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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03

       주변을 둘러싼 검은 공간을 베어 가른다.

         

       쐐액!

         

       정직한 자세와 그보다 더 정직한 검로.

         

       수천 번을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같은 자리에 내리그어 흔적을 남긴다.

         

       칠흑 같은 어둠에 뒤덮인 공간에 새겨진 한 줄기 실선.

         

       그것은 상흔이다.

         

       다른 무엇도 아닌 공간(空間)이라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자리에 남긴 상처.

         

       눈앞에 난 작은 생채기 같은 실선을 바라보는 백우진의 눈에는 실망감이 서려 있었다.

         

       “…이게 아닌데.”

         

       나아가고 있는 방향 자체는 정확하다.

         

       다만, 속도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느릴 뿐.

         

       “수천 번을 휘둘러서 고작 이 정도라니.”

         

       정확히는 9,999회를 같은 자리에 휘둘러 저 작은 생채기 하나를 만들어 냈다.

         

       그 말인즉, 검에 실린 기운이 더없이 미약했다는 뜻.

         

       아니면 기운이 들쭉날쭉하여 어떤 검격엔 실리고, 또 어떤 검격엔 안 실렸거나.

         

       어느 쪽이 정답이든 한없이 미숙한 상태라는 건 매한가지.

         

       “감각은 잘 잡힌 것 같은데.”

         

       이 어두컴컴한 곳에서 마주한 주마등과 같은 회상 덕분에 공간 자체에 대한 감각의 실마리는 확실하게 붙잡아 두었다.

         

       남은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검에 옮겨 담느냐인데.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쓰게 웃는 백우진.

         

       “이 정도면 안제…, 아니, 천마에게 감사해야 할 지경인데.”

         

       이토록 효율적인 공간에서도 성공률이 처참한데, 그때의 결과가 어땠을지는 뻔했다.

         

       만약 그녀가 여인들의 목숨으로 자신을 협박하지 않았더라면 끝에 더 처참한 결말을 맞이한 채 후회 속에서 사랑하는 이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바라보아야만 했을지도.

         

       “천운이 겹쳐 얻은 기회야.”

         

       천운이라는 말밖에는 설명하기 힘든 만큼, 이 공간은 불가사의했다.

         

       상상하는 것이 그대로 손에 쥐어지는 걸 보면 제 심상과 관련이 있는 듯하긴 한데, 막상 공간 자체는 아무리 바꾸려 해도 바뀌지 않는다.

         

       너른 들판, 화사한 꽃이 만개한 정원, 우중충한 하늘 등.

         

       무엇을 상상해도 이 검은 배경은 굳건하게 제 눈을 가로막고 있다.

         

       “대체 뭘까.”

         

       머리를 굴려 봐도 명확한 답은 나오지 않는다.

         

       다만, 추측할 따름이다.

         

       제 심상에 다른 무언가가 뒤섞여 이러한 결과물이 생성되지 않았을까.

         

       지금으로선 그게 가장 신빙성 있어 보였다.

         

       “뭐…, 사실 크게 중요한 부분은 아니지.”

         

       이곳이 정확히 어떤 곳인지는 중요치 않다.

         

       중요한 건 제게 부족한 시간과 효율적인 수련의 공간이 마련되었다는 것.

         

       물론 여기서 얻은 모든 깨달음을 현실에서 체화하는 데에 또 시간이 걸릴 테지만, 아예 밖에서 맨땅에 머리를 박아대는 것보다는 백 배, 천 배 나으리라.

         

       “자아…, 집중하자, 집중.”

         

       머릿속을 부유하는 상념들을 말끔히 지워낸 뒤, 다시금 집중 상태에 돌입한다.

         

       목표는 저 실선의 크기를 더욱 키우는 것.

         

       그보다 중요한 건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이상적인 크기의 실선을 새기는 것.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감각.

         

       그리고 한동안 기고만장하여 소홀하게 대했던 기본기를 다시금 수련하는 것.

         

       쐐액!

         

       휘익!

         

       더없이 단순한 경로.

         

       그러나 단 하나의 흔들림 없이 단숨에 그려져 더없이 매끄럽고, 그리하여 아름다운 실선이 연신 백우진의 검 끝에서 펼쳐졌다.

         

       무아(無我).

         

       제 존재마저 잊은 채.

         

         

       * * *

         

         

       숭산으로 향했던 연합의 고수들이 마침내 복귀했다.

         

       호기로운 발걸음으로 나아가던 때와 달리, 돌아올 때의 그들은 절망에 휩싸여 있었다.

         

       무림맹주 현학의 설득으로 연합에 남아 혼란스러운 내부를 정리하고 있던 사흑련주 도굉은 갑작스럽게 도착한 비보에 정신이 아득히 멀어지는 듯한 감각을 느껴야만 했다.

