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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26

    “……!”

    전투가 길어질수록, 리브는 점차 당혹감으로 물들어갔다.

    처음부터 오로지 그를 쓰러트릴 생각으로 전력을 다했다.

    그럼에도 아무런 무기도 쥐지 않은 상대가 쓰러지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쓰러지기는 커녕 그는 검격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대응이 더욱 빠르고 정교해지고 있다.

    분명 압도해야했을 터인데, 어느순간부터 자신은 대치하는 것이 고작인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 기점은, 그가 돌연 손을 허공에 뻗어보인 직후.

    마치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허공에 손을 내밀었던 그는, 순간 무언가를 잡아쥐는 듯한 동작과 함께 그 기세가 변했다.

    그 후로는 자신이 아무리 패턴이나 규칙을 변경하고, 그의 사각을 노리거나 검로를 틀어 속임수를 섞더라도 전혀 소용이 없다.

    그는 마치, 어떤 전지적인 무언가가 그를 직접 이끌기라도 하는 것처럼, 자신의 모든 움직임을 전부 간파해내기 시작해낸 것이다.

    리브가 아직 쓰러지지 않은 이유는 단지, 갑주가 지닌 속도와 힘의 우위로 겨우 버틸 수 있는 것 뿐이었다.

    이전과 무엇이 달라진거지?

    단순히 ‘격’의 차이가 있었다는 것으로는 납득할수도, 설명할 수도 없었다.

    수천년 전, 루크는 아린세이아를 지키기 위해 리빙아머를 제작했고, 그에 탑재할 검술을 얻기 위해 각지에서 여러 소드마스터의 데이터를 수집한 적이 있었다.

    그중에는 당연 그의 친구이자 최연소 그랜드 소드마스터였던 ‘케일 프롭슨’도 존재했다.

    데이터의 분별은 완벽히 동일한 조건의 리빙아머에서 진행되며 오직 검술의 완성도만을 평가하는 철저히 객관적인 방식으로 이뤄졌고, 결국 ‘케일 프롭슨’의 검술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그동안 ‘공을 세운 노장에게 취하는 명예’에 불과했던 ‘그랜드’ 칭호를 실력으로 받아낸 마스터의 검술은 과연 당대 최고라 칭할 만 했다.

    케일을 비롯한 수많은 소드마스터들이 스러져간 마계대전 이후 더이상 제대로 된 검사를 찾아보기조차 어려워진 뒤에는 더욱 더.

    그 탓에 케일의 검술은 원형에서 거의 수정되지 않았지만, 그것이 리브가 사용하는 검술이 현대에 와서 무뎌졌다는 이야기가 될 수는 없다.

    케일의 검술은 현대의 스포츠화된 검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실용적인 형태로 이미 그 당시 완성되어있었으며, 그 묘리를 온전히 이해한다면 얼마든지 응용과 대응이 가능하도록 대안과 변칙까지 전부 이어갈 수 있도록 확장성과 깊이 또한 매우 뛰어났다.

    게다가 리브의 검술 그 자체도, 아린세이아의 오랜 격리기간 자율적 가상대련으로 기술 자체는 더욱 날카로워지면 날카로워졌지, 퇴보했다고는 볼 수 없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걸까?

    이는 마치, 학습이라기보단 상기하는 것에 가깝다.

    그에겐 무슨 예지능력이라도 있는 걸까?

    아니면, 이미 오래 전에 세월의 토사에 묻혀 실전되어버린 아린세이아의 검술을 그가 발굴해내기라도 했단 말인가?

    -……!

    그 순간, 갑주 내부에서 비명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끼긱, 긱…!

    쇳소리가 섞인 증기가 배출되는 소리.

    그것은 무리한 구동으로인해 갑주 내부에서부터 서서히 마모가 일어나고 있다는 의미였다.

    ‘이 이상은 갑주가 버티지 못한다.’

    리브는 빠르게 갑주의 상태에 대한 자가진단을 실시했다.

    한겨울의 추위가 열을 식혀준 덕분에 내부가 받는 부하를 조금 늦춘 모양이지만, 이런 전투가 계속해서 이어졌다간 위험했다.

    프로토타입 갑주는 분명 매우 뛰어난 성능으로 제작되었으나, 사실 그 안정성에 대해서는 아직 테스트가 충분히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프로토타입이 어째서 프로토타입이라 불리는지 생각해보면 당연한 이이야기다.

    새로운 기술이란 즉, 새로운 문제거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심지어 새로운 기술이 문제가 아니더라도 그것이 ‘시제품’인이상 필연적으로 문제를 안고 있을 수밖에 없다.

