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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2

     

    평화롭던 티타임은 끝나고 라스와 아셀라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흐른다.

     

    그 자리에 서 있는 호위기사들은 두 사람 사이에서 흐르는 적막한 기류에 피부가 따가울 정도였다.

     

    ‘또 시작이군.’

    ‘어차피 황녀 전하가 이기시겠지.’

    ‘이번엔 선생님께서도 할 말씀이 있으신 모양인데.’

     

    호위기사들은 근엄하게 임무를 수행하면서도 두 사람을 직관했다.

     

    카밀라 황비가 실권을 쥐고 있을 땐 늪에 잠겨있듯 끈적한 위협과 함께하던 월광궁이었다.

     

    나이가 어려도 아셀라의 카리스마는 카밀라보다 한참 품격이 있었다.

     

    지금의 월광궁은 마치 사방에 칼날이 깔린 날카로운 얼음 궁전 같다.

     

    그래도 고트베르크 주치의 덕분에 지금처럼 놓칠 수 없이 흥미로운 이벤트가 종종 발생한다.

     

    호위기사들은 두 사람의 모습을 한 순간도 놓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라스가 먼저 입을 뗐다.

     

    “오해가 있으시군요, 황녀님.”

     

    “아, 또 너는 아무 잘못 없는데 내가 이유 없이 오해했니?”

     

    “아뇨, 그런 의미는 아니고요.”

     

    “헤이케가 네게 혼약자의 자리를 제안했다고 들었어.”

     

    “그 문장만 떼놓으면 사실이긴 합니다만.”

     

    “하.”

     

    아셀라가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돌리고는 코웃음을 쳤다.

     

    ‘사실이었나.’

    ‘헤이케 1황녀가 선생님을 노리셨다고?’

    ‘이건 좀 큰 사건인데.’

    ‘아무리 그래도 나이 차이가… 1황녀가 정신이 나갔나.’

    ‘이봐, 여성 쪽이 나이가 많으니까 오히려 어울리는 거야.’

    ‘자네 아셀라 황녀님께 처형당하고 싶나?’

    ‘정신들 차려. 고도의 도발이었겠지.’

     

    월광궁의 기사들은 황실 어느 기사단보다도 수준이 높았다.

     

    그들은 동공만 움직여서 세세한 의사를 주고받을 수도 있었다. 작전 중에 적을 야습하기 위해 갈고닦은 능력이다.

     

    지금은 그 고급 능력을 황녀와 혼약자의 치정싸움 감상을 나누는데 사용하며 쓸모없이 낭비 중이었다.

     

    “황녀님께서 생각하시는 사교적인 대화가 아니었습니다. 파벌 간 협의 중 튀어나온 은유적 문장이었죠.”

     

    “어떤 협의.”

     

    “기간제 동맹 제안입니다.”

     

    “동맹?”

     

    “토진궁과 적대하는 현재, 월광궁은 기사도 자금도 준비가 부족합니다. 지금 목휘궁까지 적대하게 되면 월광궁의 행동이 매우 제한됩니다.”

     

    ‘선생님 말씀이 맞긴 하지 않나? 아군은 필요한 상황이야.’

    ‘선생님이 먼저 움직이신 것도 아니셨겠지.’

     

    기사들의 눈동자가 좌우로 움직이며 두 사람의 눈치를 살핀다.

     

    “내가 그걸 모르겠어? 왜 거기서 네 신변을 가지고 혼약이라는 말이 나오냐고.”

     

    “헤이케 황녀님도 농담이라 하셨고….”

     

    “참으로 즐거운 농담이라 웃음이 멈추지 않는구나.”

     

    “정색하고 계신데요.”

     

    “시력은 정상이네. 헤이케의 요사스런 얼굴도 똑똑히 보였어?”

     

    아셀라의 날카로운 언성에 테이블의 찻잔이 버티지 못하고 쩌적 금이 갔다.

     

    ‘어째 점점 심각해지는데.’

    ‘1황녀가 월광궁에 독을 풀었군.’

    ‘황녀님께서 다른 파벌 도발에 이토록 격하게 반응하신 적이 있었나?’

    ‘가시방석이군. 살려줘.’

     

    라스가 들리지 않게 한숨을 쉬었다. 인내심이 조금씩 깎여나갔다.

     

    이번 건에서 그는 자신이 적합한 판단을 내렸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옳았다.

    왜 아셀라는 그 한 문장에 집착해 이토록 화를 내는가. 조금 두통이 몰려왔다.

