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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02

   어둠에 휘감겨 피부의 색조차 알아볼 수 없는 루카의 진격을 바라보던 나는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바라는 대로 되긴 했어.

   

   아그라의 권능에 사로잡힌 루카는 이성을 완전히 잃어버렸으니까.

   

   이제 문제가 되는 건 두 가지다.

   

   하나는 내가 저 녀석의 힘을 버틸 수 있는가.

   

   다른 하나는 저 녀석이 쓰는 전술이 내가 아는 것과 동일한가.

   

   “죽#%>#%!”

   

   인간의 목소리조차 잃어버린 자의 공격을 가만 바라본다.

   

   전조는 크게 셋. 바닥을 진동시킬 정도로 강대한 걸음. 허리가 끊어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과장스러운 힘 모으기. 도끼날의 끝에 맺히는 힘.

   

   내가 기억하고 있는 타이밍은 도끼가 휘둘러지는 순간부터 0.3초 뒤다.

   

   그 타이밍이 정확하다면 나는 충분히 루카를 상대로 버틸 수 있다.

   

   루카의 공격이 날아든다.

   

   그의 팔에 새겨진 힘줄이 찢어질 것처럼 선명해진다.

   

   분노로 타오르는 붉은 색 눈이 날 바라본다.

   

   악신의 힘이 잔뜩 담긴 도끼날이 나를 향해 날아든다.

   

   콰아앙!

   

   방패 너머로 전해지는 거센 충격. 방패를 쥔 손이 벌벌 떨리고.

   

   충격을 견뎌낸 몸이 비명을 내지르고.

   

   입 안에는 비릿한 맛이 진동한다.

   

   패링에 실패했다.

   

   완전히 실패한 건 아니다.

   

   충격을 0으로 만들지는 못해도 상당히 줄이는 데엔 성공했다.

   

   그렇지만 충격을 줄였음에도 악신의 권능으로 강화된 루카의 힘은 버티기가 어려운 것이었다.

   

   온 몸에서 느껴지는 통증을 무시한 채 루카의 다음 동작을 살핀다.

   

   살짝 내려간 턱. 뒤로 물린 도끼. 앞 쪽으로 쏠린 무게 중심.

   

   어깨로 들이받을 생각이네.

   

   타이밍은 기억하고 있다. 발이 떨어지고 나서 0.5초 뒤. 머리로도 몸으로도 외우고 있어.

   

   그렇지만 그 타이밍을 믿을 수 있을까?

   

   내 기억을 완전히 신용했다가 방금 전에 실패했는데?

   

   잘 생각해야 해. 루카의 공격을 어설픈 패링으로 감당할 순 없어.

   

   이를 아무리 꽉 깨문다 한들 내게 주어진 기회는 기껏해야 셋에서 네 번 정도.

   

   그 안에 답을 찾아내야 해.

   

   눈을 크게 뜬다.

   

   시야에 모든 신경을 집중한다.

   

   루카가 보여주는 모든 움직임을 눈에 담는다.

   

   그리고 비교한다.

   

   내가 모니터 너머에서 보았던 루카와 지금의 루카를.

   

   “아=%^#!%!”

   

   루카의 돌진을 받아낸 순간 내 몸이 허공에 떠오른다.

   

   중력이 사라진 공간에서 휘저어지는 내 다리. 그리고 그 너머에서 휘둘러지는 루카의 도끼.

   

   내가 날아가는 것보다 루카의 도끼가 내게 닿는 것이 더 빠르다.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고민은 하지 않았다.

   

   본능에 따른다.

   

   방패 위에 신성을 싣는다.

   

   기적을 그린다.

   

   미적 감각에 의해 섬세히 그려진 마법진이 방패 위에 새겨짐과 동시에 그 위에 도끼가 닿았다.

   

   빛으로 만들어진 방패와 도끼가 부딪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빛이 붕괴되어 허공으로 흩어진다.

   

   그리고 그 때 난 이미 다시금 채비를 갖춘 뒤였다.

   

   살짝 굽은 루카의 눈매를 보며 생각한다.

   

   방금 전 공방을 통해 어느 정도 확신을 얻었다.

   

   내가 왜 패링에 실패했는지에 대해서.

   

   지금 루카가 지닌 신체 능력은 게임 속의 루카와는 비할 수 없이 강해져있다.

   

   심지어 루카가 지닌 체형마저도 저 할버드에 맞춰진 상태지.

   

   그러니 내가 아는 타이밍과 루카가 무기를 휘두르는 타이밍이 같을 순 없어.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나의 지식이 무용지물이 된 상황 앞에서 어찌 해야 하는가.

   

   어떡하긴 뭘 어떻게 해.

