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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2

       [서브 퀘스트-후원자]

         

       내가 이 세계로 건너와서 첫 번째로 해결한 퀘스트.

         

       그때는 빙의 된 지 얼마 안 된 터라 모든 게 어설펐다.

       ‘웃는 남자’에 이리저리 휘둘리고 몸에 총알까지 박히기도 했다.

         

       퀘스트의 내용 자체는 단순하고 보상도 작았다.

       하지만 그 파급 효과는 컸다.

       ‘메인 퀘스트-서커스 그랑프리’가 활성화된 것은 물론 2년 반 동안 여행의 자금을 대줄 후원자를 얻게 되었다.

         

       문제는 그 퀘스트가 TT3에서 파생된 것이라는 것이다.

         

       TT1와 TT2에 나오는 적들은 지금 시점에서는 적들이 아니었다.

       그들이 괴물이 되는 것은 본편이 진행된 이후의 이야기였다.

         

       현재 그들은 대부분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어떤 관계를 맺어도 미래에 대한 부담이 없었다.

       유령 데릭 같은 경우는 미래의 조력자지만 죽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TT3에 나오는 적들은 달랐다.

       그들은 본편 이전 시점부터 원더스타인과 관계를 맺고 있는 이들이었다.

         

       나의 변화된 행동이 그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직접적인 반향이 되어 돌아올 수 있었다.

       TT3와 관련된 퀘스트는 신중하게 처리해야 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차마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당장 몸에 적응하고, 진화연구소로 이것저것 실험해보고, 눈앞에 주어진 첫 과제를 처리하는 데 급급했으니까.

         

       피에르가 카리브해의 교단 측에 전한 정보가 무엇인지 몰랐다.

       하지만 그것이 그곳의 우두머리인 ‘토끼’의 판단에 영향을 미친 게 분명했다.

         

       무언가가 그녀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다.

         

       아니꼬움, 질투 혹은 장난기.

         

       그 원인으로 추측되는 게 몇 가지 있었지만 확실한 것은 없었다.

         

       그녀는 원더스타인과 안면이 있는 사이였지만, 완전한 우군이라 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녀는 게임에서도 성격이 워낙 변덕스럽고 행동도 제멋대로 굴곤 했다.

       날 방해하려 들다가 그다음 날부터 갑자기 나에게 협조적으로 굴어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왜 그런 소문을 퍼트린 걸까요?”

       “저에 대한 흠집 내기죠.”

         

       아나이스는 허탈한 웃음을 내뱉었다.

       그녀도 삼촌이라는 작자가 조카의 연애사로 뒷공작을 벌이는 꼴이 기가 찬 모양이었다.

         

       “두 달 전, 저는 삼촌의 살인미수 행각을 이사회에 통보했어요. 그리고 삼촌에게 수배령을 내렸죠. 삼촌은 어떤 변명도 없이 도망쳤어요. 그건 자신의 죄를 인정한 거나 다름없었죠. 그래서 삼촌 쪽 파벌들도 쥐죽은 듯 조용히 지냈고요. 괜히 나섰다가 살인은 둘째치고 그가 저지른 부정을 덤터기쓸 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몇 주 전부터 상회 내에 이상한 소문이 돌더군요.”

         

       그녀는 여기서 말을 잠시 멈추고 내 눈치를 봤다.

         

       서커스단의 명성을 깎아 먹은 소문이 그것인 듯했다.

         

       “괜찮습니다. 얘기해주세요.”

       “오해하지 마세요. 소문이 그렇다는 거니까. 그러니까 그게 뭐냐면……제 옆에 수상쩍은 마술사가 감언이설로 저를 구워삶아 판단력을 흐리게 하고 조종하고 있다는 뭐 그런 내용이었어요.”

         

       나는 속으로 신음을 삼켰다.

       영 틀린 소리는 아니었다.

       원래의 원더스타인은 그럴 목적으로 접근했을 테니까.

         

       “삼촌이 절 죽이려 했다는 것도 저의 과대망상으로 치부하더군요. 마술사에게 현혹되어 헛소리하는 거라고.”

       “사람들이 그걸 믿습니까?”

         

       아나이스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제 행보가 사람들 눈에 이상하게 비치는 건 사실이에요. 한 영지의 영주가, 한 상회의 회장이 서커스단을 쫓아다니면서 여행을 다니다니……. 주변에 들리는 증언이라고는 제가 단장님이랑……꼭 붙어 다닌다는 둥……제가 단장님께……푸, 푹 빠져있다는 둥……그런 얘기밖에 안 들리니까……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어쩔 수 없죠.”

         

       하긴 그 부분에 대해서는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

       세계에서 순위권 안에 드는 대상회의 주인이 무명의 떠돌이 마술사랑 사랑에 빠졌다?

       정신 나갔다고 난리를 피우는 게 정상적인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아까 1층에서 있었던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이제야 이해가 갔다.

