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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2

    네르는 아르윈이 떠나고, 엘프 시종들에게 물품을 하나 부탁했다.

     

    무언가를 적을 수 있는 용지를 원했다.

     

    이내 그녀의 부탁대로 엘프들은 얇은 가죽책을 하나 가져다주었고, 네르는 머리를 비운채로 그 빈 종이들을 채워나갔다.

     

     

    ‘스탁핀’

     

    그녀가 책 안에 처음으로 적은 단어였다.

     

    깊은 생각을 두고 하는 행동은 아니었다.

     

    하지만 해두기는 해둬야 할 것 같다.

     

    선택지를 늘려놓고 결정해도 나쁠게 없다.

     

    아르윈과 대화하며 자신의 목표를 드디어 떠올렸다.

     

     

    과연 이 책이 필요해지는 날이 오게 될까.

     

    그건 알 수 없다.

     

    이미 베르그를 배신하는게 너무도 힘들어졌다는걸 아니까.

     

     

    그럼에도, 베르그 곁에 있으면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은 갈수록 심해졌다.

     

    감정을 죽이고 객관적으로 생각했을때의 이야기다.

     

     

    베르그는 인족이라 많은 여성을 사랑할 수 있다.

     

    네르는 그런 인족의 특성이 싫었다.

     

    베르그는 용병이라 목숨을 계속해서 건다.

     

    네르는 그런 용병의 특성이 싫었다.

     

    예언의 사람도 아니었다.

     

    “…안돼.”

     

    하지만 베르그는 자꾸만 마음속으로 파고든다.

     

     

    그를 절대 사랑하지는 않을거지만…친구로만 둘거지만.

     

    혹시. 혹시나, 가정에 가정을 두어 그를 좋아하게 되기라도 한다면, 미래에 얼마나 아프고 힘들지 예측조차 가지 않는다.

     

    이미 나열한 사실들만 봐도 고통이 앞에 놓여있다.

     

     

    문화가 달라, 종족이 달라…너무도 많이 다투고 상처를 주게 될거다.

     

    행복이랑은 거리가 멀었다.

     

    그러니 그와 더욱 가까워지기 전에 행동해야할지도 모른다.

     

    미래에 후회하고 싶지 않다.

     

    이미 이러고자 아르윈의 혼인도 찬성했지 않았는가.

     

    이건 정해진 수순이었다.

     

    “…”

     

    네르는 자신의 흰꼬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머리를 양옆으로 세차게 저었다.

     

    베르그만이 아름답다 말해준 꼬리지만, 그 사실은 머리 저 편으로 던져둔다.

     

     

    억지로 감정들을 억누른다.

     

    깃펜을 끄적이며, 마음 없는 인형처럼 책을 메워갔다.

     

     

    그러다 보니 또 책상 위에 올려진 자신의 왼손 약지에 끼워진 반지가 보인다.

     

    “…”

     

    네르는 왼손마저도 책상 밑으로 내리고 집필을 이어나갔다.

     

     

    -똑똑.

     

    “네르?”

     

    “읏!”

     

    네르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책을 강하게 덮었다.

     

    -쿵!

     

     

    뒤를 돌아보자, 언제온건지 게슴츠레한 눈으로 문을 여는 베르그가 보인다.

     

    “…뭐야, 왜 그렇게 놀라?”

     

    그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네르는 천천히 책을 등 뒤로 숨겼다. 베르그는 글자를 모를테니 괜찮을 것이다.

     

    “이…일기 쓰고 있었어.”

     

    베르그는 취기가 전해져오는 말투로 그녀에게 걸어왔다.

     

    “…그랬구나. 하긴 이런 곳에 왔으면 추억을 남기고 싶기는 하겠다.”

     

     

    네르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그에게 자연스레 묻는다.

     

    “…술 마셨네?”

     

    “응. 단원들이랑…엘프장로랑 마시느라 조금 과하게 먹었어. 미안. 내가 늦었지?”

     

    “…어디서 뭘 했는지 이야기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했잖아.”

     

    “아. 그랬던가.”

     

    베르그는 몸을 풀며 그녀에게 계속해서 다가섰다.

     

    이렇게 많이 취한 그의 모습은 처음보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두렵지 않다는 부분에서…그 동안 얼마나 마음을 많이 허락하게 되었는지 네르는 새삼 실감했다.

     

     

    베르그는 취침 준비를 하며 자연스레 윗통을 벗어던졌다.

     

    네르는 그제야 새로 생긴 그의 상처들이 보였다.

     

    그녀의 머리가 먼저 사실을 소화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베르그…!”

     

    그녀는 자리에서 곧장 튀어오르며 놀랐다.

     

    피가 흥건한 붕대들은 이미 갈아줘야할 시기가 지나 있었다.

