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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03

    <503 – 혁명가의 유혹(3)>

     

    도적길드의 상징과도 같은 도적의 회랑을 막아서는 최후의 관문, 대도적의 잠금문.

    그 문에는 역대 대륙십대도적들의 지식과 기술이 아낌없이 들어갔다.

    당대 대륙십대도적이 아니고서는 누구도 단독으로는 출입할 수 없는 문이지만 그런 문이 개방됐다.

     

    구구궁…

     

    도적들의 회랑.

    황금색 재보의 빛으로 가득 찬 회랑의 중심에 디스트로이어와 빛을 정면으로 마주하면서도 눈살 한번 찌푸리지 않는 혁명가가 시선을 마주했다.

    세월이 지나도 변치 않는 젊음을 과시하듯, 예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얼굴을 지닌 혁명가와 달리 디스트로이어는 한층 늙고 쇠약해졌다.

    암흑마나의 축적.

    피폭된 신체에 남은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기에.

     

    “으음.”

    “곤란한데.”

    “이 정도의 괴물이었나.”

     

    혁명가의 최정예 수하들은 하나같이 침음을 흘리거나 난색을 드러내었다.

    오직 혁명가만이 당당하게 그를 마주했다.

     

    “오랜만이군요, 디스트로이어.”

    “잘도 내 앞에 그 낯짝을 들이밀 용기를 내었군.”

    “몇 안 남은 시간을 하찮은 마인 따위를 위해 할애하지 않았습니까. 당신의 그 어리석음이 제게는 기회가 되었답니다.”

     

    역시 계기는 베수비오 화산에서의 마인과의 격돌이었는가.

    디스트로이어는 용사행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지 않았음을 다시금 확인했다.

    그가 현역으로 남았다면 몇 건의 비극은 막을 수 있었겠지만, 지금처럼 혁명가와 재회하기도 전에 수명이 다했겠지.

     

    “감히 내 앞에 나선 어리석음의 대가를 치르게 해주지.”

    “이런. 성급한 성격은 여전하시군요. 그런데 정말로 괜찮겠습니까? 여기에는 당신이 아끼는 대륙십대도적의 서열 5위, 거울도둑 릴리아 양이 있는데.”

     

    보란 듯이 팔을 들어 올리는 혁명가의 행동에 한쪽 팔이 딸려 올라가는 릴리아.

     

    <고유경계>

    <제 4형 – 불립하는 시선의 경계>

     

    무신불립無信不立이라는 말이 있다.

    믿음 없는 자는 설 수 없다.

    디스트로이어의 시선은 그의 의지를 투영하는 문이자 공격의 사출로.

    그가 소리 없이 포효했다.

    이 자리에 나와 대등한 각오를 지니지 못한 자는 감히 두 다리로 마주 서지 못할 것이라고.

     

    쿵! 쿵! 쿵!

     

    피리를 든 음유시인도, 지팡이를 든 적색마법사도, 문의 개방에 협력했던 도적도, 혁명가의 옆을 따르던 혁명동지들의 대다수가 무릎을 꿇었다.

     

    “큭!”

    “바, 방어에 전념해!”

    “이길 수 있는 건가? 정말로 저런 괴물을?”

     

    혁명가를 따랐던 이들의 얼굴에는 후회가 어렸지만 곤란함을 느끼는 것은 디스트로이어도 마찬가지였다.

     

    ‘대도적의 잠금문을 개방한 시점에서 대륙십대도적 중 하나를 포섭한 것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쳐들어온 시점에서 그 정도는 대비했으리라 예상했지만…’

     

    초장부터 기선제압을 위해 발산한 경계에 무릎을 꿇지 않고 온전히 두 다리로 선 자가 혁명가 말고도 셋이나 더 존재했다.

    그들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디스트로이어에게는 절대 좋지 않은 징조였다.

     

    “릴리아는 사명을 이루었다. 자신의 뜻을 모두 펼친 자는 천명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루지 못한 혁명에 죽음을 두려워하는 너와는 입장이 다르다는 말이다.”

    “큭큭! 결국 그렇게 나왔군요. 역시 당신은 저와 같은 비겁자입니다. 타인의 희생을 강요하지 않으면 목표를 이룰 수 없어. 누가 더 미쳤느냐, 덜 미쳤느냐의 차이만이 있을 뿐.”

