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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2

       당황한 엘리를 만족할 때까지 놀린 뒤에야 입장한 미궁.

       

       하루 사이에 장비가 싹 바뀐 덕일까. 아니면 새 스킬 덕에 한층 예민해진 감각 덕일까.

       

       대수림이 배경이라 원래도 공기가 좋은 곳이지만…오늘따라 한층 더 상쾌하게 느껴진다.

       

       “킁킁.”

       

       “…나는 요나처럼 냄새 안 나는데.”

       

       “그렇게 말하면 제가 더러워 보이잖아요. 뭣보다 리디아 님 냄새 맡은 거 아니거든요!”

       

       숲 냄새를 맡았을 뿐이다. 세워질 때부터 도시였던 판 그레이브에서는 의외로 맡기 힘든 냄새거든.

       

       리디아가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나저나 정말 신전에 안 가봐도 되겠어? 가호를 받았다면서. 사제를 할 생각이 없더라도, 가호를 받은 사람은 신전에서 약간의 보조금을 주는 걸로 알고 있는데.”

       

       “하지만 그 보조금은 어떤 가호를 받았느냐에 따라 달라지잖아요. 제가 받은 건 체향이 좋아질 뿐이니 그리 격 높은 가호는 아니에요. 얼마 나오지도 않는 보조금 때문에 신전이랑 엮이는 건 좀….”

       

       “요나는 왜 그렇게 신전을 피하는…아니, 아무것도 아냐.”

       

       무언가 말하다 말고 고개를 휘휘 젓는 리디아. 그녀가 자신의 볼을 짝짝 두드리고서야 말을 이었다.

       

       “그래서? 오늘은 어디까지 갈 거야? 역시 아이언 울프?”

       

       “아뇨. 이번에는 자이언트 멘티스. 가능하면 홉 고블린에도 도전해 보고 싶네요.”

       

       “…위험하지 않을까. 이번에 새 장비들을 맞췄다는 건 알지만, 요나의 실력은 크게 변하지 않았잖아.”

       

       “글쎄요. 전 자신 있단 말이죠.”

       

       한차례 어깨를 으쓱이고는 히죽였다.

       

       “말했잖아요? 깨달음이 있었다고. 제가 오늘 그게 뭔지 한번 보여드릴게요.”

       

       “…뭐, 좋아. 어차피 내가 있으니까 위험하진 않을 거야. 뭘 하건 내 눈이 닿는 거리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주의해.”

       

       “그럴게요!”

       

       히히 웃으며 품에서 지도를 꺼냈다. 리디아의 도움 없이도 길을 잃지 않는 모습을 몇 번 보여주자, 아예 1층 지도를 넘겨주더라고.

       

       리디아를 졸졸 따라가기만 하던 예전과 달리, 이번에는 내가 앞장서서 복잡한 대수림의 길을 헤쳐 나가던 도중.

       

       갑자기 느껴지는 묘한 위화감에 발걸음을 멈추고 정신을 집중해 보았다.

       

       코끝을 간질이는 희미한 꼬린내. 그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거기에는 어설프게 숨겨진 고블린의 함정이 있었다.

       

       아마 함정 옆에 있는 나무 뒤에 숨어있는 거겠지.

       

       …이제 보니 시력 좋아진 게 체감되네. 꽤 먼 거리에 있음에도 코앞에서 본 것처럼 선명하게 보이거든.

       

       소리를 먹는 발걸음을 얻으며 덩달아 얻은 것은 강한 힘도, 민첩한 순발력도, 쥐꼬리만 한 마력도 아니었다.

       

       감각.

       

       시각, 미각, 촉각, 후각, 청각 같은 기본적인 오감은 물론이요. 균형감각, 직감, 심지어는 마력을 조작하는 감각까지.

       

       감각이라고 부를 만한 것들 대부분이 획기적인 수준으로 성장했다.

       

       근력 운동으로 근육을 성장시켜 힘을 키우듯, 본래라면 오랜 시간에 걸쳐 끌어올렸을 감각을 한순간에 얻은 것이다.

       

       다만, 그게 이 정도로 대단할 줄은 몰랐지.

       

       씨익 웃으며 유니콘 단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는 전력으로 기척을 죽여가며 숨어있는 고블린을 향해 천천히 돌아갔다.

