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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16

   노을이 하늘을 주홍빛으로 물들일 무렵. 아카데미 내부의 혼란은 거의 완벽하게 진화되었다.

   

   목숨을 잃은 이 하나 없고. 물질적인 피해도 그리 크지 않고. 오염되었던 결계도 멀쩡히 돌아온데다가. 아카데미 각지에 남아 있던 악신의 기운들 또한 루시가 펼친 기적으로 사라져버렸으니. 더 이상 혼란을 만들려 해도 혼란을 만들 여지가 존재치 않았다.

   

   “수고하셨습니다. 성녀님.”

   

   여러 절차적인 일이 끝나고 주교가 고개를 숙이자 페이비가 입꼬리를 살짝 들었다.

   

   “수고하신 건 오히려 주교님과 다른 사제 분들이죠. 제가 한 일이 무어가 있습니까.”

   “주신의 대리인으로써 공허의 악신을 상대하지 않으셨습니까. 그 때문에 힘들고 피곤하실 터인데도 쉬지 않고 움직이며 다른 이들을 안심시켜 주시고, 1왕비님과 함께 움직이시며 여러 뒤처리까지 하셨는데 어찌 한 일이 없다 할 수 있을까요.”

   

   페이비가 겸손을 부린다 생각한 주교가 느슨한 웃음과 함께 말을 이었지만 페이비는 차마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그녀는 오늘 자신이 한 일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악신의 계획을 눈치 챈 건 루시. 그를 대비하기 위해 이런저런 것들을 준비한 것도 루시. 지하에서 모든 변수를 제거해 준 것도 루시. 그 후 악신의 기운을 모두 정화해 준 것도 루시.

   

   페이비 자신이 한 일은 그저 주신의 사도가 만들어낸 무대 위에서 춤을 춘 것 뿐이다.

   

   각본가의 목소리를 믿고 그 위에서 필사적으로 몸을 움직인 것 뿐이란 말이다.

   

   그런데 정작 주목받아야 할 사람은 아무런 시선도 받지 못하고 주목 받을 이유가 없는 자신은 모든 공적을 얻게 되었으니 어찌 페이비가 고갤 주억거릴 수 있겠는가.

   

   “맞습니다. 성녀님. 성녀님이 아니었더라면 얼마나 많은 희생자가 생겨났겠습니까.”

   “아카데미 내부 뿐만 아니라 외부의 사람들도 위험했을 겁니다.”

   “…어쩌면 저희도.”

   “저희의 무력함 탓에 생겨났을 죄를 없애주심은 물론이고 저희의 목숨을 구원해주시기까지 하신 것이 성녀님입니다. 그러니 제발 저희의 감사를 받아주십시오.”

   

   페이비의 복잡한 표정을 본 사제들은 그녀의 고결함을 칭송하며 감사의 말을 내뱉었다.

   

   성녀께서 자신들의 마음을 알아주길 바라며 웃음을 지었다. 그것이 페이비의 마음을 더 복잡하게 만든다는 것조차도 모르는 채.

   

   “아닙니다. 여러분들.”

   

   저도 알고 있습니다.

   

   알른 영애님께서 전면에 나서서는 안 된다는 것을.

   

   따스함보다 차가움이 많은 주신 교회에 사도의 정체가 들킨다면 크나큰 파란이 일어날 것임을.

   

   영애님께서 분란 속에서 생겨날 수많은 희생을 바라지 않음을.

   

   그렇기에 제게 모든 공적을 넘기신다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저는 정말.”

   

   허나 마음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제가 이루지도 않은 공적으로 다른 분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해 듣는 것도.

   

   본래 찬사 받아야 할 사람은 아무런 감사도 전해 듣지 못한 채 악의적인 소문 아래에서 날선 눈으로 바라봐져야 하는 것도.

   

   “아무…”

   

   이것 또한 시련일까요. 주신께서 저의 마음속에 고난을 주시는 걸까요. 이를 극복한다면 무언가가 달라질까요.

   

   “성녀님. 폐문시간입니다.”

   

   말을 망설이던 페이비의 뒤에서 아서와 프레이가 모습을 드러낸다. 평소 페이비와 가깝게 지내던 두 사람의 모습에 주교와 사제들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성녀님의 친구분들. 저희가 무능하여 시간을 오래 끌고 말았군요.”