       

       “제 파벌의 이사들도 소식을 듣더니 저보고 어리석은 짓 하지 말라고 항의서한을 보내왔을 정도예요. 그들이 그랬다는 건 상회 사람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거나 다름없죠. 제가 단장님께……그……유, 유혹당한 게 분명하다고……. 안 그러면 그런 무명의 서커스단에 갑자기 후원할 이유가 없다면서…….”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익었다.

       그녀는 빠르게 부채를 파닥였다.

         

       “다들 제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어서 아무에게나 기대고 싶어 한다고 떠들어대더군요. 흥. 얼마 전까지 베르그송 상회 최고의 전성기를 이룩하고 있는 회장님 어쩌고 할 때는 언제고……. 웃긴 일이죠.”

         

       이쯤 되니 나는 한 가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그래봤자 무슨 명백한 증거가 없는 ‘소문’일 뿐이었다.

       그에 대한 효과적인 대처법은 간단했다.

         

       “아니라고 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녀는 왜 이런 소문이 퍼지도록 방관하고 있는 것인가.

       아까 인터뷰 자리에서도 한마디만 하면 되지 않았나?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요.”

         

       그러면 간단히 해결될 문제였다.

       들어보니 이 사건이 이렇게 커진 이유는 그녀가 이런 소문을 방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부정하고 수습에 들어가면 문제가 커지기 전에 진화할 수 있었다.

         

       “저는 자작님의 병을 치료했고, 제가 후원을 받은 건 그냥 거래의 일환이었잖아요? 그동안 서커스단을 쫓아다닌 것도 사랑 때문이 아니라 후속 치료를 받기 위해서라고 하면 되고요.”

         

       괜찮은 변명이라 생각했다.

         

       이것이면 소문을 잠재우고 서커스단의 명성을 회복할 수 있었다.

       아나이스도 후원자로서의 위치가 흔들릴 일이 없고, 토끼의 장난질로부터 퀘스트도 방어할 수 있었다.

         

       일석삼조의 전략.

         

       그러나 그녀는 내 말을 듣더니 헛웃음을 터트렸다.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요……?”

         

       그녀는 숨을 거칠게 푸푸 내뱉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녹색 머리카락이 커튼처럼 드리워지며 그녀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숨소리가 간신히 가라앉았을 무렵,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죠.”

         

       가뭄의 논바닥처럼 쩍쩍 갈라진 것 같은 목소리였다.

         

       그녀의 속에 있던 질기고 단단한 무언가가 북 찢어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나는 침을 삼켰다.

       무언가……

       무언가 잘못됐다.

         

       내가……뭔가를 잘못 말했다.

         

       말하고 나서야, 아니, 그녀가 반응을 보이고 나서야 나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사님들도 그렇게 발표하라고 등을 떠밀더군요.”

         

       그녀가 웃음을 흘렸다.

       지금까지 들은 그녀의 웃음소리 중에 가장 싸늘하고, 답답하고, 처연한 것이었다.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두 눈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녀의 입술에는 어제부터 몇 번이나 본 그 슬픈 미소가 걸려 있었다.

         

       “맞아요. 사귀는 사이는 무슨. 후후. 단장님과 저의 관계는……그냥 거래였을 뿐인데…….”

         

       그녀는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제가 좀 욕심을 부렸네요.”

         

       그녀의 미소가 일그러졌다.

       천천히.

         

       그리고 다시 활짝 웃었다.

       재빨리.

         

       “단장님이 잘못한 건 아니에요.”

         

       나는 그녀의 말을 부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마땅히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단장님은 좋은 사람이에요. 저를 구하기 위해 총알도 대신 맞으시고.”

         

       돈 때문이었다.

         

       “소녀를 구하기 위해 물로 뛰어드시고.”

         

       호감도 때문이었다.

         

       “단원을 보호하기 위해 폭발을 몸으로 받으셨죠.”

         

       퀘스트 때문이었다.

         

       “자신의 꿈을 위해 한눈팔지 않고 정진하는 모습도 보기 좋았어요.”

         

       내가 받을 보상 때문이었다.

         

       “알아요. 단장님은 좋은 사람이죠.”

         

       아니다.

         

       “안 그러면 제가 그렇게 쏘아붙이는 데도 그렇게 웃으면서 받아주셨을 리 없어요.”

         

       저주 때문이다.

         

       “한 달 동안 제 어리광에 어울려주셔서 감사해요.”

         

       나는 감사받을 일을 한 적이 없었다.

         

       아니, 감사해야 하는 건 오히려 나였다.

       그녀가 지금까지 가만히 있다가 오늘에야 이 사실을 털어놓는 이유를 방금 알아차렸다.

         

       그녀는 ‘이사회에서 후원을 철회하라고 압박이 들어와요’라고 말하며 자신만이 그 공격을 방어해줄 수 있다고 어필할 수 있었다.

       그러면 그녀는 원하는 것을 더 손쉽게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자신의 후원을 무기 삼아 내 마음을 붙잡지 않았다.

         

       가끔 후원을 철회하겠다고 들먹일 때는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농담 차원에서 던진 것이었다. 절대 진지한 상황에서 그 말을 입에 담지 않았다.