         

       “맹주께서…, 퇴각을 명하셨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우려하던 일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연합에서 차출한 천여 명의 고수와 구파일방의 으뜸이나 다름없는 소림사에서 지원한 수백 명의 제자들.

         

       더군다나 그들을 이끄는 이들은 다름 아닌 정파 무림의 기둥이라 일컬어지는 세 사람 중 두 사람인 검존과 불존.

         

       그들의 패퇴가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천마 한 사람에게 중원 무림이 패배했구나.’

         

       고작 한 사람 앞에 중원 무림 전체가 무릎 꿇었다는 것.

         

       천여 명의 고수를 내보냈을 뿐인데, 과한 비약 아니냐고?

         

       그거야말로 우스운 말이다.

         

       많은 인원을 편성하면 그만큼 그들의 평균적인 실력은 낮아지게 된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하수들은 현경을 넘어서는 고수와의 싸움에서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일정한 수준에 이르지 못한 이들은 심상 세계에 서 있는 것만으로 모든 기운을 소진하고 그대로 쓰러질 것이기에.

         

       “…일단 그날의 일은 함구하라.”

       “알겠습니다.”

         

       혼란스러운 와중에 도굉은 가장 먼저 함구령을 내렸다.

         

       누구도 숭산에서의 패배 소식을 알지 못해야만 했다.

         

       물론 세상에 영원한 비밀이란 존재하지 않기에 언제고 알려질 사실이지만, 지금은 아니다.

         

       안 그래도 복잡한 와중에 무림의 패배 소식이 들려온다면 그 혼란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제아무리 자신이라도 통제할 수 없게 될 터.

         

       ‘일단은 숨겨야 한다.’

         

       평생을 거짓 없이 당당하게 살아온 그였으나, 이번만큼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미 한 차례 패배한 상황에서 혼란이 무림 전체로 번지는 순간 조금이나마 남아 있는 희망마저 사라지게 될 것임을 알기에.

         

       돌아온 연합원들을 향해 철저한 함구령을 내린 그는 다음 명령을 지시했다.

         

       “…조사단을 파견하라.”

         

       현학이 퇴각을 명했다고는 하나, 아직 실낱같은 희망은 남아 있다.

         

       하여 입이 무겁고 날랜 이들로 구성한 조사단을 숭산으로 파견했다.

         

       최대한 빠르게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최소한의 물품만을 들고 나선 이들은 며칠 뒤, 무겁기 그지없는 것을 손에 가득 쥐고서 돌아왔다.

         

       그들이 들고 온 것은 인근 도시에서 급하게 구한 관이었다.

         

       “…맹주님과 방장님의 시신을 수습해 왔습니다.”

       “…….”

         

       무겁게 내려앉은 표정으로 조심스레 손을 뻗어 관을 열어보는 도굉.

         

       그곳에는 현학이 잠들어 있었다.

         

       생기 하나 없는 얼굴로 눈을 감은 채.

         

       심장에는 두 치에서 두 치 반쯤 되는 구멍이 뚫려 있었다.

         

       좁고 긴 것으로 보아 날카로운 검에 단숨에 심장을 꿰뚫린 듯하다.

         

       상흔을 통해 그는 천마의 경지를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할 수 있었다.

         

       “일격인가.”

         

       단 일격 만에 현학이 목숨을 잃었다.

         

       잠든 것처럼 보이는 온화한 표정은 그가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심장을 꿰뚫렸다는 뜻.

         

       상상도 하지 못했다.

         

       자그마치 현경의 고수를 이토록 손쉽게 죽일 수 있다고는.

         

       “괴물…, 아니, 정녕 신인가.”

         

       그는 생각했다.

         

       천마(天魔).

         

       마교도들에게 신으로 추앙받는 같은 인간인 줄 알았건만.

         

       어쩌면 진정으로 신의 경지에 다다라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그렇기에 더욱 머리가 아파졌다.

         

       천외천(天外天).

         

       감히 존재한다고 생각조차 못한 하늘 밖의 하늘에 다다른 이를 무엇으로 상대해야 하는가.

         

       “뒤를 맡긴다고 하였던가….”

         

       숭산에서 퇴각해 온 이들에게서 전해 들은 현학의 유지(遺志).

         

       그는 물끄러미 하늘을 올려다보며 쓰게 웃었다.

         

       “참으로 무거운 뜻을 남기고 가셨구려.”

         

       아무리 노력해도 이룰 수 없을 것만 같은 높은 뜻에 갇혀버린 듯한 느낌.

         

       수없이 많은 고민 속에서 숱한 날들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

         

         

       * * *

         

         

       화산에서 천마의 칼에 찔려 쓰러진 백우진은 이후 곤륜산으로 이송되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난리가 났다.