   “아닙니다. 주교님. 사제님들. 여러분들께서 목숨을 걸고 거리의 사람들을 지켰다는 걸 아는데 어찌 거기에 무능이란 단어가 끼어들 수 있겠습니까.”

   

   후일 아카데미 측과 왕국 측에서 감사인사를 전하러 올 것 같단 이야기를 전한 아서는 이런저런 말을 잇다가 페이비를 데리고서 교회에서 벗어났다.

   

   “왕자님. 영애님께서는?”

   “고로롱대는 소리를 내면서 자고 있습니다. 힘을 너무 많이 써서 지친 거겠죠.”

   “이상은 없나요?”

   “여러 대단하신 분들이 말씀하시길 멀쩡하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자신의 무능을 루시에게 미뤘음은 물론이고 그녀가 벌인 기적의 공적까지 빼앗아버린 페이비는 죄책감 속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옆에서 그녀의 축 처진 어깨를 바라보던 아서는 잠시 생각을 하다 조심스레 목소리를 냈다.

   “성녀님.”

   “예.”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게 주제 넘는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만 감사 정도는 받아주셔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말없이 아서의 뒤를 따르던 페이비는 툭하고 발을 멈추고는 느릿하게 고갤 들었다.

   

   노을 아래에 선 아서의 그림자가 저 뒤까지 길게 이어진 것이 그녀의 눈에 들어온다.

   

   “왜 감사를 불편하게 여기시는 지 대충 짐작은 합니다만 당신께서 마음의 짐을 키우면 다른 이들의 짐도 더 커지지 않겠습니까.”

   “알고는 있습니다. 다만.”

   “혹시 성녀님께서는 루시 알른의 얼굴이 시뻘개져서 도망치는 것을 보고 싶으신 겁니까?”

   “…예?”

   “그거라면 저도 보고 싶긴 합니다. 칭찬에 면역이 없는 그 녀석이 쩔쩔매는 꼴은 꽤 웃기거든요.”

   “나도 보고 싶어. 루시가 귀엽잖아.”

   

   공감한다는 듯 고갤 주억거리는 두 사람의 모습에 페이비의 양 볼이 노을빛에 동화된다.

   

   “그. 그런 이야기가.”

   “보기 싫으십니까?”

   “아니. 저.”

   “정말로?”

   “보고 싶…긴 하지만 그것과 제가 하고자 하는 말은 전혀 다른 이야기잖습니까!”

   

   당황한 페이비가 목소리를 높이자 아서가 어깨를 으쓱인다.

   

   “성녀님. 루시 알른은 저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아는 녀석입니다. 제가 잊고 있었던 어머님의 유언을 기억할만큼.”

   

   루시가 지닌 지혜는 인간의 것보다는 신의 것에 더 가까울 것이라 아서가 중얼거리자 페이비가 눈을 끔뻑이고 프레이가 고갤 갸웃한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두 사람의 반응에 피식 웃은 아서는 등을 돌리면서 말을 이었다.

   

   “허나 그 녀석도 모르는 게 있습니다. 태양이 제 아무리 구름 속에 숨으려 해도 결국 구름은 걷히기 마련이란 것.”

   

   굳이 누군가 나서서 루시가 대단하다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 그녀가 자신을 숨기기 위해 노력한다 한들 결국 지상에 머무는 자들은 그녀의 빛을 마주하게 될 테니.

   

   “그 때까진 부끄럼 많은 태양이 얼굴을 감추게 내버려둬도 되지 않겠습니까? 그 날이 오면 숨고 싶어도 숨을 수 없게 될 텐데요.”

   

   가만 아서의 말을 듣던 페이비는 노을이 저물고 찾아온 어둠 속에 그림자가 묻힌 것을 보고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과연 그 날까지 열심히 참아야겠네요. 그 분을 위해서.”

   

   페이비가 목소릴 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거리의 가로등이 빛을 내며 어둠을 걷어낸다. 밝은 빛 아래에 자리한 아서의 얼굴에는 느슨한 미소가 자리하고 있었다.

   

   “많은 걸 내려놓으셨군요. 왕자님.”

   “누구 덕에 소중한 추억을 떠올렸거든요.”

   “그런가요. 좋으면서도 곤란한 일입니다.”

   “…예?”

   “영애님은 한 분이지 않습니까.”