     

    “그래서, 기분이 어땠는데?”

     

    “어쩌고 자시고 할 것도 없죠. 1황녀님의 제안은 즉시 거절했습니다.”

     

    “…그래?”

     

    라스의 증언에 아셀라가 턱을 목에 붙이며 슬쩍 몸을 뒤로 뺐다.

     

    “당연하잖습니까. 제 충의를 시험해보려고 던진 함정이 뻔하니까요.”

     

    “당연하구나. 흐응.”

     

    뭐라고 쏟아낼 말이 없어진 아셀라는 괜히 입술을 오물거렸다.

     

    그렇다고 라스에게 얕보이고 싶지는 않다.

    어쩐지 가슴 속에서 꼬물꼬물한 감정이 피어오르지만 머리 끝까지 차오른 분노를 뒤덮을 정도는 아니었다.

     

    어떻게든 그의 잘못을 잡아내야 한다고 생각한 아셀라는 매도를 이어갔지만 비교적 자신감이 떨어진 톤이었다.

     

    “…동맹같이 중요한 안건이 있으면 내게 가장 먼저 보고해야지. 여기서 차나 마시고 있으면 어떡해.”

     

    “황녀 전하.”

     

    구석에서 조용히 있던 자그마한 소녀가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왔다.

     

    네리아가 다시 한 번 예를 표하고 또박또박 말했다.

     

    “고트베르크 가문의 영애 네리아 고트베르크에요. 외람되오나 한 말씀 올려도 될지요.”

     

    이미 면식이 있음에도 자신을 낮춰 아셀라를 존중하는 태도다.

    아무리 아셀라라도 조그마한 아이에게 짜증을 부리지는 않았다.

     

    “허가할게.”

     

    “오라버니… 고트베르크 선생님은 분명 중요한 보고를 하러 황녀님께 가시던 길이었을 거예요. 제가 연락도 없이 나타난 탓에 저를 맞아주시느라 늦어버렸어요. 이번 사건은 제 잘못이니 오라버니를 너무 탓하지 말아주세요….”

     

    네리아가 또박또박 의견을 피력했다.

     

    “영애, 내 말은….”

     

    뭐라 대꾸하려던 아셀라는 자기도 모르게 멈칫했다.

     

    네리아의 천진난만한 눈동자가 울먹거리며 당장에라도 눈물을 터트릴 것만 같았다.

     

    본래 그런 것에 마음이 약해지지 않을 아셀라였지만 네리아의 표정은 파괴력이 너무나 강했다.

     

    어쩐지 눈이 막스와 닮기도 했고.

     

    ‘황녀님께서 화낼 타이밍을 놓치셨다!’

    ‘분노도 때가 있는 법. 지나가 버리면 애매해지지.’

     

    기사들이 흥미진진하게 두 사람의 분위기를 지켜본다.

     

    따지고 보면 네리아는 성녀로 선택받을 수도 있는 몸이었다.

     

    이 대치는 절대선과 절대악의 전초전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대치의 결과는.

     

    “흐잉.”

     

    압박감을 참지 못한 네리아의 입에서 흘러나온 소동물 같은 소리에 절대선의 승리로 끝났다.

     

    네리아를 못되게 괴롭히는 기분이 들어버린 아셀라가 시선을 피해버린 것이었다.

     

    “됐어. 바로 보고하러 오지 않은 점을 문제 삼았던 거야. 이유를 알았으니 이 건은 그만 언급하겠어.”

     

    누가 봐도 이 자리의 핵심은 헤이케의 혼약 제안이었건만, 아셀라는 어느새 스무스하게 주제를 돌려버렸다.

     

    ‘황녀님께서… 변명을?’

    ‘불편한 상황에서 탈주를 선택하셨다.’

    ‘고트베르크 영애의 공격력도 상당하군.’

     

    기사들은 아셀라 앞에서 저만큼이나 버텨낸 네리아에게 속으로 박수를 보냈다.

     

    “송구합니다, 황녀님. 재발하지 않도록 주의하겠습니다.”

     

    “…그래.”

     

    아셀라가 라스의 사과를 뻘쭘하게 받아들였다.

    그녀의 시선이 테이블에 놓여있던 라스의 수첩으로 향했다.

     

    “이건 뭐니?”

     

    “아, 황녀님께서 신경 쓰실 내용은 아닙니다. 저희 가문의 이야기라.”