       

       뒤에서 리디아가 헛숨을 삼키긴 했지만,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니겠지. 집중해야 하니 대충 넘겼다.

       

       한걸음. 또 한 걸음. 발이 어떤 각도로 바닥에 닿는지, 실린 힘은 얼마나 되는지, 호흡은 어떻게 제어하고, 고블린 시야의 사각은 어디쯤인지 등등.

       

       머릿속으로는 온갖 계산을 돌리며 움직이느라 정신이 없었으니까.

       

       그렇게 모든 감각을 총동원해, 세상에 남기는 흔적을 최소화하던 것도 잠시.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나는 고블린의 뒤편에 서 있었다.

       

       분명 부스럭거리기 쉬운 풀밭을 걸어갔음에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녀석. 

       

       나무 너머로 덩그러니 남아있는 리디아 쪽을 힐끔거리더니, 기대감 가득한 표정으로 소리죽여 웃기 시작했다.

       

       놀라울 정도로 추한 낯짝에 흠칫한 것도 잠시. 미리 뽑아둔 단검을 뒤에서부터 찔렀다.

       

       목표는 녀석의 폐.

       

       푸욱.

       

       “…어?”

       

       “고, 브?”

       

       케이크라도 자르듯이 너무나 간단히 고블린의 살을 파고드는 단검.

       

       물론 고블린이 단단한 종족은 아니니 푹 찌르면 뚫리는 녀석들이긴 한데…아무리 그래도 근육이 있고, 지방이 있는 놈들 아닌가.

       

       아무런 저항도 없이 박힐 줄은 몰랐지.

       

       고블린 또한 갑자기 자신의 가슴에서 튀어나온 순백의 칼날이 당황스러운지 흠칫 굳은 모양이다.

       

       뭐, 어쨌건 은신 효과는 4성답게 확실한 것 같으니 이제 고블린을 마무리해야….

       

       툭.

       

       “?”

       

       단검을 뽑아, 이번에는 뒷목을 찌르려고 했건만…그보다 한발 빠르게 고개를 툭 떨구며 쓰러지는 녀석.

       

       자세히 살펴보니 이미 죽어있었다. 그것도 검게 물든 얼굴로.

       

       “…독?”

       

       당연한 말이지만 나는 뭘 바른 기억이 없다. 심지어 찌른 곳도 뼈로 보호받는 심장이 아닌 폐였으니, 죽긴 해도 이렇게 빨리 죽진 않았을 거란 말이지.

       

       그렇다면 원인은 하나뿐이다.

       

       “너 진짜 마검이구나?”

       

       분명 깊게 찔렀음에도 핏물 하나 묻어있지 않은 단검이 잘게 진동했다.

       

       우웅-!

       

       비처녀의 피를 머금어 불쾌한 것인지, 아니면 에고라도 있어 내 말을 부정하는 건지 모를 반응.

       

       “아니지. 비처녀가 아니라 사악한 것에도 반응한다고 했던가.

       

       물론 미궁의 몬스터는 죽어도, 랜덤 시공간의 미궁에서 다시 태어나기를 반복하는 녀석들이다.

       

       하지만 그게 정말 새로운 몸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뜻은 아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재구축에 가까운 거지.

       

       즉, 디폴트 값은 처음 미궁에 갇힌 상태라고 보면 된다.

       

       미궁에서 생활하며 나이를 먹기도 하고, 성장하기도 하며, 멀쩡하게 살아가긴 하지만….

       

       죽음에 이르러 다시 태어나면 처음 미궁에 갇혔을 때의 모습으로 리셋되는 것이다. 심지어 기억까지도.

       

       당연히 처녀성의 여부도 거기에 포함된다.

       

       그런 의미에서 부락을 형성해 나름의 세력을 일군 홉 고블린이면 모를까, 방랑 고블린은 수컷을 구하지 못해 눈이 돌아간 애잔한 베타피메일이다.

       

       힘도 없고, 짝도 없고, 지능도 비교적 떨어지는 것들.

       

       운 좋게 덜떨어진 모험가를 사로잡는 게 아니라면 평생 처녀로 살아야 하는 녀석들이 방랑 고블린이다.

