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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19

       

       

       

       언제인지 모를 기억 속.

       

       유달리 붉은 빛이 흐른다. 축축한 습기가 가득했고, 몸은 서리가 낄 만큼 추웠다.

       덜덜 떨리는 육신을 비롯해 딱딱해진 호흡이 온몸에 감돌았다.

       

       그런 불편한 감각 속에서.

       

       -나쁘지 않구나.

       

       목소리가 들렸다.

       

       알 수 없는 웃음이 섞인 서늘한 목소리.

       

       그 안에서 느껴지는 비릿한 혈향. 무슨 영문인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바짝 숙인 고개는 들릴 생각을 안 한다.

       

       마치 감히 얼굴을 봐선 안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상태로 몸이 굳은 듯 바닥만을 보고 있을 때. 

       또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너로 하면 되겠어. 뇌천의 아이야.

       

       목 사이로 손길이 느껴진다.

       

       -너는 이제부터 나의 종이다. 달가워하거라.

       

       끌끌.

       

       차게 웃는 소리와 함께, 간신히 유지하던 정신이 끊어졌다.

       그리고.

       

       감았던 눈이 떠졌다.

       

       “…!….”

       

       벌떡.

       

       마른 노인이 정신을 차림과 동시에 몸을 일으켰다. 

       비틀거리듯 급히 몸을 일으키고는 주변을 살핀다.

       

       “…이곳은…?”

       

       흠칫.

       

       낯선 공간에 당황하려던 찰나, 몰려오는 고통에 머리를 움켜잡았다.

       

       뭐지?

       

       어째서 이리 머리가 아픈 것일까. 

       억지로 침음을 참아내지만, 그조차 쉽지 않았다.

       

       “끄으….”

       

       노인이 고통을 참아내고 있으니, 그제야 주변에 있던 이들이 반응했다.

       

       “천존께서 깨어나셨다…!”

       “…가주님에게 보고 올리겠습니다!”

       “의원! 의원을 모셔와라!”

       

       시끄럽다.

       

       노인은 웅성거리는 주변을 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평소였다면 별로 크지 않을 소리거늘.

       어째서인지 유달리 크게 느껴진다.

       

       “후우…후우….”

       

       숨을 몰아쉬었다.

       고통은 여전하다. 

       

       머리가 깨질 것만 같은 상황 속에서, 천존은 의문을 품어야 했다.

       

       이곳이 어디인가. 

       자신은 왜 이곳에 있는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천존은 머리를 쥐어 잡으며 눈을 감았다.

        

       기억이 군데군데 구멍이 뚫린 듯 비어있음이 느껴진다.

       이게 어찌 된 영문일까. 

       

       천존이 고통과 함께 의문을 품을 무렵.

       

       “깨어나셨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존이 목소리에 간신히 고개를 들어 위를 살폈다.

       

       “그리 꼴값을 떠시더니. 쯧쯧. 꼴이 말이 아니시오.”

       “…자네.”

       

       힘들어하는 천존을, 한심한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또 다른 노인.

       그건 바로.

       

       신의였다.

       

       

       

       

       

       **************

       

       

       

       

       

       나히에게 선택권이 없음을 인지시킨 직후.

       

       벌벌 떠는 그녀를 두고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마음 같아선 그 자리에서 보석을 먹이고 싶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좀 여의찮아.’

       

       그저 상황을 알려줬을 뿐이다. 정확히 인지하고 있으라고. 너는 할 일이 있다고.

       

       ‘그대로 버리긴 아까우니까 말이야.’

       

       당덕의 역할은 정해져 있다. 

       지금은 곁에 두고 길들이는 데에 집중하고 있다지만, 나중에 가선 놈도 할 일이 있었다.

       

       이에 비교해 나히는 별로 쓸모가 없는 편이다.

       

       정보원으로 쓰자면 쓸 수 있겠지만, 당문이 이꼴이 난 시점이라면 구태여 쓸 필요도 없었다.

       

       그럼 어디다 사용해야 할까.

       

       ‘굳이 사용할 필요가 없지.’

       

       별로 필요가 없다.

       

       수준? 나히의 경지는 절정. 조금 더 나아가면 완숙한 절정이긴 할 터이나, 그 정도는 중원에 널리고 널렸다.

