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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2

       살다 보면 그런 적이 있다.

       

       

       너무 피곤하거나, 오히려 너무 푹 자고 일어났을 때.

       

       

       침대에서 일어나기 싫지만 일어나야 하고, 그렇게 억지로 상반신을 일으키면.

       

       

       갑자기 세상이 자주빛으로 물들고 시야가 어지러워진다.

       

       

       잠시 머리가 찡하고 아프며 흔들거리지만, 그것도 한순간이다.

       

       

       1초도 지나지 않아 세상과 시야는 원래대로 돌아오며, 내가 너무 피곤했구나── 하고 깨닫는다.

       

       

       ………그렇다고 그 감각을 지금 느끼고 있다는 소리는 아니였다.

       

       

       그냥 눈앞의 현실이 너무 갑작스러워서 잠깐 딴 생각과 함께 현실도피를 했을 뿐이었다.

       

       

       “그러니까……형?”

       

       

       “편하게 부르셔도 됩니다. 카일 님.”

       

       

       “아니, 그러니까 대체 왜 그러는 건데?”

       

       

       첫째 형이 아카데미로 떠나고 나서 대략 2년 반.

       

       

       당연히 그 사이 첫째 형과 대화하거나 연락을 주고받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나쁜 의미로 내게 관심을 가지던 프레드릭이라면 몰라도 첫째 형과 나는 서로 얼굴만 아는 가족이었으니까.

       

       

       생각해보면 2년 반이 아니라, 첫째 형이 아카데미로 떠나기 전에도 제대로 대화해본 적이 없었다. 가끔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 인사하는 정도?

       

       

       그렇게 보자면 내가 첫째 형과 대화하는 건 정말 몇 년 만이었다.

       

       

       그리고 그 때의 형은.

       

       

       ‘그냥 말수 자체가 적었지.’

       

       

       말을 걸어도 제대로 말하지 않고, 먼저 말하는 경우도 거의 없으며, 대부분의 대답은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해결한다.

       

       

       대화를 하면 할수록 복장이 터지는 게 기억 속 첫째 형과의 마지막 대화였는데.

       

       

       “모노폴리는 어떻게 만드신 겁니까?”

       

       

       “어떻게라 해도, 그냥 만든 거지 형. 황실에서 기술자들 도움으로 만든 거야. 그나저나 존댓말 좀 안 하면 안 돼?”

       

       

       “어찌 저같은 하찮은 놈이 카일 님과 같은 천재를 평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사죄드립니다.”

       

       

       “아니, 왜!?”

       

       

       “조금 전 다른 이들이 앞에 있어 카일 님을 이름으로 부르며 존댓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둘이라면 문제없지만 타인이 보고 있다면 그 또한 귀찮은 일로 나아갈 수 있어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에 지금 이 자리에서 다시금 사죄드립니다.”

       

       

       “형이 이렇게 나오면 내가 더 불편하다니까?”

       

       

       “설령 그렇다 하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교수가 평범히 부르라 하여 정말로 반말하는 학생이 있겠습니까?”

       

       

       “하……….”

       

       

       거 말 잘하네. 이렇게 잘하면서 왜 예전에는 입을 닫고 살았던 걸까.

       

       

       아니, 사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였다.

       

       

       방금 형이 했던 말 중에 넘길수 없는 부분이 있었으니까.

       

       

       “하찮은 놈이……형을 말하는 거야?”

       

       

       “그렇습니다.”

       

       

       “천재는 나고?”

       

       

       “매우 그렇습니다.”

       

       

       “대체……왜?”

       

       

       바이런 자작가의 장남, 그리고 동시에 마법과 오러 양 쪽에 재능을 보인 희대의 천재.

       

       

       그 둘에 애매하게 발을 걸치고 있어도 한 쪽에만 재능이 있는 이들보다 높은 평가를 받을 터다. 하물며 첫째 형은 아카데미에 들어가기 전에 마탑 차원에서 스카우트가 오거나, 여러 기사단에서 오러 나이트가 되는 건 어떻겠냐고 제안이 들어올 정도의 천재였다.

       

       

       물론 추후 바이런 자작가를 이어야 하기에 전부 거절했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가문을 이을 게 당연한 귀족가의 장남에게 스카우트를 넣어볼 정도로 형이 탐난 인재라는 뜻이기도 했다.

