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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1

       아니, 뭔데.

        

       이건 진짜로 무슨 상황이냐고.

        

       그래, 일단 내 머리를 말려주겠다고 나선 이수아는 이해하기 쉬웠다. 전생에 남자였던 내가 여자애들이 모였을 때 어떻게 노는지는 당연히 알 수 있을 리가 없었지만, 왠지 머리 말려주고 만져주는 것은 조금 상상이 갔다. ……10대 시절에 자주 본 애니메이션에 자주 나오는 장면이라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지만 이수아를 제외한 나머지 두 명은—

        

       “……그걸 입겠다고?”

        

       나는 내 교복 셔츠 중 하나를, 마치 빼앗길 생각 없다는 듯 품에 안고 있는 신소희를 보며 물었다.

        

       “그래, 나는 이거면 충분해. 집에서도 셔츠 한 장만 입고 살거든.”

        

       ……집에서 셔츠 한 장만 입고 산다고? 그게 말이 되나?

        

       아, 물론 내가 여자 형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라 확신할 수는 없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팬티 한 장에 셔츠만 입고 있는 모습은 실내용 일상복이라는 이미지보다는, 그, 영화 속 정사신이 끝나고 여주인공이 남자친구의 셔츠를 입고 있는 장면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물론 어느 걸그룹의 멤버는 걸그룹 숙소에서 그냥 벗고 산다는 이야기도 들어본 적이 있으니, 본인이 그게 편하다면 입고 있을 수는 있다. 세상에는 사람이 수십억 명이나 있고, 당연히 그 모든 사람의 취향이 같을 수는 없으니까.

        

       그래, 신소희는 미연시 속 캐릭터다. 그림판 CG라서 제대로 된 서비스 신이 있지는 않았지만, 사고방식이 다소 미연시 히로인다워도 이상할 것은 없다……고, 나는 혼자 생각하며 지금 상황을 받아들이고자 했다.

        

       왜 여주인공이 아니라 나를 열렬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그렇게 말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제 만난 지 일주일도 되지 않은 사이에 나를 그 정도로 좋아하게 되었을 거라는 생각은 하기 힘들고…… 그러니까 그냥 본인이 주장하는 대로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야겠지.

        

       하지만, 아무리 몇 발자국 물러나서 생각해주더라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셔츠 사이즈가 도저히 맞지 않을 텐데?”

        

       그렇다.

        

       예사라도 가슴이 ‘있긴’ 했다. 아무리 그래도 미연시 캐릭터였으니, ‘배가 가슴보다 더 나왔네’같은 비극까지는 없다. 얇은 옷을 입으면 그래도 여자라는 티가 날 정도는 된다.

        

       ……어쩌면 브래지어 같은 건 필요 없을 것 같은 몸매이기도 했지만, 뭐 아무튼.

        

       그런데, 신소희는 어떠한가?

        

       그 그림판 CG로도 한눈에 알아보기 쉬운 거유였다. 아니, 어쩌면 폭유의 기준에 아슬아슬하게 닿아있을지도 모른다. 키가 크고 비율이 잘 빠져서 크게 과장되었다는 기분은 들지 않지만, 그래도 봤을 때 ‘아, 크다’라는 생각이 확실하게 떠오를 정도의 크기였다.

        

       그러니까, 예사라와는 비교하는 것이 무의미한 크기 차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가슴뿐만이 아니라 키도, 덩치도 다르다. 솔직히 컵이 같아도 신소희가 저 셔츠를 입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뭐, 조금 작아도 상관없어. 나는 이렇게 보여도 꽤 말랐거든?”

        

       아니, 마르고 말고의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뭐, 지금 와서 다른 옷을 빌려주겠다고 해도 말도 듣지 않을 것 같으니 일단은 그냥 넘어가기로 하자.

        

       위잉— 하고, 헤어드라이어가 부드러운 바람을 내쉬고 있다. 사락, 사락, 메이드인 양혜인과는 조금 다른 방식이지만, 내 머리카락이 꼬이거나 아프지 않게 빗질해주는 이수아의 손길이 기분 좋았다.

        

       나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뜨고 있으려니, 하늘이가 말을 걸어왔다.

        

       “나는 이걸로 입을게!”

        

       하늘이가 들어 보인 옷은, 토요일에 하늘이가 골라주었던 그 검은 티셔츠였다. 음…… 유하늘은 나와 키가 비슷했지만, 내가 더 말랐다. 가슴 크기는 유하늘 쪽이 확연하게 더 컸다.

        

       하지만 티셔츠는 신축성이니까, 뭐. 입어도 큰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 것이다. 기껏해야 가슴 부분이 조금 늘어나겠지.

        

       “그리고 이것도!”

        

       “…….”

