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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2

       *

        

        이반의 입장에선 끔찍하리만치 미개한 전근대 사회로 비춰졌다지만, 그건 터무니없는 중상이다. 당연하게도 이 세상 사람들은 유능하다. (무능한 자는 살아남을 수 없었다.)

        

        이 유능함이란 것은 언제나 선한 방향으로 적용될 수는 없는 법이므로, 대부분의 유능한 엘리트와 사회 고위 계층들은 놀라울만큼 섬세하게 부정부패를 쌓아 나간다. (이 탓에 방첩사령부는 성악설을 믿는다.)

        

        모두들 알다시피, 우둔한 이들의 부정보단 유능한 이들의 부정이 더 치명적인 법이다. 이것이 개인의 축재가 아닌 사회 시스템에 대한 도전으로 발전한다면 더욱 그렇다.

        

        그러니까, 마족의 편에 붙어 큰 물에서 놀아보겠다고 결심한 야심가들이 그렇다.

        

        

        “이 녀석들은 어쩔까요?”

        “그런 걸 왜 물어봐. 아마추어처럼. 프로 답게 처리하자고, 프로 답게.”

        

        

        드미트리는 어깨를 으쓱이며 몸을 돌렸다. 긴 코트가 너울지며 자락을 흘린다. 그가 등을 돌리는 것과 동시에, 타앙. 건조한 총성이 두 번 울렸다.

        

        드미트리는 총성을 반주 삼아 담뱃불을 붙였다. 스읍, 하. 타들어가는 담뱃불이 어두운 실내에 붉게 번들거렸다.

        

        

        “지긋지긋한 놈들.”

        

        

        사회 시스템이 정교해질수록 야심가들의 야망은 더욱 깊은 그림자 속에 몸을 묻는다.

        

        이 세상, ‘살아남은 야심가’들은 모두 유능하기 짝이 없다. 앞서 말했다시피, 전쟁통에 야망을 드러낸 무능한 것들은 모두 도태된 탓이다.

        

        세계 단위의 우성학적 실험이라 할만하다.

        

        전통적인 삼단논법에 준거한다면 이렇다.

        

        

       1. 지금까지 활동하는 반군, 테러리스트, 또는 반체제적 인사들은 모두 한 재간이 있다.

       2. 그러나 여전히 연합 왕국의 사회 시스템은 굳건하다.

       3. 따라서, 저 ‘유능한 반군’들을 잡는 모든 방첩부대 요인들은 그보다 더 유능하다.

        

        

        전쟁이 끝난 것이 고작 4년이 되었다. 모든 왕국들의 국체는 더 이상의 전란을 견딜 수 없을 수준으로 손상되었다.

        

        거기에 더해, 생업에 종사할 경제 인구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주로 마족의 뱃속으로 사라졌다.

        

        흑사병이 터졌을 때 민중의 권리가 드높아졌던 것과 거의 비슷한 흐름이 펼쳐진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민중을 수탈하는 귀족들은 압도적 강자, 말 그대로 마력을 휘두르는 압도적 강자라는 점.

        

        자연스럽게도 민중과 수탈자들의 분란이 예정되어 있다 할만 하다. 누군가 부채질을 해주기라도 한다면 활활 타오를 수준으로.

        

        사회 현상 속에서, 큰 사건이 발생한다면 가장 큰 이득을 쟁취한 놈이 범인인 법이다.

        

        한 나라가 불타오르면 가장 큰 이득을 볼 자들을 추려볼 때, 이 정도가 되겠다.

        

        식민청 지배하의 마족, 이웃나라. 자국 반군. 권력승계에 밀려난 왕족. 민중 이데올로기에 빠진 사상가.

        

        

        “후….”

        

        

        드미트리는 담배 연기 속에 한숨을 섞어 뱉었다. 많기도 하다. 국내외를 걸쳐 다방면으로 펼쳐져 있으며, 심지어 지금 크라실로프는 내전 직전 상황에 놓여 있다.

        

        크라실로프 방첩사령부는 오늘도 밤을 지새워야 할 것이다.

        

        예년과 같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지긋지긋한 여름밤이었다.

        

        프리첸카야가 불타오르기 전까진.

        

        

       *

        

        

        이반은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었으므로, 대부분의 문제를 대화로 해결하는 편이다.

        

        사소한 문제가 있다면 이 미개한 시대의 사람들 대부분은 마음의 빗장을 걸어 잠그고 대화를 거부한다는 점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반은 기지 넘치는 현대인답게 이 문제를 손쉽게 해결한다.

        

        무릇 빗장은 나무로 만들어지는 법이고, 모든 나무는 도끼 아래에 부서진다.

        

        따라서 이반의 도끼는 수많은 용례(병따개, 캔따개, 머리따개 etc) 중, 문따개의 역할을 수행하며 상대방 마음의 빗장을 활짝 열어 젖히고 있다.