    “릴리아. 원망하지 말라는 말은 하지 않겠다. 부디 혁명가와 함께 죽어다오.”

     

    디스트로이의 눈에 실린 힘이 커졌다.

    그 징조를 감지하면서도 릴리아는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이거면 됐다.

    디스트로이어는 자신의 은인이다.

    죽지 못해 사는 이에게 살아갈 이유를 만들어주었고, 복수를 성공시키기 위한 식견을 쌓도록 허락했다.

    그러니 그를 위해 죽는다.

    혁명가와 함께 동귀어진한다.

    이 모진 목숨을 가치 있게 희생한다.

    기꺼이 할 수 있었다.

    어제까지의 자신이었다면.

    혁명가와 마주하기 전의 자신이었다면.

     

    “릴리아. 당신은 정말로 그걸로 만족할 수 있습니까? 이미 당신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저의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혁명가가 죽으면 제국의 황제는 쓰러지지 않는다.

    디스트로이어의 적에 황제는 없으니까.

    황제는 악룡 오모시로이를 쓰러뜨릴 신물을 등가교환의 법칙으로 얻을 때까지 무한히 전 세계의 곡식을 모아 신화등급으로 강화한다.

    천문학적인 도박을 매해 반복하면서.

    언제 성공할지 누구도 장담 못 할 도박을 또 반복하면서.

    세계는 천천히 병들고 죽어간다.

    디스트로이어, 그의 정의로운 혁명가 토벌로 인해.

     

    <경계의 압정>

    <태산압정泰山壓頂)>

     

    한 사람의 형체를 짓눌러 터뜨리기에 충분할 압력이 혁명가 한 사람을 향해 집중투사 된다.

     

    <눈은 마음의 거울>

    <심력의 반사>

     

    그런 디스트로이어의 힘에 맞서 릴리아가 제어수갑에 마나운용이 억제된 몸으로 무리해서 영역을 전개, 태산압정의 압력을 받아내었다.

     

    “!!”

     

    디스트로이어는 순간적으로 출력을 급격히 저하했으나 그의 온전한 힘을 아주 잠깐 받아낸 것만으로도 릴리아의 한쪽 눈에는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미친 것이냐, 릴리아!”

    “미치지 않았어.”

    “정신조종이냐?”

    “내 정신은 오롯이 나만의 것이야.”

    “하면 어찌하여 혁명가 토벌을 방해하는 것이냐!”

    “그를 막으면 황제를 죽일 수 없으니까.”

     

    두려울 정도의 충격에 디스트로이어의 몸이 거칠게 떨렸다.

     

    “너마저도 변하는 것이냐? 너마저도 내 곁을 떠나겠다는 것이냐…!”

    “한때 당신은 말했었지. 찾으라고. 죽어서는 안 될 이유를. 내가 죽으면 기뻐할 적들을.”

     

    피가 흐르는 눈은 감겼으나 온전한 한쪽 눈은 디스트로이어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죽음을 기다리는 흐리멍덩한 눈이 아닌 분명한 의지가 실린 명료한 눈이 주장했다.

     

    “찾았어. 전대 자비도둑보다 더한 대적인 황제를. 황제를 죽이지 못하면 기뻐할 추종자들을. 그러니 내 목숨은 아직 끝나서는 안 돼.”

    “너의 스승이자 인생의 선구자였던, 지금의 너를 있게 만든 은인을 배신하더라도 말이냐?”

     

    혁명가가 웃었다.

    허리를 숙이고 배를 부여잡으며.

    어깨를 움츠리고 흐느껴 웃으며.

     

    “큭큭큭! 보셨습니까? 당신의 작은 대의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아아, 훌륭합니다. 릴리아. 실로 훌륭합니다!”

    “끝났군.”

    “천하의 디스트로이어도 오늘로 비로소 그 명을 달리하겠군.”

     

    무릎을 꿇지 않았던 삼인의 혁명군 강자들이 돌진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그들의 걸음은 떨어지지 않았다.

     

    <명경지수>

    <제 2형 – 강제적인 평화의 깨달음>

     

    모든 전의를 일순간 무위로 되돌리는 명호스님의 힘이 그들의 발을 묶은 까닭이었다.