   

   새로운 타이밍을 찾아내야지.

   

   히죽 웃으며 다시금 방패를 다잡았다.

   

   루카의 패턴 자체는 내가 아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부정에 물들어 이성을 잡아먹힌 루카가 패턴을 바꿀 리도 없어.

   

   그러면 타이밍만 고쳐 잡으면 돼.

   

   상대의 공격이 기존보다 빠르다는 가정을 잡고.

   

   “알!%$%!^%”

   

   위로 치켜 올려진 도끼날. 고정된 다리. 도끼 끝에 맺힌 기운.

   

   무슨 공격이 올지는 알겠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도 잘 알고 있지.

   

   그렇지만 하지 않을 거야.

   

   본다. 본다. 상대가 휘두르는 무기를 그저 본다.

   

   공격의 전조를.

   

   도끼날이 아래로 내리 찍히는 것을.

   

   그 곳에 뭉쳐있던 기운이 폭발하는 것을.

   

   그 폭발이 내게로 쏘아지는 것을.

   

   그리고 정말 아슬아슬하다 생각한 그 순간 방패를 치켜들었다.

   

   패링을 포기했기에 공격의 충격이 그대로 전해진다.

   

   이…거 살짝 무리했나?

   

   방금 전에 어설프게나마 기적을 펼쳐놓고 또 공격을 받아내려고 한 건 미친 짓인가 봐.

   

   충격을 버티다 못한 팔이 밀려남에 따라 도끼 끝에서 터져 나온 충격이 날 덮친다.

   

   아. 좆됐.

   …

   

   잠시나마 끊겼던 생각이 돌아옴에 따라 귓가에 이명이 울린다.

   

   본래라면 이 시점에서 등줄기를 타고 공포가 차올랐을 것이다.

   

   패배의 예감이 나를 집어 삼키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연약한 꼬마아이로 만들어버렸을 테지.

   

   메스가키 스킬은 압도적인 도발능력을 대가로 패배했을 때 무력함을 선사하니까.

   

   그렇지만 이번엔 아니었다. 오늘은 아니었다.

   

   지금은 결코 아니었다.

   

   난 조금도 두렵지 않다.

   

   난 조금도 무섭지 않다.

   

   나는 조금도 공포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않고 있다.

   

   내 입가에 새겨지는 것은 오롯이 웃음.

   

   입 바깥으로 새어나오는 것도 오롯이 웃음.

   

   “큽. 크흐. 끄아앙.”

   

   아아악. 젠장. 더럽게 아프네.

   

   창작물 속에 나오는 주인공들을 보면 자기가 부상당했을 때 무슨 뼈가 부러졌니 장기가 상했니 하던데 그런 걸 어떻게 구분하는 거람.

   

   그냥 온 몸이 아픈데 거기서 뭐가 아픈지 어떻게 구분해?

   

   아. 뼈 부러진 건 구분할 수 있겠다.

   

   팔이 아예 안 움직이는 걸 보면 내 뼈도 부러진 것 같으니까.

   

   나는 현실의 고통을 애써 무시하며 아르마디가 선사한 축복을 사용했다.

   

   아르마디의 손길. 수많은 상태이상을 비롯해 육신의 상처를 회복시켜 주는 스킬. 아르마디의 사도이자 그의 신성을 품고 있는 난 주신에 비견되는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

   

   “끄으윽!”

   

   상처가 단번에 회복될 때 느껴지는 통증은 도저히 익숙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처참한 꼴을 몇 번이나 당했음에도 여전히 나는 아픈 것에 무덤덤할 수 없다.

   

   그렇지만 인내할 순 있다. 외면할 수도 있다.

   

   앞으로 있을 즐거움을 위해 참고 넘길 수 있다.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앞을 본다.

   

   내가 일어서길 기다리는 루카를 본다.

   

   이성을 잃은 와중에도 시련이라는 자신의 목적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저 미치광이를 마주한다.

   

   그리고 웃는다.

   

   루카가 다시금 내게 달려들도록.

   

   “아!%^#@!”

   

   그의 동작은 내가 처음 보았던 것과 같다.

   

   좋네. 내가 새롭게 떠올린 타이밍이 옳은지 아닌지 확인할 수 있게 됐으니까.

   

   과거. 그러니까 모니터 너머에 있던 시절의 나는 약골이었다.

   

   현실에 치이느라 바빠서 운동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지도 못하는 그런 사람이었지.

   

   그런 허접의 반사 신경이 좋았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당시의 내가 택한 건 수도 없이 시간을 박아 넣어가며 타이밍을 잡는 일이었다.

   

   전조만 보더라도 완벽한 대처를 할 수 있도록.