       

       …이런 놈들의 처녀막 여부는 별로 알고 싶지 않지만, 아무튼 설정상으로는 그렇단 말이지.

       

       종합하자면 유니콘 단검이 반응한 건 비처녀라서가 아니라 사악해서라는 건데…애초에 몬스터는 사악하다기보다는 그냥 광기에 사로잡힌 종족의 총칭이다.

       

       언데드나 마족 같은 척 봐도 사악한 놈들이라며 모를까 고블린은….

       

       “아.”

       

       고블린을 사악한 존재라는 전제로 생각해 보니 떠오른 것이 있다.

       

       지금은 폐기된 설정이지만, 고블린이 몬스터가 되기 전에는 소귀족小鬼族을 자칭했다는 설정이 있다.

       

       애초에 고블린은 고블린 특유의 고브 고브 거리는 말투와 발성 기관 때문에 다른 종족이 붙인 이름이고.

       

       자기들끼리는 소귀라며 빼애액 거렸다는 설정인데….

       

       생각해 보니 소설에 나올 이유는 하나도 없는 쓸데없는 설정이라 그냥 머리속에 묻어두기로 했던 녀석이다.

       

       “설마 그게 반영된 건가?”

       

       그 외에는 다른 이유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자세한 건 다른 뒷 설정이 있는 종족들 상대로 이런저런 실험을 해봐야 알 것 같으니 지금은 깊게 생각하지 말자.

       

       중요한 건 고블린에게는 유니콘 단검의 특공이 먹힌다는 것.

       

       그거면 충분하다.

       

       스윽 심장을 갈라 마석을 챙기고는 다시 리디아에게로 돌아갔다.

       

       “리디아 님! 리디아 님! 제 은신 실력 어땠나요? 어디 부족한 점이라도 있었나요? 고블린이야 워낙 멍청하니 잘 속아 넘어가도 다른 종족은 아닐 수도 있잖아요.”

       

       “…없어.”

       

       “네?”

       

       리디아가 반달가슴곰은 달이 아닌 곰이고, 키위새는 키위가 아닌 새지만, 오리너구리는 너구리가 아닌 오리너구리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처럼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계속 지켜보고 있었던 게 아니라면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거야. 오러를 전력으로 끌어올린 상태라면 이야기는 다르겠지만…평소에 오러를 줄줄 흘리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어.”

       

       “오? 저한테서 막 좋은 냄새 난다면서요. 혹시 냄새 때문에 들키지는 않을까요? 여차하면 여신님한테 리콜 기도 드려볼 생각도 했는데.”

       

       “여신님을 동네 사과 가게 아줌마처럼 대하는 건 둘째 치고, 향기도 전혀 문제없었어. 요나가 마음먹는 순간 냄새까지 완전히 사라졌으니까.”

       

       “세상에.”

       

       하기야. 본래의 체취를 좋은 향기로 덮어씌우는 게 가능했다면, 반대로 체취를 지우는 것도 가능했겠지.

       

       기껏 4성 스킬을 뽑았더니, 1성짜리 권능 때문에 무용지물이 될 걱정은 덜었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자니 리디아가 평소보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물었다.

       

       “대체 엘리 선배에게 어떤 모습을 들켰길래, 그렇게 필사적인 은신 요령을 깨달은 거야? 말이 깨달음이지 그렇게 휙휙 성장할 수 있는 게 아닌데.”

       

       “어떤 모습이냐니. 뭐어. 알려드릴 수는 있지만, 어디 가서 말하고 다니면 안 돼요?”

       

       “응. 비밀로 할게.”

       

       입으로 지퍼를 잠그는 시늉을 하는 리디아. 묘하게 눈빛이 진지한 걸 보아 무슨 사건인지 궁금한 게 아니라, 무슨 깨달음인지가 궁금한 모양이다.

       

       …조금 미안해지네. 이제부터 보여줄 건 리디아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닌데. 

       

       쪼르르 달려가 리디아의 앞에 섰다. 진지한 얼굴을 하고있는 그녀를 향해 양손으로 V를 그렸다.

       

       “응?”

       

       그리고는 눈을 위로 까뒤집고 살짝 벌린 입으로 혀를 쭉 내밀었다.

       

       “아헤-”

       

       완벽한 아헤가오 더블피스였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미친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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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2

EP.52





       당황한 엘리를 만족할 때까지 놀린 뒤에야 입장한 미궁.


