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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1

       몸이 스치며 풀이 바스락거리기만 해도 디안과 라이너스는 기어가는 것을 멈추고 전방의 동태를 살폈다.

       

       다행히 바람이 제법 부는 초여름인 데다 포격이 끝나고 매미들이 다시 시끄럽게 울어대는 통에 아무런 낌새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들은 다시 조용히 배를 깔고 은밀하게 포복해 두 번째 목표지점에 도달할 수 있었다.

       

       수풀을 살짝 옆으로 치우고 앞을 보니 저쪽에 좌우로 길게 늘어선 참호에서 이쪽으로 홀로 떨어져 나온 경계호가 보인다.

       

       그곳은 침투로의 종점으로 디안이 공략하기로 결정한 경계호.

       

       경계호란 본대의 참호보다 적진으로 돌출되어 적의 공격을 사전에 관측해 경보를 울리는 역할.

       

       마족 병사 두 명이 두 시간마다 교대로 근무를 하는데, 지금 근무하고 있는 마족들은 새벽 동이 막 틀 때 투입되어 이제 한 시간 후 철수하는 조.

       

       두 명의 마족이 좁은 경계호에 쪼그리고 앉아 머리를 벽에 기대고 입을 벌린 채 숙면을 취하고 있었다.

       

       역시. 지난 일주일 동안 확인한 결과 딱 이 시간대에는 모든 인원들이 여지없이 골아 떯어졌다.

       

       일대가 은엄폐가 불가한 지형이라 주로 야간에 공격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밤에는 철저하게 경계를 하고 낮에는 긴장이 느슨해지는 탓.

       

       아까의 그 마법공격도 평소의 산발적인 위협이라 여겨 다시 잠에 든 듯하다.

       

       디안이 슬쩍 뒤를 돌아보자 라이너스가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로 디안의 전투화를 툭툭 건드렸다.

       

       둘은 조용히 경계호의 바로 옆까지 기어가 좌우에서 입에 문 단도를 빼들었다.

       

       날카로운 단도가 세상 모르고 자고 있는 마족 경계병들의 입안으로 들어갔다.

       

       입으로 들어오는 차가운 금속의 감촉에 마족들이 눈을 떴다.

       

       마족과 눈을 마주친 디안이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댔다.

       

       두려움에 빠진 마족이 떨리는 눈빛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경계병들이 저항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디안은 라이너스에게 자신이 쥔 단도를 놈겼다.

       

       라이너스가 양손으로 경계병들의 입속에 들어간 단도를 쥐고 있는 동안 디안은 허리춤의 밧줄사리를 꺼내 들었다.

       

       경계들의 손목을 꼼꼼하게 묶었고 발목은 묶지 않았다.

       

       이따 후퇴할 때 또 아까처럼 신나게 달려야 하기 때문이다.

       

       이 무거운 마족놈들을 둘이서 각자 업고 뛰기에는 무리가 좀 있지.

       

       그때 갑자기 후방참호에서 경계호로 이어지는 교통호에서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려왔다.

       

       “디안…! 누가 온다…!”

       

       라이너스가 낮게 소리치자 디안이 재빨리 하늘에 뜬 해를 쳐다봤다.

       

       분명 아직 교대하려면 한 시간이나 남았고 참호 순찰조가 돌아오려면 시간이 더 걸릴 텐데? 뭐지?

       

       들려오는 마족어에서 ‘특별한’인지 ‘배급’인지를 뜻하는 단어를 포착한 디안은 곧바로 상황을 알아차렸다.

       

       저것들, 후방에서 특별배급이라도 나온 모양인데. 그걸 나눠주러 오는 거로군.

       

       이거 서둘러야겠다.

       

       “Urgh! Urgrrgh!”

       

       그때 마족 한 명이 입에 단도가 들어간 채로 소리쳤다.

       

       “Hostis est!”

       

       경계호에서의 비명을 들은 마족 병사들이 교통호를 따라 헐레벌떡 달려오기 시작했다.

       

       “젠장할!”

       

       라이너스가 당황하는 사이 디안은 주저하지 않고 손을 뻗어 소리친 마족의 입안으로 단도를 쑤셔 박았다.

       

       “Krrrrrrrr….”

       

       단도가 박힌 마족이 피를 쏟으며 죽자 디안은 곧바로 그 단도를 뽑아 다른 마족에게 휘둘렀다.

       

       “Uraaaaaaaaagh!!”

       

       디안의 단도질에 마족의 손목팔목이 떨어져 나가자 라이너스가 깜짝 놀라 디안을 쳐다봤다.

       

       “뭐하는 거야, 디안!”

       

       “살려만 가면 되잖아. 너 혼자서 이 새끼 끌고 가려면 이게 나아.”

       

       “무슨 소리야? 나 혼자라니?!”

       

       디안이 남은 밧줄사리를 라이너스에게 던졌다.