   

   그 때의 나였다면 타이밍 하나를 수정하기 위해 하루를 바쳐야 했을 거다.

   

   아니 어쩌면 며칠이나 모니터 앞에 붙 박혀 있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지금의 나는?

   

   이 세상에 떨어지게 된 나는?

   

   루시의 몸 안에 깃든 나는?

   

   여태까지 수도 없이 노력하고 또 노력해 온.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재능을 지니게 된 나는?

   

   그럴 필요가 없지.

   

   도끼가 날아든다.

   

   날 짓뭉갰던 괴력이 다가온다.

   

   내게 죽음을 선고하는 단두대처럼 망설임없이 내리쳐진다. 허나 굉음은 없었다.

   

   검정으로 물든 복도에 울려 퍼지는 청량한 소리.

   

   방패를 짓뭉개지 못하고 튕겨나간 도끼날.

   

   당혹 속에서 살짝이나마 돌아온 루카의 이성.

   

   그리고 방패 너머로 반쯤 흘러나온 나의 웃음.

   

   “시련이 되겠다고 하지 않았어?♡ 이래선 장난감도 못 될 것 같은데?♡”

   

   루카는 나의 시련이 될 수 없다.

   

   나를 이 이상 강하게 만들어줄 수도 없다.

   

   옛날 옛적에 공략당해 버린 보스 나부랭이가 내게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겠는가.

   

   *

   

   “아아. 동료 몇 사람만 더 있었다면 편했을 텐데.”

   

   유덴은 애써 여유로운 체 했지만 그녀의 상황은 좋지 못했다.

   

   마법진의 해석에 마법사가 매달리고 성직자는 영역의 유지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탓에 그녀는 홀로 전선을 유지하고 있었다.

   

   유덴이 경이로운 수준의 재능을 지닌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상황이 좋지 못했다.

   

   뒤편에는 지켜야 할 이들.

   

   대치를 무너트릴 기회만을 노리는 적들.

   

   그리고 한 시라도 방심을 하는 순간 그녀를 잿가루로 만들어버릴 용의 분노.

   

   이런 상황 속에서 대치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유덴은 자신의 칭호가 괜히 주어진 게 아님을 증명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지만 이대로만 있을 순 없어.

   

   지하로 힘이 자꾸만 빠져나가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것보다 내가 소모되는 쪽이 더 빨라.

   

   성녀님께서 기회가 생길 때마다 치유를 해주고 있지만 거기에만 기댈 수도 없어. 신성으로 이루어진 영역이 무너지는 순간 우리의 패배가 결정되는 셈이잖아.

   

   구멍을 뚫고 왔는데 왜 여태까지 지원이 안 오는 거야?

   

   소울 아카데미 같은 요충지라면 왕국에서도 민감하게 반응할 텐데?

   

   원래라면 지금쯤이면.

   

   “와아. 여기서 보니까 더 크네. 열 받게.”

   

   뒤 편에서 들려 온 태연한 목소리를 들은 유덴은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저기요. 카리아님. 지금 그렇게 여유를 부릴 때입니까?”

   “기껏 도와주러 온 사람한테 그러기야?”

   “그럼 빨리 도와주기나 하시죠!”

   “그렇게 안 보채도 도와 줄 거야.”

   

   카리아는 느긋이 목소리를 내며 유덴의 옆에 섰다.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은 수도 없이 많은 스크롤이었다.

   

   “유덴. 베네딕을 동경하는 너라면 알 거야. 그 녀석이 용을 사냥한 적이 있단 걸.”

   “그게 왜요!”

   “그때 내가 옆에 있었거든.”

   

   카리아라는 여성의 수십 년을 날려버린 사건. 그녀의 인생 자체를 지워버릴 뻔 했던 일. 한 꼬마아이가 아니었다면 결코 빠져나올 수 없었던 저주.

   

   “내가 좀 준비성이 철저한 인간이라서 말야. 한 번 호되게 당한 일에는 대비를 해둬.”

   

   정확하겐 대비하게 됐다고 해야 하려나.

   

   나한테 용의 악몽을 떠올리게 만든 건 고용주님이니까.

   

   그 꼬맹이. 대체 어디까지 계획을 하고 있는 거야?

   

   “충격에 대비해. 용의 분노는 여러모로 시끄러우니 말야.”

   

   카리아가 스크롤을 열자 그 곳에서 빛이 발한다.

   

   눈앞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지우는 용의 분노가 마법진을 넘어 현실에 강림한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Ilham Senjaya님 보러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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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g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Mesugak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메스가키 탱커는 참교육 당하지 않는다.
Score 9.2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2 Native Language: Korean
“You sloppy orc~ You can’t take down a girl?” He became the Mesugaki character in the Academy game. But the taunt works too w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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