       

       ‘널린…정도는 아니다만, 많기야 하겠지.’

       

       암객이라는 점을 이용하면, 더 나을 수 있으나.

       굳이 어딘가 쓸모를 찾자면, 당장은 안 떠오른다.

       

       ‘이미 그쪽 용도로 잡아 쓸 놈을 생각해놨으니까.’

       

       나히가 아니더라도 생각해둔 놈이 있었기에, 구태여 나히까지 둘 필요는 없었다.

       

       그런 만큼, 원래였다면….

       

       ‘적당히 쓰고 없앨 생각이었는데.’

       

       애당초 나히를 오래 살려둘 예정이 아니었다. 

       당문에서의 일정이 끝남과 동시에 치워버릴 예정이었다는 뜻이다.

       

       굳이 내가 죽이지 않더라도, 큰 역할을 쥐여줄 생각이 없었다는 뜻인데.

       

       ‘이렇게 되면 나름 쓸모가 있지.’

       

       여전히 손에 달그락거리는 보석.

       이걸 써먹을 실험할 용도. 

       

       ‘잘 되면 좋고 망하면 어쩔 수 없고.’

       

       나히가 내 도움을 받아 이 보석을 잘 흡수한다면, 그리하여 쓰임새가 생긴다면 좋은 일.

       실험을 실패하게 된다 하더라도. 상관 없는 상태.

       

       그게 지금 나히의 입장이었다.

       

       ‘성공을 한다고 해도, 이후를 봐야 하는데.’

       

       경지가 오른다면 어디까지 오르고.

       육체가 변한다면 어디까지 변할까. 그걸 봐야 했다.

       

       ‘하려고 보니 좀 귀찮네.’

       

       이런 걸 하나하나 봐야 하는 상황. 그게 못내 귀찮았다.

       그냥 내가 먹고 끝낼까?

       기운이 늘어나면 이걸 수습하기 위해 일이 늘어나지만, 그거야 휴식 시간을 줄이면 그만이었다.

       

       마음 같아선 정말 그러고 싶은데.

       

       “아, 짜증나네 진짜.”

       

       마냥 그럴 수도 없다는 게 거슬렸다.

       내가 이러는 이유가 있었다.

       

       “왜 이딴 걸 발견해서.”

       

       보석 말고도 품 안에 거치적거리는 게 한 가지 더 있었다.

       일장로를 마기로 심문해 얻어낸 또 다른 물건.

       

       부시럭.

       

       품 안에 손을 넣어 종이를 끄집어냈다.

       

       그리 크지도 두껍지도 않은 낡은 서찰이었는데. 

       

       이 안에 담긴 내용이 문제였다.

       

       “…음.”

       

       천무지체 탄생계획. 이를 위해 쓰인 수십 년의 시간, 그걸 이용해 찾아낸 가장 알맞은 재료와 비율.

       

       정수에 들어갈 사용법까지.

       

       그 모든 설명이 적힌 비전, 그게 지금 내 손안에 들려 있었다. 

       

       [그걸 쓰기라도 할 생각이더냐.]

       

       말을 묻는 노야의 목소리엔, 어째서인지 날카로운 감정이 스며있다.

       나는 그 목소리의 뜻을 알고 있었다.

       

       “미쳤습니까…? 이걸 쓰게.”

       

       노야는 내가 이거 사용할까 두려운 것이다.

       여기서 적힌 것만 보자면, 이 서찰은 인간이 쓰기엔 너무나 잔인한 물건이었다.

       

       애초에 모으는 것도 힘들다.

       독성을 가진 마물을 모으는 건 둘째치고. 

       

       ‘인간만 백 명을 넘게 모아야 해.’

       

       그것도 약관이 넘지 않은 인간만을 모아야 했다. 

       이건 그걸 정수하고 정수해 그릇과 육신에 변화를 주게끔 만드는 방식이 적혀 있었다.

       

       중요한 재료는 그들의 혈육과 선천지기.

       

       이걸 뽑아낸다는 것도 신기한데. 정수해서 마물의 독을 띤 혈육과 또 섞는다고?

       미친 방식이 아닐 없다.

       

       손에 움켜쥔 보석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정파라는 새끼들이, 이깟 거 하나 만들겠다고.”