       

       “대충 지혈하고 등에 업고 뛰어. 그 사이에 나는 저것들을 막고 있을 테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너 혼자 어떻게 한다는 거냐! 같이 가자!”

       

       “마족 하나 들쳐업고 추적을 따돌릴 수 있겠냐? 빨리 가!”

       

       디안이 단도를 양손에 쥐고 교통호로 뛰어들었다.

       

       “젠장할…!”

       

        라이너스는 서둘러 밧줄로 마족의 절단면을 질끈 묶고 어깨에 들쳐멨다.

       

       “Hostium incursio est!”

       

       막 라이너스가 마족을 업고 일어나자 마족 병사들이 소리를 지르며 들이닥쳤다.

       

       디안이 양손에 든 단도를 서로 엇갈려 난자했다.

       

       딱 두 번의 칼질로 마족의 머리와 왼쪽 팔이 하늘 높이 치솟아 참호 바깥으로 떨어졌다.

       

       분수처럼 피가 폭발하자 뒤따른 마족들이 움찔하며 뒷걸음질쳤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디안이 기세를 몰아 마족들을 사정없이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저런 미친….”

       

       인간보다 훨씬 덩치가 큰 마족 병사들을 양떼 몰듯이 몰아내는 디안을 본 라이너스가 입을 떡 벌렸다.

       

       휘그르르르르르-!!

       

       그때 약속한 시간이 되자 아군 쪽에서 마법이 날아들어 경계호 후방에 작렬했다.

       

       마족을 등에 업은 라이너스가 소리쳤다.

       

       “디안! 갈 시간이야! 빨리 와!”

       

       “너 먼저 가! 뒤따라 갈 테니까!”

       

       두 번째 마법공격이 보다 가까운 곳에 떨어지자 라이너스는 이를 악물고 경계호 밖으로 나가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헉, 헉, 헉!”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라이너스는 아군 참호를 향해 전력질주했다.

       

       어깨에 멘 마족이 너무도 무거웠지만 속도를 늦췄다간 꼼짝 없이 포화에 휩쓸린다!

       

       “여기야, 여기!”

       

       참호에서 머리를 내민 아군 병사들이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라이너스가 마족과 함께 미끄러지듯 참호로 떨어지자 병사들이 그들을 받아냈다.

       

       “뭐야?! 왜 너 혼자 와?! 같이 간 녀석은?!”

       

       “예상치 못한 적병과 조우해서 전투중입니다…! 제가 데리고 오겠습니다!”

       

       “미쳤어?! 지금 저기를 가겠다고?!”

       

       막 참호 밖으로 도로 나가려는 라이너스를 병사들이 끌어내렸다.

       

       “가면 죽어!”

       

       현재 마법공격은 아까 디안과 라이너스가 기동하던 방향의 역순으로 점점 아군 참호로 가까워지는 중.

       

       게다가 퇴각하는 라이너스를 발견한 마왕군측에서도 대응사격을 했기에 이 상황에 나가는 건 곧바로 죽겠다는 뜻이나 마찬가지다.

       

       “디안! 이런 제기랄…!”

       

       라이너스는 참호벽에 주먹을 내지르며 분에 받쳐 소리쳤다. 기껏 일주일만에 전우를 잃게 되다니….

       

       “디안은 훌륭한 병사였다.”

       

       현장에 나와 있던 대대장이 라이너스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스스로를 희생해 큰 위업을 이루었지.”

       

       “디안…. 혼자 오는 게 아니었는데….”

       

       라이너스가 좌절감 짙게 중얼거리자 다른 병사들도 모두 침통한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슬픔에 잠겨서는 안 된다.”

       

       그런 병사들을 보며 대대장이 목소리를 높였다.

       

       “디안의 값진 희생을 발판 삼아 계속 앞으로….”

       

       “으아악!”

       

       그때 비명소리와 함께 아직까지도 이어지는 마법공격의 포화 속에서 무언가 참호로 날아들었다.

       

       “나아가야만… 어이쿠!”

       

       연설하던 대대장이 머리 위로 떨어진 그것과 엉켜 참호 바닥을 꼴사납게 뒹굴었다.

       

       “어휴, 하마터면 죽을뻔했네. 어라? 대대장님? 죄송합니다, 하하.”

       

       피를 뒤집어 쓰고 머리카락이 살짝 탄 디안이 낄낄 웃으며 쓰러진 대대장을 일으켜 세웠다.

       

       그 모습을 본 라이너스가 떠듬거리며 물었다.

       

       “디안…? 너, 어떻게 살아서 온 거냐…?”

       

       “죽지 않았으니 살아서 왔지. 무거워 죽겠네.”

       

       그러며 디안은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바닥에 휙 던졌다.

       

       참수한 마족의 대가리 여섯으로 밧줄로 뿔이 줄줄이 엮여 있었다.

       

       그 사이에 적의 수급까지 모두 챙겨왔다고…?

