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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1

     

    “그대에게 승계권자의 혼약자 자리를 원하냐고 물었다.”

     

    헤이케가 나를 향해 무덤덤하게 질문했다.

     

    이야기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따라오지 못한 알베리치는 꺽꺽대며 경악하는 상태다.

     

     

    어디, 고려는 해보자.

    황제의 부군, 국서라 불리는 위치다.

     

    와이프는 제국에서 제일 높은 황제셔서 얼굴 뵙기도 힘들다.

     

    나는 숨 턱턱 막히는 궁에 백날 천날 죽을 때까지 갇혀 있겠고.

     

    매일같이 암살 걱정에 잠도 제대로 못 자겠지.

     

    비슷한 처지에 놓인 입장을 안다.

     

    감옥에 갇힌 수감자다.

     

    예, 사절하겠습니다.

     

    “외람되오나 그 자리는 저 같은 소인을 위해 준비된 것이 아니라 사려됩니다.”

     

    “흠.”

     

    헤이케는 내 대답에 미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이만한 제안에도 전혀 욕심을 보이지 않는군. 최고의 신하 아닌가.”

     

    황족이 너무 욕심이 많은 게 아닐까.

     

    “얼굴 풀게. 농담이었다. 아무리 짐이라도 혈육의 혼약자까지 뺏지는 않는다.”

     

    “전하께서 농을 즐기실 줄은 몰랐군요.”

     

    내 발언이 불만인 듯 헤이케가 입술을 끌어당겼다.

     

    “황가의 사람도 농담 정도는 한다. 이리 완고히 나오면 파고들 틈새가 없군.”

     

    그리 보일 의도까진 없었건만 지나치게 철벽을 쳐버렸다.

     

    이대로 헤이케를 돌려보내면 다시 엮일 일은 없어진다.

    조금 더 나은 제안이 생각났다.

     

    “조건에 따라 목휘궁에 페니실린을 판매하는 정도는 고려할 수 있습니다.”

     

    “그게 정말인가?”

     

    헤이케가 팔짱을 풀며 관심을 보였다.

     

    “이곳까지 옥체를 행차하신 전하를 빈손으로 돌아가시게 한다면 그만한 무례가 어디 있겠습니까.”

     

    “귀족가의 영식답게 예를 갖춘 자로군. 조건은 무엇인가?”

     

    황족은 역시나 손익계산이 철저하다. 대가와 조건부터 찾는 모습을 보니 같은 핏줄이지 싶다.

     

    챙길 건 확실하게.

    헤이케와는 비즈니스로 간다.

     

    내가 단호한 목소리로 조건을 제시했다.

     

    “목휘궁과 월광궁의 동맹입니다.”

     

    “흠.”

     

    내의원에서 내 파벌이 조용히 성장하기 위해서라도 백은 필요하다.

     

    팔켄하인을 구슬려도 아셀라가 게오르크와 적대하는 이상 그가 내 편을 들어주기는 한계가 있다.

     

    이번처럼 알베리치가 사사건건 방해해오기라도 하면 점점 내의원에서 활동하기 곤란해진다.

     

    아셀라의 동맹 허락은 안 받았지만 뭐, 설명하면 이해해 주겠지.

     

    우리와 동맹이 되면 헤이케도 게오르크와 본격적으로 충돌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둘이 전력을 소모하다가 공멸하면 월광궁에는 좋은 시나리오다.

     

    아셀라의 승률이 늘어나긴 하겠지만 뭐…

    배드엔딩 확률이 당장 변하고 있지도 않으니 나중에 생각하자.

     

    “동맹이라.”

     

    헤이케가 원하는 건 내 의료기술이다.

     

    제안을 받아들이면 장기적으로도 나와 약이나 장비 등을 거래할 수 있다.

     

    그녀가 투자라고 여긴다면 꽤 달콤한 제안이지 싶었다.

     

    헤이케가 계산을 마친 후 대답했다.

     

    “긍정적으로 고려해 보지. 아셀라와 대면하겠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앞으로 잔뜩 뜯어낼 기대에 벌써부터 방방 뜨는 기분이었다.

     

     

     

    ***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타냐와 함께 월광궁으로 귀환한다.

     

    큰 이슈가 있었으니 사무실은 클로에에게 맡기고 조금 쉬고 싶었다.

     

    클로에는 나를 걱정하다가 발작 상태에 들어가 있었는데, 그 와중에 맡긴 일은 잘 해냈다.

     

    지금은 클로에가 배양한 푸른곰팡이를 재료로 직접 연금술을 써야 페니실린을 만들 수 있다.

     

    이 페이스면 조만간 클로에에게 항생제 양산도 맡길 수 있겠다.

     

    연금술 없이 탄생하는 약제를 기대해 볼 법해진다.

     

    그런데, 월광궁에 도착하니 생각지도 못한 반가운 얼굴이 있었다.

     

    “오라버니!”

     

    “네리아?”

     

    나를 보자마자 버선발로 도당당 뛰어와서는 활짝 웃는 네리아가 그곳에 있었다.

    반가움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건강하게 지내셨어요?”