       


       하루 사이에 장비가 싹 바뀐 덕일까. 아니면 새 스킬 덕에 한층 예민해진 감각 덕일까.


       


       대수림이 배경이라 원래도 공기가 좋은 곳이지만…오늘따라 한층 더 상쾌하게 느껴진다.


       


       “킁킁.”


       


       “…나는 요나처럼 냄새 안 나는데.”


       


       “그렇게 말하면 제가 더러워 보이잖아요. 뭣보다 리디아 님 냄새 맡은 거 아니거든요!”


       


       숲 냄새를 맡았을 뿐이다. 세워질 때부터 도시였던 판 그레이브에서는 의외로 맡기 힘든 냄새거든.


       


       리디아가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나저나 정말 신전에 안 가봐도 되겠어? 가호를 받았다면서. 사제를 할 생각이 없더라도, 가호를 받은 사람은 신전에서 약간의 보조금을 주는 걸로 알고 있는데.”


       


       “하지만 그 보조금은 어떤 가호를 받았느냐에 따라 달라지잖아요. 제가 받은 건 체향이 좋아질 뿐이니 그리 격 높은 가호는 아니에요. 얼마 나오지도 않는 보조금 때문에 신전이랑 엮이는 건 좀….”


       


       “요나는 왜 그렇게 신전을 피하는…아니, 아무것도 아냐.”


       


       무언가 말하다 말고 고개를 휘휘 젓는 리디아. 그녀가 자신의 볼을 짝짝 두드리고서야 말을 이었다.


       


       “그래서? 오늘은 어디까지 갈 거야? 역시 아이언 울프?”


       


       “아뇨. 이번에는 자이언트 멘티스. 가능하면 홉 고블린에도 도전해 보고 싶네요.”


       


       “…위험하지 않을까. 이번에 새 장비들을 맞췄다는 건 알지만, 요나의 실력은 크게 변하지 않았잖아.”


       


       “글쎄요. 전 자신 있단 말이죠.”


       


       한차례 어깨를 으쓱이고는 히죽였다.


       


       “말했잖아요? 깨달음이 있었다고. 제가 오늘 그게 뭔지 한번 보여드릴게요.”


       


       “…뭐, 좋아. 어차피 내가 있으니까 위험하진 않을 거야. 뭘 하건 내 눈이 닿는 거리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주의해.”


       


       “그럴게요!”


       


       히히 웃으며 품에서 지도를 꺼냈다. 리디아의 도움 없이도 길을 잃지 않는 모습을 몇 번 보여주자, 아예 1층 지도를 넘겨주더라고.


       


       리디아를 졸졸 따라가기만 하던 예전과 달리, 이번에는 내가 앞장서서 복잡한 대수림의 길을 헤쳐 나가던 도중.


       


       갑자기 느껴지는 묘한 위화감에 발걸음을 멈추고 정신을 집중해 보았다.


       


       코끝을 간질이는 희미한 꼬린내. 그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거기에는 어설프게 숨겨진 고블린의 함정이 있었다.


       


       아마 함정 옆에 있는 나무 뒤에 숨어있는 거겠지.


       


       …이제 보니 시력 좋아진 게 체감되네. 꽤 먼 거리에 있음에도 코앞에서 본 것처럼 선명하게 보이거든.


       


       소리를 먹는 발걸음을 얻으며 덩달아 얻은 것은 강한 힘도, 민첩한 순발력도, 쥐꼬리만 한 마력도 아니었다.


       


       감각.


       


       시각, 미각, 촉각, 후각, 청각 같은 기본적인 오감은 물론이요. 균형감각, 직감, 심지어는 마력을 조작하는 감각까지.


       


       감각이라고 부를 만한 것들 대부분이 획기적인 수준으로 성장했다.


       


       근력 운동으로 근육을 성장시켜 힘을 키우듯, 본래라면 오랜 시간에 걸쳐 끌어올렸을 감각을 한순간에 얻은 것이다.


       


       다만, 그게 이 정도로 대단할 줄은 몰랐지.


       


       씨익 웃으며 유니콘 단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는 전력으로 기척을 죽여가며 숨어있는 고블린을 향해 천천히 돌아갔다.