       

       이까짓 거라고 하면서도 속으로는 달리 떠올린다.

       먹기만 하면 천무지체가 될 수 있는 영약.

       

       이건 역사적으로도 가치가 높은 물건임은 확실했다.

       

       제작 방식이 인간의 윤리와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을 뿐이다만.

       

       ‘…비전을 세상에 뿌리기만 한다면, 개판이 나기에 충분하지.’

       

       이 세상엔 그런 윤리 따위 개나 줘 버린 인간도 많았다. 

       그걸 제대로 아는 만큼, 이건 쉽게 세상에 내놓아선 안 되는 것이었다.

       

       [정녕 그 이유뿐이더냐.]

       ‘…그럴 리가요.’

       

       노야의 비웃음이 담긴 말에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그 이유뿐은 아니다.

       

       내가 언제부터 그런 의협심이 있었다고 그런 걸 신경 쓰겠는가.

       

       이걸 신경 쓰는 이유는 하나였다.

       

       뭐가 되었든 적당한 범재의 몸을 천무지체라는 말도 안 되는 육신으로 바꿀 수 있다면, 이건 엄청난 가치였다.

       

       하니.

       

       ‘쓸 수 있다면 쓰고 싶은데.’

       

       다른 이에게 주거나 태우기 보단, 내가 사용할 방법을 찾고 싶었다.

       

       […애송아.]

       ‘알고 있습니다.’

       

       노야의 한껏 어두운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픽 웃었다.

       

       ‘걱정 마십시오. 노야가 걱정하는 건 안 할 생각이니까요.’

       

       혹여라도 내가 이 비전에 적힌 방식을 사용할까 봐. 노야는 그게 걱정일 터였다.

       

       내가 그 정도로 쓰레기로 보이나 싶어 좀 기분이 묘했으나. 

       노야의 입장에선 걱정할 만한 일이었으니, 별다른 말은 안 하기로 했다.

       

       실제로도….

       

       ‘고민을 안 한 건 아니니까.’

       

       이걸 몇 개씩 만들어 믿을만한 이들에게 먹여 성장시킨다면, 훗날 있을 전쟁에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이건 선을 넘는 일이야.’

       

       거기까진 가고 싶지 않았다.

       

       그건 내가 잡아놓은 ‘선’을 넘는 행위다. 거기까지 가선 안 됐다.

       

       그 선은 내가 아직까진 인간이라는 걸 인지할 수 있는 선상이다.

       

       ‘육신은 이미 아니라고 해도.’

       

       몸이 달라지고, 상황이 달라지더라도. 

       

       간신히 인간이라 생각할 수 있는 선, 이 행위는 그 선을 넘는 행동이었다.

       

       ‘그러니, 다른 방식을 찾아봐야지.’

       

       비전에 적힌 그대로를 쓸 수는 없다.

        

       애당초 약에 있을 독기를 추가한 이유는, 오로지 당문의 혈족을 위함이었으니 이걸 제외하고.

       인간의 혈육과 선천지기를 대처할 무언가가 있다는 전제를 둔다면.

       

       ‘…조금 다르게 사용할 수 있을지 몰라.’

       

       본디 영약이 가졌을 힘이 줄어들지언정.

       비슷한 효과를 가진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런 생각 때문에 고민을 하는 중이었다.

       

       해낼 수만 있다면, 이건 분명 훗날 혈겁에 도움이 될 일이었으니까.

       

       [그건 위험한 생각이다.]

       ‘예, 그 또한 알고 있습니다.’

       

       노야의 경고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다. 이게 얼마나 위험한 생각인지.

       

       그래도.

       

       ‘시도는 해볼 만하지 않겠습니까.’

       […]

       ‘안 해보는 것보단 낫다 생각합니다. 뭐든 해볼 때 까진 해보고 포기하는 게 좋잖습니까.’

       [그래…. 그 신념이 네 단점이자 장점이지.]

       

       안 될 때까진 해보고 놓는다.

       전생에는 그러지 못했기에, 이번 생에는 바뀌고자 다짐한 신념이었다.

       

       ‘당장, 이걸 해보겠다고 하는 건 아닙니다.’