     

    “그럼. 챙겨준 재료 덕분에 잘 지냈지. 어떻게 여기에 있어?”

     

    “헤헷, 깜짝 놀라셨죠.”

     

    편지로도 기색이 전혀 없었는데 이런 귀여운 서프라이즈를 준비하다니. 제대로 성공했다.

     

    네리아의 정수리를 톡톡 두드려주니 헤실거리며 회색빛 머리칼을 살랑거린다. 답답한 궁 생활에 비로소 숨이 트이는 느낌이다.

     

    “실은 중요한 사교 파티가 있다고 해서 오게 됐어요.”

     

    얼마 후에 있을 공작 치하 파티 말이구나.

     

    “아버지도 오셨어?”

     

    “아버님은 바쁘셔서 제가 대신 왔어요. 네리아가 고트베르크 가문의 대표랍니다.”

     

    “듬직한데. 가문 체면은 네리아에게 맡길게.”

     

    “하하, 고트베르크 후작가의 얼굴마담도 젊어질 때가 되었죠!”

     

    호탕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부하 기사들과 함께 네리아가 타고 온 말과 마차를 정리하는 보리스가 있었다.

     

    고블린 샤먼에게 입었던 부상은 말끔히 나아있었다.

     

    “잘 지내셨습니까, 도련님.”

     

    “신수 훤해 보이는데, 보리스.”

     

    “덕분입죠. 단장님도 오랜만에 뵙습니다.”

     

    “음.”

     

    타냐가 보리스의 인사를 가볍게 받았다.

     

    “보리스와 기사들이 황궁까지 호위해줬어요.”

     

    “먼 길 수고했어. 2주일은 걸리지 않았어?”

     

    “궁 성벽에서만 하루 잡아먹었습니다요. 원, 황궁은 들어오는 절차도 엄청 복잡하구만요. 보안 검사를 몇 번이나 받았는지 모릅니다.”

     

    보리스가 투덜대더니 이빨을 드러내보이며 웃었다.

     

    “그보다 도련님, 단장님, 소식은 잘 들었습니다.”

     

    “어떤 소식 말인가?”

     

    “황실 비무대회의 영상을 봤어요. 타냐 단장 실력이 대단했어요.”

     

    “과찬이십니다.”

     

    네리아의 칭찬에 타냐가 겸손하게 답했다.

     

    “단장님이 계속 도련님을 언급하지 않으셨습니까. 소문이 쫙 퍼졌어요. 고트베르크의 장남이 주치의가 되어서 비무대회를 뒤집어놨다고 말이죠.”

     

    “흠, 그래?”

     

    나에게도 반가운 소식이었다. 고트베르크의 이름이 널리 퍼지면 업적을 올리는 데 유리해진다.

     

    “덕분에 후작령은 연일 축제 분위기입니다요. 내년 육성소 입학자가 벌써부터 줄을 서고 있다니까요.”

     

    “아버님도 기뻐하셨어요. 편지도 있는데 있다가 전해드릴게요.”

     

    “기대되는데. 이만 들어가서 이야기할까. 네리아, 차를 준비해줄게.”

     

    “좋아요!”

     

    황궁에 들어와 들떴는지 네리아는 이리저리 둘러보며 월광궁으로 들어섰다.

     

    “저는 마침 브루노와 교대할 시간이기도 하니 잠시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타냐는 볼일이 있는지 사라졌다.

     

    나는 네리아를 접객실로 데려가 시종에게 다과를 부탁했다.

     

    “보내주신 황금 장미 말인데요, 성장이 빨라서 금방 수확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제 날이 더워지긴 하는데 그땐 산지를 이용하면 된대요. 후작령 거리는 어떻냐면….”

     

    네리아는 그간 편지로 다 전하지 못한 쌓인 이야기를 속사포처럼 풀어냈다.

     

    그냥 뒀다간 숨이 넘어갈 것 같았기에 입에 과자를 물려주며 페이스를 조절했다.

     

    “황궁의 과자도 엄청 달콤해요!”

     

    네리아는 뺨에 과자 부스러기를 묻힌 것도 모르고 신나게 간식을 즐겼다.

     

     

    어느 정도 근황 이야기가 지나가고, 나는 네리아에게 한 가지 주제를 꺼내기로 했다.

     

    “네리아, 후작령에도 내가 만든 약에 대해 소문이 퍼졌어?”

     

    “네. 아이스…? 죄송해요, 이름이 어려워서. 치유술을 안 쓰고도 제도에 퍼진 전염병을 고친다면서요?”

     

    “맞아. 지금은 나만 만들 수 있지만 교육을 받으면 다른 치유사들도 만들 수 있어.”

     

    “정말요?”

     

    “응. 애초에 재료가 네가 보내주던 버드나무 껍질이야.”

     

    “아하… 신기해요.”

     

    네리아에게 약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헤이케의 제안을 들었을 때.

     

    약제를 양산하고 독점할 환경을 구비해준다는 이야기는 잠깐 군침이 흘러나올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그런데 잠깐, 그렇게 좋은 이야기면 내가 직접 하면 되지 않나?

    하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었다.

