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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15

        

         

       진성은 직설적으로 말했다.

       자신을 보디가드로 쓰려고 하는 이 조항들부터 삭제하자고 말이다.

         

       “흐음. 과연.”

         

       루카스는 그런 진성의 말에 당황하지 않고 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더니 군말 없이 그 부분을 슥슥 삭제하고는 다른 문장으로 갈아 끼웠다.

       진성이 자신의 목숨을 구해야 하는 의무를 만드는 대신에, 고용주인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거나 재산에 피해를 주지 않도록 하는 조항들로 말이다.

         

       “돈 많은(loaded) 집안에서 교육받았다고 하더니, 이런 것도 확실히 잘 알고 있군.”

         

       루카스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진성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진성에 대해 뒷조사했음을 전혀 숨기지 않는 말이었으며, 동시에 자신이 진성의 능력을 시험해보고자 일부러 이러한 조항들을 끼워 넣었음을 은근히 암시하는 말이기도 했다.

         

       진성은 그러한 루카스의 반응에 그저 방긋 웃기만 했다.

       불쾌감을 표시하지도 않았고, 마찬가지로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지도 않았다.

       기회를 본 승냥이 같은 느낌을 들게 하지도 않았고, 먹이를 노리는 뱀과 같은 느낌을 풍기지도 않았다.

         

       그저 웃었다.

       평온하게 말이다.

         

       딱히 기분 나쁠 일도 아니었고, 크게 신경 쓸 일이 아니기도 했고.

         

       진성의 눈앞에 있는 남자는 월 스트리트의 늑대 중 한 명이었다.

       정확한 정체는 알 수가 없으나, 하는 말이나 행색을 보아하면 평범한 사람은 아닐 터.

       그런 사람이 이런 얕은수를 썼다는 것은…. 그냥 떠보기에 불과한 수준일 가능성이 컸다.

         

       어째서 떠보기에 불과하다고 단정할 수 있는 것이냐고?

         

       간단하다.

       제대로 남을 등쳐먹으려 했다면, 고작 이렇게 훑어보는 것만으로 눈치챌 정도로 이해하기 쉽게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았을 테니까.

       물론 수정 전 계약서가 ‘교묘하다’라고 표현하기에 부족함이 없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말 작정하고 만든 것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정말 작정하고 만든 계약서는…끔찍하지.’

         

       진짜 작정한 계약서를 본 적이 있는가?

       진성은 보았다.

       그것도 꽤 많이 보았다.

         

       법 전문가들이 악마의 혓바닥으로 쓴 것 같은 그 끔찍한 계약서들은, 기기묘묘한 단어들로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고, 일반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단어나 문장들을 잔뜩 집어넣고, 그러면서도 그것이 법리적으로는 명확하게 해석되게 만든다. 게다가 이렇게 문장 몇 개만 읽어보고 바로 파악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 수십에서 수백 개의 조항이 서로 얽히고설키며 함정을 만드는 모양새를 만든다.

       수많은 조항을 제대로 이해해도 간신히 윤곽만 보일 정도로 설계된 그 미친 계약서들은…. 수많은 이들이 치를 떨게 했던 끔찍한 물건이었다.

         

       ‘그 마귀 같은 계약서가 어디서부터 유행했더라….’

         

       그 시작이 어디인지는 잘은 모르겠다.

       아마 재계일 가능성이 클 것이다.

       계약을 그렇게 세련되고 끔찍한 형태로 다룰만한 족속들은 그쪽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그 악마가 썼다고 해도 의심하지 않을 것 같은 계약서가 사람들에게 퍼지게 되고, 유행을 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유행을 타기 시작하면서 그 설계가 파악이 되고, 그 설계를 바탕으로 사람들이 보강해가며 점점 그 계약서는 악랄하게 변해갔다.

       그리고 마침내 수많은 곳을 거쳐서 용병 업계에까지 그 계약서가 나타나게 되었을 때는, 어지간한 인간들은 합법적으로 등쳐먹을 수 있는 괴물로 탈바꿈이 되어 있었다.

         

       그 악마 같은 계약서를 처음 본 그의 동료는 ‘이 계약서를 찬찬히 살펴보면 영혼을 팔겠다는 조항이 분명히 들어 있을 거야. 분명히 그럴 거라고, 제기랄!’이라고 말하며 혐오감을 숨기지 않았다.