         

       그가 무사히 돌아오기를 바라며 제게 주어진 과제들을 하나둘씩 해결해 나가는 도중에 정신을 잃은 상태로 실려 온 그를 보고 놀라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으니.

         

       백우진과 함께 여정을 떠난 여인들에게서 자초지종을 모두 전해 듣고 나서야, 그들의 혼란은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물론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정말 괜찮으신 거 맞는 거겠죠.”

       “네, 괜찮아요. 칼에 찔리긴 하셨지만, 생각보다 상처 자체는 위중하지 않았어요.”

         

       설수연에게 하루에도 몇 번씩 던져지는 물음과 그에 대한 답이었다.

         

       그녀의 말대로 백우진이 입은 상처 자체는 그리 심각하지 않았다.

         

       이를 증명하듯 그녀는 천마가 떠나간 뒤 곧장 그 자리에서 그의 상처를 아물게 했으니까.

         

       “그런데 왜 깨어나지 않는 걸까요.”

       “…글쎄요.”

         

       그렇기에 이후의 대답은 궁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신체적 상태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다.

         

       외형은 말할 것도 없고, 신체 내부 또한 더없이 이상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물론 신체에 큰 충격을 받을 때 정신이 손상되어 깨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백우진이 보통 사람일 때의 경우.

         

       세계를 구한 용사다.

         

       어떤 고난과 시련이 찾아와도 극한의 정신력으로 버텨낸 이가 고작 칼에 찔렸다고 정신에 큰 충격을 받는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

         

       그러나 딱 한 가지.

         

       ‘아직도 그녀를 사랑하시는 거라면….’

         

       여전히 백우진이 그녀를 마음 깊이 사랑하고 있다면 또 모르겠다.

         

       사랑하는 이의 손에 들린 칼에 찔린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혼절한 거라면.

         

       그거라면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누구보다 동료를, 연인을 소중히 하는 사람임을 그녀는 알고 있기에.

         

       “짐작 가는 부분은…, 없나요?”

       “죄송해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차마 그러한 사실을 입에 담을 수도, 담기도 싫었기에 그녀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그저 그가 얼마 안 있어 깨어나기만을 바라며.

         

       그렇게 그가 잠들어 있는 보름 동안 너무나도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그중에서 가장 충격적인 소식은 숭산에서의 패배.

         

       그로 인해 무림의 큰 별이었던 검존 현학과 불존 태원이 전사했다는 것이었다.

         

       도굉이 빠르게 내린 함구령 덕분에 아직이기는 하나, 무림에 큰 혼란이 찾아올 것은 자명한 일.

         

       이를 해소하기 위해선 바닥까지 떨어진 중원 무림의 기세를 끌어 올릴 사람이 필요하다.

         

       도굉 혼자만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그는 삼존보다 고작 반 수에서 한 수 정도 앞서는 고수로 잘 알려져 있다.

         

       삼존 중 두 사람이 단숨에 패퇴했다는 소식을 뒤엎고 기세를 끌어올리기엔 쉽지 않다.

         

       그렇기에 백우진이 필요했다.

         

       그가 중원 전체에 이름을 드높이기 시작한 건 비교적 최근.

         

       더군다나 성장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나이 아닌가.

         

       그라면, 아니, 오직 그만이 가능하다.

         

       수렁에 빠진 무림을 구원할 새로운 기둥으로 우뚝 설 수 있는 것은.

         

       얼기설기 엮인 여러 이유로 그가 깨어나기만을 기다리는 이들이 우후죽순 늘어나고 있을 때.

         

       영웅은 자신이 필요한 순간을 절대 놓치지 않는다고 했던가.

         

       죽은 듯이 잠들어 있던 그의 두 눈이 어떠한 예고도 없이 번쩍 뜨였다.

         

       그렇게 기나긴 잠에서 깨어난 그가 처음으로 내뱉은 말은.

         

       “아, 시발 꿈!”

         

       

       …꿈과도 같은 생환을 자축하는 의미인 듯하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당분간은 새벽 연재가 이루어질 수도 있을 듯합니다.

    또 갑자기 새벽이 되어서야 글이 풀리는 기이한 현상이 오고야 말았네요…

    독자님들의 너른 양해 바랍니다.

    그럼 저는 다음 편으로 찾아 뵙겠습니다.

    읽어주셔서 매번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셔요. (_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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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a Drunkard in a Martial Arts Novel.

I Became a Drunkard in a Martial Arts Novel.

무협지 속 주정뱅이가 되었다
Score 7.6
Status: Completed Type: Author: Released: 2022 Native Language: Korean
I sent a 5,700-character message and ended up transported into a novel world once. Then after returning, I got reincarnated into a second martial arts novel by the same damn author. Only this time, I really didn’t write anyt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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