         

       후원자 대 예술가라는 권력 관계를 이용하려 들지 않았다.

       그녀가 엎드리라면 엎드릴 수밖에 없는 내 처지인데도.

         

       이번 일을 개막식이 시작하는 날에 밝힌 이유가 그거였다.

       일단 대회가 시작되면 상회에서는 투자한 것을 철회할 수 없으니까.

       내가 최대한 편하게 부담가지지 않도록 그녀가 배려한 것이었다.

         

       혹시나 그런 소문을 내가 들었을 때, 후원은 어떻게 되는 거냐고 전전긍긍하지 않도록.

         

       그런 그녀에게 나는…….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요.

         

       “갑자기 울어서 죄송해요. 각오는 했는데, 후후. 그래도 단장님 입에서 그런 말을 직접 들으니 가슴이 아프네요.”

         

       뭐라고 위로를 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저 멍청하니.

       멍청하니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단장님은 저랑 한 달 같이 지내면서 저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셨나요?”

         

       나는 이 방에서 당장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스스로에 대한 분노와 부끄러움이 내 안에서 나를 죽이기 위해 덤비고 있었다.

         

       -후원자 접대는 해야지.

       -왜 자꾸 귀찮게 하는 거지?

       -사랑은 무슨. 착각하는 거겠지.

         

       나는 예전에 내 수발을 들어주는 도우미분에게 사랑을 고백했다가 차인 적이 있었다.

       그녀의 친절과 미소를 호의로 착각했었다.

         

       “차라리 단장님이 저를 밀어냈다면 좋았을 텐데.”

         

       돈을 받고 일할 뿐이라고 했다.

       친절도 미소도 전부 고객을 향한 배려라고.

         

       “차라리 저를 향해 웃어주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도우미를 교체한다는 전화 통보.

       왜 그분은 그렇게 도망쳐버린 것일까.

       차라리 원래 관계대로 돌아가자고 했다면 받아줬을 텐데.

         

       “차라리 제가 싫다고 했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그분이 내 마음을 거절하고 다시 웃는 낯으로 나타나 내 수발을 들어주었다면 정말로 기분이 어땠을까?

       그 미소 그대로, 그 친절 그대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대로 행동했으면?

         

       그게 더 잔인한 일 아니었을까?

       차라리 냉정하게 끊어버린 게 나를 위한 배려 아니었을까?

         

       나는 몇 년이 지난 지금에야 그걸 깨닫게 되었다.

         

       내 미소와 친절에 상처받은 사람과 마주하면서…….

         

       “단장님 말이 맞아요.”

         

       그녀는 울음을 삼키려다 다 못 먹은 것처럼 내뱉듯이 말했다.

         

       “우, 우리……아. 아무 사이도 아, 아니잖아요?”

         

       그녀가 떨리는 입술로 간신히 미소를 지었다.

       동시에 목멘 소리를 내며 눈물을 흘렸다.

         

       그녀의 눈물을 보고 있으니, 그녀의 울먹거림을 듣고 있으니, 그녀가 내게 품었던 마음을 느끼고 있으니, 나 자신이 혐오스러워졌다.

         

       내가 지난 한 달 동안 그녀에게 가한 건 단순한 벽 세우기가 아니었다.

         

       비겁한 화풀이였다.

       옛날의 나를 떠올리게 하는 그녀를 밀쳐내면서 안도감을 얻었다.

         

       나는 착각을 했던 거야.

       그러니 네가 하는 것도 착각이야.

         

       하지만 그때 내 마음이 정말 착각이었나?

       그분을 좋아하지 않았나?

       실연당했다는 걸 부정하고 싶어서 착각했다고 자신을 속인 게 아니었나?

         

       내 마음도 알지 못하면서 상대의 마음을 다 파악한 척 짚고 빈정댔다니.

         

       크게 울부짖고 싶었다.

         

       그러나 내 목구멍에서는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가만히 웃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부디 그것이 그녀의 입에 걸린 것과 같은 쓸쓸하고 슬픈 미소로 보이길 바랐다.

         

       안 그렇다면 내 입가를 찢어서라도 우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고 싶었으니까.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2021년 8월 20일
    -숫눈 님, 10코인 후원 감사합니다! 더욱 재미있게 쓰려고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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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the Leader of the Monster Circus Troupe

I Became the Leader of the Monster Circus Troupe

괴물서커스단의 단장이 되었다
Score 4.4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The protagonist, a famous YouTuber known for playing the game trilogy “Tril Trilo Trilogy,” finds himself possessing the final boss of the game world. Before the release of the new instalment in the series, he receives an offer from the game’s developer to play a prequel, “Part 0,” which explores events that occurred before the first instalment. Since he is a fan of “Tril Trilo Trilogy,” he eagerly accepts the offer. However, through some twist of fate, he wake ups in the world of “Tril Trilo” in the dreadful body of the final boss of the trilogy, a character named Frank Wonderst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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