         

       ‘물론 그 유행은 금방 끝났지만.’

         

       하지만 이 대단한 계약서는 금방 유행이 끝났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이딴 장난질을 친 놈들이 죽어 나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계약서를 쓴 당사자들 간의 칼부림이나 총격전은 예삿일이었고, 무력 단체 간에 이런 장난을 벌였을 경우 피를 피로 씻는 전투가 연달아 벌어졌다. 기업 간에는 능력자를 고용해서 서로의 모가지를 자르고 다니는 싸움이 이어졌고, 돈을 가진 이들은 청부 업자를 고용해서 상대방을 죽이라고 의뢰를 넣기도 했다.

         

       용병?

       말할 필요도 없다.

       아무리 신뢰가 중요하다고는 해도, 대놓고 사람 등쳐먹겠다고 계약서를 작성해놓고 노예처럼 부려 먹으려 하는 것을 참을 이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게다가 용병에 투신한 이들 중에 인생 막장인 이들이 많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그러했다.

       그렇게 용병들에게 허튼짓하려고 했던 이들은 실수나 사고를 가장해서 죽어 나갔다.

       혹은 의문의 돌연사를 당하기도 했고.

         

       그렇게 많은 이들이 ‘지옥의 계약서’라고 부르는 악랄한 계약서의 유행은 순식간에 끝났다.

       계약은 상호의 이해와 존중, 믿음과 신뢰가 중요하다는 교훈을 남긴 채….

         

       그런 것을 보고 겪었던 진성이니만큼, 루카스의 계약서는 딱히 특별한 것이 없었다.

       그냥 교묘하긴 하지만 대놓고 숨기지는 않은 수준이었으며, 마치 알아채기라도 하라는 듯 곳곳에 힌트를 과할 정도로 남기기까지 한…. 그를 테스트해보겠다는 의도가 묻어나오는 수준이었다.

         

       “더 수정할 것이 있나?”

         

       “예.”

         

       진성은 루카스의 이 ‘테스트’에 기꺼이 응해주었다.

       그에게 불리하게 돌아갈 수 있는 부분을 수정하고, 함정처럼 보이는 부분을 삭제하고, 진성이 손해를 볼 수 있는 부분을 서로 합의하고 조건을 바꾸고….

         

       그렇게 이야기를 이어가면 갈수록, 루카스의 미소는 짙어졌다.

       마치 자신이 낸 문제를 모두 맞히는 학생이 대견스럽다는 듯 바라보는 과외선생처럼.

       혹은, 유망주에게 어마어마한 재능이 있음을 확인하고 기뻐하는 야구 감독처럼.

         

       루카스의 얼굴에 점점 기쁨이 감돌고, 그 기쁨은….

         

       “흐. 좋아. 훌륭한 엘리트로군.”

         

       마침내 구체화하여 계약서의 가장 밑부분에 형상화되기에 이르렀다.

         

       “—엘리트는, 존중받아 마땅하지.”

         

       루카스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홀로그램 계약서의 가장 밑에 글귀를 적어넣었다.

       그 글귀는 가장 중요한 것이었으며, 그런데도 아직 그들 사이에서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은 것이었다.

         

       보수.

         

       진성이 의뢰에 성공하면 받게 되는 것.

       그것이 계약서의 가장 밑부분에 적히기 시작했다.

         

       “내가 의뢰한 게 총 3개였지. 일단 의뢰 하나에 성공보수는 40만 달러.”

         

       의뢰 하나에 40만 달러.

       한화 약 5억.

         

       세 개를 다 성공하면 15억이니, 꽤 높은 금액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진짜 메인은 이것이 아니었다.

       그 아래에 쓰이는 것들이었다.

         

       “그리고…미국으로 온 걸 보니 큰물에서 놀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그걸 도와주지. 확실하게, 내 이름을 걸고 소개해주겠다는 이야기야.”

         

       인맥.

       그것도 그냥 인맥이 아닌, 황금 인맥이다.