        

       하지만, 이쪽은 이쪽 나름대로 문제가 있었다.

        

       하늘이가 당당하게 들어 보인 그것은, 돌돌 말린 나— 그러니까 예사라의 팬티였다.

        

       그렇다. 팬티.

        

       하늘색 팬티.

        

       “……정말로 괜찮겠어?”

        

       나는 다시 한번 물어봤다. 여자끼리 속옷을 공유하는 것이 정말로 당연한 것인가? 여자들은 친구 속옷도 빌려 입고 그러나? 나는 정말로 모르겠다.

        

       일단 남자였던 나의 기준으로는, 내 동성 친구가 속옷 빌려달라고 했으면 기겁했을 것이다. 물론 군대에서야 워낙 물자가 부족하니 훔쳐다가 입는 놈들이 있어도 이상할 것이 없지만, 사회에서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당장 24시간 편의점에만 가도 여분의 속옷을 구매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여분의 속옷을 구할 상황이 아니라고 해도 나는 당당하게 친구에게 그냥 어제 입은 거 그대로 입고 가라고 할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여자들은—

        

       하물며 이 세계는 내가 살던 평범한 세계도 아닌, 미연시 속의 세상이다. 그것도 여자를 공략 가능한. 여자끼리 사귀는 것이 어느 정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그래서 오히려 더 이상한 생각이 드는 것이다. 여자끼리 속옷을 빌려주는 것이 ‘정말로’ 평범한 것인가?

        

       봐, 신소희도 눈을 가늘게 뜨고 하늘이를 보고 있다. 게다가 신소희는 이미 편의점에서 속옷을 하나 사서 왔고.

        

       “나는 괜찮아.”

        

       하지만 저렇게 당당하게 대답하면, 또 내가 할 말이 없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본인이 그렇다는데 어쩌겠어.

        

       이쪽 세계의 상식으로는 그렇다 하고 넘길 수밖에 없다. 뭐…… 딱히 찝찝할 이유도 없고. 어차피 빨아서 입을 테니까.

        

       “사라, 머릿결 좋다. 혹시 매일 관리해?”

        

       관리…… 하겠지? 아침에 비몽사몽 하며 씻은 뒤 앉아있으면 메이드인 양혜인이 알아서 다 해주니까. 머리에 이것저것 바르는 것 같기도 하다. 저녁에는 그냥 말리고 빗기만 하지만.

        

       “아마, 그럴 거야. 내가 직접 하지는 않으니까.”

        

       “그, 그렇구나.”

        

       이수아가 조금 당황한 듯 대답했다. 하긴, 웬만큼 돈 많은 집안에도 상시 거주하는 메이드를 데려다 놓고 일을 시키는 경우는 거의 없을 테니까. 게다가 양혜인은 젊고 아름답기까지 했다. 그런 사람을 데려다가 일을 시키려면…… 아, 하긴, 양혜인 연봉은 이미 들었지, 참.

        

       사실, 회장이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다면 분명 이상한 쪽으로 상상력이 폭주했을 것이다. 뭐, 여자라고 해도 그렇고 그런 상상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나마 다행히도, 나는 회장이 이 저택에 거의 오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덕분에 그렇고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오해할 이유는 없겠네.

        

       “그런데, 너희들은 안 씻어?”

        

       내가 그렇게 물어보자, 갑자기 세 사람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서로 눈치만 본다. 혹시 아직 순서가 정해지지 않은 건가?

        

       스륵, 스륵.

        

       나는 머리 뒤를 부드럽게 쓸어내리는 감각에, 다시 한번 눈을 가늘게 뜨고 말았다.

        

       “향기 좋네. 특별히 쓰는 거라도 있니?”

        

       머리를 쓸어주던 이수아가 그렇게 물었다. 나는 빗질에 방해될까 봐 뒤를 돌아보지는 않고 대답했다.

        

       “어…… 이름은 잘 모르겠네. 내일 메이드한테 물어볼까?”

        

       “좋아. 나도 같은 걸로 쓰고 싶다. 그럼 같은 향기가 날 테니까.”

        

       “어, 그, 그래……?”

        

       보통 같은 샴푸 쓰겠다는 말을 이렇게 하나……?

        

       *

        

       “좋아, 내가 먼저 씻을게.”

        

       신소희는 그렇게 말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사실 일어나면서도 마음이 편치 못했다. 누가 봐도 사라에게 그렇고 그런 사심이 가득한 유하늘과, 지금 사라의 머리를 기분 좋게 만지고 있는 이수아를 두고 샤워실로 들어간다는 것이 마음에 걸릴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이쪽으로는 크게 관심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생각한 이수아는, 헤어드라이어를 끈 뒤에도 빗으로 사라의 머리를 계속 쓸어주고 있었다. 사라는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목뒤를 긁어주는 고양이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신소희는 보았다. 바로 조금 전에, 은근슬쩍 빗을 든 손으로 머리카락을 잡아 코앞에 가져다 대는 이수아를. 뒤를 돌아보지 않은 사라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지만.