       

       “대대장님. 이 정도면 일계급 특진 정도는 되지 않겠습니까?”

       

       디안의 당돌한 질문에 대대장이 멍청한 얼굴로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라이너스는 그때 생각했다. 저놈은 미친놈이라고.

       

       입대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신병이 다짜고짜 대대장을 찾아가 포로를 잡아오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그 방법이라는 게 아군의 포격과 합을 맞춰 돌격하겠다는 정신나간 발상.

       

       그 와중에 계획이 틀어지자 복귀 여건 보장을 위해 혼자서 단도 두 자루로 마족 여섯을 막아섰다.

       

       이후 공격마법이 쏟아지는 무인지대를 뚫고 자신이 죽인 마족의 수급까지 알뜰살뜰 챙겨왔고.

       

       저건 미친놈이야….

       

       

       # # # # #

       

       

       군단 사령부에서 포로를 심문했고 현재 대치한 적군이 어느 부대인지 알아낼 수 있었다.

       

       다른 전선에서 큰 손실을 입고 상대적으로 약소국인 아보카에 전환투입된 군단으로 모든 병력을 여기 낙타령 방어에 몰아 넣어 후방은 뚫려 있는 상태.

       

       이에 제국군 8군단은 총공세를 감행했고 결국 아보카 왕국을 탈환하는 데에 성공했다.

       

       군단의 작전판단에 크게 기여한 디안과 라이너스는 아보카 왕성에서 군단장에게 나란히 훈장을 수여받고 일계급 특진의 영광을 누렸다.

       

       삼등무공훈장: 낙타령 방어전에서 전우조와 적 포로를 획득해 아군의 작전판단에 기여한 공로.

       

       “야, 라이너스.”

       

       부대로 복귀하는 마차에서 디안이 입을 열었다.

       

       “내 말대로 됐지? 나랑 같이 움직이면 좋다니까.”

       

       “네 말이 맞다.”

       

       “그러니 앞으로도 나랑 같이 다니자.”

       

       라이너스는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사특한 마왕군 무리에 대륙이 혼란에 빠지는 것을 두고만 볼 수 없어 영지를 도망쳐 제국군에 지원했다.

       

       인품만 좋고 무능한 영주의 지휘를 받는 것보다는 차라리 제국군, 거기서도 2황녀가 지휘하는 3군단에 들어가고 싶었다.

       

       그러나 라이너스는 농노의 자식이라는 출신의 문제로 가장 낙후한 8군단으로 분류되었고 곧바로 여기 바다 건너 아보카 왕국까지 오게 되었다.

       

       몇 달간 지루하게 계속되는 참호전과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야간돌격, 그리고 칼 한번 휘두르지 못하고 죽어가는 병사들.

       

       이것이 자신이 생각하던 것이 맞나 고민하던 찰나 디안을 만났고 다들 불가능하다 여기던 포로 획득에 기적적으로 성공했다.

       

       그리고 결국 아보카 왕국을 탈환했고 훈장에 일계급 특진까지.

       

       물론 낙타령에서 아보카 왕성까지의 진출 내내 디안 덕분에 몇 번이나 죽을 위기를 넘긴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목숨을 열 개라도 쌓아둔 것처럼 행동하는 디안은 마치 미래를 내다 보는 것만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전쟁터에서 늘 저렇게 여유로울 수가 없다. 그리고 마왕성에 대해서도.

       

       “아마 너랑 나라면 마왕성까지도 갈 수 있을 거야.”

       

       “마왕성이라….”

       

       마왕성을 언급할 때의 디안의 눈은 너무나도 확신에 가득차서 늘 신중한 라이너스조차 왠지 디안과 함께라면 가능할 것만 같다는 허황된 망상을 품게 된다.

       

       “그런데… 궁금한 게 있는데. 왜 하필 나지? 나보다 더 뛰어난 병사들도 많은데.”

       

       “아, 그거 말이지.”

       

       라이너스의 물음에 디안이 웃었다.

       

       “네가 이 세상의 주인공이기 때문이야.”

       

       “뭐? 그게 무슨 뜻이냐?”

       

       “설명해 봐야 몰라. 여튼, 할 거냐. 말 거냐? 우리 둘이면 이 세상에 못할 일이 하나도 없어. 마왕 새끼를 반으로 썰어버리고 이 전쟁을 끝내자고.”

       

       디안의 확고한 눈빛을 본 라이너스는 결국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같이 하자, 디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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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tired Supporting Character Wants To Live A Quiet Life

The Retired Supporting Character Wants To Live A Quiet Life

The Retired Supporting Character Wants to Live Quietly 은퇴한 조력캐는 조용히 살고 싶다
Score 3.9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stead of causing chaos with my knowledge of the original work, I assisted the protagonist.

I successfully completed the story and now planned to retire and live peacefully.

However, it seems the protagonist still needs my help.

An academy professor? That’s nothing much.

But why is the state of the academy so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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