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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53

        

         시선이 어지럽게 흔들린다.

         

         화면안에는 변함없이 부드러운 미소를 띤 앤이, 그 주변엔 분주하게 뭔가를 준비하는 방호복 차림새의 작업자가.

         

         배경으로 유추하건대 분명 같은 지하층, HA 플로어 어딘가에 있다고 여겨졌지만… 물리적 거리와는 별개로 항상 가깝다고 느꼈던 친구의 모습이 굉장히 낯설게 느껴졌다.

         

         아니, 애당초 자신처럼 경찰 짓거리를 그만둔 것도 아닐 텐데 왜 바이저도 안 쓰고 저렇게 태연한 자세로 앉아있는 걸까.

         

         현장 책임자 아가씨, 미스 그리샤. 그리고 애타게 찾던 내부 고발자.

         아무런 연관도 없어 보이던 단편적인 파편들이 한데로 뭉쳐 형상을 이룬다.

         

         “앤…?”

         

         “!!”

         

         조심스럽게 입밖으로 친구의 이름을 꺼내자 그녀의 얼굴이 꽃처럼 만개했다.

         단순히 웃는 걸 넘어 붉게 상기된 표정에 헬레나의 말문이 막혔다.

         

         질 나쁜 농담, 못된 장난. 내키는 대로 매도할 수는 있겠지만 그게 이 상황에 대한 해답이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최대한 냉정하게, 차근차근 사실관계부터 파악하다 보면 단연코 합당한 설명이 존재할 것이다. 가령…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던가, 그것도 아니라면….

         

         “……나는 이해해.”

         

         “……?”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충격으로부터 회복한 헬레나를 본 앤이 의문을 표했다.

         아직 준비한 모든 걸 보여준 건 아니여도. 배후의 칼날에 찔려서 아파하고… 비관하는 모습 정도는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더는 이런 일을 참아줄 수 없었던 거지…? 너 혼자의 증언이나 증거로는 이 만행을 공론화하긴 힘들 테니까…… 규모를 키워서. 없던 사고가 되지 않도록. …맞지?”

         

         사랑해 마지않는 이의 감미로운 목소리를 경청하던 앤은 마지막 되물음에 찢어질 것 같은 입꼬리를 숨기기 위해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왜냐하면… 그 불안한 말 끄트머리에는 미처 덜어내지 못한 불안함이 잔뜩 담겨있었기에.  

         이해한다고 말을 꺼낸 헬레나 자신조차 그 가설을 전적으로 믿는 게 아니었기에.

         

         당장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동아줄에 매달려,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램과 희망사항을 있는 대로 담아서 날려보낸 화합의 손길. 그것이 고막을 타고 뇌를 흔들자 앤은 다리사이가 뻐근해짐을 느꼈다.

         

         “……그렇게 생각할 길도 있었구나. 응, 역시 레나는 대단해. 정말 실망시키는 법이 없어.”

         

         원래 계획대로라면 평소와 같은 태도만 보여줘서 괴리감을 키워 나갈 예정이었으나, …벌써 애원하는 듯한 헬레나를 본 앤은 결국 참지 못했다.

         

         “레나는… 진짜 머리속이 꽃밭이네…? 여기까지 와서도 그런 꿈 같은 미래에 매달리는 거야?! 그건 그냥 힌트였어. 아무것도 모른 채로 매일 보람차 하는 너를 보는 것도 충분히 즐거웠지만… 너무 오래 뜸을 들이면 맛이 없어지니까…!”

         

         “……난 지금이라도 잘못된 걸 바로잡고 싶을 뿐이야.”

         

         “자기들을 잡아넣은 경찰께서 친히 해방해 주신다니… 다들 감동받아서 어쩔 줄을 몰라하겠네…?”

         

         …실컷 지껄이면서도, 앤은 자신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크게 떠진 헬레나의 눈동자에서 글썽거리는 물기를 본 감정만은 확실히 말할 수 있었다.

         

         살아온 모든 나날을 합쳐도, 감히 비교할 수조차 없는 최고의 유열이라고.

         

         꼭 겉으로 피를 흘려야만 다친 게 아니다. 그 안에 있는 마음을 병들게 하고, 정신을 난도질하면 인간은 껍데기만 남은 시체가 되어버린다.

         

         그래… 마치 즐거움이라고는 모르던 옛 자신처럼.

         

         “언제쯤 눈치채 줄까… 조마조마하는 것도 좋았지만. 나라고 인내심이 무한한 것도 아니고… 또 무대에 어울리는 너무 좋은 관객을 네가 데려왔으니까… 레나의 잘못도 있어. 알았지…?”

         

         “…그건 무슨 소리야.”

         

         그동안 쌓아 올려온 관계가 한순간에 무너져 돌이킬 수 없게 된 쾌감.