        

       ……완전히 방심하고 있었다.

        

       다만 그런 행동을 하는 이수아의 표정에는 유하늘처럼 노골적인 감정이 드러나지는 않았다. 그래서 잠깐 머리카락의 향기를 맡는 그 행동도, 정말로 향기가 궁금해서 그렇게 행동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이수아도 예사라만큼은 아니더라도 충분히 돈 많은 집안의 아이라는 걸 감안 해야 한다. 표정을 숨기는 것 정도는 쉽게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래도 참 다행스러운 게, 저 둘도 신소희 본인 못지않은 겁쟁이라는 것이다.

        

       이수아야 감정을 숨기고 있는 상태니 잘 모르겠다고 쳐도, 유하늘은 그렇게 대놓고 좋아하는 감정을 드러내면서도 사라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지 못했다. 그저 자기 내키는 대로 신체접촉만 하고 있을 뿐이다.

        

       자신의 감정에 확신이 없다면, 신소희가 샤워하는 사이에 무슨 일이 있을 일은 없을 것이다…… 아마도.

        

       신소희는 그렇게 자신을 다독였다. 어차피 씻기는 해야 하니까. 다른 애들이 들어가고 나면 자신의 차례도 올 테니까.

        

       ……그래도 될 수 있는 한 빠르게 씻고 나오자.

        

       신소희는 이수아의 손길을 즐기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있는 사라를 보면서 생각했다.

        

       *

        

       “나 다 씻었어!”

        

       엥?

        

       쟤 들어간 지 몇 분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아니, 뭐, 빠르게 씻으려면 얼마든지 빠르게 씻을 수야 있다. 하지만, 그래도 그 최소치가 있는 법이다. 처음 쓰는 샤워실에 뭐가 어디 있는지 파악한다거나, 물의 온도가 너무 뜨겁거나 차갑다고 느낀다거나 하는 것은 둘째치고, 신소희의 머리카락은 꽤 긴 편이었다. 샴푸로 머리를 감으려면 꽤 시간이 걸릴 것 같은데.

        

       신소희가 샤워실에 들어간 이후에 별일은 없었다. 이수아는 계속 내 머리를 만지는 중이었고, 하늘이는 그런 이수아를 부럽다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부드러운 손길을 가만히 느끼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앉아있었는데, 신소희가 샤워실 문을 벌컥 열고 나온 것이다.

        

       “다 씻었—헉!”

        

       아무 생각 없이 신소희 쪽을 보다가, 나는 나도 모르게 숨을 들이쉬고 말았다.

        

       ……용케도 신소희는 나의 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랬다. ‘입고 있었다.’ 몸에 맞지도 않은 옷을.

        

       허리가 엄청 얇기라도 한 걸까. 배 부분의 단추는 그럭저럭 채웠지만, 당연히 가슴 부분은 그렇지 못했다. 가슴 바로 아래의 단추는 겨우 채우긴 했지만, 금방이라도 터져나갈 듯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다.

        

       당연히 그 위로는 잠그지도 못했다. 평소에 단추 세 개 열어두고 다닐 때보다도 더 아찔한, 뭐랄까, 좌우에서 꽉 눌려서 훨씬 더 깊어진……그, 아무튼 그 부위가 눈에 선명히 들어왔다.

        

       당연히 신장이 다르니, 셔츠는 영화 속 히로인이 입던 남주인공의 셔츠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짧다. 그러니까, 아래의 속옷은 그냥 그대로 보였다는 것이다.

        

       그나마 편의점에서 파는 속옷이라 그런지 천이 넉넉했다.

        

       “……저, 아래도, 입는 쪽이 좋지 않을까?”

        

       아무리 봐도 위쪽 속옷도 입지 않은 모양이긴 하지만, 차마 그걸 지적할 용기는 나지 않아서 그렇게 말해봤지만—

        

       “나는 원래 잘 때 아래는 안 입고 자는 편이라.”

        

       아, 그래. 남자 중에도 그냥 트렁크만 입고 자는 사람은 많지.

        

       “…….”

        

       결국, 더 이상 설득할 재료가 다 떨어진 나는, 그냥 입을 꾹 다무는 것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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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Don’t Want to Become a Villainess

I Don’t Want to Become a Villainess

Q악역 영애가 되긴 싫어
Status: Completed Author:
I fell into the single-player game 'If You Wish' and decided to struggle to avoid becoming a villainess with a terrible en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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