        

        

        “다… 커흐윽!! 다 말하겠소! 그, 그만! 그만!!”

        “쉿.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마, 말한다고 하지 않았소!!”

        

        

        이반은 이 아마추어 사상운동가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마음의 빗장이 다 열리지 않은 상태에서 말하는 정보는 대단히 높은 확률로 거짓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보의 신뢰성을 높이기 위해선 더 열린 마음이 필요했다. 물리적인 의미로 마음이 있는 위치를 열어내면, 대부분의 경우 심리적인 마음도 열리기 마련이다.

        

        

        “끄으윽…!”

        “이제 치료해주마.”

        “죽….여줘….!”

        “그런 슬픈 말은 하지 말고.”

        

        

        이반은 힐링 포션을 꺼내 활짝 열린 마음을 다시 봉합해주며 부드럽게 속삭였다.

        

        단순히 반복되는 고문은 정보의 화질을 낮추는 악수다. 정보란 변질되기 쉬운 것이어서,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른 기억을 진실이라고 믿고 말하는 경우가 속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심리적 장벽을 온전히 허물기 위해선, 이반 또한 현대의 지적 능력을 잠시 포기하고 이 시대 다운 미개함을 장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따듯한 배려(치명적인 장기를 피해 절개함)와 섬세한 치료(힐링 포션을 아끼지 않음)를 동반한 짧은 심리 상담 끝에, 다섯 번째 만난 스파이는 결국 멍하니 풀린 눈으로 진실을 뱉어내게 되었다.

        

        

        “다이오나르 경은… 끄윽… 이미 프리첸카야에… 도착…. 거사의 신호탄은… 우리, 우리가 아니라… 다이오나르 경이 직접….”

        “그 놈이 이미 활동하고 있다고?”

        “예, 예…. 접선책은 그저 허울…일… 뿐이고, 저희도 경의 거사를 기다리고 있습… 있습니다….”

        “다이오나르가 노리는 것이 뭐지? 에시디스의 납치가 끝인가?”

        “아닙니다….”

        

        

        다이오나르와의 접선책을 맡고 있다고 알려져 있던 이 첩자는, 풀린 눈으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다가 돌연 바닥을 툭 짚었다.

        

        그것이면 대답이 된다는 듯이.

        

        이반이 눈썹을 꿈틀거리자, 사내는 핏물을 쿨럭이며 간신히 말을 이었다.

        

        

        “이곳.”

        “…이곳?”

        “프리첸카야입니다…. 혁, 혁명 만세…. 민중의 검을 민, 민중에게… 사람 위에… 오직 신만이 존재하는…. 하늘의 왕국 아래에…. 쿨럭! 아, 아아….”

        

        

        망가졌군.

        

        이반은 혀를 차며 일어섰다.

        

        내일이나 모레 중으로 도착한다는 다이오나르가 이미 이 도시에 잠입해있다면, 수행원들을 썰어둔 상황에서 과연 결행일을 미룰 것인가?

        

        아니, 그렇지 않을 것이다. 들킨 이상 녀석은 돌아갈 구석이 없다. 드로안으로 귀국해봐야 분노한 에이나르의 도끼날과 인사하게 될 테니까.

        

        프리첸카야는 드넓은 광역권을 지닌 대도시다. 따라서, 단 한번도 마주한 적 없는, 밀입국한 외국의 첩자를 찾아내는 것은 서울에서 김서방을 찾는 것보다 조금 더 어렵다.

        

        그러나 뱀을 찾기 위해선 풀숲을 쳐야 하는 법.

        

        본거지가 들통나고 수행원과 공작원들 몇몇이 명백한 고문을 당한 채로 살아서 방치된 상황을 눈치챈다면, 다이오나르 입장에선 대단히 초조해질 터.

        

        

        “에시디스는 지금쯤 집에 있겠지.”

        

        

        프리첸카야 자체를 노린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지 곱씹으며, 이반은 걸음을 옮겼다.

        

        에시디스의 안전을 먼저 확보하고, 가능하면 그녀를 급습할 다이오나르를 사전에 저지한 뒤에 물어볼 예정이다.

        

        대체 어떻게 용사 파티의 자제를 습격하는 것이 어떻게 프리첸카야를 공략할 방법이 된다고 망상했는지, 그 심리 기저가 퍽 궁금했다.

        

        

       *

        

        

        에시디스와 모르드는 조용히 밤거리를 거닐었다.

        

        

        “와, 근데 진짜 적응이 안 되네요. 삼촌도 그렇죠? 어떻게 거리에 사람이 이렇게 없을 수가 있죠?”

        “국가가 무능하면 이렇게 되는 거란다. 에시. 네 아버지가 얼마나 위대한 임금인지 알겠느냐?”

        “아, 네, 뭐. 그러시겠죠….”