     

    마침 네리아도 여기 있겠다, 말머리를 살짝 띄워볼까 한다.

     

    “네리아, 사업 하나 해볼래?”

     

    “사업이요?”

     

    “그래. 치유사 육성소는 학비와 헌금 받아 운영하는 정도라 큰돈은 안 돼. 지금도 우리 가문이 엄청 부자는 아니잖아? 영지 운영에는 항상 거액의 자금이 들어가니까.”

     

    “맞아요. 저도 빨리 어른이 되어서 오라버니처럼 가문에 보탬이 되고 싶어요. 그런데 어떤 사업이요?”

     

    나는 품에서 약통을 꺼내들었다.

    종류별로 정리해놓은 샘플 통이다.

     

    “아스피린, 감기나 두통에 효과적이야. 페니실린, 추가감염을 막는 항생제. 빨간약은 바르는 항생제고. 멀미약, 소독제까지. 소화제나 화상 치료제도 제작할 예정이야.”

     

    나는 네리아가 확인할 수 있도록 수첩에 개요를 적어나가며 계획을 설명했다.

     

    “종류가 엄청 많네요.”

     

    “더 고급 기술이 필요한 약제는 나만 만들 수 있지만 여기 보여준 정도는 기술과 장비, 재료가 준비되면 양산이 가능해.”

     

    나는 네리아에게 본론을 말했다.

     

    “후작령에 제약 공장을 만들자.”

     

    “약 공장…!”

     

    관심을 보였는지 눈동자가 땡그래진다.

     

    네리아는 교육도 잘 받았고 워낙 영특하니 제대로 알아들었을 터다.

     

    어차피 나는 후작가의 가주로 전면에 나설 생각은 없다. 의사직과 후작령 운영은 병행이 어렵다.

     

    제약 사업은 앞으로 아버지의 일을 물려받을 네리아가 적극적으로 맡아줘야 한다.

     

    “아픈 사람들을 많이 도울 수 있겠어요!”

     

    지금이야 나만 만들 수 있어서 비싸게 팔지만 공장에서 제작하면 코스트가 다운된다.

     

    서민들이 치유사를 일일이 찾아야 하는 비용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부담이 줄어들게 된다.

     

    역시 네리아는 똑똑하다.

     

    “제국에는 사탕 공장도 있다고 들었어요.”

     

    “응? 있지.”

     

    “그렇게 달콤한 약도 마구마구 만들 수 있게 될까요?”

     

    “흠, 하기에 따라서?”

     

    어떤 초콜릿 공장 같은 이미지를 상상하는 모양이다.

    금방 발상이 다른 방향으로 넘어가는 게 아직 어린아이답다.

     

    “그런데 이만한 공장을 만들려면 돈이 엄청 많이 들지 않나요?”

     

    “많이 들지. 투자자 없이 우리 가문의 자본만으로 시작하려면 위험부담이 커.”

     

    가내수공업 정도 규모로 시작하면 모를까, 약제사 인력을 교육하고 첫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는 시간도 자금도 상당히 소모된다.

     

    “투자자를 구하긴 해야겠어. 어차피 몇 년 걸릴 테니 천천히 시작해 보자.”

     

    “네, 오라버니. 열심히 해볼게요!”

     

    네리아는 다짐하며 주먹을 꽉 쥐어보였다.

    진지하게 보이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오히려 상기된 볼이 빵빵해져서 귀여울 뿐이었다.

     

    네리아가 적극적으로 추진해주면 안심이다.

     

    기왕이면 내가 주치의를 은퇴했을 때 완성되어 있으면 좋겠다.

     

    얼마나 여유롭고 풍족한 삶이겠어.

     

    “잘 부탁해. 우선은 아버지 설득부터 해서 계획부터 짜보자.”

     

    “맡겨주세요! 아버님은 제가 하고 싶은 일은 늘 시켜주셔요!”

     

    기운이 넘치는 네리아. 무심코 빵빵한 볼에 간식을 잔뜩 넣어주고 싶어진다.

     

    “사탕 먹을래?”

     

    “네!”

     

    벌꿀 사탕의 포장을 까서 넘겨주니 한입에 물어버린다.

     

    당분간 심심하지는 않겠다고 생각하던 찰나, 귓가에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철그덕거리는 기사들의 발소리. 속도가 빠르다.

     

    호위기사들이 우르르 접객실로 몰려 들어와 각자 벽을 점령해 위치한다.

     

    그들이 만들어낸 길로 들어오실 분은 한 명밖에 없다.

     

    아셀라였다.

     

    “아, 황녀 전하!”

     

    네리아가 바로 아셀라를 향해 예를 갖추었지만 그녀는 인사를 무시했다.

     

    아셀라가 턱을 치켜올리고 팔짱을 낀 채 나를 매섭게 내려다본다.

     

    “공자.”

     

    “예.”

     

    그녀의 동공에서 금빛 마나가 불타오른다.

     

    이번엔 뭐가 또 불만이실까.

     

    아셀라가 싸늘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헤이케에게 청혼받았다는 게 무슨 소리야?”

     

    대체 이야기가 어떻게 와전되면 그렇게 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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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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