     

    “소승이 늦지 않아 다행이군요.”

    “명호. 보조를 부탁한다.”

    “혁명가 토벌에 나설 작정이라면 분명히 답해드리죠. 거절하겠습니다.”

    “명호!”

    “저희의 임무는 오크노디가 심득서를 습득하거나 도주할 결심이 서기까지 시간을 버는 것. 혁명가의 토벌이 아닙니다.”

     

    상황의 변화에 개의치 않는 명호스님의 차분한 주장은 <명경지수>라는 절대적 정신방어에 특화된 영역만큼이나 흔들림이 없었다.

    그 굳은 심지를 마주하고 나서야 디스트로이어는 자신이 혁명가의 함정에 빠지기 일보 직전이었음을 깨달았다.

    릴리아는 이미 늦었다.

    오크노디까지 잃을 수는 없었다.

    지금 그가 수행해야 할 교전은 혁명가 토벌전이 아닌 오크노디를 위한 지연전.

    1분1초라도 더 오랜 시간을 벌어야 한다.

     

    “…어렵구나. 쉬운 용사행은 한 번도 없었지만 이번만큼은 정말로 어려워.”

     

    거울을 닫는 방법은 깨뜨리는 것.

    지금 릴리아가 거울로 삼은 것은 자신의 눈.

    …선택을 강요받는다.

    오크노디와는 다른 의미로 제자처럼 키웠던 아이의 희생을.

    릴리아의 두 눈을 멀게 만들어야 한다고.

    돌이킬 수 없는 영구적인 부상을 입혀야만 한다고.

    지연전도 토벌전도 결론은 같다.

    릴리아를 쓰러뜨리지 않고선 다음을 논할 수 없다.

     

    “일어나십시오. 여러분의 발을 묶는 아카데미의 교수 명호스님은 자신을 위한 영역을 지닌 자. 그 힘은 타인에게 향할 때에는 지속시간도 출력강도도 상대적으로 약해집니다. 아니면 여러분은 약화된 영역조차 떨쳐내지 못할 수준입니까?”

     

    혁명가의 독설에 전의가 사라졌던 삼인의 강자들이 엇비슷한 타이밍에 강제되는 평화를 깨뜨렸다.

    그러나 그들이 발을 멈춘 30여 초의 시간은 디스트로이어에게 마음을 추스르고 전력을 보강할 충분한 대비 시간을 허락했다.

     

    “네가 나를 배신하겠다면 더는 망설이지 않겠다. 내게는 복수를 위해 지켜야 할 또 다른 제자가 남아있으니. 내 모든 기대, 모든 희망은 이제 오직 오크노디 하나를 위해 남겨두겠다.”

     

    다시금 전개되는 디스트로이어의 영역.

    혁명가가 손을 들지 않아도 스스로 팔을 들어올린 릴리아가 방어에 나섰다.

     

    “자아, 마음이 바로 섰다면 이번에는 저 역시 지원해드리죠. 소중한 방패가 깨지게 둘 수는 없으니까요!”

     

    혁명가의 압도적인 마나제어력이 제어수갑의 영향을 무시하고 릴리아의 능력전개를 신체에 어떠한 해도 끼치지 못하도록 보강했다.

    지이잉!

    손에 담아도 팔이 터지는 건 아닌지 두려울 수준의 대량의 마나를 눈에 담아 발산하는 두 사람.

    안력과 안력의 대결.

    두 눈이 성하더라도 성립하지 않았을 대결에 척안으로 맞서는 릴리아의 열세는 명백했으나, 지금의 그에게는 혁명가가 있다.

     

    <피어오르는 재능의 꽃>

    <하비의 영혼튤립>

     

    릴리아의 피부 위로 스며드는 마나의 꽃이 그녀의 영혼에 뿌리를 내렸다.

    재능의 끝을 모르는 다재다능한 릴리아의 재능이 혁명가의 손 안에서 한층 더 꽃을 피웠다.

     

    <언어란 마음의 표상>

    <표상이란 거울의 표면>

     

    릴리아가 말했다.

     

    “쓰러지세요.”

     

    그 한마디가 디스트로이어의 두 다리를 무서울 정도로 무겁게 만들었다.