        

        

        크라실로프는 단일 왕정 상태에서 지난 전쟁을 보냈다. 당연히 국가 단위 계엄령이 선포되고, 전시 태세로 십여 년을 운영했던 국가다.

        

        비록 평화를 되찾았다 하더라도 이런 군국주의 국가가 고작 4년 만에 변할 리가 없다. 그러나 드로안은 다르다.

        

        드로안은 지난 전쟁 기간동안 십수 명의 야를들이 각자의 국가를 운영하던, 느슨한 연합국을 유지해왔다.

        

        이 부족단위 국가엔 중앙집권화된 단일 권력이 존재하지 않는다. 당연하게도 시민 개개인의 권리가 타국에 비해 대단히 발전한 편이다.

        

        당장 길바닥에 널린 전사 한 명도, 건너건너(X7)를 반복하면 야를과 형동생 하는 사람의 고종사촌의 처남쯤 된다. 씨족 사회란 그런 의미다.

        

        여기서 두려워해야 하는 점이라면, 길바닥에 전사가 널려 있다는 점이겠지만. 어쨌건 그 탓에 사회 치안은 더 현대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문명 사회와는 달리 부족 사회에선 예의 없는 것들의 대가리에 도끼가 찍히기 때문이다. 모두가 예절을 갖추고 있으니 밤거리가 무서우랴.

        

        

        세상에, 옆집 아저씨가 강도를 당했다고? 놀랍게도 강도는 그 아저씨의 옆옆집 아저씨일 가능성이 높다. 닫힌 사회니까. 그럼 그 강도-이웃은 다음날 머리 또는 손목이 잘린다.

        

        

        그런 사회에서 살다가 프리첸카야의 밤거리를 바라보면 참 삭막하고 팍팍하다 하겠다.

        

        이건 이 도시에 들어온 지 언 3개월이 다 되어가는 에시디스에겐 여전히 적응하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아, 삼촌. 저 가게 가보셨어요? 저기 와플이 진짜 맛있어요.”

        

        

        보통 대학가 와플가게는 혼자 가서 먹는 곳이 아니다. 그곳은 비정한 인싸들의 공간이었으니까.

        

        따라서 에시디스는 저 가게에서 와플을 먹어본 적이 없다. 먹는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집으로 돌아간 적은 많았지만.

        

        아쉬움 담긴 목소리로, 문 닫힌 와플 가게를 지나가며 에시디스는 연신 근처 맛집(맛있어 보이는 집이란 뜻)들을 삼촌에게 소개해주고 있었다.

        

        

        “아, 그렇지. 저긴 딸기가 올라간 와플이 맛있더구나.”

        “…?!”

        

        

        에시디스가 간과한 사실이라면, 모르드는 엄청난 인기인이란 점이다.

        

        기사학부는 기본적으로 강자존. 즉, 강자의 율법에 따라 움직이는 사나이들의 학과.

        

        사나이 중의 사나이를 자부하는 드로안 사내를 싫어할 수가 없다. 거기에 모르드는 호방하고, 돈이 많고(에이나르 대왕의 활동비다), 대개의 경우 친절하기까지 했다.

        

        정확히 반대의 이유로 천대받던 에시디스는 그제야 대단히 상처받은 표정으로 모르드를 바라보았다.

        

        배신자.

        

        세상엔 배신자들뿐이야.

        

        이 비정한 진리를 깨달아버린 20살 대학생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냥 집에 돌아가요. 재미없다 이제.”

        “가는 길에 뭐 먹을 거라도 좀 사갈까?”

        “됐어요!”

        

        

        그렇게 그들이 다시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길 잠시.

        

        그들의 눈 앞에 뜬금없는, 그러나 반가운 사람 하나가 나타났다.

        

        

        “오랜만일세. 형제.”

        “…자네가 여길 어떻게?”

        “폐하의 밀명 말고 내가 여기 올 이유가 있겠는가.”

        “삼촌!!”

        “오, 에시. 잘 지냈니? 네가 떠난지 고작 세 달인데도 벌써 십 년은 지난 것 같더구나. 역시 궁에 우리 조카님이 있고 없고 차이가 참 커.”

        “헤헤, 삼촌. 삼촌도 잘 지내셨죠?”

        

        

        밤거리의 마력등 아래에 나타난 사람은, 제멋대로 삐쭉 솟은 머리칼을 야성적으로 넘긴 거구의 사내.

        

        에이나르의 허스칼. 다이오나르 에릭손이었다.

        

        

       

       *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내일은 오늘보다 일찍 올라옵니다!

    오늘 밤에야 올라온 사유) 낮에 쭉 잠들어버렷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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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프롤로그에서 30년이 흘렀다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got transmigrated into a game I’ve never seen before. I thought it was a top-notch RPG and spent 30 years on it. I retired as a war hero and planned to spend my remaining time leisurely. But it turns out, it was an academy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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