    내구, 내충, 내마모성이 뛰어난 특수 재질은 당연히 그것을 녹이고, 두드리고, 갈아내야하는 제련과 연마작업에도 많은 노력과 시간이 들어가게 된다.

    이미 구상된 외피장갑이야 수정될 일이 거의 없으니 마음놓고 특수재질을 취해도 상관 없겠지만, 각종 신기술로인해 발생하는 문제를 빠르게 수정할 필요가 있는 내부를 특수재질로 채울 수는 없는 노릇.

    따라서 선택과 집중의 일환으로, 갑주 내부엔 아직 일반재질로 이뤄진 부품들이 꽤 많았다.

    그러면 당연히, 설계구조상 결함이 없더라도 극한의 상황에서는 충분히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이 과부하상태가 지속되어 코어까지 영향을 받아 망가지게되면 수천년간 홀로 아린세이아를 지켜온 기사단장 리브의 존재는 그걸로 끝이 되리라.

    그리고 루크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키이잉, 키잉–!!

    마치 비명을 지르는 듯한 리브의 구동음에, 루크는 리브의 시간이 끝나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무리 루크가 다양한 근접격투술에 조예가 깊다곤 하나, 근본적으로 마법사인 루크는 상위 마스터간의 전투에 직접적인 참여를 할 순 없었다.

    마법사에게 경지에 이른 소드마스터는 기본적으로 거리를 두고 상대해야 하는 적이며, 이를 무시하고 접근을 시도하는 것은 그저 자신의 특기를 내버리고 불리한 조건을 떠안은채 사지로 뛰어드는 것과 마찬가지이니까.

    마법사가 검사에게 유리한 거리에서 얻을 수 있는 이점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도 서클조차 제대로 운용할 수 없는 반푼이 상태인 자신이라면 더더욱.

    그러나 그것이 루크가 자신의 짐을 리브에게 떠넘겨두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는 의미는 아니다.

    리브의 패배는 곧 자신의 패배나 다름없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 가만히 지켜보기나 하려고 마법사의 길을 걸어온 것은 아니니까.

    루크는 다면체인 무언가를 손에 쥔 채로 이리저리 접고 펼치며 마법회로를 수정하는 중이었다.

    특이한 모양새로 저택에 방문한 시루드의 관심을 잠깐 끌었던 구조체였다.

    그것의 정체는 아티팩트, ‘인식조정체’.

    원래의 용도는 인지를 속여 보물을 숨기는 용도의 아티팩트다.

    지금은 루크가 자신의 방에 놓아둔 각종 특이한 아티팩트가 방문자의 시선에 이상하게 비치지 않도록 제어하기위해 사용하는 아티팩트이지만, 지금은 아공간 보수와 타워 테러를 준비하면서 아린세이아에서 꺼내둔 아티팩트들이 외부인에게 노출되는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 잠시 거실에 꺼내뒀었다.

    그래서인지 감이 좋은 시루드는 그것이 특이하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바로 손을 가져갔었지.

    위험해서 바로 제지하기는 했지만.

    아무튼. 

    ‘인식조정체’는 일반적으론 단순한 위장용 아티팩트이나, 그 원리는 사용하기에 따라서 어느 한 대상의 인식과 인지를 조작해 오감을 망가트리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불규칙적으로 점멸하는 시야, 막을 수 없는 소음, 당장에라도 토해버릴 역겨운 맛, 불타는 고통과 참을 수 없는 가려움, 어지럼증을 동반할 정도로 지독한 악취…….

    이러한 것들도 결국에는 인지에 속하는 범위의 작용이었으니까.

     

    그리고 이 모든것이 ‘동시에’ 느껴지는 환경속에서 아무렇지 않게 행동할 수 있는 생물은 단언컨대, 없다.

    이만한 감각의 포화가 발생하면, 상대가 설사 이미 죽은 언데드라고 할지라도 자율적으로 주변환경을 인식할 수 있는 외부신경이 존재하는한 명령체계 자체에 혼란과 과부하가 발생해 영구적인 감각기관 손상과 함께 무력화되지 않을 수 없다.

    만일 이것으로 간단히 무력화 되지 않더라도, 잠깐의 틈을 만드는 건 충분히 가능하겠지.

    그렇다고 단순히 상대를 방해하는 작용만 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약과 독약이 작동하는 기전이 동일하듯, 타인의 인지를 조정하는 것은 그 컨트롤에 따라 일종의 ‘강화’로 작용시킬수도 있다.

