에 대해 마탑에서 불만이 꽤 많습니다. 자신들의 업적을 끌어내리는 짓이라고요. 그 이야기에 대해 아크메이지 러들께서는 오늘도 항의를 할 것 같은 모양새던데요.”

    “뭐, 하라면 하라고 하세요. 제가 눈 하나 깜짝하나.”

    그 순간이었다.

    -막아! 대체 경비들은 뭘 하고 있었던 거야?

    -이 녀석, 엄청난 아티팩트를 가지고 있어!

    왕성의 한켠에서 들려오는 아우성거리는 소리에 레니에의 발걸음이 멈췄다.

    “여왕님, 회의가….”

    “잠시만요. 혹시 중요한 이야기일지도 모르니까.”

    사건의 냄새를 맡은 레니에의 고집은 그리 쉽게 꺾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정말 잠시만입니다.”

    그에 레니에는 한차례 씨익 웃어보인 뒤, 곤란해하는 기사단장을 향해 다가가 물었다.

    “저기, 이게 대체 무슨 소란이지요?”

    “아, 여왕님. 위험하니 다가오지 마시지요.”

    자신을 제지하는 경비대 기사단장의 손길에 잠시 멈칫한 레니에는 그 제지를 무르며 말했다.

    “걱정 마세요. 그가 무슨 짓을 하든, 어차피 제게 위협은 되지 않을 테니까.”

    확실히.

    그녀를 지켜야하는 입장에서 말하기엔 뭐하지만, 그녀의 ‘능력’을 안다면 그녀의 안녕을 걱정하는 것 만큼이나 쓸데없는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위해에도 죽지 않는 존재가 암살을 당할 것을 걱정하는 것처럼 의미없는 짓도 없다.

    레니에가 말을 이었다.

    “그보다, 저는 무슨 일인지 알고 싶은데요.”

    “아, 예.”

    여왕의 질문에 그는 한차례 목을 가다듬고는, 조금 근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자신이 150년 전에 실종되었던 탐험가, 루이츠 펠의 조수였다고 주장하는 인물이 나타났습니다. 다짜고짜 여왕님을 만나뵙고 싶다고 하더군요.”

    루이츠 펠, 확실히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이었다.

    동대륙과 서대륙을 몇번이고 횡단한 그의 모험가로서의 업적은 모험가에게는 꽤 관심이 있던 레니에로서는 모를 수가 없는 것이기도 했고.

    하지만 어느날 갑자기 그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그 이유를 추측하는 이들의 이야기는 많았지만, 결국 밝혀진 바는 아무것도 없었고.

    150년이 지난 지금은 그저 단순한 전설취급을 받는 가십거리에 지나지 않는 이야기다만…….

    결국 흥미가 생긴 레니에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150년? 혹시 그 사람은 엘프인가요?”

    하지만 레니에의 물음에 기사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뇨, 평범한 인간입니다. 적어도, 자신이 주장하기로는요. 여왕님께 전언이 있다고 하더군요.”

    “흐음?”

    글쎄,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적어도, 일반적인 ‘시간선’ 안에서는 말이다.

    사라진 전설적인 모험가와, 150년을 뛰어넘어 도착한 파발이라.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루크를 얘기해도 자캐딸 취급받는 레니에는 억울합니다.

    사실, 저도 며칠 전에 꿈을 꿨습니다.
    정말 엄청나게 좋아하는 사람이 나온 꿈이었던 것 같은데, 그 사람은 꿈속의 인물이라서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죠.
    현실에선 모쏠에 남중 남고 나온 저에겐 그런 사람에 대한 모티브도 없고, 이제는 그 사람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커녕, 뭐하나 기억나지 않는 상태이지만…….

    꿈을 꿀 당시엔 정말로 푹 빠져있는 상태였단 말이죠…….

    그래선지 꿈에서 깨어나니 죄다 허무하게 느껴질 지경이었거든요?

    근데 그런 느낌을 생각하며 글에 녹여보니, 글이 걍 너무 우울하더라고요.
    저라면 몰라도 레니에가 그러는 건 어울리지 않아서 많이 수정했습니다.

    그나저나, 이 글도 벌써 500화나 되었군요!
    아무래도 꾸준히 썼다고는 말 못하겠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써내린 흔적이긴 하네요.

    모두가 봐주신 덕분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저도 이제 어느정도 몸상태는 호전이 되었습니다만, 너무 오랜만에 글을 쓰는 것 같아서 속도가 잘 안 붙네요.
    원래는 2편을 쓰려고 했는데, 한편 쓰는 것도 이틀에 걸쳐서 쓰고 말았습니다…….

    특집은 항상 과거의 이야기와 약간의 떡밥이 나왔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 문법을 지키다보니 우리 단또드래곤의 얼굴을 보여드리지 못해 너무 아쉽군요…….

    다음화 보기


           


The Archmage dreams of being an Archmage again

The Archmage dreams of being an Archmage again

다시 대마법사를 꿈꾼다 대마법사였던것은
Score 4.2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5000 Years in the future, the Archmage Luke Irushi opened her eyes again. The world has changes so much.

Horseless carriages, an entertainment box with audio and video, food and spices she has never seen before…

And, a changed magical system!

It wasn’t just the world that changed.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