   

   가로등 아래에서 입을 헤 벌리고 있던 아서는 뒤늦게 페이비가 짓궂은 농을 던졌단 걸 눈치채고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기 위해 뒤 편으로 물러섰다.

   

   수줍은 아서의 반응에 쿡쿡 웃던 페이비는 허접 왕자님이라며 아서를 놀리던 프레이 쪽으로 고갤 돌렸다.

   

   “켄트 영애. 지금 조이는 무얼 하고 있는지 아시나요?”

   “교수님한테 붙잡혀있어. 교수님 눈에 동공이 안 보여서 무서웠어.”

   “으음. 그럼 오늘 보기는 힘들겠네요.”

   

   *

   

   피부를 스치는 따스한 봄바람을 타고 누군가의 노랫소리가 전해진다.

   

   잘 부른다고 하기는 애매하지만 듣기에 편안하고 가만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마음이 안정되는 그런 노랫소리가.

   

   녹음을 해두고 잠자리에 들 때 틀면 좋은 꿈을 꿀 수 있을 듯한 노래에 집중하던 나는 문득 얼굴 근처에 빗방울이 떨어진 것을 느끼고 눈을 떴다.

   

   검은 색으로 물들어있던 천장을 마주한 나는 그제서야 내가 방금 전까지 잠들어있었단 사실을 깨달았다.

   

   이상하다. 내가 뭐 하다 잠들었지? 나 분명.

   

   아. 생각났다. 정화의 기적을 펼치고 나서 그대로 뻗었구나.

   

   정화의 기적을 펼치는 게 진짜 힘들긴 했어. 신성의 양이라면 누구한테도 밀리지 않는 게 나인데 진짜 신성이 고갈되서 죽겠단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니까.

   

   그래도 꼴에 기적은 기적이라 일은 잘 해결된 것 같지만.

   

   지친 몸을 억지로 일으킨 나는 얼굴을 비비다가 내 눈가에 눈물이 맺혀있단 걸 눈치 챘다.

   

   뭐지? 무슨 슬픈 꿈이라도 꾼 건가? 내가 멀쩡한 어투로 말하는 꿈을 꾸다가 이루어질 수 없음을 깨닫고 오열한 건가?

   

   <일어났느냐? 몸은 어떻느냐.>

   ‘완전 멀쩡해요.’

   <하아아. 다행이구나. 정말 육신도 강건한 아이가 무슨 일이 일어날 때마다 픽픽 쓰러져대니 그 때마다 내 심장도 같이 떨어지는 느낌이야.>

   ‘떨어질 심장 없으시잖아요?’

   <…비유가 그렇다는 거지! 비유가!>

   

   할아버지가 투덜거리는 소리를 배경삼아 기지개를 핀 나는 어둠 속에서 주변을 둘러봤다.

   

   잠든 나를 간호하다 눈을 감은 듯 침대 머리맡에 엎드려 자고 있는 에린. 창가에서 골골 거리고 있는 얼빠여우. 문 바깥에서 느껴지는 칼의 기척.

   

   모두가 곤히 잠든 밤의 고요함이 모든 일이 끝났음을 알려준다.

   

   흐으으. 온갖 변수가 한가득이었지만 어떻게든 잘 넘겼네.

   

   다행이긴 한데 다음부터는 참교육이고 나발이고 안전한 방식으로 하자.

   

   내 욕심대로 움직이려니까 너무 피곤해.

   

   그냥 땡깡 피워서 베네딕을 데리고 왔다면 이만큼 고생할 일도 없었을 거 아냐.

   

   개인적인 욕심 때문에 바보짓을 했단 생각을 하며 투덜거리고 있으려니 내 귓가에 알림음이 닿았다.

   

   – 띠링.

   

   그걸 따라 고갤 들자 내 앞에 푸른색 창이 떠올라 있었다. 그건 내가 확인하려다 아래로 내린 퀘스트의 내용이었다.

   

   [요정들은 언제까지 잠을 자는 걸까.]

   

   단언컨대 그 푸른 창에 적혀 있는 것은 내 생에 처음으로 보는 퀘스트였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Ilham Senjaya님 보러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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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g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Mesugak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메스가키 탱커는 참교육 당하지 않는다.
Score 9.2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2 Native Language: Korean
“You sloppy orc~ You can’t take down a girl?” He became the Mesugaki character in the Academy game. But the taunt works too w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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