    감각에 접속하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통각을 제거할 수도, 정신을 고양시킬 수도, 더 나아가 대상자의 마나 제어를 수월하게 하도록 체내에 가이드를 만들거나 관찰자의 입장에서 객관적이고 정확한 최적의 행동경로를 안내해줄 수도 있겠지.

    게다가 이는 약을 섭취하지 않고 감각에 직접 접속하는 방식이기에 리빙아머인 리브에게도 충분히 유효한 서포트일 것이다.

    그리고 루크는 마침 그 조정작업을 끝냈다.

    마법을 사용할 수 없으면, 아티팩트를 이용하면 될 일.

    루크가 그들의 머리 위를 향해 조정을 마친 아티팩트를 던지며 외쳤다.

    “리브!”

    그렇게 아티팩트가 마법진을 그려내며 폭발하자, 어째서인지 아린세이아와 비슷한 느낌의 힘이 검에 휘몰아치는 게 느껴진다.

    리브는 루크에게서 별다른 지시가 내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았다.

    그 힘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어떻게 움직여야하는지, 무엇이 벌어지게 되는지…….

    모든 감각이 한가지 동작과 행동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

    모든 것을 이해한 리브는 조용히 검을 들어올렸다.

    이것은 결과가 어떻게 되든, 자신에겐 최후의 일격이 되리라.

    ——

    천둥이 치는 듯한 굉음과 함께 ‘베어진’ 공간.

    그것은 말 그대로 천지를 개벽할만한 일격이었다.

    -툭, 투툭….

    베어올려진 대지가 우박처럼 떨어지며 잔해와 흙먼지를 날렸다.

    만약 이것이 본인의 마지막 검이라면, 검사로서는 만족할만한 결과이리라.

    -푸쉬익–!!

    그만한 일격을 쏟아낸 반작용으로, 갑주의 틈새로 쌓인 열이 방출되며 막대한 증기가 뿜어져나온다.

    동시에, 마비되었던 감각기관들이 비명을 질러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리브의 갑주에서 피어오른 증기는 퍼져나가 마당에 그어진 거대한 상흔과 베어진 구름을 가렸고, 이어 피워올려진 탁한 흙먼지를 하얗게 물들여갔다.

    빠르게 식어가는 갑주의 온도를 느끼며 증기에 가려진 시야가 트이길 기다리던 찰나….

    -멈칫.

    리브는 자신이 쥐고 있는 검의 무게가 지나치게 가벼워져 있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자신이 쥐고 있는 것은 고작 칼자루.

    그 칼날은 부러져 사라진 채였다.

    이게 무슨 일일까?

    아세릴 합금으로 이뤄진 검은 아무리 오러를 불어넣는다고 부러지진 않을텐데….

    불길한 예감이 든다.

    하지만 불길한 예감은 어째서 항상 적중하는 것일까.

    잠시 후, 연막이 흩어지며 아직 두 다리로 선 ‘장의사’가 드러났다.

    그리고….

    사라진 칼날은 역시나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

    “터무니없는 짓을……!”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늦어서 죄송합니다.
    이제 진짜 일일연재 한다고 말해놓고선…….

    역시 전투씬은 다시써도 쓰기 어렵군요.
    그리기도 어렵구요…
    아무래도 저란놈은 이런 장면마다 손이 멈춰버리는건 어쩔 수가 없나봐요…….
    3000자 쓰는게 원래 이렇게 어렵지가 않았는데….

    그래도 좋은 소식을 드리자면, 다음화 또는 바로 그 다음화에서 장의사 전투파트는 끝날겁니다.

    제가 또 연재가 늦어져서 그렇지, 수정 목적자체가 전투단계에서 스스로 억지에다 늘어진다고 느껴졌던 시루드와 서드의 비중과 설정을 줄이는 것이 목표였기 때문에 분량이 그리 길어질 것도 아니었거든요.

    그리고 이 수정이 끝나면 그 뒤엔 기존의 이야기로 덮어쓰면서 인과율 좀 맞추고 시가르마타의 묘사나 대사정도 수정한 뒤에 이어서 예정대로 스토리가 전개될 예정이니까요.
    일상 이야기도 금방 다시 시작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아직 전개상 루크(본체)가 작아지는건 바뀌지 않습니다.

    다음화 보기


           


The Archmage dreams of being an Archmage again

The Archmage dreams of being an Archmage again

다시 대마법사를 꿈꾼다 대마법사였던것은
Score 4.2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5000 Years in the future, the Archmage Luke Irushi opened her eyes again. The world has changes so much.

Horseless carriages, an entertainment box with audio and video, food and spices she has never seen before…

And, a changed magical system!

It wasn’t just the world that chang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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