       

       

       보통 가문의 후계자에게 가문 잇지 말고 마탑이나 기사단 오는 건 어때? 라 하는 건 무례의 극치였으니까. 아버지도 다소 기분 나빠했지만 그만큼 첫째 형이 우수하다는 뜻이었기에 자랑스러워하셨다.

       

       

       결국 아카데미로 와, 루케실이 말하길 천재는 당연하고 전체 수석까지 차지한 사람.

       

       

       그런 사람이 뭐?

       

       

       “따지자면 천재는 형이고, 하찮은 놈은 나 아냐?”

       

       

       “절대 아닙니다!!”

       

       

       쾅!

       

       

       아 깜짝이야.

       

       

       갑자기 무표정을 일그러뜨리며 탁자를 치고 일어서는 첫째 형.

       

       

       그에 물호랑이도 화들짝 놀랐으나 첫째 형은 날 노려보며 처음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세상에 천재의 기준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마법에, 오러에, 학문에 재능 있는 이들만이 천재이고, 다른 이들은 천재가 아닙니까?”

       

       

       “어, 그런 말은 아니었는데……?”

       

       

       “그야 물론 보통 사람들은 마법과 오러를 천재의 기준으로 삼을 지 모릅니다. 하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이런 하찮은 힘보다, 카일 님이야말로 진정한 천재입니다.”

       

       

       “……보드게임 때문에?”

       

       

       “바로 그렇습니다.”

       

       

       이건 대체 뭐지……?

       

       

       이쯤 되니 진심으로 무서워지는데.

       

       

       이 와중에 물호랑이는 첫째 형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넌 또 왜 그래?

       

       

       “형이 그렇게 보드게임을 좋아했었나? 킬 더 킹 때문이야?”

       

       

       “그런 건 보드게임이라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럼……모노폴리 때문에?”

       

       

       “물론 모노폴리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보드게임이지만, 단순히 그것 때문만은 아닙니다.”

       

       

       “응?”

       

       

       “요트, 카일갈리, 그리고 아브라카다브라.”

       

       

       어.

       

       

       형이 그걸 어떻게 알아?

       

       

       “요트는 예전에 플레이했었고, 카일갈리는 가주님께 편지로 받았으며, 아브라카다브라는 얼마 전에 직접 기아스 영지로 가 체험하고 왔습니다.”

       

       

       “그……래?”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카일 님이야말로 진정한 천재라는 걸. 카일 님의 보드게임 앞에서 제 마법이나 오러 따위 한 줌에 불과하다는 것을요.”

       

       

       아닌데. 나도 보드게임을 좋아하지만 그렇게까지 생각하지는 않는데.

       

       

       하지만 첫째 형의 말은 하나같이 진심을 담은 것 같았다. 강렬한 목소리로 말을 끝낸 형이 숨을 고르며 그제야 소파에 앉았다.

       

       

       “그러니 다시금 부탁드립니다.”

       

       

       “어……?”

       

       

       “제발 사인을……!!”

       

       

       형은 고개를 숙이며 진심으로 간곡했다. 대체 어디서 챙겨왔는지 모를 모노폴리의 땅문서와 함께.

       

       

       솔직히 하도 예상을 벗어나는 탓에 현실감각이 없어서 어떻게 사인을 하는지도 몰랐다.

       

       

       그냥 적당히 카일 바이런이란 이름을 휘갈겼을 뿐인데.

       

       

       “아……!!”

       

       

       저토록 기뻐하는 첫째 형을 보자니.

       

       

       이게 꿈은 아닌가 진지하게 고민되기 시작했다.

       

       

       어쩌면 첫째 형이 정신마법으로 공격하는 건 아닐까.

       

       

       물호랑이에게 한 대 쳐달라고 부탁해야 하나 망설이던 와중.

       

       

       내 사인이 적힌 모노폴리 땅문서에 온갖 마법을 걸며 소중하게 갈무리한 첫째 형이 또 고개를 숙였다.

       

       

       “죄송하지만 카일 님, 감히 드리고 싶은 부탁이 하나 더 있습니다.”

       

       

       “뭔데 그래……?”

       

       

       “이 아카데미는 잘못되어 있습니다.”

       

       

       ……네?

       

       

       뭐요?

       

       

       “어?”

       

       

       “아카데미에서는 지식, 오러, 마법을 가르치지요. 하지만 이는 잘못된 분류입니다. 당연히 아카데미에서 보드게임 또한 가르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

       

       

       “저도 극단적인 건 아닙니다. 다른 분야들도 공존하되, 지식에 오러, 마법, 보드게임까지 네 가지 분야로 나눠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토록 아카데미는 잘못되어 있지만, 이는 현실적으로 힘들겠지요.”