       


       뒤에서 리디아가 헛숨을 삼키긴 했지만,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니겠지. 집중해야 하니 대충 넘겼다.


       


       한걸음. 또 한 걸음. 발이 어떤 각도로 바닥에 닿는지, 실린 힘은 얼마나 되는지, 호흡은 어떻게 제어하고, 고블린 시야의 사각은 어디쯤인지 등등.


       


       머릿속으로는 온갖 계산을 돌리며 움직이느라 정신이 없었으니까.


       


       그렇게 모든 감각을 총동원해, 세상에 남기는 흔적을 최소화하던 것도 잠시.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나는 고블린의 뒤편에 서 있었다.


       


       분명 부스럭거리기 쉬운 풀밭을 걸어갔음에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녀석. 


       


       나무 너머로 덩그러니 남아있는 리디아 쪽을 힐끔거리더니, 기대감 가득한 표정으로 소리죽여 웃기 시작했다.


       


       놀라울 정도로 추한 낯짝에 흠칫한 것도 잠시. 미리 뽑아둔 단검을 뒤에서부터 찔렀다.


       


       목표는 녀석의 폐.


       


       푸욱.


       


       “…어?”


       


       “고, 브?”


       


       케이크라도 자르듯이 너무나 간단히 고블린의 살을 파고드는 단검.


       


       물론 고블린이 단단한 종족은 아니니 푹 찌르면 뚫리는 녀석들이긴 한데…아무리 그래도 근육이 있고, 지방이 있는 놈들 아닌가.


       


       아무런 저항도 없이 박힐 줄은 몰랐지.


       


       고블린 또한 갑자기 자신의 가슴에서 튀어나온 순백의 칼날이 당황스러운지 흠칫 굳은 모양이다.


       


       뭐, 어쨌건 은신 효과는 4성답게 확실한 것 같으니 이제 고블린을 마무리해야….


       


       툭.


       


       “?”


       


       단검을 뽑아, 이번에는 뒷목을 찌르려고 했건만…그보다 한발 빠르게 고개를 툭 떨구며 쓰러지는 녀석.


       


       자세히 살펴보니 이미 죽어있었다. 그것도 검게 물든 얼굴로.


       


       “…독?”


       


       당연한 말이지만 나는 뭘 바른 기억이 없다. 심지어 찌른 곳도 뼈로 보호받는 심장이 아닌 폐였으니, 죽긴 해도 이렇게 빨리 죽진 않았을 거란 말이지.


       


       그렇다면 원인은 하나뿐이다.


       


       “너 진짜 마검이구나?”


       


       분명 깊게 찔렀음에도 핏물 하나 묻어있지 않은 단검이 잘게 진동했다.


       


       우웅-!


       


       비처녀의 피를 머금어 불쾌한 것인지, 아니면 에고라도 있어 내 말을 부정하는 건지 모를 반응.


       


       “아니지. 비처녀가 아니라 사악한 것에도 반응한다고 했던가.


       


       물론 미궁의 몬스터는 죽어도, 랜덤 시공간의 미궁에서 다시 태어나기를 반복하는 녀석들이다.


       


       하지만 그게 정말 새로운 몸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뜻은 아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재구축에 가까운 거지.


       


       즉, 디폴트 값은 처음 미궁에 갇힌 상태라고 보면 된다.


       


       미궁에서 생활하며 나이를 먹기도 하고, 성장하기도 하며, 멀쩡하게 살아가긴 하지만….


       


       죽음에 이르러 다시 태어나면 처음 미궁에 갇혔을 때의 모습으로 리셋되는 것이다. 심지어 기억까지도.


       


       당연히 처녀성의 여부도 거기에 포함된다.


       


       그런 의미에서 부락을 형성해 나름의 세력을 일군 홉 고블린이면 모를까, 방랑 고블린은 수컷을 구하지 못해 눈이 돌아간 애잔한 베타피메일이다.


       


       힘도 없고, 짝도 없고, 지능도 비교적 떨어지는 것들.


       


       운 좋게 덜떨어진 모험가를 사로잡는 게 아니라면 평생 처녀로 살아야 하는 녀석들이 방랑 고블린이다.