         차마 손대지 못하고 지켜만 보던 천상의 존재를 자신이 있는 곳까지 끌어내린다는 관능.

         

         한마디… 한마디.

         걸러지지 않은 진심이 꽂힐 때마다 몸서리치게 아파하고, 낯에 드리운 그늘이 커져간다.

         

         ‘아아…. 무지렁이 앤 그리샤는, 저 헬레나 발렌타인의 삶에서. 마음속에서 차지하는 공간이 이렇게나 컸구나.’

         

         제대로 된 답조차 없었음에도… 어쩌면 가장 원하던 계시를 받은 거나 다름없는 앤은 공들여서 갖춰 놓은 선물 꾸러미의 포장을 풀어주기로 마음먹었다.

         

         “……아?”

         

         화면이 비추던 시야각이 점점 넓어지고 구체적인 방 풍경이 드러난다.

         아무래도 이 층에 있는 수술실 중 하나였던 모양인지, 보기만 해도 끔찍한 상상밖에 안 떠오르는 장비들과 수술대. 그리고 그 위에 올라가 있는 어딘가 익숙한 실루엣….

         

         “앤… 지금 뭐하는 거야…? …멈춰.

         

         “말했잖아? 좋은 관객이 생겼다고. …또 좋은 무대엔 처절한 갈등이 있어야 하고.”

         

         흡사 악신에게 바쳐지는 제물처럼, 미동도 없이 가로누인 여동생. 아나스타샤를 본 헬레나의 목소리가 참혹하게 갈라졌다.

         

         …정상이라고는 절대 증언할 수 없는 상태의 상급자를 어찌 대해야 할지 모른 채, 쭈뼛거리며 대기하던 작업자가 명령받은 대로 수술용 기계의 전원을 올린다.

         

         각종 날붙이와 레이저가 덕지덕지 부착된 기계가 직원의 조작에 따라 발렌타인 가의 막내를 향해 겨눠졌다.

         

         “자… 레나? 선택해줘. 난 네가 저기 있는, 백명이 넘는 불쌍한 사람들을 풀어 달라고 하면 가진 권한을 전부 활용해서 무사히 바깥으로 돌려보낼 거야. …대신 아샤는 완전히 해체되겠지만.”

         

         “아샤는 이 일과 상관없잖아?! 무슨 악감정이 생긴 건지는 몰라도 그만…!!”

         

         ‘악감정’ 이라는 부적절한 어휘에 앤이 맹렬한 불쾌감을 드러내며 헬레나의 비명을 끊었다.

         

         “반대로…! 아샤를 살려 달라고 하면, 저들은 내버려둔 채로 여기서 나가는 거야. …오직 구할 수 있는 사람을 외면했다는 죄악감만 짊어진 채로.”

         

         “그런…….”

         

         돌연 들이밀어진 양자택일에 언제나 자신감 넘치던 그녀가 말을 흐렸다.

         

         ‘……그렇게 너도 나와 다를 바 없는 결함품이 되는 거야.’

         

         사랑이 이루어지려면 먼저 같은 눈높이에 서야 하니까.

         자신이 올라갈 수 없다면, 상대를 끌어 내려서라도. 그래야 진정한 의미로 동등한 관계가 시작되는 거니까.

         

         흠집 난 신념에서 자괴감이, 믿었던 친구에게서 배신감이, 최후엔 정답 없는 딜레마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이 정도는 해야 헬레나가 절망하리라는 믿음이 앤의 사고 기저에 깔려 있었다.

         

         일생일대의 피날레를 선보인 앤은 묵묵히 통화 화면과 다양한 각도에서 헬레나는 지켜볼 수 있도록 보안망과 연결된 단말기를 바라보았다.

         

         망설이는 입이 열렸다가… 닫힌다.

         식은땀 한방울이 또르륵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항상 정면과 내일을 바라보던 두 눈이 갈 곳을 잃고 방황한다.

         

         “……이러지 마.”

         

         “…괜찮아. 징수 부대나 경찰 투입은 내가 지연시키고 있으니까, 충분히 고민하고 스스로 결정하면 돼.”

         

         콰지직—!!

         

         따듯한 위로처럼 건네진 말에 격정을 억누르지 못한 주먹이 통제실 자판 한 귀퉁이를 으스러트렸다.

         

         반면 반대쪽에서는 각 행동 하나하나를 기억에 새기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 헬레나의 화풀이라니… 매 순간 순간이 설렜고, 미답의 영역을 내디디는 것과 동일했다.

         

         “…부탁이야. 누군가 꼭 죽어야 한다면 차라리 내가….”