     

     

    네르는 자신이 챙겨온 의료물품을 가져온 뒤, 베르그를 적당한 의자에 앉혔다.

     

    “아니…! 치료해야하는 상태잖아…! 이렇게 될 때까지 붕대도 안갈아주고 뭐한거야!”

     

    “….응? 그냥 이렇게 하면 낫잖아.”

     

    “바보야! 오염될 수 있단 말이야!”

     

    “네르, 이거 새로 두른지 얼마 안된거야…깨끗히 씻고 약도 잘 발랐어…”

     

    변명하듯 말하는 베르그.

     

    “술을 이때 먹으면 어떻게 하냐고 대체! 덧난다고!”

     

    네르는 급하게 그의 붕대를 풀어주며 상처를 살폈다.

     

    “…”

     

    그의 말대로 치료 자체는 깔끔히 되어있다. 하지만 네르는 놀라고 걱정되는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더한 잔소리를 할 수가 없어진 지금, 네르는 묵묵히 그의 붕대를 새로 갈아주었다.

     

    “…”

     

    그 동안 베르그는 미소를 지은채 눈을 끔뻑이고 있었다.

     

    이내 그의 몸을 두르는 천이 깨끗해지고 나서야 네르는 안도의 한숨을 돌린다.

     

    격한 감정을 쏟은 자신이 부끄러워, 조금 진정된 소리로 말했다.

     

     

    “…다, 다했어. 침대로 가서 자. 여기서 졸지 말고.”

     

    “그럴까?”

     

     

    그리고 그의 말과 동시에, 네르는 자신의 신체가 하늘로 붕 날아오르는게 느껴졌다.

     

    어느새 등과 다리 밑에 베르그의 팔이 있다.

     

     

    “아…읏!”

     

    네르는 신음을 터트렸지만, 베르그는 말 없이 그녀를 침대로 운반해갔다.

     

    잠깐의 발악도 의미가 없어진다.

     

    취해서 그런지 베르그의 행동이 한층 과감했다.

     

     

    “치료 고마워.”

     

    베르그가 실실 웃으며 말한다.

     

    네르는 심장이 뛰는게 느껴졌다.

     

    그녀는 입을 열면 말들이 떨려 나올 것 같아 입술을 깨물고 말을 아꼈다.

     

    그렇다보니 너무도 손쉽게 그에게 몸을 맡기는 꼴이 되어버린다.

     

     

    ‘첫 친구라서 그래. 첫 친구라서 그래.’

     

    네르가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큰 의미를 두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베르그는 이내 네르를 침대에 조심스럽게 눕혔다.

     

    그도 마찬가지로 자연스레 침대에 눕는다.

     

     

    하지만 베르그는 네르의 등 뒤에 두었던 자신의 팔을 회수하지 않았다.

     

    살짝 올려, 그녀의 목을 지지하기만 한다.

     

    네르는 처음으로 팔베개라는 것을 해본다.

     

     

    “자자.”

     

    그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했다.

     

    네르는 거부하기 위해 상체를 일으켜 세우려했지만 베르그가 그녀를 다시 눕혔다.

     

    “그냥 자자.”

     

    “…”

     

    슬며시 베르그의 눈이 떠진다.

     

    “…어차피 내일부터는 떨어져서 잘텐데.”

     

     

    네르의 심장이 그 말에 잠시 가라앉는다.

     

    “….어?”

     

    “내일 혼인하기로 했어. 조금 급하지만…뭐. 없는 사정에 준비해봤자 달라질 것도 없으니까.”

     

    “…”

     

    “내일은 아르윈 셀레브리엔이랑 자게 될거야. 그러니 오늘만 참아, 네르.”

     

     

     

    네르는 그 말에 말문이 막힌다.

     

    형식적인 대답조차 내뱉을 수 없다.

     

    이미 예상하고 있던 미래였지만, 막상 닥치니 그 타격이 더욱 크다.

     

     

    온몸의 힘이 쭉 빠진다.

     

    네르는 그렇게 그의 팔에 편하게 눕게 되었다.

     

    반대로 동그랗게 커진 두 눈은 감길줄 몰랐다.

     

     

    “미안해.”

     

    하지만 베르그가 사과했다.

     

    “…뭐가?”

     

    “…아르윈과 혼인. 더는 아내를 들이지 않을게.”

     

     

    네르는 그의 사과의 의도를 이해하겠는 반면, 그가 이러는 이유는 알수가 없었다.

     

    혼인을 받아들인건 네르였다. 베르그는 하고 싶지 않다는 입장이었다.

     

    그런데도 이런 사과를 건네온 것이다.

     

    “네…네가 왜 사과해.”

     

    “그냥. 네 기분이…좋지 않을…걸 아…니까.”