         

       “일단 하버드 매니지먼트 컴퍼니(Harvard Management Company). 그쪽에 나와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 몇 있지. 의뢰를 성공적으로 마치면 그들과 연결해주겠다. 그리고 어느 정도 성과만 보인다면, 투자팀 정도는 연결해줄 수 있고.”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하버드 매니지먼트 컴퍼니 아래로 사람 이름이 잔뜩 쓰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치 쪽과의 연결도 필요하겠지? 대부분 공화당 쪽이기는 하지만…꽤 쓸만할 거야. 아, 남부 쪽의 정치인들은 좀 뺐네. 그쪽 딕시(Dixie)놈들은 피부색이니 혈통이니 따지는 놈들이 많아서 말이야. 그쪽과 연결해줘도 인종차별을 당할 가능성이 있어.”

         

       그는 그렇게 말하며 계속해서 글을 적어 내려갔다.

         

       “연예계 쪽에도 관심이 있나? 돈 다루는 놈들만큼이나 미신에 심취해 있는 작자들이 가득한 동네지. 돈도 많이 벌고, 징검다리로 삼기에도 아주 좋아. 그쪽에서 나름 괜찮은 친구들과 연결해주지. 아, 여기서 괜찮다는 건 약 안 하고 범죄 안 하는 작자들이란 이야기야. 성격 더럽거나 사생활 지저분하다거나 하는 건 내 소관이 아니거든.”

       

       연예계 쪽 인사들의 이름이 적히기도 하고.

         

       “내가 듣기론 불과 관련된 기가 막힌 주술을 썼다지? 화염주술? 뭐 그쪽인 거 같은데…. 철강 쪽 사업하는 사람들하고도 연결해주지. 불 다루고, 물과 가까이 있고. 게다가 배와 관련된 놈들답게 미신에 아주 환장하는 족속들이거든. 좋은 장사를 할 수 있을 거야. 아, 물론 굴뚝 가지고 장사하는 놈들이랑 내가 엄청나게 친하지는 않아서 대단한 사람은 소개해줄 수는 없지만…. 뭐, 영업하기에는 나쁘지 않을 거야.”

         

       철강 쪽 대기업의 임원 이름이 적히기도 했다.

         

       “그리고…. 흠. 뭐, 펀드 들 거면 말하게. 내가 잘 해줄 테니까.”

         

       그리고 마지막은 영업 비스름한 멘트와 함께.

       그렇게 설명은 끝났다.

         

       “어때, 나쁘지 않은 보상이라 생각하는데. 받아들이겠나?”

         

       진성은 루카스의 물음에 방긋 웃으며 답했다.

         

       “과연. 나쁘지 않은 보상이로군요.”

         

       “그래?”

         

       루카스는 스마트폰을 꺼낸 뒤 크리스털 팔에 가져갔다. 그러자 스마트폰에 다운로드 표시가 뜨면서 계약서의 내용이 그대로 저장이 되었고, 스마트폰으로 이동한 계약서는 이제 자기 일을 다 했다는 듯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렸다.

         

       “그럼 계약하러 가지. 법적 효력이 있는 녀석으로 말이야.”

         

         

         

         

        * * *

         

         

         

       계약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자리를 이동한 진성과 루카스는 법적 효력이 있는 계약서를 작성하였고, 서로의 신뢰를 굳게 다짐하기 위해 악수했다.

         

       그리고, 악수가 끝나고 둘이 나란히 건물 밖으로 나온 뒤 헤어지기 전.

         

       “그런데 말이야.”

         

       루카스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아무것도 안 물어보나?”

         

       확신이 담긴 물음이었다.

         

       “궁금하지도 않나?”

         

       어째서 그에게 의뢰를 맡긴 것인지.

       어째서 그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는 것인지.

       어째서 갓 성인이 된 사람에게 이런 높은 보상을 주는 것인지.

       어째서….

       어째서….

       …

       …

       …

         

       수많은 질문이, 의문이 들어야 정상이다.

       그리고 그걸 물어야만 하는데.

         

       어째서 이 젊은 주술사는 그것을 묻지 않는 것일까?

         

       루카스는 그 점에 의문이 들어 진성에게 질문을 하였고.

         

       그리하여 젊은 주술사가 답하였다.

         

       “물어본다 한들 의미가 없고, 의미가 있는 것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림자를 손으로 만지는 것만 같은, 그런 모호한 답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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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haman Desires Transcendence

The Shaman Desires Transcendence

주술사는 초월을 원한다
Status: Ongoing Author:
The shaman realized he had gained life once more. This time, he would live a life solely for transcendence, through shamanism al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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