    와이히엠하이 재단이 만들어낸 걸작이 재단의 수석장학생 오크노디라면, 디스트로이어가 만들어낸 걸작은 대륙십대도적의 서열 5위 릴리아.

    그녀의 거울도둑으로서의 재능을 혁명가는 한층 더 커다랗게 꽃피운 것이다.

     

    “지금입니다!”

     

    혁명가의 경쾌한 외침과 함께 마침내 삼인의 강자들의 돌진이 디스트로이어의 영역에 파고들었다.

    급소를 노리는 비수처럼, 공기를 가르는 화살처럼 일점으로 파고드는 세 줄기 섬광 중 하나가 명호스님의 합장에 덜컥 멈추었다.

    두 줄기 섬광 중 또 하나가 디스트로이어의 발구름에서 비롯된 역전되는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천장에 처박혔다.

     

    ‘손이 비었다. 발도 비었다. 눈을 돌릴 여력도 없다. 돌린다면 당장은 막아낼 수 있지만…’

     

    이어지는 공방의 교착 속에서 앞으로 정확히 스물두 수가 지나간 뒤, 혁명가가 디스트로이어의 숨통을 확실하게 끊는다.

    릴리아의 재능을 개화한 혁명가에 의해서.

    혁명가가 지난 세월 동안 개량하고 또 개량한 하비의 마계종 이색튤립의 독자적인 연구의 결실 때문에.

     

    ‘그런가. 이번에도 너였는가. 하비, 널 저버린 과오가, 네 억압과 희생으로 짓눌린 세월을 물려받은 결실이 이것인가.’

     

    스물두 수의 저항조차도 이어갈 의지가 사라졌다.

    마음이 꺾였다.

    자신의 마음속 하비는 죽일 수 있었다.

    그러나 혁명가의 마음속 하비는 죽일 수 없었다.

     

    ‘미안했다, 하비.’

     

    그의 눈이 감기려는 순간이었다.

     

    “에잇!”

     

    절체절명의 위기.

    심각한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맑고 경쾌한 외침.

     

    “가랏, 암흑볼!”

     

    맑은 목소리와 달리,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힘이 실린 암흑구슬이 어떤 방위로도 회피할 수 없도록 디스트로이어의 앞을 가로막았다.

    섬광의 주인은 이를 깨닫고는 이 악물고 더욱 속도를 끌어올렸다.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지지만 그래도 이만한 기회는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는다.

    그러니 벤다.

    자신의 강함을 믿고, 막대한 힘의 집결체를 정면으로 베어 넘긴다.

    그리고 기세를 몰아 디스트로이어까지 찌른다.

    한 시대를 풍미한 영웅의 최후를 자신의 검으로 장식한다.

    그리고 영웅살해자로 명성을 떨치리라!

    그 모든 기대는 검과 구슬이 충돌하는 순간, 구부러지는 검신과 함께 산산이 깨졌다.

     

    카아앙!

     

    “크아악!”

     

    부러진 검과 함께 끔찍한 비명을 내지르며 요란하게 지면을 나뒹구는 섬광의 주인.

    210mm나 됐을까 싶은 작은 발이 그의 머리 위에 꾸욱 얹어졌다.

    귀여운 행동과 달리 섬광의 주인의 머리가 지면에 구겨 넣어졌다.

     

    “하비노디는 잘만 베어버렸으면서 저건 왜 못 베는 거예요, 교수님!”

     

    이런 심각한 자리에서도 세상의 주인은 자신이라는 것처럼 나 화났음! 이라고 과시하듯 토라진 표정을 지을 수 있는 아이.

    디스트로이어는 그런 터무니없는 아이를 한 명 외에는 알지 못했다.

     

    “오크노디!”

     

    신의 심득을 얻을 기회를 포기하면서까지 자신을 구하러 온 어리석고도 기특한 아이.

    장내의 모든 고수들의 시선이 일제히 오크노디에게 쏟아졌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기특한 아이와 연참하는 테디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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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the Daughter of the Academy’s Villain

I Became the Daughter of the Academy’s Villain

아카데미 흑막의 딸이 되었다
Score 4.2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From the side, she looks pitiful and worn out, but in reality, she’s living her joyful survival story in the world of games.

But how can someone’s name be Oknod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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