     

    베르그는 점차 잠에 드는 듯 말을 더듬었다.

     

     

    네르는 베르그의 팔에 기댄채, 이런 말을 내뱉는 그를 바라본다.

     

    수만가지의 감정들이 그녀를 헤집고 지나간다.

     

     

    “…네가 미안할 거 없어.”

     

    네르는 속삭이듯 말했다. 모난 양심이 아파왔다.

     

     

    이내 잠드는 줄 알았던 베르그가 눈을 슬며시 뜬다.

     

    네르는 그의 검은 눈에서 장난기를 발견한다.

     

    그가 빙그레 미소를 짓는다.

     

     

    “…밤인데도 꼬리 예쁘네?”

     

    “…”

     

    또 그 말에 숨이 멎는다.

     

    하지만 익숙해져서 그럴까. 아니면 그를 거부하려 해서 그럴까.

     

    이번만큼은 그 충격을 버틸수가 있었다.

     

     

    “또 그 소리. 내 꼬리 이상하-”

     

    “…..많이 힘들었어?”

     

    하지만 이어지는 베르그의 말에 또 감정이 일렁였다.

     

    “…”

     

    네르는 그 어떠한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입이 굳게 다물어진다.

     

    무엇이 힘들었냐 묻는건지 이미 너무도 잘 알았다.

     

    목이 또 메었다.

     

    그때가 너무도 힘들었으니 예언에 집착하고 있는걸지도 몰랐다.

     

    제 편 하나 없는 곳에서 매일 같은 괴롭힘을 견뎌야만 했다.

    스스로가 저주받은줄로만 알고 살아와야했다.

    할머니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단 한번도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받아본적이 없다.

    “…”

     

    -슥슥.

     

    베르그는 반댓손으로 네르의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그 과정에서 그녀의 귀가 접히고 쓸린다.

     

    그 변할 수 없는 과거를 위로해주는 것 같았다.

     

     

    베르그는 이내 스르륵 잠에 빠져든다.

     

    “…”

     

    네르는 말없이 곤히 잠든 베르그를 바라보았다.

     

    인상이 멋대로 찌푸려지는걸 참을수가 없다.

     

    “…”

     

    그가 아르윈에게 간다는게 왜 자꾸만 이렇게도 불편할까.

     

    아르윈이 그를 미워하는 것 같은게 왜 이리도 다행일까.

     

    친구인 베르그에게 왜 이렇게 이기적인 마음만 들까.

    …어쩌면 할머니 이후로 자신을 가장 좋아해준 사람이라 그럴지도.

     

     

    “…대답은 듣고 잠들어야 하는 거 아니야?”

     

    네르의 구겨진 표정을 뚫고 미소가 나온다.

     

     

    졸린 것이 전염되어와서 그럴까.

     

    오늘 하루가 고단해서 그럴까.

     

    네르도 점차 수마가 몰려옴을 느낀다.

     

     

    베르그의 팔목에 누워있던 그녀는 홀로 중얼거렸다.

     

    “…불편해.”

     

    아무도 듣고 있지 않지만 변명을 내뱉는다.

     

     

    그리고는 팔목이 아닌…그의 팔뚝을 베고 누웠다.

     

    불편하니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다.

     

    베르그의 품속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간다.

     

     

    네르는 취한 베르그를 둔채 그를 가까이서 몰래 살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닿는것조차 거부감이 들었는데.

     

    벌써 그의 팔을 베고 누워도 싫지가 않다.

     

     

    아니, 외려…

     

    “…친구니까…”

     

    네르는 혼잣말을 하며 다시금 그의 팔 안쪽으로 파고든다.

     

     

    그리고는 가만히 그의 얼굴을 뜯어본다.

     

    인족 여인들이 왜 그를 두고 잘생겼다 하는지,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친구니까…”

     

    네르는 가볍게 그 얼굴을 만져보았다.

     

    베르그도 자신의 머리카락과 귀를 만졌으니 괜찮을 것이다.

     

    “…친구니까.”

     

    내일은 또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될지 두려웠다.

     

    하지만 네르는 베르그의 품에 몸을 말아넣었다.

     

    그의 따스한 온기가 전해져온다.

    누가보더라도 부부같은 자세로 그녀는 잠에 빠져들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얼마나 걸릴지 몰라 공지하지 않았지만, 오늘은 연참입니다.

    여러분 덕에 100만 조회수를 달성했습니다.
    인생픽도 75위나 됐네요.
    예상보다 큰 사랑을 받아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앞으로도 노력하겠습니다.

    +스탁핀은 홍염단이 정착한 지역 이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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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compatible Interspecies Wives

Incompatible Interspecies Wives

IIW 섞일 수 없는 이종족 아내들
Score 4.3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Polygamy is abolished.

We don’t have to force ourselves to live together any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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