     

    “그러면 더더욱 알아야겠는데.”

     

    아셀라가 슥 제약 공장 사업에 관한 내용을 금방 훑었다.

     

    “자금이 많이 필요하겠네.”

     

    “그렇습니다.”

     

    “월광궁에서 투자할게.”

     

    “정말입니까?”

     

    투자라는 말에 라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잠깐, 퇴직한 후에도 계속 지분을 요구하면 귀찮아지는데. 기한 설정은 필요하겠다고 라스가 생각했다.

     

    “그래. 비전 있는 사업이야. 동맹으로 자금이 순환하면 고트베르크 후작령에도 전달하겠어. 공자, 다음부터 이런 중요한 안건은 바로 상담해.”

     

    “명심하겠습니다. 기획서는 곧 전달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자각을 가져.”

     

    “어떤 자각이요.”

     

    아셀라가 눈을 감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왜 이 남자는 한 마디를 잘했다 싶으면 바로 눈치 없는 소리를 해대는지.

     

    속이 부글부글 끓지만 다시 화를 낼 수도 없다. 지켜보던 기사들은 그 이유를 잘 알았다.

     

    ‘이미 주제를 돌리셨지. 다시 언성을 높이시면 품위가 떨어지실 뿐이야.’

    ‘역시 선생님이야. 후작가에서 여자 여럿 미치게 만드셨겠어.’

    ‘황녀님이 명확하게 명령하시지 않는 한 선생님이 먼저 숙이시진 않을 터인데.’

     

    과연 누가 먼저 자존심을 굽힐 것인가.

    아니면 이 자리도 무던하게 파하는가.

     

    기사들의 이목이 집중된다.

     

    결국 아셀라가 라스를 삿대질하며 청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가 본녀의 혼약자라는 자각 말이야.”

     

    라스는 그 말을 듣고도 동요하는 기색 없이 예를 지켜 인사했다.

     

    “명심하겠습니다.”

     

    그의 반응을 본 아셀라는 홱 몸을 틀어 접객실을 나섰다.

    발소리가 유난히 커다랗다.

     

    ‘삐지셨다.’

    ‘삐지셨군.’

     

    호위기사들은 예상치 못한 고트베르크의 승리에 감탄하며 아셀라를 따라 우르르 진형을 움직였다.

     

     

     

    ***

     

     

     

    “나 억울해.”

     

    아셀라와 한 판 붙고 나니 지쳐서 오후 업무를 할 생각이 안 들었다.

     

    헤이케에게서 이것저것 잔뜩 뜯어낼 단초를 마련해왔더니 혼만 났다.

     

    마음에 잔뜩 기스가 났다. 아쉽게도 이건 의학으로 치료할 수 없다.

     

    대신 네리아의 부드러운 볼살을 조물락대며 상처를 메우기로 했다.

     

    “죄송합니다.”

     

    타냐가 내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목휘궁과 동맹 건은 긴급한 사안이라 판단했고, 선생님께서 바쁘셨기에 대신 보고하였습니다만, 경솔했습니다. 내용을 다 듣기도 전에 황녀님께서 뛰쳐나가셨기에….”

     

    “잘 하는 짓이다. 황녀님은 그만큼 내가 못 미더웠나보지.”

     

    “반대가 아닐까요? 오라버니.”

     

    네리아는 내게 볼을 잡힌 채로 잘도 똘망거렸다.

     

    “황녀님이 오라버니를 많이 아껴주셔서 다행이에요.”

     

    대체 어디서 뭘 본 거니, 네리아야.

     

    “어차피 보고가 늦으면 늦을수록 황녀님의 분노가 더 커지셨을 테지요. 제 덕분에 매 좀 덜 맞았다고 생각하십시오.”

     

    “단장, 너 요즘 아셀라랑 놀더니 진짜 뻔뻔해졌다.”

     

    내 타박에 타냐는 모른 척하며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뭐,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쨌든 내가 보고했어야 할 중요한 사항이었다. 타냐의 판단은 옳았다.

     

    결과적으로 지원 약속도 받아냈다.

    아셀라에게선 나를 괴롭힌 만큼 최대한 뜯어내야겠다.

     

    “오라버니는 황녀님과 함께 가시죠? 파티, 기대돼요!”

     

    나는 멋지게 악녀를 쓰러트린 작은 성녀님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유니유니야님 후원 감사해요! 항상 재밌게 봐주셔서 기뻐요 : D :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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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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