       

       

       “그, 그렇지 형.”

       

       

       “그렇기에 우선 동아리로 시작해보고자 합니다.”

       

       

       기분 탓일까.

       

       

       첫째 형이랑 대화를 시작하고서 처음으로 정상적인 주제가 나온 것 같은데.

       

       

       “동아리? 보드게임 동아리를 말하는 거야, 형?”

       

       

       “바로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동아리의 고문에……카일 님을 부르고 싶습니다.”

       

       

       “그거야 뭐.”

       

       

       오히려 나야 좋은 일이고, 아카데미에 보드게임을 퍼트린다는 목적을 생각하면 최고지만.

       

       

       뭐라고 해야 할까.

       

       

       거기서 매번 이런 형을 만나야 한다 생각하니 묘하게 꺼려진다……

       

       

       “……형, 그럼 내 부탁 하나만 들어주면 할게.”

       

       

       “무엇이든 말씀하시길.”

       

       

       “나랑 보드게임 한 판 하자.”

       

       

       “…………….”

       

       

       “형?”

       

       

       “………죄송합니다. 너무 꿈만 같은 일이라 순간 숨이 안 쉬어져서.”

       

       

       “………….”

       

       

       “무슨 보드게임이든 좋습니다! 바로 나투라에 설치된 모노폴리를 뜯어오면 되겠습니까?”

       

       

       “아니. 그랬다가는 민폐고.”

       

       

       애초에 루케실도 언제 돌아올 지 모르고, 샐리와 아델라를 몇 시간씩 문 밖에 둘 수도 없는 노릇.

       

       

       그러니 지금 상황에 적절한 보드게임이야 하나 뿐이었다.

       

       

       “……카드?”

       

       

       “아까 형이 내가 만들었던 보드게임들을 말해줬잖아? 사실 하나 더 있거든.”

       

       

       정령 포커.

       

       

       이건 에버츠 공작성, 정확히는 레이시아 공녀의 첨탑 말고는 거의 한 적 없는 게임이었으니 형도 몰랐겠지.

       

       

       언제나 챙기고 다니는 카드를 품 속에서 꺼내 섞고 있자니, 형이 조금씩 몸을 떨었다.

       

       

       “형?”

       

       

       “제가 몰랐던 카일 님의 보드게임이라니………저 자신에게 화가 나지만 너무 기쁩니다……!”

       

       

       “………….”

       

       

       

       *

       

       

       

       그날 밤.

       

       

       잠이 오지 않았기에 물호랑이만 침대에 눕힌 채, 작은 불빛과 함께 탁자 위에 앉아 턱을 괴었다.

       

       

       “………….”

       

       

       암만 생각해도 첫째 형이 잊혀지지 않는다.

       

       

       지금까지 알던 형과, 오늘 만났던 형이 너무나 달라서.

       

       

       혹시 내가 헛것을 봤던 게 아닐까 의문이 들기도 했지만.

       

       

       사락.

       

       

       내가 따로 만들어서 들고 다니던 정령포커의 카드 수는 원래 64장.

       

       

       하지만 지금은 63장 뿐이었다.

       

       

       첫째 형이 카드 중 한 장만 사인과 함께 받아가도 되겠냐면서 부탁했기 때문이었다.

       

       

       진짜 무릎까지 꿇을 기세였기에 서둘러 넘겨주었던 기억이 있다.

       

       

       한 장 모자란 정령 포커의 카드가, 낮에 있었던 대화가 진짜라는 증거겠지.

       

       

       ‘뭔 일이라도 있었나?’

       

       

       아카데미에 오고 나서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던 걸까? 무언가 사람이 크게 바뀌었나?

       

       

       첫째 형 본인의 재능인 마법과 오러를 하찮게 여기고, 보드게임을 최고로 여기는 형의 생각이.

       

       

       원래 가졌던 생각인지, 아카데미에 오고 나서 생겨난 생각인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그냥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냐는 식으로 넘기기에는 무언가 꺼림칙했다.

       

       

       ‘형의 진심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무언가 있다.

       

       

       첫째 형이 그토록 보드게임을, 나를 추종하게 된 계기가.

       

       

       그리고 형과 했던 정령 포커는.

       

       

       ‘재밌었지.’

       

       

       동시에 깨달았다. 역시 형은 천재였다.