         

         “레나의 자기희생은 이 자리에선 의미가 없어. 그러니까… 부디 솔직하게 골라줘. 아니면… 아샤도 깨우고, 감옥 방면이랑 음성채널이라도 열어줄까? 고심 끝에 버려진 쪽이 울부짖는 소리가 궁금해?”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어느 구시대의 철학자는 조언했지만, 그게 문제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없는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할까?

         

         헬레나의 체감시간 일분일초가 영원처럼 늘어지고, 논리가 논리를 잡아먹고 스스로에 대한 의심으로 자라나고 있었다.

         

         책임질 이유도 없는 타인 백 명과 가족 한 명.

         누군가에겐 쉬운 물음일지도 몰랐으나 그녀의 천칭은 어지럽게 삐걱거렸다. 아니, 그렇다고 믿고 있었다.

         

         삐리리릭…!

         

         “……하핫.”

         

         ……아니다. 그녀는 그제야 이 고뇌의 모순을 눈치챘다.

         조금이라도 망설인 시점부터, 경중을 비교하려 든 순간부터. 이미 자신은 숨기는 것도 많고 미스터리한 작은 동생이 무고한 사람 백명만큼이나, 어쩌면 그보다 더 소중하다고 인정해버린 거였다.

         

         기업이 그들을 평가한 것처럼, 값어치를 매겨버린 건 과연 누구일까?

         

         …어쨌거나 침묵도, 고민도 해결해주지 못한 난제를 풀은 건 시간이었다. 기어이 깜깜한 어둠속에서도 간신히 길을 찾았다. 허나 그 길이 인도해주는 목적지는 모른다.

         

         지옥만이 기다리는 천 길 낭떠러지일수도, 약속의 땅일수도 있었다.

         

         “……를 살려줘.”

         

         친구는 기만자에 본인은 위선자라니. 참 어울리는 파트너라고 조소하며 그녀가 중얼거렸다.

         

         “제대로. 크게 말해줘.”

         

         사실 선택을 강요하면서도 앤은 결과가 뻔한 문답이라고 여겼다. 단지 이걸로 달라질 것들을 기대했을 뿐이지.

         

         …하지만 헬레나 발렌타인은 늘 앤 그리샤의 이해밖의 존재였다.

         

         

         “……아샤를 죽이고. 사람들을 무사히, 안전하게 살려줘.”

         

         

         “…….”

         

         타락? 아니면 가식? 구태여 바쁘게 여러 화면을 살필 필요도 없었다.

         다시 정면을, 화면을 직시한 헬레나의 눈동자엔 절대 감추지 못할 신뢰가 서려 있었으니까.

         

         “…인간이 된 걸 환영해, 레나. 그런데… 조금은 실망이야. 그런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고, 혹시 내가 아샤를 예뻐해서 입으로만 떠들고 살려줄 거라고 생각한 거야?”

         

         “…얼른.”

         

         지나치게 몰아붙인 탓에, 간절함이 폭주해서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번 기회에 남은 인연을 잘라내려고 다짐한 걸 수도 있었고.

         

         – ……HA 플로어에 있는 모든 작업자와 연구원, 그리고 경비인력에게 알립니다. 현장 책임자 권한으로 비상 사태를 선포합니다. 즉시 수용 중이던 예비상품을 전부 가까운 정착지 방면으로 영구추방, …사살은 허용하지 않겠습니다. –

         

         긴급방송이 끝나자 인근이 소란스러워진다.

         

         약속은 약속. 첫번째 부분을 이행했으니, 이제는 두번째 부분도 이행할 시간이다.

         

         선택의 결과를 똑똑히 지켜보고 가슴에 새기라는 뜻에서 앤은 수술대를 확대해주려고 했는데… 방송을 듣자마자 홀연히 통제실을 빠져나가는 헬레나의 모습이 단말기에 출력되었다.

         

         설마… 동생의 마지막을 지켜보지도 않겠다는 걸까? 아니면 차마 가만히 직시할 수 없었던 걸까?

         

         “…매정한 레나도 아름답네.”

         

         들뜬 기분이 가시지 않은 그녀가 중얼거렸고.

         

         

         “…개소리는 그쯤 해두죠? 앤 그리샤?”

         

         “”…?!””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튀어나온 대답에 작업자와 앤 모두가 당황한 사이.

         

         지이이잉—!!

         

         어느새 통제에서 벗어난 절개용 레이저가 눈부신 빛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뉴타입 출격이다!

    겨울바다서리꽃 님의 33코인 후원! 너무 감사드립니다!

    항상 재밌게 봐주시고 댓글에 추천까지 달아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라고 2시간 45분 지각한 못난 놈이 전해달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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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Status: Ongoing Author:
No matter how many times I repeated the episodes, I couldn't clear the true ending of the open-world shooting RPG, Neo Haven. Just when I thought I finally cleared the hidden true ending... they want me to actually clear it without any help from the game system or save/load fea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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