       


       …이런 놈들의 처녀막 여부는 별로 알고 싶지 않지만, 아무튼 설정상으로는 그렇단 말이지.


       


       종합하자면 유니콘 단검이 반응한 건 비처녀라서가 아니라 사악해서라는 건데…애초에 몬스터는 사악하다기보다는 그냥 광기에 사로잡힌 종족의 총칭이다.


       


       언데드나 마족 같은 척 봐도 사악한 놈들이라며 모를까 고블린은….


       


       “아.”


       


       고블린을 사악한 존재라는 전제로 생각해 보니 떠오른 것이 있다.


       


       지금은 폐기된 설정이지만, 고블린이 몬스터가 되기 전에는 소귀족小鬼族을 자칭했다는 설정이 있다.


       


       애초에 고블린은 고블린 특유의 고브 고브 거리는 말투와 발성 기관 때문에 다른 종족이 붙인 이름이고.


       


       자기들끼리는 소귀라며 빼애액 거렸다는 설정인데….


       


       생각해 보니 소설에 나올 이유는 하나도 없는 쓸데없는 설정이라 그냥 머리속에 묻어두기로 했던 녀석이다.


       


       “설마 그게 반영된 건가?”


       


       그 외에는 다른 이유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자세한 건 다른 뒷 설정이 있는 종족들 상대로 이런저런 실험을 해봐야 알 것 같으니 지금은 깊게 생각하지 말자.


       


       중요한 건 고블린에게는 유니콘 단검의 특공이 먹힌다는 것.


       


       그거면 충분하다.


       


       스윽 심장을 갈라 마석을 챙기고는 다시 리디아에게로 돌아갔다.


       


       “리디아 님! 리디아 님! 제 은신 실력 어땠나요? 어디 부족한 점이라도 있었나요? 고블린이야 워낙 멍청하니 잘 속아 넘어가도 다른 종족은 아닐 수도 있잖아요.”


       


       “…없어.”


       


       “네?”


       


       리디아가 반달가슴곰은 달이 아닌 곰이고, 키위새는 키위가 아닌 새지만, 오리너구리는 너구리가 아닌 오리너구리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처럼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계속 지켜보고 있었던 게 아니라면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거야. 오러를 전력으로 끌어올린 상태라면 이야기는 다르겠지만…평소에 오러를 줄줄 흘리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어.”


       


       “오? 저한테서 막 좋은 냄새 난다면서요. 혹시 냄새 때문에 들키지는 않을까요? 여차하면 여신님한테 리콜 기도 드려볼 생각도 했는데.”


       


       “여신님을 동네 사과 가게 아줌마처럼 대하는 건 둘째 치고, 향기도 전혀 문제없었어. 요나가 마음먹는 순간 냄새까지 완전히 사라졌으니까.”


       


       “세상에.”


       


       하기야. 본래의 체취를 좋은 향기로 덮어씌우는 게 가능했다면, 반대로 체취를 지우는 것도 가능했겠지.


       


       기껏 4성 스킬을 뽑았더니, 1성짜리 권능 때문에 무용지물이 될 걱정은 덜었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자니 리디아가 평소보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물었다.


       


       “대체 엘리 선배에게 어떤 모습을 들켰길래, 그렇게 필사적인 은신 요령을 깨달은 거야? 말이 깨달음이지 그렇게 휙휙 성장할 수 있는 게 아닌데.”


       


       “어떤 모습이냐니. 뭐어. 알려드릴 수는 있지만, 어디 가서 말하고 다니면 안 돼요?”


       


       “응. 비밀로 할게.”


       


       입으로 지퍼를 잠그는 시늉을 하는 리디아. 묘하게 눈빛이 진지한 걸 보아 무슨 사건인지 궁금한 게 아니라, 무슨 깨달음인지가 궁금한 모양이다.


       


       …조금 미안해지네. 이제부터 보여줄 건 리디아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닌데. 


       


       쪼르르 달려가 리디아의 앞에 섰다. 진지한 얼굴을 하고있는 그녀를 향해 양손으로 V를 그렸다.


       


       “응?”


       


       그리고는 눈을 위로 까뒤집고 살짝 벌린 입으로 혀를 쭉 내밀었다.


       


       “아헤-”


       


       완벽한 아헤가오 더블피스였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미친놈;;
    다음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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