       

       

       고작해야 일주일 만에 모노폴리를 그 정도 수준까지 깨우치고 나름의 전략을 세워왔던 것처럼.

       

       

       처음 해보는 정령 포커였음에도 한 판 만에 게임의 감을 잡았으며, 두번째 판부터는 나도 진심을 다해야 이길 수 있을 정도로 빠르게 실력이 늘었다.

       

       

       형은 천재다. 그건 마법과 오러의 천재라는 말이기도 하지만.

       

       

       보드게임의 천재이기도 했으니.

       

       

       “……어쩐다.”

       

       

       형이 만들 보드게임 동아리의 고문 정도야 당연히 하기로 했다. 하지만 형은 그 수준에서 끝나지 않을 거라 말했다.

       

       

       아카데미에서 지식, 마법, 오러와 함께 보드게임을 가르치게 하겠다는, 누가 들어도 농담일 뿐인 허무맹랑한 꿈.

       

       

       허나 첫째 형 정도의 천재가 매달린다면 어떻게 될까.

       

       

       ‘생각보다 아카데미에 오래 머무르겠어.’

       

       

       동아리 고문 일도 일이고, 형에게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도 알아봐야 한다.

       

       

       원래라면 회합이 끝난 뒤 적당히 모노폴리의 유행 추세를 지켜보다가 아르케 마탑으로 돌아가려 했는데.

       

       

       아무래도 좀 더 아카데미에 있어야 할 듯 했다.

       

       

       ‘그래도 뭐.’

       

       

       오늘은 형 일 때문에 조금 많이 당황하긴 했지만.

       

       

       보드게임 동아리는 당연히 좋은 일이다. 모노폴리 말고 다른 보드게임도 자연스레 알릴 수 있고, 나도 여러 플레이어들과 보드게임을 할 수 있을 테니.

       

       

       ‘원래 세상에서도 대여섯 명 정도면 충분했지.’

       

       

       아마 지금은 모노폴리 광풍도 있을 테니 몇십 명 정도가 동아리에 오지 않을까.

       

       

       아델라에게 부탁해서 모노폴리를 환상으로 구현해야 할까, 아니면 급한 대로 보드게임을 대충 만들어야 할까.

       

       

       고문을 맡기로 한 이상. 

       

       

       형 일은 일단 두고서 어떻게 해야 동아리에 들어온 학생들이 모노폴리 외에도 다른 보드게임의 매력에 빠질지 고민했다.

       

       

       조금 많이 당황스러운 하루이긴 했지만.

       

       

       그럼에도 내일 들어올 파릇파릇한 보드게임 뉴비들을 생각하니 한없이 즐거운 밤이었다.

       

       

       

       *

       

       

       

       다음 날.

       

       

       “야! 거기 비켜! 난 새벽부터 줄 섰다고!”

       

       

       “난 어젯밤부터 있었거든? 사감 선생님들 순찰 피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냐?”

       

       

       “카일 바이런이 직접 고문을 맡는다면서? 아카데미 외부 인사가 동아리 고문을 맡는 경우야 종종 있긴 했지만……….”

       

       

       “농담이 아니라 카일 바이런이면 보드게임에 한해서 진짜 제국 최고의 고문 아니냐?”

       

       

       “지금 생각하니까 테라 놈들은 동아리에 못 들어가게 해야 하지 않을까? 회합 꼴찌잖아?”

       

       

       “꼴찌가 아니고 6등이라고! 그렇게 따지면 오히려 우리가 들어가야지!”

       

       

       “응 아스트론 아래.”

       

       

       “개자식이!”

       

       

       “………뭐야?”

       

       

       내가 첫째 형이 미리 신청해 뒀다는 동아리 부실 앞으로 갔을 때.

       

       

       그곳은 이미 사람으로 가득 찬 상태였다.

       

       

       ……건물 밖까지 학생들이 줄을 서고 있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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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came a Board Game Producer in Another World

Became a Board Game Producer in Another World

이세계 보드게임 제작자가 되었다
Score 3.4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oard Game Playing Guidelines] Using magic to break dice or tokens does not result in a draw.

Hallucination spells are not tolerated during the game. If caught, the consequences are your responsibility.

Asking spirits to peek at opponent’s cards is cheating. If the spirits are not participating in the game, kindly let them watch quietly.

Making noise by ringing a bell with your hand is acceptable. Using a bell to strike your opponent and make noise is not acceptable.

There is absolutely no racial discrimination, but when playing with Dwarves, please check the game board in advance. It may be a ‘special’ board g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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