       

       인간을 모으는 건 제외하고, 마물을 찾는 것을 제외해도.

       그 외에 재료가 상당했다.

       

       값이 어지간히 나가는 약초 또한 수두룩하다.

       이걸 다 모으는 건 아무래도 시간이 좀 걸릴 터.

       

       ‘약초를 모은다고 해도, 정수를 하는 건 물론이고….’

       

       인간과 마물을 대체할 재료가 필요했다. 약초가 아니라, 이런 게 있는지 파악하는 게 우선일 터.

       

       ‘그게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찾기만 한다면, 앞으로의 계획에 상당한 이점이 있을 터였다.

       

       ‘소림이나 화산의 영약보다 월등한 물건일 테니까.’

       

       만들기만 한다면, 대환단이나 자소단. 혹은 독천단보다 뛰어난 물건일 것이다.

       

       인간의 육신 자체를 뒤바꾸고 그릇을 넓히는 물건인 만큼, 어마어마한 물건일 터.

       

       거기에.

       

       ‘…예상이긴 하지만.’

       

       인간의 혈육은 모르겠지만, 선천지기를 대체할 물건.

       그게 떠오르는 바가 있었다,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우선은, 나히부터 처리하고.’

       

       이 영약이 정녕 통하는지, 통한다면 어떤 상태가 되는지를 확인한 후.

       쓸만하다는 판단이 서면, 그때부터 착수할 예정이었다.

       

       ‘…내가 약관이 되기 전까진, 길을 정해야 해.’

       

       시간이 많지 않다.

       

       앞으로 약관이 될 때까지는 삼 년.

       

       그 안에는 앞으로 향할 방향성을 구축하고, 계획을 확실히 짜둬야 했다.

       이 또한 그와 연관이다.

       

       “후우….”

       

       복잡한 생각을 하며 걷다보니, 어느새 처소다.

       

       아마 아버지는 독왕의 의뢰를 처리하고 있을 즈음이고, 당문 전체가 시끄러울 상태이니.

       

       내 처소는 비교적 조용할 것이었다.

       

       ‘그럼 안에 가서 할 일은.’

       

       오늘 해야 할 일.

       

       ‘…뇌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시끄러워 서랍 안에 처박아놨던 뇌아. 그 안에 있을 남궁명…으로 짐작되는 인물.

       이에 대한 대화를 아직 끝내지 못했으니.

       

       아버지가 오기 전 까진 그것까진 끝내 놔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처소에 들어선 순간.

       

       “…응?”

       

       조용해야 할 처소 안에서 인기척이 가득 느껴졌다.

       

       -아니! 이 미친놈아!

       

       더불어 시끄러운 소리까지 여가 없이 들린다.

       

       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백련검 같은데?’

       

       백련검 그 아줌마의 목소리였다.

       …그 아줌마가 왜 내 처소에서 소리가 들릴까.

       

       ‘또 뭐 하려고.’

       

       벌써 겁이 난다.

       

       저 아줌마가 여기 올 때마다 괴상한 소리를 내뱉는 터라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에휴….”

       

       크게 한숨을 푹 내쉰 직후, 처소에 들어섰다.

       

       그리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들려온 뜬금없는 소리에 내가 기함을 토해야 했다.

       

       “…뭐라고?”

        

       문제는, 그게 그 뜬금없는 소리를 내뱉은 이가 백련검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어디를 간다고…?”

       “…”

       

       한껏 커진 눈으로 물은 말에, 내 앞에 있던 여인이 대답했다.

       

       “…북해….”

       

       청백발의 긴 머리칼.

       곱디 고운 하얀 피부를 가진 여인.

       

       내 약혼자이자, 전생에 나를 위해 죽었던 인물. 

       남궁비아가 나를 보며 다시금 말했다.

       

       “…북해로 갈 거야….”

       

       북해로 가겠다며 말이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_ _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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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ldhood Friend of the Zenith

Childhood Friend of the Zenith

CFZ, Childhood Friend of the Zenith Under the Heavens, The Zenith's Childhood Friend, 천하제일인의 소꿉친구
Score 8.4
Status: Ongoing Type: Author: , Artist: Released: 2021 Native Language: Korean
Instead of struggling meaninglessly, he acknowledged his p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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